Heavenly Goddess RAW novel - Chapter 224
224.
이린과 곽천영, 그리고 유영을 비롯한 호위들은 오랜만에 십만대산을 벗어나 근처에 있는 가장 큰 도시로 향했다. 다들 경공을 사용한다지만 꽤 먼 거리라 시간이 걸렸다.
“밖으로 나오는 건 오랜만이야.”
“본교 안에도 볼거리는 충분히 많고, 말만 하면 뭐든 네 앞에 갖다 놓을 텐데. 굳이 왜 나오고 싶어 해? 축제라지만 나와도 별거 없는데.”
“글쎄. 사형이 너무 바깥 풍경에 재미를 못 느끼는 게 아닐까?”
5년 전 부상을 입은 이후로 바깥에 나오는 걸 금지당했다는 이린은 외유를 나올 때면 꼭 아버지나 곽천영과 함께해야 했다.
‘좀 너무한단 말이지.’
아무리 그래도 너무 폐쇄적인 게 아닐까? 스물셋이면 나이가 어린 것도 아니고. 혹시 자신이 너무 약한 걸까 싶어 이리저리 시험해 봤지만 무공이 변변치 못한 것도 아니었다.
이린의 투덜거림에 곽천영이 피식 웃었다.
“혼인이라도 해야 안심하시지 않겠어?”
“아니, 그렇다고 혼인은 좀.”
“내가 어디가 부족해서?”
인파 속을 걷는 곽천영의 손은 자연스럽게 이린의 어깨를 감싸고 있었다.
둘 다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으나 가까운 거리다 보니 면사 너머로 곽천영의 얼굴이 보였다. 워낙에 잘생긴 얼굴이라 이렇게 가까이 붙을 때면 묘하게 설레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큰 불안이 언제나 이린의 가슴을 울리고 있었다.
수제자가 스승의 딸과 혼인해서 사문을 잇는 것이 그리 드문 일은 아닐 터였다.
하지만 다른 무엇보다 이린을 불안하게 만드는 건 곽천영이 그리 친밀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아니, 사실 아버지도… 어딘지 낯설어. 기억이 없어서 그런 걸까.’
아버지의 제자라고 하기에 당연히 자신도 아버지에게 무공을 사사받았으리라 여겨 사형이라 부르기 시작했는데 실제로 아버지에게 배운 것은 용모를 바꾸는 역용술 정도. 정작 이린의 무공은 곽선후의 것과 달랐다.
게다가 이린은, 지금의 가족들에게서 묘한 이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가지고 싶은 것이 있으면 가지고, 원하는 것이 있으면 손에 넣어라. 네 심기를 거스르는 자가 있으면 살아 있는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 줘라. 너는 천마 곽선후의 하나뿐인 딸이니까.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무슨 일을 해도 상관없다.]아버지 곽선후의 말이었다.
하지만 이린은 저 말을 듣는 순간 생각했다.
‘아니,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농담이냐고 묻고 싶었는데 가볍지도 진지하지도 않은, 그냥 오늘은 겨울이라 추우니 따뜻한 걸 먹자 수준의 지극히 평범한 내용을 말하는 어조였다.
‘마음은 고맙지만 그건 너무 지나치지 않나.’
하지만 이상하게 여기는 건 자신뿐,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다들 지당하신 말씀이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린은 자신의 도덕관이 이곳과 크게 다르다는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 손에 자랐다면 분명 익숙할 텐데 이렇게 이상하게 느껴지는 걸 보면 아마 어릴 적에는 어머니가 함께했던 게 아닐까. 심지어 내 성은 연씨고 무공도 이곳 사람들과는 전혀 다르니….’
어머니에 대해서는 여전히 말을 아끼는 것을 보면 안 맞아서 집을 나가기라도 한 게 아닐까.
그런 추측을 하던 이린은 어깨에 얹어져 있는 곽천영의 손을 쳐 내며 피식 웃었다.
“나는 혼인 생각 같은 거 없어. 빨리 가고 싶으면 다른 사람 찾아보는 게 좋을걸. 아, 저거 예쁘다.”
“너….”
이린은 향낭을 팔고 있는 반대편 가게로 달려갔다. 그대로 이린을 따라가려던 곽천영은 다음 순간 입을 다물고 몸을 돌렸다.
“연 소저?”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듯한 소리에 향낭을 보던 이린은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무척 준수한 얼굴의 청년이 다급한 얼굴로 이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린은 어쩐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한 감각에 저도 모르게 호흡을 멈췄다.
‘잘생겼네.’
잘생긴 아버지와 사형 덕분에 눈이 높은 이린이 보아도 한눈에 잘생겼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준수한 미남자였다.
이린이 면사를 걷지도 않았는데 사내는 곧 실망한 듯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사람을 잘못 본 모양입니다.”
“괜찮아요.”
이린이 입을 열자 사내는 다시 뭔가 복잡한 표정을 지었지만 공손하게 이린에게 예를 표하고는 서둘러 사라졌다.
“정인과 길이 엇갈리기라도 했나.”
잘생긴 청년이 저리 아련한 표정을 지으니 별 관계없는 이린도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다시 향낭을 보러 몸을 돌리니 어느새 다가온 유영이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평소 표정 변화가 크지 않은 유영의 반응에 이린도 놀라서 상태를 살폈다.
“유영?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어, 아가씨. 이만 객잔으로 돌아가시죠.”
“어? 하지만 모처럼 나왔는걸. 늦게까지 놀다 들어가야… 아니다, 유영 상태가 안 좋은 거면 지금 돌아가자.”
이린이 얼굴을 굳히자 유영도 다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아닙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나 때문에 무리하지 말고. 들어가서 저녁 먹고 일찍 쉬자. 지금 집으로 돌아가려 해도 좀 머니까 힘들 테고. 응?”
이린은 웃으며 유영을 이끌었다. 이린이 순순히 객잔으로 돌아가겠다고 하자 유영을 비롯한 이린의 일행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유영이 이린을 이끄는 동안 곽천영은 미간을 찌푸리며 아까 이린을 붙잡았던 사내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어디로 가는 건지, 여기에 머물고 있는 건지 확인해라.
―존명.
곽천영의 주변에 은신 중이던 호위 두 사람이 조심스레 모습을 감췄다.
곽천영은 유영의 팔을 붙잡고 객잔으로 향하는 이린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유영을 좋아하는군.’
기억이 없어도 취향은 일관적인 걸 보면 지난 5년간 이린의 알맹이는 그다지 바뀌지 않은 모양이었다.
일찍 쉬러 들어온 대신 다들 편하게 놀고 마시라며 술과 요리를 잔뜩 주문한 이린이 숨어있는 호위들까지 강제로 불러내는 것을 보고 있던 곽천영이 뜻밖의 말을 했다.
“어차피 식사는 우리끼리 할 테니 원래 얼굴로 돌아가면 안 돼?”
“어색해?”
“응. 아무래도 좀.”
별채로 음식을 나른 점원들이 사라지자 곽천영이 묘하게 조르는 어투로 이린에게 부탁했다. 이린은 웃으며 원래 제 얼굴로 돌아왔다.
스승 때도 그렇지만 사람 체형에 얼굴까지 변하는 모습은 영 익숙해지지 않았다.
식사를 하고 면사로 적당히 가린 채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던 이린이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내가 보기에, 사형은 내 머리카락이랑 눈을 좋아해. 아버지랑 똑같아서 그런가?”
“뭐, 그런 소름 끼치는 소리는 사양한다.”
곽천영이 정색하자 이린은 까르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어처구니없어 웃으며 곽천영 역시 문을 닫았다.
듣기로 이린의 얼굴 생김새는 검성을 닮은 모양이었다.
‘어쩐지 혈교와의 전쟁 때 참여한 적 있는 사람들은 이린을 봤을 때 반응이 이상하다 했어.’
그들은 연화문과도, 곽선후와도 안면이 있으니 이린을 본 순간 두 사람이 떠올랐을 것이다.
너무 말이 안 되는 조합 같아서 곧 부정했을 테고.
그래도 나란히 두고 보면 약간은 닮은 것 같은 기분도 들어서 기분이 이상하긴 했다.
“아니, 스승님이랑 닮았으면 안 반했겠지…….”
혼자 작게 중얼거리던 곽천영은 자신이 방금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닫고 그대로 벽에 이마를 박았다. 별로 스스로 확인하고 싶지는 않았다.
“!”
누군가 다가오는 것을 느낀 곽천영은 곧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몸을 바로 했다. 아까 청년을 따라가라 명한 수하들이었다.
“소교주님.”
“확인했나?”
“아까 그대로 이곳을 떠나 다른 마을로 향하고 있습니다. 방향으로 봐선 중원으로 돌아가는 듯하니 경계하지 않으셔도 될 듯합니다.”
“그래? 수고했다. 돌아가서 쉬도록.”
“존명.”
곽천영은 수하들의 보고를 되씹으며 생각에 잠겼다.
‘이곳에 뭐 하러 온 거지. 설마 이린이 본교에 있다는 걸 알고 온 건가….’
어쩌면 아까, 스승님이 바빠진 이유 중 하나였을지도 몰랐다.
‘이대로 마주치지만 않으면 돼.’
이린에게 호감을 보이는 것만 아니면, 나쁘지 않은 놈이었다.
이린이 지금은 혼인에 생각이 없다고 거부하고 있지만 어차피 이린의 상대가 될 만한 이는 딱히 없었고 자신에게 호감이 있는 것도 분명했다.
시간이 좀 더 필요할 뿐.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지.”
묘한 불안감을 느끼면서도 곽천영은 스스로를 다잡았다.
자신의 방으로 일찍 들어온 이린은 식사할 때 소매에 적당히 넣어 두었던 청아를 꺼냈다.
가족들과 마찬가지로 기억에는 없지만,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함께했다는 이 뱀은 이상하게도 이린에게 누구보다 익숙했다. 먹이를 주는 것도 팔에 감겨드는 것도.
끼이―
“오늘 답답했지?”
끼이이―
“미안해. 사람 많은 곳은 아무래도 좀 위험하니까.”
이린은 애교 부리듯 매달리는 청아를 쓰다듬으며 자신의 짐을 풀었다. 내용물은 많지 않았지만 옷과 자잘한 물건들이 나왔다.
이린은 그중에서도 중요한 물건과 꼭 필요한 것들을 골라 옷 속에 챙겨 넣었다.
‘오늘은 아버지와 함께 나올 테니 힘들 거라 생각했는데.’
축제라 밖은 아직 요란스럽고 사람도 많았다. 축제가 아니면 객잔에서 하룻밤 쉬고 가는 일이 흔치 않으니 이런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중요한 짐은 챙기고 나머지는 적당히 흐트러트려 놓은 이린은 침대 위에 누웠다 일어난 흔적을 만들어 놓고 머리맡에 청아가 들어 있던 가방을 올려놓았다.
이린이 오랜만에 자신을 데리고 놀러 나갈 거라 생각해서 들떠 있던 청아는 이린이 자신을 내려놓자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끼이?
“미안, 청아.”
끼이이?
“너까지 데리고 가면 분명 내가 가출한 거 알고 금방 따라올 거야.”
끼이이이―
“그러니까 여기서 얌전히 있으렴. 알았지? 아침에 유영이 올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발버둥 치는 청아를 달래고, 방 안의 불을 끈 이린은 조용히 밤이 깊어지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창문을 통해 조용히, 방을 빠져나왔다.
“후우.”
기억을 잃은 후 집안에서 감금당하다시피 지내 온 세월이 5년.
아무리 평범한 집이 아니라지만 가르쳐 주지 않는 것이 많은 집안에 늘 위화감을 느껴 왔다.
‘어머니를 만나러 가자.’
당장 어디 있는지는 몰라도 중원에 가면 분명 아는 사람과 마주치리라.
‘그 유명한 검성이잖아? 하다못해 그 가족을 아는 사람이라도 있겠지.’
가능한 조용히 객잔이 있는 거리를 빠져나온 이린은 인적이 뜸해지자 속력을 내서 달리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들키지 않았다면 성공이었다. 누구도 경공으로 이린을 따르진 못 할 테니.
연이린 23세. 성공적인 첫 가출이었다.
주도면밀한 행동과 지난 5년간 고분고분 지낸 덕분에, 곽천영 일행이 이린의 가출을 알아챈 것은 다음날 정오가 지나서였다.
처음에는 예전에 여행하던 때처럼 주변을 돌아보고 있다고 생각했고. 귀환이 생각보다 늦어지기에 다른 곳을 보고 있겠거니 생각하며 이린을 찾아다녔다.
누군가 이린을 해하려 했다면 청아는 물론이고 자신들이 당연히 알아차렸을 것이나 아무도 이상한 낌새는 느끼지 못했기에 다들 조금씩 조바심을 낼 때였다.
오시(午時: 오전 11시쯤)가 될 무렵 지나가던 상인이 이린이 쓴 편지를 들고 왔다. 언제 부탁한 것인지 그 편지에는 ‘어머니를 찾아 잠시 여행하고 오겠음. 청아를 잠시 부탁할게.’라는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자신들을 속이려고 청아까지 두고 갔다는 사실에 유영과 곽천영은 치를 떨며 수색령을 내렸다.
물론 소용없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기억을 잃어도 무공을 잊어버린 것은 아니니 이린의 경공이 얼마나 뛰어난지 아는 이들은 혀를 찼다.
“어, 어쩌죠?”
“어쩌긴. 찾으러 가야지. 그리고 그전에… 스승님께도 얼른 연락 넣어.”
댁의 따님이 가출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