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Goddess RAW novel - Chapter 226
226.
‘이런 한적한 길에서 여인이라니.’
남궁청휘는 당황하면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혼자 다니는 여인을 조심하라는 강호의 격언이 허언이 아니라는 사실을 익히 아는 까닭이었다.
“아, 고마워요.”
여인은 청휘의 그런 기색을 눈치챘는지 자신이 가려는 방향이 맞다는 걸 확인하고는 감사 인사만 남기고 그대로 달려가 버렸다.
아직 어려 보였는데 굉장한 경공이었다.
‘과연 세상은 넓군. 이린 말고도 젊은 나이에 저렇게 경공이 뛰어난 여인이 또 있다니.’
자신과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으니 어쩌면 중원으로 향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달려가는 뒷모습이 어쩐지 이린을 닮았….”
찰싹!
혼자 중얼거리던 남궁청휘는 곧 제 이마를 쳤다.
얼마 전에도 이린과 뒷모습이 비슷해 보이는 여인을 붙잡아 공연히 놀라게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지난 5년간 얼굴과 머리카락을 가리고 다니는 여인만 보면 우선 시선이 멈추는 버릇이 생긴 것을 이제 와 어쩔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번에는 심지어 경공도 뛰어났으니.
‘방금 전 여인도 전혀 다른 사람인데.’
아니, 애초에 이린이라면 자신을 보고 먼저 아는 척을 했을 것이다. 아무리 5년이나 시간이 지났다 한들 자신을 못 알아볼 리가 있겠는가.
그렇게 멍하니 생각하던 청휘는 자신이 아직 어린 소저를 한적한 길에 혼자 보내 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심지어 방향을 확인해야 할 정도로, 길도 모르는 초행자.
무공이 뛰어난 이들도 잠깐의 방심으로 눈 깜빡할 사이에 목숨을 잃는 세상이었다.
‘게다가 지난번에 올 때 분명 이 근방은 도적들이 자주 나온다고 들었는데. 적어도 경고라도 해 줬어야….’
자신이 지나갈 때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여인 혼자라면 어떨까.
남궁청휘는 저도 모르게 걸음이 빨라졌다.
그리고 그리 오래지 않아 예상 그대로 산적과 대치 중인 여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퍼억!!
정확히 말하면, 칼을 뽑아 들고 있는 산적의 안면에 정확히 발차기를 날리는 용맹한 모습의 여인을.
“…….”
“미안하지만, 본녀가 너희 같은 도적들과 놀아 줄 만큼 한가하진 않다.”
마지막 한 명이었는지 여인의 그 주변에는 이미 쓰러져 있는 사내들이 한가득이었다.
안면을 강타당해 부들부들 떨고 있는 사내들을 무덤덤한 눈으로 돌아보던 여인은 청휘와 눈이 마주치자 머쓱하게 웃었다.
“아, 아까 길 가르쳐 주신 분이네요.”
“이 근방에는 도적이 나온다는 걸 깜빡해서 알려 드리려고 달려왔는데 괜한 걱정이었던 모양입니다.”
“아하하.”
조금 겸연쩍은 얼굴로 산적에게서 살짝 멀어진 여인이 툭툭 옷을 털었다.
“무예가 뛰어나시니 제가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만 그래도 목적지가 겹친다면 동행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혼자 다니시면 더 표적이 되기 쉬우니 동행과 만날 때까지만이라도요.”
“아, 그래도 될까요?”
“저는 호남까지 가니 겹치는 지역까지만 동행하시지요.”
상대가 호의적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청휘가 먼저 목적지를 말했고, 여인이 눈을 깜빡였다.
“아, 저도 같은 방향이에요.”
잘됐다고 웃는 여인을 보며 남궁청휘는 그 경계심 없음에 한탄했다.
‘그냥 내버려 두면 안 될 것 같아.’
이 여인도 얼굴에 면사를 걸치고 있었으나 이린처럼 상반신 전체를 너울로 가리는 것이 아니라, 눈 아래쪽만 가리고 있어 조금 옅은 갈색 홍채가 눈에 들어왔다.
자연스레 연적훈과 연이현을 떠올린 남궁청휘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아, 눈매도 조금 닮았나.’
시선을 느꼈는지 여인이 고개를 돌리자 청휘는 애써 말을 돌렸다.
“여기서 호남까지면 꽤 먼 길인데. 이렇게 혼자 다니시는 건 위험합니다.”
아무래도 도적보다 미아가 될 가능성 쪽이 더 위험할 듯했지만.
“으음, 좀 폐쇄적인 집안이라 혼자가 아니면 나오기 힘들거든요.”
“그렇군요.”
본인도 애를 가둬 놓고 무공 수련만 시키는 집안에서 자란 남궁청휘는 여인의 말에 별 의구심을 품지 않았다. 다만 곧 다른 의미로 의아해졌을 뿐.
‘혹시 이거 가출… 아닌가?’
이걸 물어볼 수도 없고.
심란한 남궁청휘의 속도 모르고 어렵게 외유를 나왔다는 여인은 조금 들떠 보였다.
“호남까지 가시는 연유를 여쭤보아도 되겠습니까?”
남궁청휘의 질문에 여인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혹 대협께서는 검성에 대해 아세요?”
“검성 연화문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중원에는 모르는 사람이 없지요.”
심지어 남궁청휘는 검성에 대한 사적인 부분까지 본의 아니게 알게 된 사람 중 하나였다.
5년 전, 이린의 실종 이후 가족들만큼이나 딸의 수색에 열심인 남궁청휘에게 연적훈은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털어놓았다.
‘이린조차 아직 모르는 사실을 내가 먼저 들었다는 사실이 조금 걸리긴 하는데.’
검성과 천마가 친부모라니 말도 안 되는 출생의 비밀이었다.
“그럼 검성이 어디 계신지도 아세요?”
“아뇨. 그건 아마… 아는 사람이 없을 겁니다.”
그때 혈교의 근거지를 습격한 직후. 검성은 일이 있다며 혼자 사라졌다.
‘이린이 실종되었다는 사실도 모르고 떠났는데 설마 지금은 알고 있겠지.’
중원 땅은 넓으니 마음만 먹는다면 속세의 이야기가 전혀 전해지지 않는 곳으로 숨어 버리는 것도 가능했지만 검성은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그때 혈교 토벌에는 실패했으니까.
여인은 조금 들뜬 얼굴로 말을 이어 갔다.
“저 검성을 만나고 싶거든요.”
“검을 배운 여협들은 대부분 선망하시니까요.”
“아니면 적어도 검성의 가족들이라든가.”
“네?”
검성을 동경하는 어린 여협을 훈훈하게 바라보던 남궁청휘는 이어지는 말에 저도 모르게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리고 그런 기색을 놓치지 않은 여인은 상기된 얼굴로 남궁청휘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혹시 검성의 출신 가문을 아시나요?!”
“아니요. 그런데 왜 검성의 가문을 찾으십니까?”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요.”
검성이 아니라 검성의 가문인 연가장을 찾는 거라면 단순한 동경 외의 다른 이유가 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검성이 연가장 출신이라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는 듯하니 연장주께 여쭤본 후 결정하는 게 좋겠군.’
남궁청휘의 반응을 관찰하던 여인은 눈을 반짝 뜨며 웃었다.
“아시는군요?”
“아니, 안다고 할 정도는 아닙니다.”
“제가 운이 좋네요.”
“가르쳐 드린다고 하지 않았습니다만.”
“어머, 대협이 아니어도 중원에 가면 아는 사람이 있지 않겠어요?”
“…….”
그렇게 통성명도 하지 않은 두 사람은 동행했다. 둘 다 경공이 뛰어나니 길을 가는 동안 시간을 지체하는 일은 없었다.
‘나보다도 빠른 것 같으니 도적을 만나도 일부러 멈추는 게 아니라면 도적들이 못 쫓아오겠는데.’
아까 검도 뽑지 않고 산적들을 때려눕히는 걸 보면 실력 쪽은 그리 걱정할 필요도 없는 것 같지만….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 낯선 사람과 너무 덥석 동행하신 것 아닙니까?”
“생각해 보니 그렇기는 하군요.”
해가 저물고 머무르기로 한 객잔에서 마주 앉아 식사를 하며 여인은 싱긋 웃었다.
“어쩐지 대협이 낯설지가 않아서요. 좋은 분일 것 같아요.”
“그러시면 안 된다고요.”
이 험한 세상에서 이 무슨 순진한 생각인가.
남궁청휘의 걱정 어린 말에 여인은 태평하게 웃었다.
“저는 이상하게 처음 만났는데도 마음이 편한 사람이 있고 불안해지는 사람이 있더라고요. 다 그런 건 아니지만.”
“?”
“대협은 어쩐지 안심이 되니 믿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보통은 다른 사람을 쉽게 믿는 편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그렇게 말하며 여인은 싱긋 웃었다.
본인이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자길 믿지 말라고 하는 것도 이상하고. 결국 남궁청휘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처음으로 외유를 나왔다고 하신 것 같은데 유람은 하지 않아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남궁청휘가 여인을 배려해 부드럽게 권유했지만 여인은 고개를 저었다.
“권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도 가능한 빨리 중원으로 가고 싶거든요. 대협께서도 급하신 것 같고요.”
틀린 말도 아니었고, 굳이 가까워질 생각은 없기에 남궁청휘는 그대로 길을 재촉했다.
여인의 경공이 뛰어났기에 생각보다 이르게 사천성에 도착했다.
사천성에 들어서자 여인은 환하게 웃으며 기뻐했다.
“대협 덕분에 길을 헤매지 않고 편하게 왔군요!”
“대단한 일은 못 됩니다.”
“늘 급하게 식사하고 출발했지만 오늘은 제가 식사 대접할게요.”
“괜찮습니다.”
“제가 사천 음식을 먹어 보고 싶었거든요! 아무래도 혼자서는 여러 요리를 먹기는 힘들어서요.”
“…알겠습니다.”
결국 남궁청휘가 고개를 끄덕이자 여인은 편히 먹겠다며 아예 별실을 빌렸다.
‘씀씀이를 보면 확실히 평범한 집 영애는 아닌 듯한데 정체가 뭔지.’
사치스러운 편은 아니지만 필요할 때 돈을 쓰는 데에는 거침없이 거금을 턱턱 쓰는 것이 절대 평범하지 않았다.
점소이를 불러 추천하는 요리를 잔뜩 시키고 잠시 쉬고 있을 때였다.
밖이 소란스러워지자 귀를 기울이던 여인이 피식 웃었다.
“또 대협을 찾는 분이 계신 것 같네요.”
“후우.”
“유명인이시네요.”
“아닙니다.”
남궁청휘는 여인에게 자신의 이름을 밝힌 적이 없으나, 분명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을 터였다.
여기까지 오며 그간 마주친 이들이 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여인의 귀에 한 번도 닿지 않았으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으니까.
‘불공평해….’
이쪽은 여인의 이름을 모르는데 저쪽은 이름을 알고 있다니. 유명인의 비애였다.
게다가 남궁청휘는 아무리 피차 강호인이라도 이름을 밝히려 하지 않는 양갓집 처자의 이름을 물어볼 정도로 뻔뻔하지 못했다.
“요리는 시켜 놨으니 걱정 마시고 다녀오세요.”
“하아.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청휘가 자신의 짐을 잠시 내려놓고 나가자 여인은 호기심에 가득 찬 눈으로 밖을 기웃거렸다.
‘무슨 일일까.’
우연히 동행하게 된 이는 그 얼굴과 검법만 보고도 누군지 알아채는 이들이 많은 것을 보면 분명 강호에 유명한 검호일 터였다.
‘남궁세가 사람이라는 건 나도 금방 알았지만.’
내려다보니 면사로 얼굴을 가린 여인 하나가 남궁청휘를 반갑게 맞고 있었다.
두 사람은 꽤 친밀한 사이인지 남궁청휘의 얼굴에도 밝은 웃음이 떠올라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뭔가 잘못한 기분이 들어 서둘러 별실로 돌아오자, 마침 주문한 요리들이 줄줄이 들어왔다. 맛깔스러운 요리들이 눈앞에 있는데도 어쩐지 입맛이 돌지 않았다.
‘왜 이러지.’
아까 본 여인이 신경 쓰여 공연히 자리를 서성였다. 혼자 먹는 것은 적적하기도 하니 남궁청휘를 기다릴 생각이었다.
그리고 뜻밖에 남궁청휘의 자리 근처에서 무언가가 발에 채였다.
툭.
“아.”
발에 채인 것은 남궁청휘의 물건으로, 허리에 고정하는 작은 가방이었다. 아마 아까 요리를 가져오던 이들 중 누군가가 지나가며 남궁청휘가 두고 간 짐을 건드려 바닥에 떨어진 모양이었다.
평소에는 몸에서 떼는 일이 거의 없었으나 식사 때에는 잠시 풀러 두곤 했는데 아까 자리에 앉았을 때 풀러 두고 깜빡 잊은 모양이었다.
‘떨어진 걸 올려 두는 것뿐이니 만져도 괜찮겠지?’
평소 애지중지하는 듯했기에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바닥에 방치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잠시 망설이다 손을 뻗는데, 바닥에 떨어지며 그런 것인지 발에 차여 그런 것인지 살짝 열린 가방 사이로 무언가가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붉은빛이 도는 흰 비늘의, 작은 뱀.
“아?”
끼이?
눈이 마주친 한 사람과 한 마리가 동시에 얼빠진 소리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