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Goddess RAW novel - Chapter 256
외전 6화
소년은 칠흑같이 어두운 산길을 조심조심 걸었다.
숨기지 못한 발소리는 다행히 바람 소리가 묻어 주었기에 들키지 않을 거라 확신할 수 있었다.
‘오늘이야말로!’
누님들이 밤마다 몰래 장원을 빠져나가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뭔가 대단한 걸 발견한 게 틀림없어.’
워낙에 활발한 성정의 선하 누님만이라면 몰라도 화문 누님까지 같이 나가는 걸 보면 단순히 둘이 놀러 가는 건 아닐 터.
들키지 않으려 수일에 걸쳐 조금씩, 기척을 죽여 가며 누이들이 지나가는 길목에 숨었다.
타닥!
‘왔다!’
열 살 차이 나는 누이인 연화문과 그 벗인 주선하 사저.
아직 한참 어린 자신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무공의 소유자들이니 어설프게 따라가다간 들킬 게 틀림없다.
‘하지만 이 앞은 길이 없어. 여기서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 확인해야 해.’
들키지 않기 위해 매일 조금씩 표시해 두며 뒤를 따르던 연적훈은 어쩌면 오늘 밤, 드디어 누이들의 마지막 종적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른침을 삼켰다.
‘이 앞은 절벽이니 이쪽으로 갈 리는 없…… 어?’
망설임 없이 달려가던 두 사람의 모습이 절벽 위에서 그대로 사라졌다.
휘이잉―
“절벽을…… 뛰어내렸어?”
놀라서 아래를 내려다보았지만 까마득한 절벽만이 있을 뿐, 두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오늘이야말로 누님들의 밤놀이 현장을 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결국 허탕이었다.
* * *
귀신도 아니고 대체 어디로 간 걸까.
“귀신도 혀를 내두를 사람들이긴 하지.”
“뭐?”
“헉!”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지레 놀란 연적훈이 펄쩍 뛰는 모습에, 말을 건 소녀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뭐 해?”
“너야말로.”
“주 사저가 부르시던데.”
“왜, 왜?”
“내가 어떻게 알아.”
아침 수련을 나온 장원의 무인들 사이로, 연적훈의 또래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다.
다들 기운도 좋지. 기초 수련 끝나고 뛰어놀 기운도 있고.
간밤에 누님들의 추적도 실패해, 잠도 못 자, 새벽에 일어나 무공 수련에 공부까지 하느라 지쳐 버린 연적훈은 터덜터덜 호출에 따랐다.
쾌활한 인상의 미인은 그런 연적훈의 얼굴을 보며 재미있다는 듯 유쾌하게 미소 지었다.
분명 어젯밤 누이와 함께 절벽 위에서 사라졌던 사저, 주선하였다.
“우리 도련님. 요새 수면 부족 같은데 무슨 일이 있어?”
“네? 아닙니다. 사저.”
“아니긴. 얼굴에 다 보이는데. 왜, 수린이랑 잘 안 되나?”
장난기 어린 목소리에 연적훈이 부루퉁하게 고개를 저었다.
다들 남의 일에 뭔 관심이 그렇게 많은지 한 마디씩 보태지 않는 이가 없었다.
“아니거든요?”
“어허, 어찌 감히 사저에게 목소릴 높여?”
“아야야야.”
마침 지나가던 윤 사형이 주선하 앞에서 보란 듯이 연적훈의 머리를 쥐어박으며 타박했다. 장주의 아들을 대하는 태도라기에는 참 허물없었다.
“어허, 그만. 우리 귀여운 도련님을 괴롭히다니.”
“…….”
병 주고 약 주는 주선하의 태도에 연적훈은 포기한 듯 입을 다물었다.
“노는 건 자유지만 장주님께 걱정은 끼치지 말도록.”
“네에…….”
아무래도 말하고자 했던 결론은 그거였던 모양이었다. 하긴 주 사저가 누굴 통제하는 걸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연적훈이 물러나자 주선하 곁에 붙어 있을 명분이 없었는지 주선하보다 연하에, 아래 항렬인 윤 사형 역시 따라 물러나 연적훈에게 물었다.
“주 사저가 왜 부르셨어?”
“암 것도 아냐.”
“아니긴? 아무것도 아닌 눈빛이 아닌데.”
“윤 사형은 주 사저 일이라면 별거 아닌 일에도 늘 눈에 불을 밝히고 있으니 그렇게 보이겠지.”
“뭐, 내가, 내가 뭐가 어째?”
“자꾸 이러면 윤 사형이 괴롭혔다고 주 사저한테 이를 거야!!”
빽 소릴 지르고 달려가자 안절부절못하던 청년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발만 구를 뿐이었다.
윤 사형을 따돌리고 다시 연무장을 거쳐 후원으로 향하자 아까 말을 전했던 수린이 그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자신을 보는 소녀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해서, 연적훈은 소녀와 시선이 마주치자 저도 모르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훈, 정말 무슨 일 있어? 얼굴이 안 좋은데.”
“아무 일도 아냐. 아무 일도.”
황급히 손을 내젓자 소녀의 얼굴에 서운함이 떠올랐다. 아니, 서운하다기보다는 조금 빡친 것 같기도 했다.
“……내가 걱정하는 게 귀찮아?”
“뭐? 그, 그럴 리가.”
여기서 잘못 대답했다간 앞날을 장담할 수 없음을 본능적으로 느낀 연적훈은 필사적으로 부정하며 수린의 손을 붙잡았다. 마주 보고 있던 소년 소녀의 볼이 수줍음에 붉게 물들었다.
“그런 거 아냐. 요새 좀…….”
“좀?”
“그냥, 공부가 잘 안 돼서 그래.”
“정말이지?”
“응. 저기, 수린.”
계속 손을 잡고 있는 게 어쩐지 민망해져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담담한 한 쌍의 눈동자가 미동도 없이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으헉!”
“앗.”
화들짝 놀라 손을 놓고 떨어지는 두 사람을 보던 여인의 무표정한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놀라게 해서 미안하구나.”
“누님.”
“소장주님.”
차분한 목소리의 주인은 소년 소녀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서류를 하나 들고 있었다.
‘인기척 좀 내고 다니지.’
물론 연적훈의 누이이자, 연가장의 소장주인 연화문이 이곳에 있는 것이 문제가 될 건 하나도 없었다. 지레 찔린 연적훈이, 수면 부족의 원인이라며 연화문을 원망하고 있을 뿐.
그런 연적훈의 복잡한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신수린은 해맑게 웃으며 연적훈을 버리고 연화문에게 매달렸다.
어릴 적부터 연가장에서 보낸 시간이 긴 수린은 연화문을 친언니처럼 잘 따랐다.
“소장주님!”
“수린. 오늘 몸 상태는 좀 어떠니? 열이 나진 않았고?”
“네!”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언제든 몸 상태가 좋지 않으면 참지 말고 꼭 말해야 한다.”
“네.”
그리 당부한 연화문은 신수린과 연적훈의 머리를 한 번씩 쓰다듬어 준 후 소리도 없이 조용히 사라졌다.
아마도 주선하에게 간 게 아닐까. 두 사람은 단짝이니까.
그런 두 사람을 동경하면서도 부럽기도 한 마음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게다가 옆에 있는 신수린이 반짝이는 눈으로 누님의 뒷모습을 좇는 것을 볼 때면 한숨을 내쉬는 게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너, 실은 나보다 우리 누님이 더 좋지?”
“어머, 아훈은 소장주님과는 비교 대상도 못 되는데 무슨 소릴.”
“뭐, 뭐가 어째? 내가 어때서?”
연적훈이 따지고 들자 신수린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그래 아훈은 아훈 나름의 매력이 있지.”
뭐야, 그게.
자신과 누님을 대할 때의 극명한 온도 차에 종종 툴툴거리곤 했지만 사실 누님에게 열등감을 느끼기에는 10년이라는 차이가 너무 컸다.
‘10년 후면 나도 누님을 따라잡을 수 있……겠지?’
연적훈은 현실주의자였으므로 지금 당장 자신이 누님을 이길 가능성이 한없이 무(無)에 수렴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며, 10년 뒤에도 이길 가능성이 있다고는 감히 장담하지 못했다.
“수련 시간이야. 가자.”
“흥.”
자신에게 내밀어진 수린의 손을 잡고 연적훈은 순순히 함께 연무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런 두 사람을 몰래 숨어서 지켜보던 사형 사저들은 숨죽여 웃었다.
다들 심혈을 기울여 은신 중이었으므로, 어린 연적훈과 신수린이 그 사실을 알 리는 만무했다.
물론 그 사실을 안다고 해도 연적훈은 감히 그들에게 따질 수 없었다.
[도련님은 우리가 기저귀 갈아 가며 키웠거든요?]말수가 적은 편인 친누이 연화문과 달리 어릴 적부터 장원에서 함께 자라 온 사저들은 연적훈이 화문에게 뭐라 대거리라도 할 때면 짓궂게 도련님이라 부르면서 까르르 웃으며 연적훈을 놀리곤 했다.
‘어릴 적 누님에게 업혀 잠들곤 했던 기억도 있으니 사실이겠지.’
자고로 양육자를 이기기는 어려운 법이다.
늦둥이로 태어난 연적훈을 키운 건 8할이 친부모가 아닌 누님과 그 벗들인 연가장의 사형제들이었다.
연화문은 다소 무뚝뚝한 성정이었으나 어린 동생에게는 다정한 편이었으므로 연적훈은 나이 차 많이 나는 누이를 경애(敬愛)했다.
심지어 연화문은 연가장의 수많은 무인들 중 누구와도 비할 수 없을 만큼 강했다. 연가장에서 연화문과 제대로 검을 맞댈 수 있는 무인은 주선하 정도였다. 두 사람은 장원 내의 교육도 전담하고 있었으므로, 종종 장원 무인들을 묵묵히 패는 누님들의 모습을 봐 온 연적훈과 아이들은 절대복종을 다짐하며 자랐다.
수련과 공부가 대부분의 시간을 차지하는 하루 일정이 끝나고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자 누군가가 연적훈에게 슬금슬금 다가왔다.
낮에는 내내 보는 눈이 많아 하지 못했던 질문을 하기 위해서였다.
“윤 사형.”
“그건 어떻게 됐어?”
“놓쳤어요.”
“대체 둘이 어딜 가는 거지.”
“……걱정하시는 것처럼 밤놀이를 가는 건 아닐 거 같은데요.”
“네가 뭘 알아!”
그렇게 궁금하면 직접 물어보시든가.
‘어휴, 못 봐 주겠네.’
연적훈은 고백은 못 하면서 어린 자신만 들볶은 사형을 보며 내심 혀를 찼다.
사실 누님들의 밤 외출을 먼저 알아챈 건 사모하는 님의 자취를 쫓고 싶어 하는 이 사형이었다.
“사형이 이러는 거 알면 오히려 소름 끼쳐 할 텐데”
“……그러니까 내가 안 쫓아가고 너한테만 말하잖아.”
좋아하는 연상의 여인을 미행하는 남자와 누님이 걱정되어 뒤를 따라가는 남동생의 차이는 컸다. 게다가 아직 어리고 약한 아이라면 두 사람이 오히려 발견하지 못할 가능성이 컸기에 연적훈이 홀로 두 사람을 미행하고 있었다.
‘난 저런 사내는 되지 않을 거야.’
연적훈은 속으로 타산지석을 외치며 다짐했다.
그리고 사실 윤 사형에게는 말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오늘도 가 봐야지.’
어제 누님들은 그렇게 사라지고 몇 시간 후 절벽 위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절벽 아래에 뭔가가 있다?’
누님들이 떠난 후 다시 절벽을 내려다본 연적훈은 나무 덩굴을 붙잡고 아래로 내려갈 수 있다는 걸 깨달았고, 절벽 중간에 위쪽에서는 보이지 않는 동굴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일찍부터 무공을 익혀 제법 재능을 인정받아 온 소년은 겁이 없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행적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는 데에는 거부감이 있었다.
그런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뭔가 통로가 있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 좋을 것이 없었다.
‘뭐 기연 같은 걸 수도 있고, 두 사람이 은신처를 만들어 놓은 걸 수도 있고.’
한 번만 확인해 보고 다시는 접근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래서 누님들이 동굴에서 나오는 시간을 확인해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누님들이 나온 후 몰래 동굴에 들어가기 위해 횃불과 피풍의(披風衣) 등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뭐 기연이라도 만난 건가. 헉, 그럼 혹시 은둔 고수가 우리 집 뒷산에?’
어쩐지 누님들 요새 더 일취월장하더라니.
혹시 안에 있는 은거 기인이 나를 마음에 들어 해 제자로 삼아 주는 게 아닐까!
연적훈은 그 나이대 소년이 품을 만한 꿈과 희망이 가득한 설렘을 품고,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동굴 안으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동굴은 처음이야.’
불을 밝히고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안을 살폈다. 사실 은거 기인은 둘째 치고 동굴도 신기해서 두근두근했다. 덕분에 저도 모르게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그저 동굴의 서늘함 때문이라 생각하며 더 깊은 곳으로 향했다.
첨벙―
‘물소리?’
입구 근처에서 이미 호수가 있다는 건 확인했다. 안쪽까지 보진 못했지만 아마 물고기라도 있는 거겠지.
스스스―
기세 좋게 들어섰을 때와는 달리 조금 위축된 상태로 한창 주변을 관찰하느라 정신이 없던 연적훈의 귀에 뭔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뭔가 묵직한 것이 바닥에 스치는 듯한 소리. 동굴 안에서부터 점점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니, 아닐 거야. 누님들이 드나들고 있었으니 위험한 게 있을 리가…… 있을 리가……!’
연적훈이 겁 없이 이런 낯선 곳으로 홀로 들어올 수 있었던 건, 연화문과 주선하 두 사람이 매일 거리낌 없이 이곳을 드나들고 있다는 걸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동굴 안에 뭔가 위험한 게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연적훈의 몸은 저도 모르게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불길한 소리는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통로가 여기저기로 뚫려 있는지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잡지 못한 연적훈이 그저 들어온 방향으로 뒷걸음질 치며 횃불을 들어 올렸다.
키이이이―
횃불을 든 연적훈이 마지막으로 본 것은…….
자신을 삼킬 듯이 거대한 입을 벌리고 있는, 커다란 흰 뱀이었다.
“으아아아아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