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Goddess RAW novel - Chapter 258
외전 8화
오랜만에 동정호에 온 남궁청운은 멍하니 수면을 응시했다.
예전에 이곳에 왔을 때는 징그러울 정도로 많은 일행이 있었는데 고작 몇 년 만에 이렇게 혼자 와 호수를 보고 있으려니 어지간히 청승맞은 기분이었다.
‘애초에 예전에는 혼자 다닌 적이 별로 없었나.’
일행이 없어 불편한 거라곤 길 찾기가 좀 성가시다는 것뿐인데, 지금은 그저 정처 없이 떠도는 몸이니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산적과 조우하면 몸도 좀 풀고, 용돈 벌이도 하고 나쁘지 않지.’
아직도 본인이 길치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남궁청운은 그렇게 자기 합리화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동정호로 오던 그가 본래 의도한 방향과는 다소 관계없는 길목으로 가는 바람에, 그곳에 있던 산적들은 겪지 않았어도 되는 재난을 겪어야 했다.
“사, 살려 주십시오! 대협!”
지금 눈앞에 무릎 꿇고 있는 놈들과 마찬가지로.
무자비하게 두들겨 맞고 금품을 갈취당하는 것만 아니라, 전혀 관계없는 방향에서 헤매고 있던 남궁청운의 길잡이 역할까지 해야 했던 도적들은 두려움에 떨며 자비를 청했다.
그래도 이놈들 덕분에 동정호까지 편하게 와서 이제 대충 풀어 줄까 했건만.
“사람이 모처럼 분위기를 잡고 있는데 참 눈치가 없구나.”
“악! 자, 잘못했습니다, 대협!!”
“한 번만, 한 번만 용서해 주시면 다신…… 악!!”
퍽퍽!
도적들이 조용해지자 남궁청운은 다시 한번 감상에 젖었다.
처음엔 목적이 있던 것도 아니니 모처럼 떠난 김에 연이린을 찾아볼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남궁청휘가 남궁세가에도 청을 넣었고, 연가장은 물론이요 무림맹에서조차 백방으로 찾지 않았던가.
사람 찾는 전문가들조차 그 눈에 띄는 머리카락 한 올 찾아내지 못했는데 자신이 찾을 수 있을 리도 없겠다 싶어 조용히 생각을 접었다.
그렇게 그냥 발길 닿는 대로 떠도는 와중 귀를 의심케 하는 소문이 들려왔다.
‘혈교가 궤멸되었다니 정말인가.’
심지어 소문에 의하면 실종된 연이린도 나타났다고 한다.
그게 왜 그렇게 이어진 건지 자세한 내막까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듣자 하니 연이린은 무사하고, 남궁청휘는 혈교 본거지를 치는 데에도 공을 세웠다고.
“가장 중요한 건 둘이 만났다는 거지.”
다행이다.
그 소문을 듣자마자 남궁청휘와 연이현의 얼굴을 떠올린 남궁청운은 산적들에게서 갈취한 술로 혼자 축배도 들었을 정도였다.
물론 평소에도 안 마신 건 아니지만.
다만 한 가지 신경 쓰였던 건…….
막내가 이린을 찾고 있었다는 것도, 둘이 드디어 만났다는 사실도 이젠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데, 정작 둘이 만나서 어찌되었느냐에 대한 언급은 한 마디도 없었다.
‘그래서! 그 뒤로 둘이 어떻게 된 건데!!’
둘이 잘됐나? 아니면 설마…… 차였나?
어느 쪽이든 결론이 났다면 여기저기서 즐겁게 소문이 퍼졌을 텐데 제대로 된 얘기가 없었다.
호남에서 두 사람을 본 사람이 있다, 아니다 호북에서 만났다더라, 실은 남궁청휘가 다른 여인과 있다 등등 온갖 낭설만 가득했다.
남궁청운이 오랜만에 호남으로 돌아온 이유도 직접 확인해 보고 싶어서였다.
직접 확인하기는 어려울지 몰라도 일단 이 근방에 도는 소식이 가장 정확할 테고, 나중에 남궁세가에 들러 제갈윤정에게 확인하면 더 확실해질 터.
‘하지만 청휘 녀석이 어머니께 연락을 했을지는 장담할 수 없겠는데.’
이린을 찾으면 함께 가겠다고 주루 하나를 통째로 사는 무식한 짓도 저지른 놈이었다.
연이린과 만났다면 지금쯤 그 옆에 딱 달라붙어 어머니는 까맣게 잊고 있다 해도 놀랍지 않았다.
오히려 이린을 데리고 취선루에 갔을 가능성이 더 높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오랜만에 가 볼까.’
취선루.
이제는 남궁청휘의 소유이니 뭔가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안 그래도 동정호에 오면 꼭 들르는 맛집이었지.’
예전에 동정호에 왔을 때 동생들을 데리고 간 게 마지막이었으니 제법 오래됐다. 입맛을 다시던 남궁청운은 전낭을 확인하고 방향을 잡았다.
* * *
‘뭐야! 쟤 왜 여기 있어!’
남궁청운은 취선루 2층에 올라오자마자 눈에 들어온 낯익은 인물들에게서 황급히 시선을 돌리며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이 근방에서는 아는 사람과 만날 가능성이 높아 얼굴을 가리고 다녀서 망정이지 까딱하면 들킬 뻔했다.
‘흠. 하긴 청휘가 일단은 여기 소유주이니 여기 있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
남궁청운은 술과 요리를 시키며 곁눈질로 오랜만에 보는 동생의 얼굴을 관찰했다.
‘눈매가 좀 어른스러워졌나.’
하긴 아직 젊은 나이에 적지 않은 풍파를 겪었으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원체 조숙한 아이이기도 했고.
그간의 걱정이 무색하게 남궁청휘는 함께한 일행들과 즐겁게 식사를 하고 있었다.
저쪽에 면사로 얼굴을 가린 여인은 연이린일까?
‘청휘의 맞은편에 앉은 사람이 연이린인 것 같고. 그 오른쪽에는…… 당자혜? 또 같이 다니나 보군.’
대체로 지난번에도 함께했던 아는 얼굴들이었지만 그렇지 않은 이도 있었다.
‘저 여자는 누구지?’
연이린의 왼쪽에 처음 보는 낯선 여인이 앉아 있었다.
“요리가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습니다.”
“이곳 요리는 예전과 다르지 않군. 나쁘지 않아.”
“다행입니다. 뭐든 필요하신 것이 있으시면 얼마든지 말씀해 주십시오.”
그리고 남궁청휘는 뜻밖에 연이린보다도 그 여인에게 꼼짝도 못하며 굳은 얼굴로 시중을 들고 있었다.
“?”
누구야, 대체?
여인의 용모는 평범한 편이고, 나이는 기껏해야 이린의 또래거나 조금 연상이려나?
아직 젊은 여인답지 않게 태도는 차분하고 무덤덤, 말투를 보니 신분이 낮아 보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감히 남궁세가의 공자를 저렇게 아랫사람 대하듯 하다니.’
보고 있는 형님 입장에서는 썩 유쾌하지 않았다.
“!”
대체 어디 출신인가 싶어 여인의 용모를 찬찬히 뜯어보던 남궁청운은 다음 순간 얼른 음식으로 고개를 돌렸다.
‘설마 내 시선을 느낀 건가?’
창밖을 보거나 일행과 가벼운 대화를 나누던 여인의 시선이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무것도 아니다.”
여인에게 말을 거는 사내의 목소리에 남궁청운은 미간을 찌푸렸다.
‘재수 없는 청운진인 놈의 목소리잖아.’
태도가 친근한 걸 보면 저 여인은 청운진인의 지인인 듯했다.
‘아니, 젊은 남녀가 여행 중이면 눈치껏 빠져 줘야 하는 게 아닌가. 이래서 도사 놈들은 안 된다니까.’
본인이 묘하게 불온한 기색을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남궁청운은 속이 타 벌컥벌컥 술을 들이켰다.
“주루 안에 이쪽을 보는 눈이 많구나.”
“남궁 소협과 청운진인이 계시는데 시선이 집중되는 것도 당연하죠.”
“별실로 모셨어야 했는데, 송구합니다.”
남궁청휘가 민망해하며 사과하자 연이린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어머, 아니에요. 남궁 소협이 아니었으면 들어오는 것도 힘들었을걸요. 워낙 유명한 곳이라 금방 자리가 나질 않으니까요.”
“그래. 너무 신경 쓰지 말게.”
이린의 말에 맞장구치는 여인의 목소리는 인자했으나 남궁청운은 더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자기가 무슨 웃어른이야?’
그렇다고 정체를 숨기고 있는 처지에 가서 따질 수도 없고.
괜히 다시 시선을 돌리면 의심 살 것 같아 남궁청운은 술과 요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렇다고 귀까지 막은 것은 아니었다.
“……고기를 좋아하는구나.”
“네. 아, 혹시 육식은 안 좋아하세요?”
“신세 지던 곳이 도문이라 늘 채식을 하던 게 습관이 됐을 뿐이지 싫어하는 건 아니니 걱정할 것 없다.”
“생선 요리는 어떠세요?”
“딱히 가리지는 않는다.”
“그럼 다음에 제가 해 드릴게요!”
연이린과 낯선 여인의 대화는 얼핏 듣기에는 화기애애했으나 어딘지 서먹서먹하게도 느껴졌다.
‘저 둘은 또 뭐람.’
동생부터 살펴보느라 몰랐는데 이제 보니 저 일행 전체가 여인이 신경 쓰여 어쩔 줄 몰라하는 괴이한 분위기였다.
“……내가 해 줘야 하는 게 아닌가?”
“진짜요? 요리하실 수 있어요?”
“왜 내가 못 한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구나.”
영문 모를 대화에 귀를 기울이며 남궁청운은 젓가락을 바삐 움직였다.
주인의 사정으로 팔렸다던 취선루의 술과 요리들은 여전히 훌륭했다.
* * *
“야시장이라. 나는 괜찮으니 다들 좀 놀다 오는 게 어떤가?”
그렇게 말하는 여인의 시선이 얼핏 남궁청휘를 스쳐 지나가자 담담하던 남궁청휘의 얼굴이 슬쩍 붉어졌다. 그 시선을 눈치챈 당자혜가 키득 웃었다.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이 근방은 길도 복잡하고…….”
“이 근처는 나도 예전에 자주 찾던 곳이라 익숙하니 걱정할 거 없다.”
그렇게 말하며 여인은 이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 오라비도 곧 돌아올 테니 편히 놀다 오렴.”
“……네.”
묘하게 시무룩한 기색의 이린을 보며 여인이 의아한 얼굴을 하자 남궁청휘가 뭔가 떠오른 듯 당황한 얼굴로 여인과 시선을 나눴다. 흡사 전음이라도 나누는 모양새였다.
여인도 뭔가 깨달은 듯 이린의 손을 붙잡고 말을 덧붙였다.
“함께하면 좋겠지만 나는 용무가 조금 생겨서 어려울 것 같구나. 이런 곳에서는 역시 젊은 애들끼리 놀아야 재밌을 테고. 하지만 다음에는 나도 함께 구경해도 될까?”
“아, 네!”
그제야 황급히 고개를 끄덕인 이린이 남궁청휘와 당자혜를 양팔에 하나씩 꿰고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손을 흔들며 일행을 배웅한 청운진인이 옅은 웃음을 지으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연 소저가 오해하고 있는 것 같군요.”
“옛 친구와 함께했던 장소에 좀 왔다고 그렇게 괴로워할 정도는 아닌데.”
“연가장에도 안 들어가시니 그렇죠.”
“내가 연가장에 머물다 괜한 오해라도 하면 곤란해.”
연화문과 지내 온 세월이 제법 길었던 덕에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어렵지 않게 알아챈 청운진인이 조금 난처한 얼굴로 웃었다.
“연 장주님은 그저 오랜만에 누님이 집으로 돌아온 것만으로도 기뻐하시지 않을까요.”
“그야 기뻐하겠지. 하지만 기뻐하는 단계가 지나면 나한테 다시 장주 자리를 떠넘기려고 할지도 모르거든.”
“네?”
“은근슬쩍 떠넘겼는데 이제 와서 붙잡히는 건 좀.”
“……연 장주님이 불쌍하지도 않으십니까.”
저도 모르게 힐난조의 목소리가 튀어나온 청운진인이 한숨을 내쉬었지만 연화문의 표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것보다는 오랜만에 다시 만난 이린과 함께 할 시간을 별로 주지 못했다는 게 더 미안하긴 하다만.”
“하긴 연 장주님도 그렇고 장원 사람들도 다들 아쉬워하더군요.”
“저 아이가 그리 금방 떠나자고 나설 줄은 나도 몰랐다.”
“그야 보통, 사람이 집에 안 들어오고 밖에 지내면 신경을 씁니다.”
“……내 잘못이군.”
미간을 찌푸리는 연화문을 보며 청운진인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곤륜산에서도 무슨 움막 같은 데서 생활하려고 해서 저희가 집 지어드렸잖아요.”
“입문한 것도 아닌데 폐를 끼치는 것도 좀.”
“지금은 전혀 신경도 안 쓰시면서.”
“그곳에서 지낸 시간이 너무 길었던 탓이지.”
연화문이 곤륜산에서 은둔하며 키웠던 영초(靈草)들은 지금 곤륜파의 제자들이 대신 돌보고 있었다. 그런 가벼운 말 한마디로 뒷일을 부탁하고 자리를 비우는 것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연화문은 이미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
“연 소저와 여행이 끝나면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돌아오실 겁니까?
“농사짓던 걸 남겨놨는데 계속 맡겨두기만 할 수는 없지.”
“……그렇군요.”
청운진인은 그 이상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연화문이 떠나지 않을 거란 사실에 안도했지만, 친어머니를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린에게서 어머니를 빼앗는 것 같아 내심 부끄러워졌다.
“그럼 저희는 숙소로 돌아가 이현을 기다릴까요? 그분도 곧 도착하실 듯하고요.”
“아니, 나는 조금 신경 쓰이는 게 있다. 너는 먼저 돌아가서 쉬도록 해.”
“네?”
어리둥절해하는 청운진인을 남겨 두고 여인은 그대로 모습을 감췄다.
* * *
남궁청운은 청휘와 이린의 뒤를 몰래 밟고 있었다.
‘모처럼 방해꾼들도 떨어져 나가고, 당가 꼬맹이도 눈치껏 사라져 줬으니 뭔가…… 뭔가 진전이 있겠지?’
두 사람이 눈치채기 힘든 거리에서 우연을 가장해 슬금슬금 따라붙고 있으니 사람이 북적거리는 시장에서 누군가가 자신들을 쫓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기는 힘들 것이다.
‘분위기는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데.’
모처럼 단둘인데 저럴 게 아니라 어디 좀 조용한데 가서 분위기도 잡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닌가?
청휘와 이린 두 사람은 가판에서 비단 향낭을 들고 다정하게 대화하며 웃고 있었다.
‘아, 그 꼬맹이한테 향낭 하나 사다 줄 걸 그랬나.’
전에 찾아갔을 때는 원흉 잡아다 끌고 가는 데 바빠서 그만 아이한테 뭔가 사다 줄 생각을 할 틈이 없었다.
보상까지는 아니더라도, 아이한테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지 않은가.
‘나중에 한번 잘 지내나 확인해 봐야…… 뭐야, 어디 갔지?’
잠깐 한눈을 팔았을 뿐인데, 두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사람이 붐비는 곳에서 멀리 가지는 않았을 텐데?’
건물 지붕으로 올라가 탐색하다 보니 이린으로 추정되는 여인이 남궁청휘를 붙잡고 호숫가로 뛰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래! 잘한다!’
바로 그거야! 적극적인 자세! 훌륭해!
심지어 호숫가에 도착한 두 사람은 뭔가 분위기 잡고 대화하기 시작했다.
‘너무 멀어서 들리지는 않지만 뭔가 신체 접촉을 한다면 보이기야 하겠지?!’
그렇게 두근거리며 지붕에 숨어 조용히 두 사람을 응시하던 남궁청운의 눈에 불온한 것이 포착되었다.
안타깝게도 어리석은 건달패 무리가 두 사람에게 접근 중이었다.
‘아, 안 돼!’
기껏 분위기 잡혔는데!
방해하는 놈들을 족치기 위해 이를 갈며 몸을 일으키는 순간, 갑자기 등골에 오싹한 한기가 흘렀다.
“넌 누구냐.”
처음으로 느껴 보는 위압감에 떨며 고개를 돌리자, 아까 취선루에서 보았던 여인이 어느새 남궁청운의 옆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