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Goddess RAW novel - Chapter 259
외전 9화
‘내가…… 아무리 저 둘에게 정신이 팔렸어도 이렇게까지 가까이 다가온 걸 못 느꼈다고?’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느낌이었다.
아무리 느긋하게 유람 중이라고는 하지만 홀로 여행하는 몸이었다.
고수라고 자칫 방심했다가 그대로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세상.
남궁세가라는 뒷배도 없는 낭인 생활을 하며 뒤를 내줄 정도로 방심한 적은 없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눈앞의 여인이, 남궁청운이 감히 쳐다볼 수도 없는 경지의 고수라는 것.
“당신은…… 누구지?”
뒤늦게 경계하며 거리를 벌리는 남궁청운을 본 여인은 의외라는 듯 눈썹을 치켜세웠다.
‘뭐지, 이 사람……. 이런…… 이건 설마?!’
손끝이 떨려 오며 몸을 움츠러들게 만드는 감각.
그저 키가 좀 큰 여인이 마치 거인처럼 자신을 압박하고 있었다.
남궁청운이 이 정도라면 평범한 무인들은 그대로 주저앉아 일어나지도 못할 것이다.
이 정도로 위험한 기운을 느껴 본 것은 친아버지인 검황과의 마지막 대련 이후 처음이었다. 드물긴 하지만 가끔은 아들의 성취를 확인하기 위해 대련을 해 주던 검황은 그리 자애로운 스승이 아니었던 만큼 아들이라고 봐주는 법이 없었다.
덕분에 이리 두 다리로 서 있을 수 있으니 어찌 보면 고마운 일이었다.
잠시간 말없이 서로를 노려보던 두 사람의 대치는 여인의 팔이 움직임과 동시에 깨졌다.
스릉―
남궁청운은 반사적으로 검을 뽑았다.
챙, 챙, 챙, 챙― 챙―
순식간에 오간 짧은 공방.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여자, 절대 아버지보다 하수(下手)가 아니야.’
검을 뽑은 순간부터 은은하게 전해져 오는 살기가 남궁청운의 온몸을 짓누르고 있었다. 맹수를 앞둔 초식 동물처럼, 몸이 본능적으로 무릎을 꿇으려 한다.
이를 악물어 본능을 거스르며 남궁청운은 다시 검을 들었다.
채앵!
여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아직 젊은데 제법이구나.”
생각이란 것을 할 틈을 주지 않는 여인의 짧은 치하의 말.
무너지지 않으려 버티던 남궁청운은 다음 순간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허탈하게 바닥에 쓰러졌다.
쿵!
그와 동시에, 여인의 정체에 대한 생각이 정리되었다.
‘아버지보다 하수가 아닌 젊은 여고수. 연이린과 친밀해 보이고, 말투가 웃어른 같았……!’
순간 떠오른 한 가지 가설.
“정신을 놓을 정도로 험하게 다루진 않았는데.”
여인의 의아한 목소리에 남궁청운은 후다닥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남궁청운이 다시 덤벼드는 것을 기다리고 있던 여인 앞에, 본능을 거스르지 않고 바로 무릎을 꿇었다.
“?”
“살려 주십시오!!”
“…….”
어색한 침묵과 함께 흉험하던 기운도 조용히 잦아들었다.
조용히 검을 거둔 여인이 물었다. 목숨이 위협받고 있다 생각했건만 이제 보니 검은 뽑지도 않은 채였다.
“너……. 남궁세가 사람이지?”
남궁세가의 직계와 검을 맞대 본 적이 있다면 남궁청운의 검법을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일 터.
눈썹을 치켜올린 여인이 물었다.
“남궁청휘를 찾아온 건가?”
“네? 아닙…… 아니, 맞, 아니, 아닙니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멍청한 대답이었다.
‘히익!!’
처음엔 본능적으로 부정했고, 생각해 보니 남궁청휘를 찾아온 게 맞아서 긍정하려다, 저쪽에서 말하는 ‘찾아왔다’가 단순히 ‘보러 왔다’는 의미는 아닐 거라는 생각에 부정해 버린 남궁청휘는 여인의 공격을 종이 한 장 차이로 간신히 피하며 내심 비명을 질렀다.
와르르 소리와 함께 남궁청운이 밟은 자리마다 죄 없는 기왓장들이 무너지며 시끄러운 소음을 만들었다.
“누구냐!!”
“!”
아래에서 들려오는 집주인의 비명에 쪽팔리고 당혹스러워 남궁청운은 겨우 몸을 추슬러 그 자리를 피해 달아났다.
퍽!
하지만 그가 도망칠 수 있는 한계는 기껏해야 옆집 지붕이 전부였다.
여인의 주먹이 뒤통수에 박히자 그대로 남의 집 지붕에 엎어져 버렸다. 남궁청운이 꼴사납게 바닥으로 굴러떨어지는 걸 겨우 면하고 지면에 착지하자, 그 앞에 여인이 귀신같이 나타났다.
심장이 떨어지는 감각이란 건 이런 걸 뜻하는 듯했다.
필사적인 남궁청운과는 달리 여인의 움직임에는 여유가 넘쳤다.
무덤덤하게 다가온 시선이 남궁청운의 얼굴을 뜯어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아는 사람과 닮은 것 같군. 남궁청휘보다도…… 남궁세가와는 어떤 관계지?”
“……제, 제가 누구와 다, 닮았습니까? 하. 하. 하.”
차마 정체를 밝히기 민망해 말을 돌리자 여인이 지금껏 꺼내지 않았던 검이 검집에서 스르르 빠져나오는 것이 보였다.
스르르릉―
등골에 싸늘한 한기가 흘렀다.
“남궁청운입니다! 남궁세가 셋째! 검황 셋째 아들! 청휘 셋째 형이요!!”
다급한 외침에 의아한 듯 여인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남궁청운? 죽었다고 들었는데.”
“실은 안 죽었거든요…….”
남궁청운이 운 좋게 살아남은 것과 집안이 후계자 문제로 다시 시끄러워지는 것이 싫어 숨기고 있었다는 사실을 설명하자, 여인의 날카롭던 눈매가 조금 부드러워지는 듯했다.
방금 전까지는 남궁청휘의 목숨을 노리러 뒤를 밟는 세가의 무인 정도로 생각한 게 아닐까.
“혈교에 대한 소문도 들었고, 동생 소식이 궁금해서 찾아왔는데 마침 청휘가 있어서 몰래 뒤를 따른 것뿐입니다. 결코, 불순한 의도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흐음.”
남궁청운의 말이 그럭저럭 미더웠는지 여인을 중심으로 한 오싹할 정도로 날카롭던 주변 공기가 어느새 조용히 가라앉더니 아까까지의 적막이 거짓말처럼 주변에서 작은 새와 벌레의 소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후우. 살았다.’
여인에게 공격당하는 동안 그 사실조차 느끼지 못했던 남궁청운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간신히 숨통이 트인 남궁청운이 소심하게 말을 건넸다.
“저기, 질문 하나만 해도 됩니까?”
“해라.”
“혹시 검성……이세요?”
“…….”
“…….”
다소 긴 침묵이 이어지고 나서야 여인은 입을 열었다.
“알 거 없다.”
“……네에.”
아니라곤 안 하네.
‘말주변은 없는 사람이군.’
그간 말로만 들어온 검성을 실제로 만난 첫 감상이었다.
‘영락없이 연이린 또래 여인이라 생각했는데. 반로환동의 고수라니.’
강호에서 만나기 힘든 인연 아닌가.
어떻게든 말을 붙여 보려 고심하던 남궁청운은 곧 다가오는 누군가의 기척에 얼른 몸을 일으켰다.
검성이야 뭐 검성이고. 배분도 아버지뻘이시니 민망할 것도 없지만, 다른 놈들 앞에서까지 추태를 보일 순 없었다.
“한참 찾았습니다. 이런 곳에 계셨…… 남궁 삼공자?!”
“아.”
검성을 찾아온 이는 청운진인이었다.
“이럴 수가, 살아 계셨군요!”
남궁청운을 발견한 청운진인은 밝은 얼굴로 그를 반겼다. 그리고 그의 뒤를 따라온 이도.
“무슨 일이…… 세상에! 무사하셨군요!”
“어, 음…….”
얜 또 왜 이렇게 열렬하게 기뻐하고 그래.
남궁청운을 발견한 연이현은 마치 자신의 혈육이라도 찾은 양 기뻐하며 남궁청운의 안부를 살폈다.
‘그래도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에 이렇게 기뻐하는 사람을 보니 확실히 나쁘진 않군.’
세가 놈들 중엔 죽었거나 살았거나 걱정하는 놈이 손에 꼽던데.
세가 내의 인성 교육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한 남궁청운의 손을 붙잡은 이현이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청휘…… 동생분은 이미 만나셨습니까? 이 사실을 알면 무척 기뻐할 텐데요.”
“어, 음, 그게.”
숨기고 있다고 말하면 이놈은 화낼 거 같았다.
괜히 얼버무리고 있는데 다행히 청운진인이 먼저 다른 것을 물었다.
“그런데 이런 데서 두 분이 뭐 하고 계셨습니까? 분명 안면이 없는 사이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이자가 이린을 쫓고 있어서 붙잡아 심문하던 중이었다.”
그리고 검성, 연화문의 가감 없는 대답에 청운진인과 연이현의 차가워진 시선이 남궁청운을 향했다.
“…….”
“…….”
“야, 아냐. 아니라고. 네 동생 말고 내 동생! 내 동생 보는 중이었어!”
방금 전까지 몹시 훈훈한 분위기였던 만큼 급 서러워진 남궁청운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부인했다.
“두 사람이 지금 함께 있을 테니 그럴 만도 하군요.”
필사적인 변명이 통했는지 연이현과 청운진인은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청휘가 여행 내내 이린 곁에서 좀처럼 떠나지 않은 덕분에 더욱 설득력이 있었다.
그리고 주변을 다시 한번 둘러본 이현이 의아한 듯 물었다.
“그런데 이린과 남궁 소협은 어디 있습니까?”
“아.”
“…….”
남궁청운과 연화문 두 사람이 침묵과 함께 텅 빈 호숫가를 바라보는 모습만으로도 대강 어찌된 일인지 알 것 같은 청운진인과 연이현은 허탈한 한숨을 내쉬었다.
연화문도 남궁청운을 제압하는 데 정신이 팔려 아이들을 잊고 있었다는 사실이 부끄러운 듯 옅은 신음을 흘렸다.
제 혈육들을 걱정하는 이들을 보며 청운진인이 애써 웃는 얼굴로 달랬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다들 어지간해서는 신변이 위험해지기도 힘든 사람들 아닙니까. 이젠 어린애도 아니고 별일 없을 겁니다.”
콰앙!!
그런 그들의 바람을 비웃기라도 하듯 아까 두 사람이 향한 방향에서 폭음이 들려왔다.
마지막으로 목격된 자리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긴 했으나 이린과 청휘 두 사람의 경공 실력을 생각하면 이상하지도 않았다.
두 사람이 얽혀 있지 않을 거라 덮어놓고 믿을 정도로 해맑은 이들이었다면 지금껏 살아서 이 자리에 있지도 못했을 터.
“어휴.”
연화문을 제외한 일동은 몇 년 전 동정호에서 겪은 파란만장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힘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찾으러 다니는 수고는 덜었을지도 모르겠다며 달려 나가는 연이현의 옆에서, 오랜만에 만난 남궁청운이 시비를 걸었다.
“네 동생 뭐 이상한 거 씐 거 아니냐? 전에도 그러더니 어떻게 가는 데마다 사고지?”
네 동생은 왜 이렇게 사고 치고 다니는데?
“우리 애가 사건에 휘말릴 때는 대부분 대협의 동생분도 함께였던 걸로 기억합니다만?”
댁의 동생은 안 그런 거 같죠?
방금 전까지의 훈훈한 분위기가 거짓말처럼 묘해진 둘 사이의 공기에 연화문이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침묵하는 동안, 뒤에선 청운진인이 웃음을 참으며 달리고 있었다.
“폭음(爆音)이 들렸는데 혹시 당 소저가 한 일은 아닐까요?”
“글쎄, 아까 마지막으로 봤을 때 그 아이는 두 사람과 따로 행동하는 듯했다.”
당자혜는 전에도 위험천만한 폭발물을 들고 다녔으니 가능성이 있었다.
청운진인이 제기한 가능성에 연화문이 고개를 저었다.
“그럼 당 소저만 연루된 일일 가능성도 있겠군요.”
“뭐, 가 보면 알겠지.”
두 사람은 폭약 같은 위험 물질을 들고 다니지 않으니 원인은 다른 곳에 있을 터.
경공으로 폭음이 들려온 곳으로 달려가니 불타고 있는 건물이 보였다.
불타고 있는 건물에서 사람들이 뛰쳐나오고, 불을 끄려는 이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어 주변은 몹시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예상에서 그리 크게 빗나간 그림은 아니었다.
조금 특이한 점이 있다면 건물이 한쪽만 불타고 더 이상 번지지 않고 있다는 것 정도?
“뭐야, 어디 수로채라도 털었나 했더니 그냥 주루 아냐?”
남궁청운이 심드렁하게 물었다.
동정호 주변에는 주루가 많았고, 주루에서는 언제나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는 법이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거지?”
“글쎄요. 일단 사람들 태도를 봐선 원인을 아는 이는 없어 보입니다만.”
그렇게 답하면서도 이현의 속은 편하지 않았다. 누이동생의 본의 아닌 방화 전적을 알고 있는 탓이었다. 물론 이유 없이 저지른 적도 없고, 본인이 다칠 가능성도 한없이 낮다지만 그렇다고 웃으며 장려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술렁이는 가운데 불타고 있는 건물 뒤편, 사람들이 다가가지 못하고 있는 창문에서 누군가가 담장으로 뛰어내리는 모습이 일행의 시야에 들어왔다.
“일단 가 보죠.”
연기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일반인의 시선으로는 잡을 수 없을 만큼 빠른 경신술의 주인이라면 일행이 찾는 이일지도 몰랐다.
그곳에서 발견한 이는 두 사람, 아니 세 사람이었다.
사내 하나와 여인 하나.
사내의 뒤에 있는 여인은 분명 그들이 찾던 연이린이었으나 그 옆에 있는 사내는 남궁청휘가 아니었다.
그와 마주친 이들은 하나같이 묘한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어?”
“아.”
“쯧.”
“……!”
각기 다른 반응이었으나 옆에 있는 이들의 태평한 태도와 대조적으로, 사내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본능적으로 굳어 버린 남궁청운의 몸에선 식은땀이 비 오듯 흐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