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Goddess RAW novel - Chapter 47
47.
“그럼 너 이린이랑 혼인 못 하겠구나.”
“호, 혼인이라뇨, 이모님!”
“어머, 지금 계속 약혼 얘기하고 있었는데 뭘 새삼 놀라니? 생각해 보렴. 그 집에서 위험한 집으로 시집을 보내겠니? 연가장에서 딸을 얼마나 아끼는지는 그 오빠만 봐도 알겠던걸.”
청휘는 충분히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고도 자신을 구해 주었던 이현이 이린과 붙어 있을 때는 자신을 살짝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것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중독되었던 자신의 몸을 살펴 주었던 사람이 이현이었으니 아마 처음부터 청휘가 여장을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안 그래도 연가장이 남궁세가랑 썩 좋은 관계는 아니긴 한데……. 아닌가? 남궁세가에선 좋아할 거 같기도 하고?”
“네?”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튼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니 나도 일단 네 엄마를 설득해 보마. 네가 좋아하는 여자애가 생겼다는 것도 포함해서.”
“이모님!”
“논리적인 설득에 실패하면 감정적으로 설득하는 것도 방법 중 하나란다. 아가야.”
그리고 나중에 결혼하고 싶어지면 너네 집부터 어떻게 하도록 하고.
어린아이에게는 좀 과한 과제였지만, 그런 집에 태어난 것도 본인의 운명이었다.
“좋아하는 여자애를 위험하게 해서야 그 옆에 당당하게 설 자격이 없단다. 강해지렴.”
“네.”
청휘는 냉정하고도 따스한 이모의 충고에 주먹을 꽉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의 자신은 어쩌면 이린보다 약할지도 몰랐다.
적어도 다시 만날 때에는 이번처럼 도움만 받는 것이 아닌 도움을 줄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싶었다.
* * *
이린은 아직도 붉은 얼굴에 손으로 부채질을 하고 있는 이현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복잡한 생각에 젖어 있었다.
“왜 그렇게 봐?”
“음. 아무것도 아니야.”
최소 이모뻘인 제갈윤위의 품에 안기고 얼굴이 붉어진 오빠를 보며 눈을 깜빡이던 이린은 한 가지 유력한 결론을 도출해 내는 데 성공했다.
“오빠의 취향은 유부녀였구나.”
“뭐, 아니야!!!”
화들짝 놀라서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른 이현은 곧 이성을 찾고 차분하게 부정했다.
“린아. 그런 무서운 오해는 하지 말아 줄래?”
“그럼 연상 취향?”
“그,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익숙하지 않아서 좀 놀란 거뿐이야.”
“오빠. 부정하지 않아도 괜찮아. 이해해.”
뭔가 설명을 하려다가도, 달관한 듯한 표정으로 자신의 어깨를 두드리며 고개를 젓는 여덟 살 이린의 얼굴을 보니 스스로가 바보 같아진 이현은 구차한 설명을 포기하고 힘없이 늘어졌다.
‘어쩐지 연애 얘기가 하나도 안 돌더라니……. 엄마가 일찍 돌아가신 탓일까.’
워낙에 일찍 돌아가셔서 이린에게는 그렇게 기억에 남은 게 없지만 이현은 아닐 터였다.
“린아, 오빠를 이상하게 오해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는데…….”
“괜찮아. 오빠가 새언니로 어떤 사람을 데려와도 나는 이해할 수 있어!”
오빠 성격에 유부녀를 만나진 않겠지. 나는 오빠를 믿어.
“아니야아……. 오빠 좀 믿어 줘. 마련야장이잖아. 오빠도 동경하고 있었거든?”
“응~”
성의 없는 이린의 대답에 이현은 얼굴을 감싸며 괴로워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오빠 취향이 윤휘 언니였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네.”
“그건 좀. 그런데 린아, 윤휘가 그렇게 좋아? 자영이나 민아 대할 때랑 다르네.”
이현의 말에 이린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더니 말했다.
“자영은 아무래도 좀 거리감이 있고, 민아는 너무 어리지. 윤휘 언니는 무공을 익혀서 같이 놀러 다니기도 좋고, 말도 잘 통하고, 예쁘기도 하고. 그렇게 예쁘니까 보고 있으면 막 가슴이 두근거리는 거 같기도 하고…….”
“…….”
뭔가 위험 수위로 올라가고 있는 여동생의 발언에 이현의 미간이 미세하게 찌푸려지기 시작했다.
“린아야.”
“어, 응. 왜?”
“우리 린아, 나중에 마음에 드는 사내가 생기면 꼭, 꼭, 꼭 오빠한테 먼저 보여 줘야 한다?”
“으응. 근데 내 혼처는 아빠랑 오빠가 정하는 거 아니야?”
이 시대의 보편적 혼인 방식은 중매였고, 연가장 정도면 집안을 따질 만도 했다. 무림인들 중에는 자유롭게 연애를 하는 경우도 제법 있었지만 정략결혼도 많았다.
이린도 그때 가족들을 모두 잃지 않았다면 20대 초반쯤에 아버지가 정해 준 사람과 혼인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워낙에 장원에만 있어서 만나는 사람도 없었고.
“린아가 과연 순순히 아버지랑 내가 정해 주는 사람과 혼인을 할까?”
예전의 자신이라면 그랬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어떨까.
“글쎄, 그런데 우선 아빠랑 오빠 눈에 차는 신랑감이 존재할까?”
당시에도 1등 신랑감 중 부동의 1위는 오라버니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잘생겼지, 성격 좋지. 무공도 뛰어나고, 학식도 깊고, 집안도 좋고, 돈도 많은, 어디 하나 빠지는 데가 없는 신랑감이었다.
“없으면 아빠랑 오빠랑 평생 살아야지. 오빠는 오빠보다는 잘생기고, 성격 좋고, 문무를 겸비하고, 능력도 있고, 우리 린아를 평생 아껴 줄 수 있는……!”
말도 안 되는 조건을 늘어놓던 이현의 목소리가 조금 격앙되더니 뭔가 울컥한 듯 끊겼다. 목소리가 끊기는 것을 본 이린이 당황해 이현을 달랬다.
“아니, 아직 안 가! 안 간다고! 울지 마, 오빠. 응?”
“업어 주지 않으면 잠도 안 자고 빽빽 울고, 매일같이 기저귀 갈아 주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이렇게 크다니……. 린아 시집가면 어떻게 살지…….”
“그렇게 혼롓날 신부 엄마가 해야 할 것 같은 소리를 하기엔 너무 이르잖아, 오빠.”
안 되겠어. 오빠한테 빨리 짝을 찾아주든가 해야지 원.
하지만 이린이 강호에 나와 뭔가를 하려면 적어도 17세, 앞으로 8, 9년은 있어야 했다. 예전의 기억을 떠올려 보면 어차피 그때도 오빠는 연애의 ㅇ자도 안 보이는 인생을 살고 있었지만.
‘혈교만 아니었으면 오빠 장가보내는 게 1순위인데.’
예전에 오빠가 너무 혼인 생각이 없어 보여서 다들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게 아닐까 걱정했던 걸 생각하면 차라리 긍정적인 발견이었다.
“나중에 때 되면 괜찮은 데릴사윗감 찾아서 하나 잡아 와 볼게.”
“데릴사위?”
“응. 오빠 말대로 가능한 잘생기고, 성격 괜찮고, 일 잘할 거 같은 애로.”
순간 머릿속에 남궁청휘의 얼굴이 스쳐 지나가며 가슴이 따끔했지만 이린은 애써 무시했다. 지금 떠올려 봤자 소용없는 얼굴이었다.
진심으로 슬퍼 보이는 오빠를 보고 있으니 또 안쓰러운 마음에 이린도 눈물이 나올 거 같았다. 하긴 가족이라고는 셋뿐인데 하나만 없어져도 쓸쓸한 게 당연했다.
혼자 장원을 지켜 왔던 이린은 그 기분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덕분에 집에 혼자 있을 아빠 생각에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이 집 식구들이 대체로 감수성이 좀 예민했다.
그리고 그건 아이들의 아버지인 연적훈도 마찬가지였다.
분명 장사에서 보내온 서신들을 보고 이 겁 없는 막내딸 혼쭐을 내야겠다고 다짐했건만, 아이들이 비천산까지 돌아오는 며칠 사이에 화는 눈 녹듯 사라져 버렸다. 그새 또 오는 동안 별일은 없겠지 하는 걱정으로 바뀌어 버린 연적훈은 마차가 보인다는 소식에 하던 일도 제쳐 두고 뛰어나온 상태였다.
“아빠!!!!”
“아이고 우리 딸!!”
“아빠 보고 싶었어!!”
“아빠도 우리 린아 보고 싶었어.”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품에 달려드는 이린을 꼭 끌어안고 어화둥둥 ‘우리 딸, 집 떠나더니 얼굴이 반쪽이 됐네.’ ‘그러게 집 떠나면 고생이야, 아빠가 린아 좋아하는 음식 만들어 놓으라고 했어.’ 어쩌고저쩌고하며 방실방실 웃고 있는 아버지를 보던 이현이 해탈한 듯한 얼굴로 말렸다.
“어지간히 하세요.”
걔 오는 동안 하루 세 끼에 간식, 야참까지 꼬박꼬박 챙겨 먹였어요.
연적훈은 아들의 말은 못 들은 척 오랜만에 이린을 안아 들고 빙글빙글 돌았다.
“아들내미 키워 봤자 소용없어. 좋아하는 여자 생기면 곧 애비는 본 척도 안 할걸.”
아마 몇 년 후면 그 본 척도 안 하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시게 될 텐데요.
이린은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말을 속으로 삼켰다.
아이들과 이렇게 장기간 떨어져 있다 다시 만난 것이 처음이라 다소 들떠 있던 연적훈은 자신이 뭔가 잊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키이-?
끼이-?
바닥에 발도 못 디디고 제 아빠의 품에 안겨 있는 이린의 품에서 나온 작은 뱀 두 마리와 눈이 마주친 순간 연적훈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증식했어??”
“……아니, 그거 아냐.”
뱀은 지렁이처럼 반으로 자른다고 두 마리가 되지 않아요, 아빠.
청아, 홍아를 한 손에 하나씩 붙잡아 무자비하게 가방 안으로 밀어 넣은 이린은 저 뱀들의 특수 능력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연적훈을 안으로 잡아끌었다.
* * *
“그러니까 너희들 말이야.”
소녀의 목소리가 동굴 안에 울려 퍼졌다. 동굴 안은 안개로 가득해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키이-
키이-
“허물벗기 전에 뭔가 미리 전조를 좀 주면 안 되겠니?”
끼이?
끼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지만 이미 이 아이들이 사람 말을 다 알아듣고 있다는 걸 아는 이린의 입장에서는 가증스러워 보일 따름이었다.
지난 2년간 저 영악하고 영약(靈藥)한 뱀들을 키우면서 이린은 한밤중에 갑자기 방 안이 빙고(氷庫)가 되거나, 밥 잘 먹다 갑자기 탁자에 붙은 불 때문에 혼비백산해 물을 끼얹어 식사를 망치는 등의 다채로운 경험을 해야 했다.
‘홍아는 영약을 좀 더 늦게 먹일 걸 그랬나.’
이린에겐 영약 덕분에 쌓인 내공도 있어 추위는 어느 정도 견딜 수 있지만 불이 나는 건 정말 감당하기 어려웠다. 물론 청아 덕분에 금방 진화되긴 하지만 건조한 날 바람 때문에 물건에 옮겨 붙어 불씨가 커지면 큰 참사로 이어질 수도 있는 일. 덕분에 이린의 거처 여기저기에는 물동이가 놓여 있을 정도였다.
아이들이 아무데서나 힘자랑을 하는 게 아니라 허물을 벗으면서 일어나는 현상이라 혼을 내기도 어렵고……. 아직 어려서 허물을 자주 벗기 때문에 한동안 이린은 뱀들을 데리고 자진 유배 가듯 동굴로 피신하는 일이 많았다.
오늘도 한동안 잠잠하던 홍아에게서 또 허물이 벗겨질 기미가 보이자 청아까지 데리고 동굴로 들어온 참이었다. 동굴 안은 불에 탈 것도 없고 차갑고 습하니 불이 번질 염려가 없었으니까.
“그런데 왜 내가 안 볼 때만 허물을 벗는 거야!”
끼이-
부끄러운 거야, 뭐야.
솔직히 청아에 비해 홍아는 여러모로 키우는 데 까다로웠다. 추위에 약해서 겨울에는 온수에 넣어 주고 밤에는 추워하니까 달군 돌에 이불까지 덮어 줘야 했다.
지금도 이린이 석실 안에 모포를 깔고 따뜻한 물을 끓이는 사이 홍아는 어느새 허물을 벗은 상태였다.
습기가 많은 동굴 안이라 홍아가 만든 불길은 금방 잠잠해졌다. 남은 불은 이제 익숙해진 청아가 알아서 끄고 있어 문제는 없었지만 이린은 뭔가 억울했다.
‘허물 벗는 거 보고 싶었는데!’
둘 다 마치 이린이 눈을 뗀 사이를 틈타 허물을 벗는 것 같달까.
“어쨌든 허물을 벗었으니 한동안은 문제없겠지.”
안절부절못하며 기다릴 필요가 없어진 이린은 허탈한 발걸음으로 석실로 들어가 자신이 깔아 놓은 모포 위에 풀썩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