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Goddess RAW novel - Chapter 5
5.
“기다려요, 청휘.”
멈춰 서 있던 만큼 이린의 다리는 날래게 움직였다. 보조를 맞춰야 하는 이가 없으니 거칠 것이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뒤쪽에서 무수한 발걸음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지만, 이린은 이를 악물고 계속 달렸다.
야명주가 있는 동굴 안의 길은 복잡하지 않았다. 동굴을 나와 도착한 곳이 어디인지 깨달은 이린은 망설임 없이 달렸다.
이곳은 자신들이 머물던 공동과 비슷한 구조의 텅 빈 공동이었다. 그렇다면 분명, 이곳에도 비급이 있던 그 석실이 있을 터.
공동 중앙에 마치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 같은 석실이 보였다. 석실로 가기 위해 동굴 호수를 건너려는 순간, 무언가가 물속에서 솟구쳐 오르는 것이 보였다.
촤아악―!!
“―!!”
거대한 물고기 형상을 한 무언가가 이린을 향해 성인 서너 명 정도는 한입에 삼킬 듯한 거대한 입을 벌리고 있었다.
“교룡(蛟龍)?!”
놀랄 틈도 없었다. 이린은 물고기를 피해 벽을 타고 달렸다.
날개라도 달렸으면 모를까 물고기였다. 몇 번이나 입을 뻐끔거리며 달려들었으나, 이린을 잡지 못하고 번번이 물보라만 일으켰다.
탓!
누군가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면 입을 다물지 못할 광경이었다.
팔랑팔랑 날아다니는 나비처럼 날아오른 이린은 거대한 물고기의 머리를 딛고 공동의 중앙으로 뛰어내렸다.
촤아악―!!
쿵― 쿵― 쿵―.
얼마 만에 본 건지 모를 새로운 먹잇감을 놓친 것이 분한지 동굴 벽에 머리를 박는 거대 물고기 탓에 동굴이 흔들렸다. 저런 것이 있다니. 이곳의 호수는 대체 얼마나 깊은 걸까.
‘교룡이라 부르기엔 모자라 보이는데, 그냥 좀 오래 묵은 영물인가.’
저런 것을 진즉에 발견했다면 좋았을걸. 남궁청휘와 함께 잡았다면 내단 걱정은 없었을 텐데. 뒤늦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서둘러 석실로 들어섰다.
쿵쿵 소리가 여전히 동굴을 울리고 흙부스러기가 떨어지고 있었지만, 그걸 신경 쓸 틈조차 없었다. 안쪽으로 들어가자 이린이 기억하는 석실과 유사한 구조의 석실이 나타났다.
“여기가……!”
이 안에 대체 무엇이 있기에 저들이 이토록 집요하게 이곳을 찾는지는 몰라도, 이린은 그들에게 그 물건을 온전히 넘겨줄 생각이 없었다. 검을 쥔 손에 자연히 힘이 들어갔다.
다급하게 들어선 이린의 눈에 평범해 보이는 석조상과 서책들, 무엇이 들어 있는지 모를 상자들이 보였다. 석조상을 제외하면 그들이 지냈던 공동의 석실과 거의 유사해 보였다.
‘비급과 영약들인가?’
어쩌면 지금 눈앞에 있는 것들은 평범한 사람도 단숨에 고수로 만들어 줄 수 있는 영약과 비급일지도 몰랐다. 그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가족도 친구도 팔아 버릴 수 있는 자들이 세상에 넘쳐날 정도의.
좀 더 일찍 발견했다면 좋았을걸.
하지만 이린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가 버린 자들의 손에 넘어갈지도 모르는 지금은, 서둘러 처분해야 하는 쓰레기에 지나지 않았다.
이린은 품속에서 아껴 두었던 화접자(火摺子)를 꺼내 불을 붙여 던졌다. 동굴 안답지 않게 건조한 석실 안에서 불이 번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리고 정체 모를 석상을 향해 검강을 두른 검을 휘둘렀다.
화르르륵―
파스스……!
불씨가 넘실대는 것과 동시에 석상이 무너져 내리며 돌가루가 날렸다. 석상에 걸려 있던 것인지 반짝이는 작은 금패(金牌)가 돌가루와 함께 떨어졌다.
‘금패?’
촤아악―!!!!
무의식적으로 정체를 알 수 없는 보석이 박혀 있는 금패를 손에 쥔 순간, 또다시 물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이곳으로 건너오려 하고 있었다. 마음이 급해진 이린은 남아 있는 것들을 모두 조각내어 불길에 던졌다.
고오오오오오오―.
단말마와 같은 듣기 싫은 거대한 소리와 함께, 입구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 피투성이가 된 남궁청휘가 서 있었다.
“…린…….”
“청휘!!”
이린이 청휘의 이름을 외침과 동시에, 그의 심장을 관통하고 있던 검이 빠져나갔다.
이린의 눈앞에서 청휘의 몸이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칼이 뽑힌 곳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피투성이로 쓰러져 피를 토하면서도, 청휘의 눈빛은 이린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안… 돼…….”
시간이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그의 몸이 무너짐과 동시에 자신들을 쫓던 흑의인들이 석벽 안으로 들어왔다.
불타고 있는 내부를 보며 당혹과 분노를 감추지 못하는 자들을 향해 이린은 비릿하게 웃었다.
‘네놈들에게, 아무것도 넘겨주지 않을 거야.’
황망해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니 그저 웃음만 흘러나왔다.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지만, 이린은 깨닫지 못했다.
어떻게든 불을 꺼 보려 다가오는 흑의인들의 앞을 막아선 이린의 검이 마지막까지 그들을 방해했다.
“어서 저년을 죽이고 불을 꺼라!!”
누군가의 지시에 흑의인들이 이린에게 달려들었다. 더는 잃을 것조차 없는 이린의 두 눈에 귀기(鬼氣)가 흘렀다. 죽음조차 잊은 검 끝은 더욱 날카로워졌다.
모든 집착을 내려놓은 순간, 자신에게 부족했던 무언가가 채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런 때에 깨달음을 얻다니 얄궂기도 하구나.’
청휘는 늘 이린에게 경험이 부족한 것이 아쉽다 한탄하며 많은 것을 가르쳐 주려 애썼다. 하지만 역시 실전만 한 경험은 없었던 걸까.
오늘 하루 셀 수 없이 싸우면서 점점 더 정교해진 이린의 검은 조용히 흑의인들의 숨통을 끊었다.
생사경을 넘나드는 동안 이린의 검은 한층 더 성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끊임없이 달려드는 살수들을 상대하기에 이미 몸도 마음도 지쳐 있었다.
달려드는 자들의 숨통을 모조리 끊어 놓았지만, 그 끝은 정해져 있었다. 그나마 좁은 통로에 쌓이는 시체들 덕분에 시간을 끌 수 있었을 뿐이었다. 모든 것이 불타 없어질 시간을.
불길을 등지고 온통 똑같은 시커먼 복장의 사내들을 끊임없이 베었다. 이린은 자신이 지금껏 대체 몇 명이나 죽인 건지도 알 수 없었다.
무아(無我)의 상태에서 그저 하염없이 검을 휘둘러 대던 팔에 더 이상 감각이 느껴지지 않을 무렵, 결국 이린은 빈틈을 내주고 말았다.
푸욱!!
검인지 창인지 아니면 암기인지, 무엇인지도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이린의 복부를 꿰뚫었다.
불쏘시개로 지져지는 듯한 끔찍한 고통에 도리어 현실감이 없어지기라도 한 걸까. 걸치고 있던 흰 담비 갖옷에 붉은 피가 튀는 것을 보며 비명보다도 먼저 한탄이 터져 나왔다.
‘제갈 공자에게 받은 옷인데 어쩐다.’
귀한 옷인데 결국 이리 칼에 찢기고 피가 묻었으니. 마지막 순간, 그는 이제 자신에게는 필요 없다며 제 옷을 이린에게 넘겨주었다.
결국 이리 못 쓰게 되었으니 화를 낼까. 아니면 끝까지 쓸모가 있었으니 다행이라며 웃을까.
아직도 눈앞에 생생했다. 자신이 저들을 막을 테니 도망가라며 웃던 그의 마지막 모습이.
몰래 숨겨 온 벽력탄을 터트려 청휘와 이린을 동굴에 갇히게 만든 주범이었지만, 폭사(暴死)를 무릅쓰고 목숨을 던져 두 사람을 살린 생명의 은인이기도 했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와중에도 이린의 검은 멈추지 않았다. 어차피 이길 거란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이곳에서 살아 나갈 수 있을 거란 생각도. 다만…….
‘조금만 더, 흔적도 없이 모두 불타 버릴 때까지만이라도.’
복부를 관통한 흉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이린은 천근만근 무거운 몸을 움직여 마지막까지 자신에게 덤벼드는 자들의 목에 검을 찔러 넣었다. 흑의인들 역시 점점 무너지는 이린의 몸에 화풀이하듯 칼을 휘둘러 댔다.
“젠장! 독한 계집 같으니!!”
푸욱! 푹!!
가슴과 등에 몇 개인지 모를 관통상과 함께 이린의 몸은 멈췄다. 몸을 지탱하던 그들의 칼이 뽑혀 나가고, 마침내 이린 역시 자신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 웅덩이 위로 천천히 무너졌다.
챙그랑―.
이린의 검 역시 피 웅덩이 위로 떨어졌다.
‘아버지의 검.’
살아 나가 복수를 도모하는 것을 포기하고, 이 길을 택한 것이 과연 잘한 일일까? 과연 이게 의미 있는 일이었을까?
스르륵― 툭.
기울어진 몸을 따라 가슴속에 품고 있던 작은 병이 달린 목걸이가 흘러내렸다.
‘당자혜…….’
홀로 추적자들을 막겠다고 남으며 마지막으로 이린에게 준 물건이었다.
당가(唐家)의 은원은 누구보다 깊고 분명한 것. 언젠가 목숨보다 복수가 중해졌을 때 사용하라 속삭이던 사천당가의 여인은 마지막까지 이린을 보며 웃었다.
흑의인들은 쓰러진 이린을 걷어차고 석실 안으로 들어갔지만, 남은 건 이미 불에 탄 잿더미와 돌 부스러기뿐이었다. 그들은 그 사실을 확인하고도 불길을 잡으려 애썼다.
병이 깨졌는지 희미하게 퍼져 나오는 냄새에, 움직여지지 않은 얼굴이 애써 미소를 만들려 했다.
곧 사천당문(四川唐門) 비전(秘傳)의 독이 이곳에 퍼질 것이다. 이 석실에 들어온 이들 중 살아 나갈 이는 없을 테지.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만약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땐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을까…….’
아버지, 오라버니, 그리고…….
흐려져 가는 의식 사이로 쓰러져 있는 청휘의 모습이 마지막으로 눈에 들어왔다.
이린이 눈을 감는 순간, 마지막까지 이린의 왼손에 들려 있던 금패가 피에 젖어 반짝였다.
그것이 마지막 기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