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Goddess RAW novel - Chapter 53
53.
활기찬 목소리와 함께 다다다다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숫자는 3명, 모두 어린아이였지만 달려오는 속도는 각기 달랐다. 가장 기운차게 뛰어오는 여자아이가 방금 전 들려온 목소리의 주인공인 듯했다.
나이는 이린보다 조금 위일까? 외모 탓도 있어 비교적 차분한 분위기의 이린과는 대조적으로 그 나이 대 아이다운 발랄함이 눈에 띄는 소녀였다.
‘저 정도면…… 최소 서민, 아니 중산층 가정 석 달 생활비 정도는 나올 거 같은데?’
사치품에는 비교적 어두운 편인 이린의 눈에도 소녀가 몸에 걸치고 있는 옷이며 작은 장신구 하나하나가 범상치 않게 들어왔다.
머리에는 혼수로나 쓰일 듯한 커다란 진주를 중심으로 자개와 작은 진주들이 오밀조밀 원을 그리고 있는 머리장식이 반짝거리고 있었고, 목에는 투명한 백수정과 금빛 침수정이 섞인 목걸이가, 허리춤에는 옥패와 호박에 금실 자수를 넣은 비단 주머니로 만든 노리개가 흔들리고 있었다. 보석류에는 그리 정통하지 않은 이린의 눈에도 쉽게 구할 수 없는 상등품들로 보였다.
옷도 당연히 고급스러운 광택과 자수들이 한눈에 보이는 데다, 무엇보다 겨우 열서너 살 되었을까 싶은 어린아이를 저렇게 진귀한 것들로 휘감아 놓은 것 자체가 범상치 않았다. 아마 길을 걸으면 호위도 줄줄이 따라다니겠지.
절대로 평범한 집안 아가씨는 아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간 강녕하셨어요?”
“오랜만이에요. 사린은 언제 봐도 기운이 넘치는군요. 나도 좀 나눠 받고 싶은 정도예요.”
“필요하시면 얼마든지 나눠 드릴 게요!”
화기애애한 대화 중 제갈윤정의 입에서 나온 이름을 들은 순간, 이린은 숨을 삼켰다.
진사린.
황룡전장의 여식으로 남궁청휘의 약혼녀가 될 소녀였다. 어쩌면 지금 이미 약혼한 상태일지도 몰랐다.
‘아니, 하지만 보통 여자아이에게 약혼녀가 있는 아들의 친구가 되어 달라고 하지는 않으니까.’
아직 어린애라지만 역시 그건 좀 이상하잖아?
……아닌가? 정말 어린아이로 취급하면 가능할까?
“청휘는요?”
“아쉽게도, 청휘는 지금 폐관수련 중이랍니다. 나오기 전까지는 만날 수 없어요. 미안해요.”
“네!? 폐관수련이요? 그거 동굴 같은 데 갇혀서 무공수련만 하는 거 아닌가요?”
“동굴에 갇힌 건 아니지만 사린이 생각하는 그게 맞아요. 모처럼 찾아왔는데 아쉽네요.”
“갑자기 왜요? 청휘는 아직 열두 살인데 그런 걸 하기엔 좀 이르지 않나요?”
“으음. 요즘 좀 반항기가 왔는지 가주님에게 반항을 좀, 해서……라고나 할까.”
잘 아는 사이인지 친근하게 매달리는 진사린을 달래던 제갈윤정은 곤란한 듯 이린을 보며 웃었다. 오늘 처음 만난 이린에게 집안 사정을 내보이는 것이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진짜 반항했다고 어린 아들을 폐관수련 보낸 거야?’
이린이나 이현이 기침만 해도 심각한 얼굴로 의원을 부를까 고민하는 아버지가 있는 이린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집안이었다.
이린은 습관처럼 들고 다니던 가방을 만지작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상하게 손가락이 떨려서 가만히 있기 힘들었다.
어쩌면 못 만난 게 다행인지도 몰랐다.
‘내가 기억하는 남궁청휘란 사람은 이제 없는 사람이지. 게다가 저렇게 약혼녀도 버젓이 있고. 괜히 만나서 이상한 기분이 들면 곤란할 거야.’
지금의 남궁청휘는 이린에게 호의를 품고 있던 진중한 청년이 아니라 아버지에게 반항도 하는 세가의 막내 도련님이었다.
저도 모르게 몸에 기운이 빠졌다. 어쩌면 자신은 생각보다도, 남궁청휘를 만날 걸 기대하고 있었던 걸까. 우울감에 빠지려던 스스로를 다잡으며 표정을 신경 쓰던 이린은 어느새 자신에게로 시선을 돌린 진사린과 눈이 마주쳤다. 아직 남궁청휘를 만난 적도 없으니 죄지은 것도 없는데 가슴이 뜨끔한 이린의 어깨가 움찔 굳었다.
“그런데 얘는 누구예요?”
굳어 있는 이린과 대조적으로 반짝이는 소녀의 눈동자에는 호기심이 가득했다.
“호남 연가장의 장주이신 군자검에 대해 들어 본 적 있지요? 그분의 따님이랍니다.”
“안녕하세요. 연이린이에요.”
“그리고 이쪽은…….”
이린이 애써 웃으며 인사를 건네자 어느새 제갈윤정에게서 떨어진 진사린이 이린의 눈앞에 다가왔다. 그러고는 거침없이 이린의 손을 붙잡고 제갈윤정이 소개할 틈도 주지 않고 말을 걸었다.
깜빡이지도 않고 이린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눈동자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어머, 와, 너 정말 예쁘다. 난 진사린이야! 열두 살! 너는 몇 살이야?”
“고, 마워. 저기, 열 살인데……요.”
“꺄아, 귀여워! 그럼 이린이라고 부를까? 아니다, 애칭으로 부를래! 뭐가 좋을까? 아린? 린린? 소린? 아니, 린매(妹)는 어때? 나는 린 언니라고 부르고! 와아, 그러고 보니 나랑 이름 비슷하잖아? 우리 이러니까 자매 같지 않아? 남궁세가에는 언제 왔어? 여기는 언제까지 머무를 거야? 오늘 떠나는 건 아니지? 응? 응? 우리랑 같이 놀자! 그래도 괜찮지? 저기, 무슨 놀이 좋아해? 좋아하는 음식은?”
스스로 말이 없다든가, 얌전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별로 없는 이린이었지만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이 비교적 조용한 아이였다는 걸 깨달았다.
‘이 나이 또래의 여자아이란 원래 이런 건가? 아니, 그럴 리가 없는데??’
오늘 처음 본 사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스스럼없는 태도에 이린이 당황하고 있을 때 뒤따라온 목소리들이 사린을 말렸다.
“사린. 어지간히 해. 놀라서 말을 못 하잖아.”
“너무 흥분하신 거 같은데요. 하여간 사린 누님은 너무 저돌적이에요. 미안해요, 많이 놀랐어요? 누나같이 예쁜 사람은 처음이라 사린 누님이 좋아서 저러는 거니까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말아 주세요. 이 누님이 보기보다 좋은 사람이에요.”
한 명은 사린과 비슷한 또래의 여자아이였고, 다른 한 명은 이린보다 어려 보이는데도 말투는 어른스러운 귀여운 남자아이였다.
“수연. 사린과 수원을 안내해 줘서 고마워요.”
“아니에요. 숙모님.”
“고모님, 조카 제갈수원이 오랜만에 인사 올립니다.”
“우리 막내조카, 어서 와요. 어른들은 다들 잘 계시고?”
“네. 고모님께 안부 전해 달라고 하셨어요.”
아이들이 많아지니 확실히 어수선해진 분위기에 어쩐지 적응되지 않아 넋 놓던 이린은 익숙한 이름들이 들려오자 눈을 깜빡였다.
‘저 둘이 남궁수연과 제갈수원?’
남궁세가에 오면 아는 얼굴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바로 만날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제갈수원, 제갈 공자는 남궁청휘의 외사촌이니까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남궁수연은 남궁청휘와 친척간이라는 것밖에 몰랐는데 생각보다 가까운 사이였구나.’
사실 이린은 남궁세가에 아는 얼굴이 많았다. 남궁세가에서 수년간 연가장에 파견했던 무사들의 숫자가 꽤 되는 만큼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파견된 남궁세가의 무인과 친밀했느냐고 묻는다면 애매했지만.
파견된 남궁세가 사람들 중에서도 남궁수연은 남궁세가의 직계인 남궁청휘와 달리 방계로, 두 사람은 약간 거리가 있는 친척간이지만 나이가 비슷해 어릴 적에는 친하게 지냈었다는 얘기를 얼핏 들었었다.
남궁수연은 남궁세가에서 파견된 창궁단의 무사들 중 한 명으로 꽤 초기부터 연가장에 머물렀던 이들 중 하나였다. 가주의 명으로 온 이들 중에도 이린의 처지를 동정해 도움을 주며 장기간 연가장에 머물렀던 여협들이 일부 있었는데 남궁수연은 그들 중에서도 가장 오래 장원에 남았던 인물이었다.
갑작스레 장주가 되어 어수선한 장원을 정리하느라 애를 먹던 이린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했다.
사실 그대로 연가장에 들어와 주지 않을까 살짝 기대하기도 했지만 역시 무모한 바람이었다.
‘남궁청휘와 교대하듯 남궁세가로 돌아갔었는데……. 덕분에 수연은 무사했겠지.’
그리고 제갈수원은 동굴 속에 마지막까지 이린과 청휘와 함께했던 이들 중 하나였다. 남궁청휘와는 육촌지간인 데다 둘 다 늦둥이 막내라는 점이 닮아서인지, 두 사람은 함께 다니는 일이 많았다고 들었기에 분명 지금도 교류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집안에서의 대우는 좀 달랐던 모양이지만.’
제갈수원이 너무 어려서 이번에 만나기는 힘들지 않을까 싶었지만 기우였던 모양이다. 눈앞에서 생기 넘치는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제갈수원은 깨물어 주고 싶게 귀여웠다.
‘이 어린애가 목숨을 걸고 벽력탄을 던지는 청년이 된다니 기분 이상하네.’
웃으며 자신을 보던 이린의 눈빛이 어딘지 아련해지자 제갈수원은 귀신같이 알고 이린과 눈을 맞추며 웃었다.
“누나 이름이 연이린이에요? 그럼 혹시 이어질 이(邐)에 맑을 린(粼) 자를 쓰나요?”
“어떻게 알았어?”
초대면에 자신의 이름자를 맞춘 제갈수원을 신기한 듯 바라보는 이린에게 제갈수원이 어린아이답지 않게 논리적으로 설명했다.
“군자검의 연적훈 대협의 따님이시라면 호남제일미소년 연이현 소협의 누이 동생이시기도 하니까요. 예전에 이어질 이(邐)에 맑을 현(灦) 자를 쓰신다고 들었거든요. 오누이에게 같은 뜻을 붙이시지 않았을까 했어요.”
“……어린아이가 알기에는 조금 복잡한 글자라고 생각하는데 대단하구나.”
그런데 오빠의 그 별명, 대체 어디까지 퍼져 있는 걸까. 제갈세가는 호북에 있는데.
“일곱 살이면 그 정도는 알 수도 있지요.”
엣헴, 하고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이는 제갈수원이 얄미움과 동시에 귀여웠다.
‘보통은 일곱 살에 천자문도 다 못 뗄걸. 제갈세가에 수재(秀才)가 많다더니. 하긴 전에 만났을 때는 그리 깊은 대화를 할 여유가 없었으니까.’
조금 더 대화할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면 좋았을걸.
이린의 기억 속 제갈수원은 가벼운 목소리로 말을 걸던 능청스러운 청년이었다.
치근거린다고 여겨질 법도 하건만 이린이 불쾌하지 않을 정도로 친근하게 굴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하지만 그런 얕은 사이임에도 마지막까지 청휘와 이린을 살리고 자신이 사지(死地)에 남을 때에는 한 점 망설임도 없었다.
“수원. 아는 것 좀 많다고 너무 자랑하고 다니지는 말렴.”
“에이, 고모님. 모처럼 예쁜 누나 앞에서 잘난 척 좀 하고 있는데 그렇게 말씀하시면 이 조카 섭섭합니다.”
“푸훗.”
어린애답지 않게 너스레를 떠는 제갈수원의 모습에 이린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예전에도 비슷한 느낌이었던 거 같은데. 어릴 때부터 그대로였구나.’
“나는 제갈수원이에요, 누나. 아까부터 멋대로 불러대 놓고 이제 와 새삼스럽지만 누나라고 불러도 되죠? 만나서 반가워요.”
“응. 알고 있겠지만 나는 연이린이야. 잘 부탁해.”
“아, 나는 남궁수연이에요. 저기, 잘 부탁해요.”
유독 어색하게 인사를 건네는 남궁수연에게 이린도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자신의 외모에 당황하는 사람들이야 흔했기에 놀랄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진사린과 제갈수원이 좀 이상하다면 이상한 편에 속했다.
“저기, 린매. 인사도 끝났으니까 우리랑 같이 놀러 가자. 응? 그래도 되죠?”
“……괜찮겠어요?”
아이들의 기세에 다소 놀란 듯한 이린을 보며 제갈윤정이 걱정스러운 듯 묻자 이린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