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Goddess RAW novel - Chapter 54
54.
“아, 네. 괜찮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진사린은 아무래도 조금 어색한 느낌이 있긴 하지만 정말 본인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일이고, 남궁수연과 제갈수원과는 이전에도 좋은 감정이 있었으니 이번 기회에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럼 아이들끼리 노는 자리니 나는 빠질게요. 필요한 게 있으면 사람을 부르도록 해요. 아마 남궁세가의 아이들이나 다른 문파의 아이들도 도착하면 이쪽으로 올 텐데 위험하지 않게 놀 수 있죠?”
“네에.”
아이들이 이구동성으로 답하는 것을 보며 제갈윤정은 어딘지 못미더운 듯 웃더니 덧붙였다.
“수연. 이곳 구조를 잘 아니까 다른 사람들을 잘 챙겨 줘요.”
“네, 숙모님.”
“여기는 어차피 예전에 황룡전장에서 쓰던 곳이라 저도 구조는 알고 있는걸요. 걱정 마세요. 그동안 건물은 뭔가 많이 바뀐 것 같지만.”
“사린이라면 길을 잃지는 않겠지만 아직 공사가 조금 덜 끝난 곳도 있으니까 너무 돌아다니지는 말아요.”
“네에.”
제갈윤정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아이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이린의 손을 붙들었다.
사이좋은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제갈윤정은 자리를 피했다. 하나같이 무술을 익히고 있는 무가의 아이들이니 노는 것도 여염집 아이들에 비할 바가 못 된다는 것을, 마찬가지로 무가 출신인 본인도 잘 알고 있었지만 저 기운 넘치는 아이들 사이에 낄 자신은 없었다.
‘우리 청휘가 있었다면 좀 안심했을 텐데.’
어릴 적부터 저 혼돈의 중심에서 시달리느라 익숙해져 있는 아들을 떠올리던 제갈윤정은 해맑게 웃으며 뭔가 즐겁게 얘기하고 있는 진사린과 연이린을 보고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 연가장주가 온다고 들었을 때 혹시 함께 오지 않을까 기대하긴 했다. 그리고 실제로 본 연이린은 생각보다 차분하고 귀여운 꼬마 아가씨였다.
‘어떻게 보면 이쪽이 우리 청휘와 더 잘 맞을 거 같기도 하고.’
그다지 자기 의견을 고집하지 않던 유순한 아들이 죽을 고비를 넘긴 후 완강하게 약혼을 거부하던 것과 청휘에게 좋아하는 아이가 생겼다던 윤위 언니의 말을 떠올리며 제갈윤정은 씁쓸하게 고개를 저었다.
황룡전장과의 약혼은 아이를 지키기 위한 수단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 약혼 이야기가 상대를 자극한 모양이었다. 설마하니 겨우 열 살밖에 안 된, 피를 나눈 동생을 해치려 할 줄이야. 아둔한 자신 탓에 청휘가 죽을 뻔했다는 사실에 속이 무너져 내렸지만 그렇다 해서 쉽게 약혼을 포기하긴 어려웠다.
이쪽에서 먼저 얘기를 꺼낸 약혼에 대해 보류를 청하자 황룡전장의 진 장주는 당연히 심기 불편해했다. 하지만 청휘가 목숨을 위협받았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그 역시 딸의 안위를 생각하며 약혼에 대해 재고하겠다고 몸을 뺐다. 그래도 남궁세가와의 혼인을 딱 잘라 포기하기는 아쉬웠기에 나중에 아이들의 마음이 맞으면 그때 다시 얘기하자고 넘긴 상태였다.
다만 이번 약혼에는 남편인 남궁익의 의견 역시 반영되어 있었던 만큼 저 독불장군이 어린 아들의 반항을 쉽게 넘어가 주지 않을 듯해 제갈윤정도 속이 탔다.
‘우리 아들은 그렇게 속 태우고 있는데 정작 저 아이들은 아무 생각도 없을 걸 생각하면 조금 억울한 거 같기도 하고.’
심지어 이린은 자신이 청휘와 만났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을 터였다. 여장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은 아들이 절대로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한 덕분에 아들의 은인들에게 인사도 할 수 없으니 부모로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어차피 아직 저렇게 어리니 알고 있다 해도 나중에 커서 만날 때쯤이면 까맣게 잊고 있을 텐데 어린 아들의 순정이 언제까지 갈지 솔직히 의문이기도 했다.
‘사랑과 관계없이 혼인해서 잘 지내는 경우를 의외로 별로 못 본 탓일까.’
제갈윤정 자신도, 진심으로 서로 연모하고 혼인을 약속했던 사내와는 이어지지 못하고 독신으로 지냈다. 그러다 결국 정략결혼으로 지금 이런 곳에 있으니 더욱 회의적인 걸지도 몰랐다.
‘이상적인 경우라면 연가장주 정도일까. 첫사랑과 혼인한 소꿉친구 부부로 유명했지.’
군자검 연적훈의 미혼 시절 인기는 제갈윤정 역시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과는 세대가 달라 그야말로 남 일이었는데, 수많은 여인들이 추파를 보내는데도 눈길도 주지 않고 정인(情人)에게 돌아간 준수한 미청년의 이야기는 지금도 강호에 전설 비슷한 것으로 회자되고 있었다.
‘부인이 그렇게 일찍 가지만 않았다면 더 좋았을 것을…….’
그래도 연장주의 부인이 남긴 아들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올곧은 미소년의 명성을 이어 가고 있는 것을 보면 역시 훈훈한 집안이었다.
황룡전장과 부유함에 있어서는 비교할 수 없을지 몰라도 인간적으로 사돈을 맺는다면 역시 연가장만 한 곳은 드물었다. 그쪽에서 좋다고 할지가 문제지.
‘어라?’
일부러 손님이 별로 없을 후원 뒷길을 통해 본채로 가는 중이었는데 눈에 들어온 의외의 조합에 제갈윤정은 발걸음을 멈추고 건물 뒤로 몸을 숨겼다.
“셋째가 연 소장주께 은혜를 입었는데 제대로 인사드리지 못한 게 계속 마음에 걸렸소.”
“아닙니다. 저는 그저 해야 할 도리를 했을 뿐인데 이렇게 거듭 치하를 받으니 민망할 따름입니다.”
“생면부지의 타인에게 쉬이 베풀 수 있는 일이 아님을 어찌 모르겠소. 덕분에 죽을 뻔한 동생이 살았는데 감사할 따름이오.”
대화만 들어도 누군지 알 것 같았다. 남궁청원과 연이현이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떠올리자마자 바로 눈앞에 나타날 줄이야.
“대공자께서 동생분을 많이 아끼시는군요.”
“나이 차이가 크다 보니 우형(愚兄)의 눈에는 아직도 어린아이 같아서 걱정이오. 거칠어 보여도 성정이 나쁜 아이는 아니니 무례하게 군다 하여 너무 괘념치 않으셨으면 하오.”
“저 역시 어린 동생이 있으니 대공자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삼공자께서는 언행이 솔직담백하신 것뿐인데 어찌 그 마음을 곡해하겠습니까.”
“하하하.”
이현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이어 청원의 웃음소리가 들리자 제갈윤정은 내심 깜짝 놀랐다.
‘쟤가 웃기도 하는구나.’
제갈윤정과 딱히 사이가 좋을 일이 없는 관계이긴 하지만 10여 년을 봐 오며 웃는 얼굴을 본 기억이 없는 사람이 저렇게 웃을 줄이야.
“청운이 소장주보다 몇 년은 연상인데 소장주가 더 어른스러우니 부끄럽소.”
성정이 냉정하고 오만한 남궁청원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그리 친근하게 대하는 편이 아닌데 연이현에게 저리 태도가 부드러운 것을 보면, 그가 동생 청운을 구해 준 것도 한몫했겠지만 가까이해도 괜찮은 인물이라 판단했다는 뜻이었다.
‘연 소장주에 대한 평가가 꽤 높은 모양인걸.’
역시 청운의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이라서일까. 처음으로 보는 장남의 웃음소리는 그를 어려 보이게 만들었다.
‘저 어린애들과 싸우고 싶지는 않지만, 내 아들의 목숨을 위협한다면 어쩔 수가 없구나.’
남궁가의 의붓아들과 제갈윤정은 서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나름대로,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그들의 모친이 혈교와 내통 의혹을 받고 있는 공동파의 제자였다는 것과 제갈세가의 핏줄인 자신이 그들의 남동생을 낳았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청휘의 배다른 형들은 아직도 공동파와 교류하고 있었다. 청휘를 덮친 것도 모자라 마련야장이 머물고 있는 연가상단까지 습격할 정도의 무사들을 남궁세가에서 빼돌렸다면 분명 티가 났을 것인데 남궁세가의 사람을 움직인 흔적은 없었다.
그런 아들들을 알기 때문일까, 가주인 남궁익은 아직 소가주(小家主) 자리를 장남에게 주질 않고 있었다.
“딱히 가주 자리를 원한 적도 없는데. 차라리 그 아이가 딸이었으면 경계하지 않았을 것을.”
두 사람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제갈윤정은 한숨을 쉬며 가던 길을 재촉했다.
그런 제갈윤정을 수수한 하녀 차림의 완영이 조용히 쫓고 있었다.
* * *
“숨바꼭질하자!”
“좋아!”
한창 수다를 떨던 아이들 입에서 평범하게 아이들다운 놀이가 나오자 이린은 저도 모르게 엄마 미소를 지었다. 너무 아이답지 않게 어른스러워 보여 당황했지만 그래도 역시 아이들이었다.
확실히 아직 어린 제갈수원이 끼어 있으니 술래잡기 같은 것은 무리겠지.
“린매도 괜찮아? 숨바꼭질 좋아해?”
“응.”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린은 내심 기분이 묘했다.
‘그러고 보니 해 본 적 없네. 숨바꼭질.’
친구가 없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니 어쩐지 씁쓸해졌지만 장원 아이들이 노는 것을 봐 와서 규칙은 대충 숙지하고 있었기에 이린도 고개를 끄덕였다. 뭐 좀 다르면 지역 차이라고 주장해 봐야지.
“술래는 제비뽑기로 정할까?”
“아, 처음은 내가 할게.”
어차피 조금만 기감을 집중하면 어디에 누가 있는지 대충 알 수 있는 이린은 자진해서 술래를 맡았다. 이린이 작정하고 숨으면 아이들은 찾을 수 없을 테니 대충 수준도 알아 볼 겸.
“정말 괜찮아?”
“응. 나는 아직 여기 구조를 잘 모르니까 숨어도 금방 들킬 테고. 자, 숫자 센다? 하나-.”
이린이 뒤돌아서서 숫자를 세기 시작하자 후다닥 여기저기로 흩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하나는 안으로 둘은 정원에, 그 중 한 명은 나무 위로 올라갔나?’
이린에게 숨바꼭질은 사실상 아이들과 놀아 주는 감각에 가까웠다. 애초에 어지간한 몸 쓰는 놀이는 이린에게 무의미하기도 하고.
“이제 찾는다~?”
숫자를 다 센 후,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이린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후원을 걸었다.
‘너무 금방 찾으면 이상하니까 우선 적당히 찾는 척 구경하며 시간을 좀 때울까.’
집 안으로 들어간 아이는 아마 제갈수원이겠지. 사린과 수연 중 나무 위로 올라간 건 역시 사린일까?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 같고.
‘뭔가 기운이 빠지네.’
잠깐 같이 지냈을 뿐인데도 사린이 쾌활하고 좋은 아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아이들과 수다 떠는 중간 중간 오늘 처음 만난 이린이 소외감을 느끼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신경 쓰는 것이 느껴졌다. 실제로는 이린이 훨씬 연상일 텐데도 이런 어른스러운 배려는 타고나는 걸까. 자연스레 호감이 가는 성격이었다.
남궁청휘는 진사린과 오랜 시간 알고 지냈으니 그런 약혼녀가 죽었다는 소식에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을지 알 것 같았다.
‘마음이 없었다고 했지만 너무 어릴 때 만나서 그랬던 게 아닐까.’
이번에는 자신이 사린을 죽게 두지 않을 테니 두 사람은 아무 문제없이 혼인할 것이다. 당연히 그래야 하고, 그렇게 만들어야 하는데도 이린은 어쩐지 조금 기운이 빠졌다.
그렇게 아무도 없는 후원의 호숫가를 구경하며 천천히 마음을 다스릴 때였다.
누군가 다가오는 것을 느낀 이린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 이거 뭐야?”
“……누구?”
이린을 향해 낯선 아이의 목소리가 말을 걸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