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Goddess RAW novel - Chapter 69
69.
아니, 감싼 것이 아니었다. 어디서 나타난 것인지 모를 화염이 눈앞에 아른거리고 눈보라로 가득하던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며 아이들이 하나둘씩 의식을 잃었다.
아이들은 자신이 정신을 잃어 눈앞이 흐려졌다 생각했지만 실은 얼음이 급속도로 녹으며 생긴 수증기일 뿐이었다. 다만 동시에 갑작스럽게 발생한 대량의 수증기 때문에 숨이 막혀 안 그래도 놀란 아이들이 기절했을 뿐.
끼이이-
끼이이-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 청아가 내는 소리가 희미해지는 듯했다.
‘아, 돌려줘야 하는데…….’
마지막으로 마선이 떠올린 건 뱀을 찾고 있던 이린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어느 순간, 흐려졌던 의식이 맑아지며 눈이 떠졌다.
“아!!!”
의식을 잃은 아이들 중 가장 먼저 일어난 것은 마선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쓰러져 있는 아이들과 동상으로 여기저기 피부가 시뻘게져 있는 사내들이 보였다. 아직 주변에 수증기가 가득했고 덕분에 아이들의 옷도 흠뻑 젖어 있었다.
“야, 다들 괜찮아?”
쓰러져 있는 아이들의 호흡을 살피며 아이들이 그저 의식을 잃었을 뿐이라는 것을 확인한 마선은 그제야 사내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언니.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일단 밧줄 좀 가져와 봐.”
“응.”
동상에 대해 잘 아는 바는 없었지만 얼어붙었던 팔다리가 단시간 내에 다시 녹아도 부상이 심할지 어떨지는 알 수 없으니 일단 제압해 둬야 했다.
먼저 의식을 되찾은 아이들과 함께 사내를 묶어 둔 마선은 겨우 한숨을 돌리고 자신이 의식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떠올렸던 사실 하나를 되새겼다.
“……뱀은? 누구한테 있어?”
“어?”
그동안 가둬 두지 않아도 도망치지 않고 아이들 옆에 잘 붙어 있던 뱀이었는데, 지금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아, 저기!”
한 아이의 외침에 모두의 시선이 아이의 손끝을 찾았다. 그곳에는 뱀이 아니라, 투명한 뱀 모양의 허물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없어졌어…….”
그날 아이들은 밤새 주변을 샅샅이 뒤졌다. 청아의 이름을 부르면서.
하지만 하얗고 예쁜 비늘의 뱀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울고불고 난리를 치는 오월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마선은 한숨을 내쉬었다.
‘……말을 해 줘야겠지.’
자신들이 찾는 건 무리일지 몰라도 적어도 어디서 잃어버린 건지라도 알려 주면 그 부잣집 아가씨는 어떻게든 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문전박대를 각오하고, 마선은 연가상단을 찾아가기로 했다.
“이쪽으로 가면 된다.”
당연히 문 앞에서 막힐 거라 생각했건만 뜻밖에 문지기 아저씨들은 친절하게 마선을 들여보내 주고 길 안내까지 해 주었다. 마치 마선이 올 것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미리, 언질을 해 둔 건가?’
그렇다 해도 이렇게 자신이 올 것을 미리 예상했다는 것은, 역시 어쩌면,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걸지도…….’
간밤에 수증기 때문에 젖었던 몸은 이미 말랐지만 등골에 으슬으슬 서늘한 기운이 돌았다. 과연 자신이 찾아온 게 잘한 짓일까?
복잡하던 생각은 연가장의 아가씨와 눈이 마주친 순간 그대로 날아가 버렸다.
“아……!”
“굉장히 일찍 왔네.”
다순에게 말을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실제로 보니 파란 눈과 금빛 머리카락에 고운 얼굴은 그야말로 마선에게 신기할 뿐이었다.
‘볏짚 같은 머리라니 다순이 이 도른 새끼, 표현력은 어따 팔아먹고.’
상단에서 글과 셈도 가르쳐 주고 있다고 들었는데 태생이 머리가 나쁜 놈은 어쩔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청아에 관해서 나한테 할 말이 있다고?”
“저기 그게, 실은…….”
주저주저하면서 마선은 이를 악물고 확 고개를 들었다.
여기까지 오면서 느낄 수밖에 없었다. 연가상단이 어떤 곳인지 저 아가씨와 자신의 신분 차가 얼마나 큰지. 만약 저 아가씨가 화를 낸다면 자신은 뼈도 못 추리고 이곳에서 기어 나갈지도 몰랐다.
“실은 아가씨가 찾고 계신 뱀은 제가, 저희가 데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감출 수는 없었다. 자신들이 처음 뱀을 주워 이용한 것은 죄가 아닐지 몰랐다. 하지만 바로 돌려주었다면 지금쯤 부잣집 아가씨의 곁에서 호의호식하고 있을 뱀이 자신들 때문에 실종되었는데 입 다물고 넘어갈 수는 없었다.
‘이건 내 자존심 문제야.’
지금껏 거리에서 눈총 받으며 도둑질이든 거짓말이든 나쁜 짓도 얼마든지 하고 살았지만 적어도 자신들에게 호의를 베푼 사람들 뒤통수를 친 적만은 없었다.
무엇보다 저 아가씨는, 자신들이 뱀을 데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사례를 할 테니 뱀을 찾아다 달라고 찾아왔을지도 몰랐다.
‘아니 분명 알고 있었어.’
아가씨의 얼굴을 보자마자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차분하게 웃음을 띤 여유로운 미소. 그것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눈빛이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의 말에 다시 그늘이 질 것을 생각하니 어울리지 않게도 죄책감이 가슴을 답답하게 했다.
“……그래서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송구합니다. 모두 제 잘못입니다.”
마선은 정중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그리고 그런 마선을 보는 아가씨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거리를 두고 앉아 있던 소녀는 앞으로 다가와 마선의 손을 붙잡았다.
“!?”
“괜찮아. 일어나.”
“하지만 아가……. 어?”
귀하게 자랐으니 당연히 부드러울 거라 생각했던 아가씨의 손이 의외로 거칠고 단단하다는 사실에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마선은 이린의 어깨 위에 올라와 있는 두 마리의 뱀과 눈을 마주치고는 멍청히 입을 벌렸다.
“우리 애들은 오늘 무사히 집에 돌아왔으니까. 걱정할 거 없어.”
키이-
키이이-
한 마리는 초면이었지만, 다른 한 마리는 분명 자신이 어제저녁까지 고기를 먹여 줬던 그 뱀이 맞았다.
“어어……?”
멍한 얼굴을 한 마선을 보며 금실 같은 속눈썹이 곱게 휘어졌다.
‘생각보다 훨씬 괜찮은데.’
그런 일을 겪고 솔직하게 고백하러 오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는데.
이린은 여전히 혼란 상태인 마선에게 차를 대접하겠다며 안으로 불러들였다.
청아를 찾아다니던 그날, 이린은 우연히 만난 여인의 조언으로 청아가 있을 만한 곳들을 떠올렸다.
그 말대로였다. 벌써 몇 년이나 함께한 아이이니 청아에 대해서는 이린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청아는 시원한 곳을 좋아하지만 어릴 적부터 이린의 손에 자라서인지 야외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청아가 실종된 곳은 번화가라 상점이 많았고, 이 계절에도 빙고에서 얼음을 가져와 쓰는 고급 주루들이나 우물물로 시원하게 만든 음식을 파는 곳들은 근처에도 제법 있었다.
거기에 생각이 미친 이린은 상단 사람들에게 그런 곳들을 위주로 수색해 줄 것을 부탁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가능성으로 청아가 스스로 어딘가를 빙고 상태를 만들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세웠다. 그런 소문에 대해서도 몰래 알아봐 줄 것을 부탁한 이린은 뜻밖에도 오늘 어린아이들이 어디서 가져온 건지 모를 얼음을 팔았다는 정보를 얻고 직접 소문의 아이들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곳은 이린의 기억에 있는 곳이었다.
청아가 그 아이들과 함께 있다는 것을 안 이린은 안도와 함께 살짝 고민했다.
‘지금 그냥 데려갈까.’
아이들이 청아를 괴롭히지 않고 잘 데리고 있다는 것과 청아의 능력을 이용해 얼음을 팔고 있다는 사실에 내심 감탄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곱게 키운 아이라 그곳에 계속 두어도 될지 살짝 고민됐다.
그리고 이린이 아이들을 더 두고 보기로 한 건 청아와 놀아 주고 있다는 오월이라는 아이와 마선 때문이었다.
[몇 번만 더 팔고 이 뱀은 연가상단에 몰래 돌려놓자.] [말했지? 얼음장사 같은 걸 우리 같은 애들이 하고 있으면 당연히 출처를 의심받을 거야. 오래할 만한 게 못 돼.] [당장 아까도 시비 걸렸던 거 기억 안 나? 그나마 얼굴 통하는 사람이 말려서 그냥 넘어간 거지. 앞으로 그런 일이 또 일어나지 않으리란 법이 없어. 지나치게 욕심 부리다간 본전도 못 건져. 오늘 도와준 보답으로 돌려준다고 생각하든가.]도덕적인 부분은 차치하더라도, 마선은 청아의 존재가 자신들에게 결코 행운만이 아니라는 것을 꿰뚫고 있었다.
‘제법 똑똑한걸.’
낭중지추(囊中之錐). 누군가는 배워야 깨칠 수 있는 것들을 어린 나이에 이미 이치로 알고 있는 아이였다. 흔한 것 같지만 배운 것 없는 거리의 아이들이 그런 원리를 안다는 건 드물었다.
‘조금 탐나는데.’
게다가 저 마선이라는 아이나 나이 대가 조금 있는 아이들은 조금 살펴봤을 뿐이지만 혼자서라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는 아이였다. 그럼에도 짐만 되는 어린아이들을 주렁주렁 달고 있다는 건 자기가 손해를 보더라도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은 지키는 성격이라는 뜻이었다.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이린도 모르지 않았다. 하물며 집도 없이 다리 밑에 천막을 친 채 살아가며 하루하루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형편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청아.”
걱정하고 있을 식구들을 생각해 호위 중 한 명에게 상단에 가서 소식을 전해 달라고 부탁한 후, 이린은 그곳에서 밤이 되길 기다렸다. 안쪽에서 고른 호흡이 들려오는 것으로 아이들이 잠든 것을 확인한 이린이 청아를 불렀다. 그러자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잠시 후 청아가 기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