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Goddess RAW novel - Chapter 73
73.
“마선.”
“네, 아가씨.”
“네가 책임감이 강하다는 건 알아. 네가 똑똑하고 총명하다는 것도. 하지만 여기서는, 연가상단에서 너는 그냥 어린아이이기도 하단다.”
“네?”
이린은 무슨 의미인지 깨닫지 못하고 어리둥절해하는 마선을 꼭 끌어안고 등을 토닥였다.
“아, 아가씨?”
“네가 우리 식구로 들어온 이상 우리가 너희를 지켜 줄 거야. 다른 아이들뿐만 아니라 너 역시 아직 어린아이이니 마음 놓고 보호받도록 해. 이제 너희에게도 너희를 지켜 줄 울타리가 생겼으니까.”
“……네.”
생각지 못한 뜻밖의 말에 마선의 눈가가 달아올랐다. 이린은 가만히 아이를 달랬다.
자신을 도와줄 이도, 지켜 줄 이도 없다는 것이 얼마나 외롭고 무서운지 이린도 알고 있었으니까.
마선은 이린을 따라 연가장에 가고 싶어 했지만 이린은 마선이 상단에 남기를 바랐다. 남은 아이들을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의외로 상재(商材)가 있는 마선을 위한 결정이기도 했다.
“아가씨는, 비밀이 많은 분 같아요.”
“생각이 많으면 비밀도 많단다. 왜, 마음에 안 들어?”
“아니요…….”
자신들이 연가상단에 거둬지는 게 얼마나 큰 행운인지 아는 마선은 아직 철없는 아이들을 모아 놓고 훈계했다.
“바보 같은 짓 하지 말고 말 잘 듣고 착실하게 지내야 해. 알았지?”
“귀찮은데.”
“자신이 없으면 지금 당장 나가. 아무도 붙잡지 않을 테니까.”
반항하는 아이들을 단속하는 것도 마선에게는 익숙한 일이었다. 마선의 단호한 말에 빈정거리던 아이는 입을 꼭 다물었다.
“나는 이곳에서 반드시 성공할 거야. 인정받고, 위로 올라가서 너희들을 지키고 아가씨에게도 나름 빚을 갚을 거야. 너희들에게 그런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아. 하지만 적어도, 연가장과 연가상단에 피해를 입히는 바보짓은 하지 마라.”
따뜻한 잠자리도 하루 세끼 풍족한 식사도 아이들에게는 낯선 것이었다.
하지만 이린은 말했다. 곧 익숙해질 거라고.
‘익숙해져서 잊어버리진 않을 거야.’
거리의 아이로 지내는 세월이 얼마나 처참한지, 괴로운지.
뜻밖에 내밀어진 손이 얼마나 따스했는지.
그런 마선을 상단에 남기고, 이린은 연적훈과 함께 연가장으로 돌아왔다.
‘뭔가, 정신없어서 잊어버린 거 같아.’
연가장으로 돌아와서는 의외로 예절에 엄격한 진여운에게 채석을 떠넘겼다. 자영에게 반쯤 떠넘기기는 했지만 함께 아직 어린아이들을 돌보고, 진여운을 빼앗겼다고 생각했는지 분노해서 채석에게 심술부리는 서문민영을 달래고, 청아와 홍아가 또 어디서 허물을 벗지는 않나 눈을 부릅뜨고…….
동시에 자신의 무공 수련에도 집중하느라 바쁜 덕분에 이린은 남궁세가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까맣게 잊어버렸다. 진사린과 남궁수연에게서 서신이 오기 전까지.
‘반쯤은 청아 덕분인 거 같기도 하고…….’
어찌되었건 두 사람과 인연을 이어 가고 싶은 마음에는 변화가 없었기에 이린 역시 답장을 썼다. 답장 하나 오가는 데 거의 한 달 가까이 걸리는 느긋한 교제는 마음을 적당히 차분하게 했다.
그리고 다음 해, 열여덟이 된 이현이 강호행을 떠났다.
“오빠 위험한 일 하면 안 돼. 알았지?”
“알았어. 조심할게.”
끝이 없는 이린의 잔소리에 먼저 지친 것은 이현과 함께 떠나기 위해 연가장까지 찾아왔던 노악과 형산파의 또래 청년들이었다.
“아, 좀, 어지간히 해! 언제 떠날 거야!!”
열여덟의 강호행은 빠르지도 늦지도 않았지만 혼자 보내는 것은 아무래도 불안했기에 같은 지역에 나이와 항렬이 비슷한 이들끼리 모여서 함께 떠나기로 했다. 개중에는 여행 경험이 있는 이들도 있어, 보호자들 없이 떠나는 소년들의 첫 여행은 걱정스러웠지만 혼자가 아니라 제법 든든했다.
“린아. 오빠 없다고 울지 말고, 아버지 말씀 잘 듣고……. 알았지?”
“그러니까 너희들 그만 좀 하라고!!”
이어지는 걱정과 당부에 혈압을 올리는 노악 덕분에 이현은 사랑하는 여동생을 두고 서둘러 장원을 떠나야 했다.
“너 아비 걱정은 안 되냐?”
“아버지를 뭘 걱정해요. 이린이 좀 신경 쓰세요.”
걱정이 태산 같은 아버지와 달리 아들은 냉정했다.
“그런데 린아 저렇게 놔둬도 되는 거냐?”
“린아의 교육에 관해선 저에게 맡기셨잖아요.”
“하지만…….”
이린이 검술도 학문도 아무것도 배우지 않고 있음에도 뭐든 별 어려움 없이 해내는 것을 보는 아버지의 마음은 복잡했다. 그 때문에 딱히 이린에게 뭔가 배우라고 강요한 적은 없었지만 불안해지는 것도 사실이었고.
“이린이 하고 싶다는 대로 놔두시면 될 거 같아요. 너무 위험한 데만 가지 않으면……. 나이에 비해 지나치게 똑똑하고 조숙한 아이라 걱정하실 거 없어요.”
-어린애가 너무 조숙하긴 하지……. 혹시 뭔가 안 걸까?
걱정 어린 연적훈의 말에 이현은 차분하게 답했다.
-린아가 우리 집 애라는 사실은 안 바뀌니까요. 아버지 딸이고 제 동생입니다.
지나치게 똑똑한 동생이니 이미 알고 있을 것 같았지만 이현도 연적훈도 결국 그에 대해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아마 언젠가는 알게 되리라. 이린이 장주가 되었던 미래에선 그들이 마지막까지 알려 주지 않았던 진실이었지만 그때의 그들은 그저 언젠가는 이린도 알게 될 거라 생각했다.
이린은 오늘도 예의 그 동굴에 있었다.
“결국 오늘도 안 왔네.”
끼이?
끼이?
이린의 중얼거림에 대답하듯 청아, 홍아가 고개를 들었지만 이린은 가볍게 아이들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12세 여름에 접어든 이후로 이린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동굴에 출근 도장을 찍고 있었다. 동굴 안은 시원하기도 하니 여름에 피서하기 딱 좋은 곳이기는 했지만 그게 이린이 매일 동굴을 찾아오고 있는 이유는 아니었다.
‘정확한 날짜를 기억하고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예전, 검을 익히는 것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하고 도망 다니던 12세의 이린은 이곳에서 경공을 가르쳐 준 스승을 만났다.
여자인지 남자인지도 잘 모르겠는 그 사람은 산속을 뛰어다니다 우연히 이 동굴을 발견하고 들어와, 아무도 없다는 사실에 안도해 마음껏 울고 있던 이린을 발견하고 말을 걸어왔었다.
[……왜 이런 곳에서 울고 있지, 꼬마?] [다, 당신은 누구야? 비천산은 연가장 사유지야. 맘대로 들어오면 안 돼.]절벽에서 내려와야 들어올 수 있는 위험한 곳에 숨겨져 있는 동굴이었다. 당연히 아무도 없을 거라 생각하고 마음 놓고 펑펑 울고 있던 이린은 울고 있는 모습을 들켜 민망한 나머지 입에서 아무 말이 튀어나왔다.
비천산이 사유지이기는 하지만 깊은 산속이 아니라면 동네 주민들이 적지 않게 드나드는 곳이라 이린의 말은 약간 틀렸기도 했고.
무엇보다 세월이 지난 지금 생각하면 당시의 이린은 참 겁 없는 아이였다.
[글쎄, 오래전에 이 동굴에 머물렀던 사람이지. 넌 누구지?] [나, 나는 연가장의…… 사람이야.]당시에 자신이 그 집의 친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꽤 신경 쓰고 있을 때라, 이린의 입에서 자신이 연가장의 장주인 연적훈의 딸이라는 말이 차마 나오질 않았다. 안 그래도 자신이 친아들인 이현의 자리를 빼앗으려 한다는 말까지 돌고 있을 때였다.
[이름은?] [이름을 물어볼 거면 그쪽부터 말해 줘야지!!] [뭐, 그럼 됐다.]대충 얼버무린 이린의 말은 신경도 쓰지 않고 그 사람은 짐을 짊어진 채 동굴 안에 들어와 철퍼덕 주저앉았다. 행동이 익숙한 것이 이 동굴에 머물렀던 사람이라는 말은 거짓이 아닌 듯했다.
[왜, 왜 여기 들어왔어?] [쉬러.] [여기는 연가장의 사유지라고 했잖아.] [내가 너보다도, 연가장주보다도 이곳을 훨씬 먼저 알았는데 내게도 이곳에서 잠시 쉬고 갈 있을 권리 정도는 있다고 생각하지 않나?] [……으으응.]안 그래도 우는 모습을 들켜 민망했던 이린은 그 낯선 이를 어떻게든 다시 나가게 하고 싶었지만 어쩐지 상대의 기세에 이길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아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동시에 어쩐지 멈추지 않던 눈물까지 뚝 그쳐 버렸다.
[네가 여기서 울고 있었던 건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으마.] [그, 그런 건 원래 못 본 척하는 거야!]빽빽 소리를 지르는 이린을 보며 상대는 약간 난처해하는 듯했다. 곤란해하는 그 사람을 보며 이린은 아이를 대하는 게 서툰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무인이라면 드문 일도 아니었고.
허리춤에 달린 검을 보면 강호인이 틀림없었기에 이린은 정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가볍게 말하는데도 어쩐지 농담 같지 않은 무게가 담긴 목소리였다. 장원에서만 자라 비교적 순진하긴 했지만 이린도 눈앞에 있는 사람이 어딘지 평범하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때문일까 낯을 가려 사람을 잘 따르지 않는 이린도 상대에게 호기심이 생겼다.
[그래. 왜 이런 곳에 숨어서 울고 있지? 괴롭힘이라도 당했나?] [아, 아냐.]돌려 말하는 법 없는 투박한 말투.
어쩌면 그런 무심한 태도에 안심한 걸지도 몰랐다, 이린은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았다.
[네가 오빠보다 강해져서 오빠 자리를 빼앗을 것 같아 싫다고?] [응.]지금 생각하면, 참 어이없는 말로 들렸을 텐데. 그 사람은 이린을 비웃지 않았다
[누가 그런 소릴 했지?] [다들, 굴러들어 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는 거라고 했어.]정체도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연가장과 관계없는 외부인이라는 생각에 이린은 그날 속에 있던 말을 모두 털어놓았다. 정체 모를 그 사람은 흥분해서 횡설수설하는 이린의 말을 차분하게 들어주었다.
[오빠가 장주가 되는 게 좋아. 나는 그런 거 하고 싶지도 않고, 생각해 본 적도 없고!] [하긴 썩 재밌는 일도 아니지. 일만 많고, 피곤하고, 성가시고.] [그러니까 이제 무술은 안 배울 거야!] […네가 그러길 바란다면 그렇게 해라. 세상에는 그런 거 안 배우는 사람이 더 많다.]타인의 담담하면서도 어딘가 무심한 목소리는 도리어 이린을 안심하게 했다. 그래서 이린은 마음이 풀려 상대가 궁금해하지도 않는 것을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그치만 좀 아쉽긴 해. 검도 좋아하고 달리는 것도 좋아했는데. 그래도 오빠가 더 좋으니까 됐어. 오빠 걸 뺏고 싶지도 않고 이상한 말 듣고 싶지도 않고.]점점 우울해지는 이린의 목소리에 그저 맞장구만 쳐 주던 이가 처음으로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검은…… 들지 않아도 경공은 얼마든지 배울 수 있지 않나? 실용적이기도 하고.] [하지만 경공만 가르쳐 주진 않을 테니까. 경공만 배우겠다고 하면 분명 검도 같이 배우자고 할걸.] [그럼 그냥 배워 두지 그래? 나중에 힘이 필요할 때, 자신의 뜻을 관철하고 싶을 때, 정말 지키고 싶은 것이 있을 때 힘이 없으면 아무 것도 지킬 수 없는 법이다.]계속 자신의 말을 긍정해 주던 이가 다른 의견을 내자 이린도 샐쭉하니 입을 삐죽였다.
[하지만 아빠가 있는걸. 아빠는 있지, 엄청 대단한 사람이니까. 아빠가 오빠랑…… 린아를 지켜 줄 거야.] [뭐, 그렇겠지.]무심한 듯 이야기를 듣던 이가 뭐가 재밌는지 피식 웃었다.
이제 와 생각하면 아빠에 대해 무조건적인 신뢰를 보내는 아이가 순진해 보여 재밌었던 게 아닐까. 친아빠가 아닐지 몰라도 연적훈이 자신을 지켜 주지 않을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이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