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Goddess RAW novel - Chapter 74
74.
[그래도 있지. 경공을 배우면 아빠도 오빠도 조금 안심하지 않을까 하고.] [?] [경공이 빠르면 도망치는 건 잘 하니까. 무슨 일이 생겨도 안심이잖아.] [그야, 그렇지……?]이린의 생각이 의외였던지 그 사람은 이린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무슨 생각인지 툭 내던지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그럼, 내가 가르쳐 줄까?] [경공을?] [그래.] [정말? 진짜? 그래도 돼?] [그래.] [그럼 오늘부터 내 스승님이네?] [어어, 뭐. 그렇게 되나.]아무래도 상대는 이런 이린의 겁 없는 성격이 맘에 들었던 것 같다.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데 그때 그 사람이 웃었던 것 같은 기억이 있으니까.
그렇게 경공을 배우기로 한 다음날부터 매일 이린은 아침에 동굴을 찾아가 날이 저물기 전까지 그 사람에게서 경공을 배우고 집으로 돌아갔다.
[밥은 안 먹어?] [한 끼 정도 안 먹어도 괜찮아.]산에서 적당히 눈에 띄는 열매를 따 먹기도 했지만 아직 어린 이린에게는 당연히 한참 부족했다. 첫날에는 이린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던 벽곡단을 나눠 주었던 정체모를 경공 스승은 그 다음날부터 이린에게 동물을 잡아 손질하고 간단하게 요리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어차피 계속 산속을 쏘다닐 거면 알아 두는 게 좋을 거다.] [요리할 줄 알아요?] [이걸 요리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지.]사냥한 생선이나 산짐승을 손질해서 소금 뿌려 굽는 정도였지만 엄연히 요리였다.
[검을 배우지 않는 것과 별도로 이런 작은 칼 하나 정도는 들고 다니면 그럭저럭 유용하게 쓰인단다.] [헤에.] [이젠 동물 가죽 벗기는 걸 봐도 별로 놀라진 않는구나.] [배가 고파서?] [그래. 한창 무쇠도 씹어 먹을 나이긴 하지.]처음에는 움찔 놀라던 이린이었지만 금방 익숙해져서 스승을 따라 동물을 잡고 손질했다.
[배고프니 잡긴 하는데 그리 유쾌하진 않네요.] [사냥꾼 적성은 아닌 모양이지. 너는 검을 배우지 않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왜요?] [검을 잡는다는 건 생명을 빼앗는 일이니까.] [그럼 무공 익히는 사람들은 다들 죽이는 걸 좋아해요?] [……꼭 그렇지는 않다만. 하긴, 그것도 그렇구나. 불가인 소림이나 아미파에서도 무공을 익히니 내가 이상한 소릴 했군.]이린은 얼굴도 모르는 그 스승과 함께 있는 동안 많은 이야기를 했다.
누군가와 그렇게 오래 대화를 한 것은 어찌 보면 처음이었다. 엄마가, 어쩌면 친엄마가 아닐지 모르는 엄마가 일찍 돌아가신 후로 연적훈과 연이현이 주로 이린을 돌봤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두 사람 다 이린을 돌볼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연적훈은 바빴고 연이현 역시 공부해야 할 것이 많았으니 그다음으로 이린을 돌본 것은 장 총관과 이린을 위해 새로 들어온 시비, 자영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자영이 살갑게 대해 준다 해도 말할 수 없는 것이 너무 많았으니까.
그래서 즐거웠던 것 같다.
하지만 정작 이린이 그 사람에게 경공에 대해 배운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겨우 열 며칠 정도일까? 그때까지도 일부러 성취 속도를 늦춘다는 요령조차 없던 이린은 그 사람을 스승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하고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졸업 통보를 받았다.
[이 정도면 이제 혼자 익혀도 무리가 없을 거다.] [벌써?]그 사람은 이린에게 잘한다, 못 한다조차 얘기한 적이 없었다.
그저 시키는 대로 이린이 따라하면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일 뿐. 나중에 생각해 보면 역시 이린의 성취는 유별나게 빠른 편이긴 했다.
[그래. 하지만 외공의 단련을 게을리하면 실력은 늘지 않을 테니 단련을 게을리해선 안 된다.] [괜찮아. 나 달리는 거 좋아해.]하루도 빼놓지 않던 무술 수련을 그만둔 이후로는 답답한 마음에 매일 비천산을 달리는 이린을 알고 있는지 그 사람 역시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만 가 보마. 경공을 익혔으니 이 동굴에 들어오는 것이 더 쉬워지겠구나.] [스승님은 이 동굴에 볼일이 있던 거 아냐?] [네가 없는 동안 이미 끝냈다. 아마 다시 찾아올 일은 없을 거다.] [왜?] [글쎄……. 잘 있어라.]그렇게 말하며 이린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준 스승은 그대로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 뒤로 다시는 보지 못했다.
“이상한 사람이었지.”
온몸을 꽁꽁 가리고 있어 제대로 보이는 건 눈 정도. 덕분에 이린은 혹시 아버지를 해치러 온 자객이 아닐까 했던 적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역시 그때 그 사람이 동굴 안에 영물들을 다 치워 버린 거겠지.’
당시 그 사람의 볼일은 영물의 내단이 아니었을까. 지금은 이린과 이현이 잡아 버리기는 했지만 그때도 당연히 영물은 있었을 테니.
‘굳이 나랑 시간을 보내 준 것도 내가 동굴 안에 들어가면 위험해서였을지도.’
견문이 짧은 당시에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지만 아마도 그 사람은 대단한 고수였을 것이다. 이린이 그 짧은 시간에 배운 경공만 해도 대단했으니 그 일신에 갖춘 무예와 내공은 과연 어떠했을까. 그런 생각을 처음 하게 된 것은 이린이 다시 검을 익힌 후였지만 절실하게 느낀 것은 동굴에 갇혀 석실 안에 있던 비급을 익힐 때였다.
‘분명 그 사람이 나에게 가르쳐 준 경공과 뿌리가 같은 무공이야. 심지어 연가장의 가전무공과도 비슷했지.’
대체 그 사람의 정체는 뭘까.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 이번에 다시 만나고 싶었는데 뭐가 잘못 됐는지 이번에는 오지 않을 모양이었다.
혹시 영물이 이미 다 털렸다는 걸 알아채서 오지 않는 걸까? 그것도 아니면-
‘강호인이라면……. 내가 바꿔 버린 무언가에 얽혀서 이곳에 오지 못하게 되었을지도 모르지.’
서문제우 때와 비슷한 일은 강호 여기저기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다만 그것은 매우 조용하고 일상적으로 일어났기에 그것이 이상하다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린의 부탁을 받은 서문제우가 일부러 표행 일정까지 조정해 가며 만나러 간 사람은 벌써 3명이었다. 이 숫자가 수년간 쌓이면 어찌될까.
그리고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그들이 가지고 있던 문제들 중 대부분은 돈으로 해결이 가능했다.
‘역시 돈은 중요해.’
엄연히 말하면 이린의 돈은 아니었지만. 서문제우가 일부러 찾아가서 만난 이들의 사정을 우연히 만난 것으로 바꿔 연가장에 알리고 도움을 청하면 연적훈은 기꺼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이린 역시 곁에서 한 마디씩 보태긴 했지만 사실 그럴 필요조차 없었다.
‘덕분에 군자검과 연가상단의 명성이 나날이 드높아지고 있는데 괜찮을까.’
명성이 높다고 다 좋은 것도 아니다. 성격 안 좋은 사람이 도움을 거절하면 다들 그러려니 하지만 착하다고 소문난 사람이 도움을 거절하면 욕을 먹는 법.
이린은 한창 강호행 중일 오빠 이현을 걱정하며 동굴 밖으로 나갔다. 어느새 해가 지고 있으니 이제 서둘러 돌아가야 했다. 그 사람이 밤에 이곳을 찾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린도 밤낮으로 이곳을 지키고 있을 만큼 여유롭지는 않았다.
탁, 탁, 탁
절벽을 올라 가볍게 나무 사이를 누비는 것만으로도 이린의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후, 이린이 떠나는 걸 기다렸다는 듯 누군가가 동굴이 있는 절벽으로 향했다.
“아가씨? 매일 어딜 그렇게 돌아다니십니까?”
“신경 꺼. 그런데 뭐 해?”
몰래 나갔다 온 게 아니니 평범하게 장원 대문을 통해 돌아온 이린은 한여름 해가 저물 시간까지 연무장에 있는 진여운과 마주쳤다.
“야. 아가씨께 인사드려야지.”
“다, 다녀오셨습니까. 아가씨…….”
그리고 그 옆에는 널브러져 있다가 진여운이 발길로 툭툭 치자 죽어 가는 목소리로 고개를 드는 채석이 있었다.
“아직 적응 못했구나. 힘들지?”
“살려 주세요. 아가씨……! 진 사형(師兄)은 악마……. 악!”
대놓고 사형의 욕을 하고 있는 채석의 등 위로 진여운이 발을 올리자 우둑, 소리와 함께 비명이 울려 퍼졌다.
“너무 괴롭히지 말고 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기어오르잖습니까.”
“요새는 그래도 잠잠한 거 같더니 또 왜.”
“저 숨 쉴 듯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욕을 어떻게든 해야지요. 연가장의 품격이 있는데요.”
두 사람은 동갑이지만 채석이 늦게 들어온지라 자연히 사제(師弟)가 되었다.
처음 채석을 데려왔을 때는 거리에서 거친 생활을 해 온 것이 몸에 배어 있어 한동안 적응이 힘들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사실 장원에는 비슷한 처지였던 아이들이 없지 않았다. 오자마자 삐딱하게 굴다 진여운의 성격을 잘못 건드린 덕분에 지금은 하루가 멀다 하고 몸으로 참교육을 받고 있었다.
“으흐흑. 소장주님께서 계셨을 때는 이러지 않았는데…….”
진여운에게 시달린 반작용일까. 장원에 함께 있던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데도 채석은 부드러운 인품의 연이현을 그리워했다. 진여운이 이린 앞에서는 이리 본색을 드러내도 이현 앞에서는 순한 양으로 돌변하곤 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만약 채석이 다른 거리의 소년들처럼 여자애들에게 막말을 하는 아이였다면 이현조차 엄격하게 그를 굴리며 지금의 몇 배는 호된 참교육을 겪었을 텐데.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채석은 아직 진여운만을 원망하는 중이었다.
“언니! 언제 왔어? 왔으면 얼른 들어오지.”
“아, 민아.”
“앗, 민영 아가씨!”
이린이 돌아온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안쪽에서 서문민영이 쪼르르 뛰어나오자 엎어져 있던 채석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는 것을 보며 진여운이 얼굴을 구겼다.
‘음. 볼 때마다 느끼지만 참……. 재밌어.’
채석과 함께 있던 아이들 중에도 비슷한 또래의 여자애들이 여럿 있었는데 처음 서문민영을 본 그날부터 채석의 행동은 노골적이었다. 그리고 진여운은 그런 채석의 태도를 몹시 같잖아 하며 서문민영의 옆에서 채석을 떼어놓으려 애썼다.
“운 오빠, 석 오빠. 슬슬 저녁때야. 밥 먹어야지. 언니도 얼른. 다들 기다려요.”
“응. 알았어.”
꽤 건강해진 것 같은데도 아직도 완쾌되지 않아 종종 상태가 안 좋아져 창백한 안색이 되는 서문민영이 아무래도 채석의 눈에는 병약한 미소녀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런 민영을 따라 채석과 함께 데려왔던 여자아이들이 줄줄이 따라 나왔다. 그리고 그 뒤에는 지친 얼굴의 자영까지.
“왜 다 나오는 거야.”
“아가씨가 늦게 오시니 걱정돼서 그래요. 장주님이 기다리세요. 무엇보다 음식이 식는다고요.”
“네에. 그럼 다들 수고해.”
서문민영이 나오자 약한 소리도 못하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채석과 채석을 못마땅하게 보고 있는 여운, 그리고 두 사람에게 어서 밥 먹으러 가자고 보채는 서문민영, 그런 서문민영에게 어서 밥 먹고 약 먹어야 한다고 잔소리하는 자영, 자영의 뒤만 졸졸 쫓아다니는 아이들까지.
‘평화롭네.’
아직도 서문제우에게서 전해지는 서신들은 흉흉한 것들뿐인데 연가장은 이리도 평화로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