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Goddess RAW novel - Chapter 75
75.
‘아마 알아챈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겠지.’
물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채석은 체격 조건이 나쁘지 않아 장원으로 데려왔다. 여자아이들은 자영이 교육시켜서 조금 더 자라면 연가장에서 일하게 될 거고. 신용할 수 없는 사람을 새로 들이는 것보다 손이 가더라도 어릴 적부터 장원에서 자란 사람 쪽이 훨씬 마음이 편했다.
앞으로 이린이 연가장을 비울 때 아버지와 연가장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이제 오느냐?”
“네. 죄송해요. 오래 기다리셨어요?”
“어서 앉거라.”
이현이 빠지고 단둘이 된 부녀의 식사 시간에 이린과 연적훈은 많은 대화를 나누는 편이었다. 오늘은 장원에서 오래 일했던 소소가 결혼해서 다른 곳으로 떠난다는 얘기가 나왔다.
‘음, 분명 전이랑은 다른 남자였지.’
소소와 만나는 모습을 보고 맘에 안 들어서 볼 때마다 보이지 않게 괴롭혔던 기억이 있었다. 하오문에 의뢰해 뒷조사해 보니 소소한테 접근할 때 이미 이것저것 많이 속인 모양이라 그 남자도 폭로당한 후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익숙한 사람이 떠나니 서운할지도 모르겠구나. 너도 이현이도 소소의 음식을 좋아했는데.”
“아빠가 아쉽지 않으시겠어요? 소소가 엄마 음식 솜씨를 배워서 다들 똑같다고 했는데.”
소소는 연적훈의 부인인 신수린이 연가장에 시집올 때 데려온 몇 안 되는 시비 중 하나였다. 시집가는 아가씨 치마를 꼭 붙들고 따라온 소소의 모습을 연적훈도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소소가 그 사람을 많이 따랐지……. 마님께서 고생하시지 않게 자기가 똑같은 요리를 만들겠다고 난리를 치더니 결국 비슷한 맛을 내더구나.”
“엄마를 정말 많이 좋아했나 봐요.”
“다들 그 사람을 참 좋아했으니까.”
그래서인지 소소나 장원 사람들 중에는 이린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이들이 제법 있었다. 갑작스레 나타난 이린의 존재가 마님을 괴롭히고 있으리라 생각했을 테니까.
‘사실 아빠의 혼외자를 의심하는 게 가장 자연스럽긴 해.’
이린은 남 일인 양 냉정하게 연적훈의 사생활을 의심했다.
인품이 훌륭하다는 말을 듣는다고 꼭 여자 문제까지 깨끗하리란 법은 없고, 아이는 하룻밤 실수로도 생기는 거고. 아이를 책임지라며 아이만 낳고 사라지는 일도 가능하지 않을까……?
진실이야 어떻든 이린의 흐릿한 기억 속에 신수린은 그저 자신을 딸로 아껴 주었던 유일한 어머니였다.
“결혼해서 잘살았으면 좋겠네요.”
소소가 이린을 좋아하진 않았지만 이현에게는 더없이 충실한 사람이었다. 이현이 원하기에 이린에게도 똑같은 음식을 만들어 주고 웃으며 이린을 대했다.
그러니 이린도 그 이상을 바라지는 않았다.
‘오빠가 없을 때 떠난다니 아쉽긴 하네. 오빠를 어릴 때부터 키워 온 사람이기도 할 텐데.’
하지만 이현이 연가장으로 서신을 보내는 것은 가능해도 이린이나 연적훈이 행선지를 가르쳐 주지 않는 이현에게 연락을 하기란 쉽지 않았다.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품이 많이 드는 데다 연락이 제대로 닿는다는 보장도 없었다.
“참, 오빠한테 또 연락 온 건 없었어요?”
“걔가 연락을 하면 내가 아니라 너한테 먼저 하겠지.”
어딘지 삐진 듯 보이는 아버지를 보며 이린도 킥킥 웃었다.
둘이 식사를 할 때는 청아, 홍아를 두고 오기로 약속한지라 이린은 마음 편히 식사 중인 연적훈에게 다가가 목에 매달리며 애교를 부렸다.
“와아. 아빠 나중에 나도 나가면 어떻게 하시려고 그래요?”
“너, 너는 어딜 가게?”
“나도 나중에~ 나이 차면 밖에도 돌아다니고 그래야지~ 오빠가 내 신랑감은 나보고 찾으라 했는걸. 호남에서만 찾아서야 인재가 있겠어?”
놀러 나가겠다고 하면 절대 안 된다고 할 거 같아 신랑감 핑계를 댔더니 연적훈의 얼굴은 한층 더 어두워졌다.
“네가 시집을…….”
“데릴사위 찾을 거라고. 데릴사위. 네? 데. 릴. 사. 위.”
“크흠. 그, 그래.”
“한참 먼 얘기니까 그런 거 신경 쓰지 마시고 오빠한테 새언니 좀 찾아보라 그래요. 주변에 시커먼 아저씨 같은 친구들만 있는 거 같아서 쫌 걱정되거든요?”
“역시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부녀의 오붓한 식사 시간은 어느새 이 집 아들이 왜 가까이 지내는 여성이 전혀 없는 것인가에 대한 논의로 불타올랐다.
“잘생겼지, 착하지, 돈도 많지. 오빠 좋다고 하는 사람은 많을 거 같은데.”
셋 중 하나만 갖추기도 어려운데 연이현은 그 세 가지를 고루 가진 인물이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집은 다른 집들처럼 부모님이 정혼자를 정하지는 않네요.”
“그러게. 네 조부모님도 그런 걸 강요하시는 분들은 아니었거든. 아무래도 무가(武家)라 젊을 때는 무공에 열중하라고 존중해 주시는 편이기도 했고. 그렇게 혼인을 급하게 할 이유도 없으니까.”
“아빠는 일찍 하셨잖아요.”
“으음. 그렇게까지 일찍 한 건 아닌……. 아닌가?”
이린은 현재 12세, 이현이 19세, 연적훈이 42세였다.
대충 계산해 보면 연적훈이 적어도 22세에 혼인을 했다는 뜻이었다.
“으음, 무림세가 평균으로 보면 비교적 이른 거 같기도 하구나.”
“오빠랑 비교하자면 강호행 한 번 다녀오고 바로 혼인한 수준이잖아요?”
“그건 그렇지. 나도 좀 더 놀다 혼인할 걸 그랬나 좀 아쉽기도 하단다.”
혼인하고 가정을 이룬 후에는 부인 혼자 집에 두고 여행 다닌답시고 돌아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야 일찍 마음을 정해 둔 상대가 있기도 했고. 부모님도 일찍 돌아가셔서 좀 외롭기도 했지.”
“아. 일찍 돌아가셨다는 말은 전에 들은 것 같아요.”
“그래, 내가 16세 때였지.”
“그건 너무 이르신 거 아니에요?”
“내가 워낙에 늦둥이긴 하지만, 뭐. 어쨌든 꽤 일찍 돌아가신 편이지. 수린이 그때도 곁에 함께해 주었단다.”
본래 어릴 적부터 소꿉친구였으니 그때도 당연하다는 듯 함께했었다. 기실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부터 며느릿감으로 여기고 있던 사이였고.
“굳이 말을 하진 않았지만 부모님 돌아가시고 얼마 후에 강호행을 떠나며 돌아오면 청혼하려고 했었지. 그런데 이 아비가 또, 워낙에 미목수려(眉目秀麗)하고 잘나지 않았겠니. 지금은 좀 나이를 먹었지만 당시에는 이현이 못지않았단다.”
“음. 네.”
아빠의 말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스스로의 미모에 대한 저 당당함에 뭐라 답해야 좋을지 몰랐을 뿐.
“그렇다 보니 가는 곳마다 나를 흠모하는 소저들이 적지 않았단다. 물론 다 거절했지만.”
“헤에.”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내가 고향에 약혼녀가 있다는 소문이 퍼져 있어서 고향에 돌아오자마자 수린이 찾아와 내 멱살을 잡았었지.”
“…….”
멱살 잡힌 얘기를 하는 것치고는 즐거워 보이는 연적훈을 보며 이린은 오빠의 이상형에 대한 가설을 하나 세울 수 있었다.
‘오빠 이상형은 돌아가신 어머니와 비슷할지도 모르겠네.’
물론 이현의 기억 속에 있는 어머니가 어떤 사람일지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모처럼 옛날 얘기도 하고 딸과 즐거운 저녁시간을 보낸 연적훈은 아직 처리하지 못한 일들을 처리하기 위해 서재에 처박혀야 했다. 요새 상단이 꽤 잘되고 있는지 이것저것 보고가 많아 바빴다.
‘장사가 잘되는 건 좋지만 말이지.’
게다가 서문제우의 부탁으로 몇 번 도움을 준 곳들이 묘하게 세력이 튼실하거나 능력 있는 사람들인 경우가 많아 자꾸 연가장에 은혜를 갚고 싶다고 난리였다. 상단이 번창하는 데는 그 영향도 있었다. 좋은 일이라면 좋은 일인데 덕분에 연적훈은 자꾸자꾸 바빠졌다.
‘아, 졸려…….’
이제는 뭔가 새 사업도 시작하겠다고 하는데 자기들이 확인했으면 됐지 전권 위임했는데 왜 자꾸 자신한테 확인을 하라는 건지. 연적훈은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들어 올리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그나마 이린이랑 밥 먹을 때는 쌩쌩했는데…….’
정말이지 저 아이는 누굴 닮았는지, 이린과 있으면 종알종알 수다가 끊이지 않았다. 사랑스러운 딸을 떠올리던 연적훈은 그대로 살짝, 의식을 놓아 버렸다.
“헉!”
얼마나 졸았는지, 퍼뜩 정신을 차린 연적훈은 눈을 부릅떴다.
졸고 있던 자신의 책상 위에, 분명 방금 전까지는 없던 상자 하나가 열려진 채 놓여 있었다.
깨끗한 약초 냄새. 분명 영약이었다.
“설마.”
끼긱-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창가에 서 있는 누가 봐도 수상쩍어 보이는 차림의, 하지만 어딘지 익숙한 인영이 한심하다는 듯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것을 발견한 연적훈은 숨을 삼켰다.
눈빛만으로도 ‘명색이 무인이라는 놈이 한심하게’라고 말하고 있는 듯한 상대는 그대로 창문 밖으로 뛰어 나갔다.
“앗, 잠깐만……!”
마찬가지로 창문을 통해 뒤따라 나간 연적훈은 그대로 그 사람을 따라 달렸다. 순식간에 멀어지는 경공에 연적훈은 이를 악물고 달렸다.
‘아니, 왜 저렇게까지 도망을 가?’
“아 좀!!! 잠깐만요!!”
소리 질러 부를 틈조차 주지 않고 멀어지는 상대를 보며 심호흡을 한 연적훈은 결국 최후의 수단을 쓰기로 했다.
“야!! 거기 안 서? 이 미친……!!”
빠악!!
분명 방금 전까지 저 멀리 있었는데……. 어느새 자신의 머리통을 강타한 충격과 눈앞에 있는 인기척을 느끼며 연적훈은 천천히 그 자리에 쓰러졌다.
‘저 성질머리……. 여전…….’
* * *
연가장의 아침은 이르다.
장원의 하인들은 일찍 일어나 일을 시작하고, 어른들은 물론 어린 수련생들조차 새벽같이 일어나 가벼운 체력 단련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무술을 익히고 공부를 하는 것은 그 뒤의 일.
그리고 장주인 연적훈도 약간씩 차이는 있지만 언제나 기상 시간은 이른 편이었다. 그러니 오늘 같은 일은 드물었다.
“곧 아침 식사 시간인데 아빠가 아직도 안 일어나셨어요?”
“어제 일이 많아서 피곤하신 모양입니다.”
“어머나, 요새 많이 바쁘신가 봐요. 그럼 저는 애들이랑 같이 먹을게요. 일어나시면 무리하지 마시고 좀 쉬시라고 전해 주세요.”
오늘도 아침부터 충실하게 체력 단련을 하고 돌아와 기운이 넘치는 이린은 양쪽 어깨에 자그마한 뱀을 한 마리씩 얹고 폴짝폴짝 뛰어다니며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런 이린의 모습을 훈훈하게 지켜보며 장 총관은 서재로 향했다.
‘그런데 아가씨 방금 뭔가 순식간에 사라진 거 같은데…….’
이린이 무공 수련하는 것을 제대로 본 적이 없는 장 총관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서재 문을 열었다.
“괜찮으십니까?”
“안 괜찮아…….”
죽어 가는 목소리로 휴식용 침상에 엎어져 있는 연적훈을 보며 장 총관은 쯧쯧 혀를 찼다.
“아침에 서재에 쓰러져 계셔서 놀랐잖습니까.”
“면목이 없네.”
장 총관이 빙고에서 가져온 얼음을 적당히 쪼개어 넣은 수건을 뒤통수에 갖다 대자 연적훈은 끄으으 신음을 흘렸다. 청아 덕분에 연가장에는 간이 빙고가 있어 언제든 얼음찜질이 가능했다.
“그런데 대체 누구한테 맞으신 겁니까? 장주님을 그렇게 팰 수 있는 사람이 흔치 않은데.”
“……어젯밤 그분이 왔다 가셨다네.”
“네?”
연적훈은 설명을 계속하는 대신 책상 위에 놓인 상자를 가리켰다. 2개의 작은 상자 안에 영약이 들어 있음을 확인한 장 총관은 작게 신음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용케 만나긴 하셨군요.”
“나랑 눈 마주치자마자 튀어 나가기에 무작정 쫓아갔지.”
“설마 잡은 겁니까?!”
연적훈은 깜짝 놀라 자신을 쳐다보는 장 총관에게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허탈하게 웃었다.
“하하하핫. 그럴 리가 없지 않나, 자네도 참.”
“하긴, 그럴 리가 없지요. 하하하.”
마찬가지로 메마른 웃음으로 부정한 장 총관은 곧 그럼 그 상처는 뭐냐고 눈으로 물었고 연적훈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