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Goddess RAW novel - Chapter 76
76.
“잡아 보려고 야, 거기서! 라고 외쳤더니 바로 머리통을…….”
“……안 봐도 뻔하군요. ‘이게 어디서 반말을, 한참 안 봤더니 눈에 보이는 게 없어졌구나.’ 하면서 무자비하게 패셨겠죠.”
“마치 옆에서 보고 있던 사람 같군. 맞네, 심지어 아혈(啞穴)까지 짚어서 소리도 못 지르게 만들고 무자비하게 패시더군. 덕분에 장원 사람들에게 안 들켜서 다행이긴 하다만.”
“거 성질머리 여전하신…….”
“조심하게 그러다 자네도 맞을지도 몰라.”
“합.”
서둘러 자신의 입을 막은 장 총관은 황급히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하도 신출귀몰하신 분이시니 그런 말씀하시면 꼭 진짜 듣고 계신 거 같지 않습니까.”
공포에 떠는 것이 자신만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연적훈은 흡족한 얼굴로 투덜거렸다.
“그러고 다니신 지도 한참 됐는데 대체 뭘 하고 계신 건지.”
“그러게 말입니다. 그런데 굳이 상자를 2개나 두고 가시다니 그분답지 않군요.”
상자 하나에 영약 하나같이 섬세한 생각을 하실 리가 없으니 그냥 상자 하나에 다 쑤셔 넣고 던져 주실 분인데.
“어, 실은 내가 어제 처음 봤을 때는 분명 하나였거든?”
“?”
“아마 병 주고 약 준다는 말을 그대로 실현하신 게 아닌지.”
패 놓고 보니 미안했나. 연적훈의 중얼거림에 어이없어하던 장 총관은 상자 하나를 들어 보이며 물었다.
“기왕 받으신 건데 하나?”
“됐어. 나중에 애들 줄 거야.”
무슨 치료약도 아니고 그걸 하나 더 주고 갈 줄이야. 아니, 치료약으로 안 쓰이는 것도 아니지만 누가 타박상 좀 입었다고 영약을 먹을까.
“여전하시네요.”
한숨 쉬는 장 총관을 돌아보며 다시 침상에 누운 연적훈은 당당하게 말했다.
“어쨌든 나는 삭신이 쑤셔서 일을 할 수 없으니 자네가 내 대신 일 좀 하게.”
“……저 바쁩니다?”
“아 몰라, 난 지금 환자라 쉬어야 해.”
침상에 철퍼덕 엎어져 있는 연적훈을 보며 장 총관은 자신을 주워 왔던 반짝반짝했던 홍안(紅顔)의 미소년 시절 연적훈의 모습은 이미 남아 있지 않은 현실에 혀를 찼다. 그때는 분명 저렇게 느물거리지 않는 상큼한 미소년이었던 것 같은데……. 한창 물오른 미모에 현혹된 당시 자신의 기억이 왜곡되어 있는 게 아닐까?
‘아니야, 우리 소장주님은 저렇게 되지 않을 거야……!’
연이현이 장주 자리 이어받을 때쯤이면 본인은 은퇴해야 할 거 같지만. 생각만 해도 흐뭇하게 자란 소장주 연이현을 떠올리며 장 총관은 연적훈이 말한 대로 쌓여 있는 서류 쪽으로 향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해 달라는 건 다 해 주게 되는 자신의 처지가 서글펐다.
“아참, 린아는?”
“아침은 아이들과 같이하겠다고 가셨습니다.”
“요새 어딜 그렇게 종일 싸돌아다니는지. 낮에는 집에 붙어 있질 않던데 혹시 아는 사람은 없던가?”
“애들이 데려가 달라고 해도 바쁘다고 가 버리시고, 쫓아가기엔 너무 빨리 사라져서 아직까지 성공한 사람은 없는 것 같습니다.”
장 총관의 말에 머리를 짚고 끙끙거리던 연적훈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짚이는 곳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마 이현과 함께 발견했다는 그 동굴에 가 있겠지.
“그런 건 안 닮아도 되는데…….”
“네?”
“걔 요새는 나갈 때 내가 잡을 거 같으면 애들까지 은근히 동원해서 날 저지하는데 대체 누굴 닮은 건지 모르겠어.”
“제가 보기엔 얼굴은 몰라도 그런 건 장주님 닮으셨습니다만.”
“……나를?”
“네.”
소장주님이 아닌 건 확실하죠.
헤벌쭉 웃다가 단호한 장 총관의 대답에 민망한 듯 크흠, 헛기침을 한 연적훈이 질문을 이어 갔다.
“그런데 언제나 혼자 나가던가?”
“예에. 그러니 아무도 모르죠.”
“그래? 으음, 하긴 장원에는 린아 또래의 여자아이도 별로 없지.”
연가장에 있는 아이들은 주변 지역에서 부모가 보내온 아이와 연이현이나 연가장 사람들이 거두게 된 아이들이 뒤섞여 있었는데 아무래도 어느 쪽이든 남자아이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여자아이에게 굳이 무인의 길을 걷게 하는 집은 무가(武家)가 아닌 이상은 드무니까요.”
“가족들도 바라거나, 본인이 희망하는 경우가 아니면 힘들지. 신체 조건이 뛰어난 아이도 그리 흔한 건 아니고.”
여자아이는 일부 예외를 제외하면 일단 기본적인 체력 조건에서 열세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린 같은 아이는 매우 희귀한 경우일 뿐.
게다가 연가장에 여자아이들이 없는 건 장원에 여협들이 없는 탓이 컸다. 아무리 연가장에 대한 인상이 좋다 해도 아저씨들만 있는 곳에 여자아이를 맡기기는 부담스러웠으니까.
“그래도 예전엔 많았는데.”
연적훈은 어릴 적 장원을 장악하고 있던 무서운 누님들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장원에 있던 이들 중 아직까지 장원에 남아 있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친밀하게 여기던 많은 무인들이 떠나고 황량해졌던 장원을 애써 지켜 왔던 날들과 지금의 북적거리는 장원을 생각하니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생각해 보니 나 고생 진짜 많이 했는데?”
“그래도 이건 장주님이 직접 보셔야 합니다. 그만 일어나시죠.”
“……감상에 젖을 시간 정도는 좀 주지 그러나.”
장 총관의 메마른 감성 덕분에 결국 일어나 서류를 받아 든 연적훈은 상단에서 온 서류를 훑으며 침상에서 일어났다.
“린아도 혼자 다니지 않고 가까운 여자 친구가 있다면 좋을 텐데. 이현이도 없고 외롭지 않을까. 요즘 장원 아이들과는 어떤 것 같나?”
“잘 지내고 있는지 걱정이시라면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언제부터인지 잘 모르겠는데 아이들은 아가씨에게 절대 복종 중이더군요. 다만 장원에 친구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현이는?”
“다들 소장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던질 거 같은 게 좀 걱정입니다.”
연적훈은 어제저녁 이린과 나눈 대화를 떠올리며 형산파에 벗이 있고 다른 호남 문파의 자제들과도 교류가 있는 이현처럼 이린에게도 함께 무예를 닦을 친구가 있었다면 좋지 않았을까 잠시 고민했지만 금방 고개를 저었다.
‘린아가 어릴 적 외모 때문에 워낙 놀림을 많이 받아서 힘들어했지. 게다가 안 그래도 어린 나이에 진지하게 무예를 익히려 하는 아이가 흔치 않은데, 이린과 함께했다면 어지간해서는 금방 좌절해 버렸을 테니 더 크게 상처 입었을지도…….’
이린의 재능은 남들과 달랐다. 그걸 옆에서 지켜봐야 하는 또래 아이들이 의연하게 받아들이기를 기대할 만큼 연적훈도 순진하지는 않았다. 장원에서 수련하는 아이들이라면 그나마 장주의 자제들이니 특별할 거라는 선을 그을 수 있지만 대등한 관계의 아이들일수록 더 어려운 법이었다. 차라리 처음부터 차이를 느끼고 만나는 게 나았다.
“확실히 린아도 언젠가는 강호에 나가 봐야 좀 친구가 생기겠구나.”
신랑감은 둘째 치고 친구가 적은 것은 슬픈 일이었다. 그나마 예전에 남궁세가에서 만난 남궁수연과 진사린이라는 여자아이들과 가까워져 서신을 주고받는 모양인데 그때 겨우 한 번 본 사이이니 그렇게 깊은 관계라 하기는 어렵고 서신도 뜨문뜨문 주고받는 것이…….
“그러고 보니 린아가 민아 아비와 자주 서신을 주고받는 것 같던데.”
“요새 민영 양이 글자를 배우고 있는데 하기 싫다고 도망 다니고 있다더군요.”
아직 글을 못 쓰는 민아 대신 이린이 안부를 전해 주고 있다는 뜻이었다.
“민아가 좀 더 크면 린아도 속을 좀 털어놓을 수 있으려나.”
“글쎄요. 그것보다 이 서신부터 읽으시지요.”
“아? 아아.”
장 총관이 내민 것은 서문제우로부터 온 서신이었다.
* * *
“흠. 하긴 슬슬 표국도 자리를 잡았고 아저씨가 직접 가야 할 만한 표행도 많이 줄었으니까 이제 민아를 데리고 가고 싶겠죠.”
저녁 식사 시간에야 다시 만난 이린은 서문제우가 이제 안정되었으니 민영을 데리고 가고 싶다는 서신을 보냈다는 말에 담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서운하지 않겠느냐?”
“저야 서운하지만 아저씨 입장에서 생각하면 하루라도 빨리 딸하고 함께 지내고 싶지 않겠어요?”
“그야 그렇지.”
안 그래도 아들이 떠난 이후로 꽤 허전함을 느끼는 연적훈이었으니 그간 어린 딸을 연가장에 맡기고 타지에서 쓸쓸히 고생했을 서문제우를 생각하면 남일 같지가 않았다.
‘아저씨가 가끔 와서 심법을 가르치고 내가 봐 주고 있긴 한데. 좀 더 붙어 있어야 뭐든 더 해 줄 수 있겠지.’
이린은 아직까지도 또래 아이들보다 작은 서문민영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도 좀 쓸쓸해지겠지만 민아도 그렇겠네요. 아무리 그래도 아저씨는 낮에 일해야 할 테고 그동안은 거의 혼자 있어야 할 텐데. 거기에도 민아 또래의 아이가 있다면 좋겠지만 연가장에 있는 동안 친해진 사람들과는 헤어져야 하고.”
“그것도 걱정이구나. 아무래도 낯을 좀 가릴 텐데.”
“처음 얼마간은 친한 사람들을 함께 보내 같이 지내도록 할까요?”
서문제우가 지내는 곳은 장사에 있는 연가상단이었다. 다른 지역으로 표물을 운반해야 하다 보니 아무래도 중심지인 장사에 자리를 잡고 있었고 거처도 그곳에 마련했다고 했다.
“누구를? 네가 갈 생각은 아니겠지?”
“일단 아빠가 저는 안 보내 주실 거 같고. 자영이나 진여운과 채석 같은 애들을 같이 보내면 어떨까요. 자영과 여운은 민아를 오래전부터 돌봐 오기도 했고요. 채석은 장사 지부에 옛 친구들도 있으니 잘 연결해 줄 거 같거든요.”
“그것도 나쁘지는 않구나.”
그리고 이린은 좀 더 편하게 집밖을 들락거릴 수 있고.
“저도 좀 더 크면 장사 정도는 가벼운 마음으로 오갈 수 있겠죠, 뭐. 지금도 경공은 특기인데.”
이린은 자신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 확연히 드러내는 대신 예전과 마찬가지로 경공만이 뛰어난 척을 하고 있었다. 장원 아이들이 이린에게 압도당하고 있는 것을 어른들은 알고 있긴 했지만 이린이 어느 정도 뛰어난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요새 너무 바쁜 거 아니냐, 늘 일찍 나가서 늦게 돌아오는데. 날도 더운데 조심해야지.”
“네. 조심할게요.”
이린은 신기할 정도로 아무것도 묻지 않는 아버지를 빤히 쳐다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행선지는 알려 둘까 하는 마음과 혹시라도 누군가 동굴에 찾아오면 옛 스승을 만날 가능성이 사라질까 하는 불안에 마음이 갈팡질팡했다.
“네가 뭔가 기연을 얻었다는 건 네 오라비에게 들어서 나도 알고 있으니 더는 추궁하지 않으마. 기연 만나고 나선 지들만 어디 틀어박혀 수련한다고 안 나오고 보이지도 않고 그러는 경우가 있다는 것도 잘 알고. 하지만 적어도 가족들에게 걱정은 끼치지 말렴.”
“네. 아빠.”
다정한 연적훈의 말에 이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참, 그리고 오빠한테서 서신 도착했어요.”
“역시 너한테만 온 거냐…….”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정말 이린에게만 오자 연적훈은 삐진 듯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이어지는 이린의 말에 다시 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여성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어요.”
“정말이냐?”
“네. 아미파 고수와 만나서 비무했대요.”
못미더워하면서도 궁금해하며 몸을 기울이던 연적훈은 이어지는 이린의 말에 힘이 빠져 고개를 숙였다.
“아니, 강호에 여협이 적지 않은데 왜 하필 그중에서도 비구니……. 아니, 아니지. 애인 사귀러 나간 건 아니니까 저게 바른 자세긴 한데…….”
갈등하고 있는 아버지를 보면서, 이린은 웃으며 식사를 계속했다.
연가장은 오늘도 평화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