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Goddess RAW novel - Chapter 77
77.
서문민영이 연가장을 떠날 거라는 건 아이들에게는 조금 나중에 알리기로 했다. 다들 외로운 아이들이라 서로 정이 듬뿍 들어 있다 보니 떨어지게 될 거라고 하면 괜히 우울해할 것 같았으니까. 그래서 적어도 서문제우가 집과 세간을 적당히 준비해 민영을 데려올 준비를 어느 정도 마친 다음에 알리기로 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서문민영이 서문제우와 독립하는 일은 생각보다 늦어졌다.
길어야 몇 개월 정도 지나면 정리될 거라 생각했는데 서문제우의 일이 약간씩 꼬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사실 그 원인은 이린이 서문제우에게 부탁한 일과 연관되어 있었다.
‘아저씨가 이렇게까지 무리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서문제우는 이린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가끔씩 딱히 그가 갈 필요는 없는 지역으로 표행을 떠나곤 했는데, 이린이 말한 인물들이 저마다 어딘지 딱한 사정들이 있는 걸 알게 되고는 이제는 꽤 자의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좋은 일이라면 좋은 일이지만.’
연가장에 투신하더니 물들었다고 주변에서 수군거릴 지경이라 하니 이린은 약간 찔렸지만 뭐, 아저씨의 평판이 좋아지는 것이니 나쁜 일은 아니었다.
“민아 아빠가 좋은 일 많이 하고 계시대.”
“정말?”
“그래.”
민아의 장래를 생각하면 아무래도 그 아버지인 서문제우의 평판이 좋아야 하지 않겠는가. 사실 이전의 서문제우는 그렇게까지 평판이 좋은 인물은 아니었다.
욕을 먹을 만큼 나쁜 짓을 저지르지는 않았지만 표국을 세우고 운영하는 동안 여러모로 마찰을 겪어 왔기에 부정적인 인상을 가진 사람도 꽤 많았다. 게다가 민영의 약값이나 영약을 구하겠다고 다소 무리한 운영을 해야 했으니 주변의 평판을 살필 여유도 없었던 모양이었고.
연가상단과 연을 맺고 민영에 대한 걱정도 덜은 데다, 주변 잡음이 줄었으니 조급한 운영을 해야 할 이유도 없어졌다. 거기에 자신의 평판이 좋아졌다는 사실에 신이 났는지 서문제우는 이린에게 또 해야 할 일이 없냐고 먼저 재촉할 정도였다.
‘이것 참. 어렵네.’
그리고 이린의 머리는 조금 복잡했다.
언제, 어디에서, 누구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는 미리 알고 있다 해도 과연 그 사람이 지금 시간대에도 그 장소에 있을 것인가.
이린에게 가장 어려운 부분이었다.
기왕이면 혈교가 눈독들이기 전 일찍 싹을 잘라 버리는 것이 좋았지만, 서문제우를 헛걸음시켜서야 자신뿐만 아니라 그까지 이상한 사람이 되어 버린다.
특정 문파에서 특정 인물에게 일어나는 일이라면 참 쉽지만 세상일들이 참 그렇지가 않다.
이린이 이번에 서문제우에게 가르쳐 준 이를 찾는 것은 실은 살짝 모험에 가까웠다.
‘지금 그곳에 있을지 확실하지 않으니 일단 조용히 소재만 파악해 주세요.’
그리고 마침 이린이 말한 절강성(浙江省)으로 가는 표물을 싣고 표행을 떠난 서문제우는 뜻밖에도 갑작스러운 장기 휴가를 청했다.
상단과 아버지 연적훈을 통해 그 사실을 들은 이린은 불안감에 가슴 졸여야 했다.
안 그래도 호남 장사에서 절강성 항주(杭州)까지는 가까운 길이 아니었기에 서문제우가 직접 보낸 서신이 이린에게 도착하는 데에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이유도 말하지 않고 무작정 장기 휴가를 낸 서문제우는 나중에 제대로 설명해 드리겠노라며 그저 잘 지내고 있다는 안부 서신만은 뜨문뜨문 보내왔다.
이린에게도 직접 서신을 보냈는데 민영을 염려하는 구구절절한 문장 중간에 이곳에서 우연히 병약한 아이를 보았는데 딸아이 생각이 나 가슴이 아프다는 내용이 섞여 있었다. 이를 놓치지 않은 이린은 그가 지금 어쩌면 자신이 말한 이들을 찾아갔다 혈교의 인물들과 마주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신으론 괜찮다고 하시지만 역시 걱정이에요.”
“아무래도 무슨 일에 휘말린 것 같구나.”
하지만 연가장에 직접 도움을 청하지 않는 이유는 지금 그가 휘말려 있는 일이 개인적인 일이라서, 혹은 연가장을 끌어들이고 싶지 않아서, 둘 중 하나일 터였다.
‘그렇다면 당연히 후자겠지.’
그가 항주에 간 이유는 이린의 청 때문이었고, 서문민영을 보호하고 있는 연가장이 위험한 일에 얽히는 것을 바라지 않을 테니까.
한동안 감숙성이나 사천성의 험지에도 자청해서 다녀와 주변에 인망이 높아진 참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맡겨 놨던 딸아이를 데려오기 전 마지막으로 항주행을 떠나겠다는 데 굳이 반대한 이는 없었다. 다들 딸아이를 데리고 다니기 전 혼자 다녀오고 싶었나 정도로 생각했으리라.
‘제발 무사히 돌아오세요. 아저씨.’
가벼운 마음으로 위험한 일을 부탁했다는 죄책감에 이린은 한동안 민아를 볼 때마다 미안해해야 했다. 그리고 다행히도 수개월 뒤 서문제우는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심려를 끼쳤습니다.”
“무사히 돌아왔으니 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나 말해 보게.”
아빠를 거의 1년 가까이 보지 못했던 민아가 원망의 눈물을 쏟으며 떼를 쓰는 것을 다 받아 준 후에야, 서문제우는 연적훈에게 사실을 털어놓았다.
“실은 항주에서 저를 속인 그놈들과 우연히 마주쳤습니다.”
“정말인가!”
서문제우와 연적훈의 대화를 옆방에서 민아를 재우며 엿듣고 있는 이린은 한숨을 내쉬었다.
‘거기서 혈교가 딱 작업할 때 마주친 건가.’
우연이 아닌 동시에 우연이었다.
이번에 서문제우가 만나러 갔던 이는 어린 아들 하나를 홀로 키우고 있던 서생이었다. 그는 아들의 원인 모를 병증에 가산을 탕진하고 괴로워하고 있었고, 그런 서생에게 혈교가 접근하던 중 마침 재수 없게 서문제우와 마주쳐 정체가 들통 난 셈이었다.
“무림맹에 급히 도움을 청했습니다만, 무림맹에서 바로 사람이 파견 나올 거 같지는 않아 제가 그 서생의 집에 머물며 한동안 부자를 지켜 주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천운(天運)일세. 그들은 잡았는가?”
“개방에서 어찌 포위했던 모양인데 놓쳤다고 합니다.”
“대체 뭐 하는 자들인지 모르겠군.”
걔네 혈교래요.
말해 줄 수도 없고. 말한다고 믿을 리도 없고. 이린만 속이 답답했다.
“그래서 그 서생 부자를 두고 올 수 없어 데리고 오게 되었습니다.”
“그야 자네 입장에서는 남 일 같지 않았겠지. 어떤 사람인가?”
“본인이 밝히고 싶지 않은 듯해서 그리 캐묻지는 않았습니다만 듣기로는 본래 항주에 유서 깊은 가문 출신이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집안은 몰락하고 부인도 잃고 아이까지 아파 처지가 곤궁해진 모양입니다.”
“저런. 아이는 어떠한가.”
“그것이, 무림맹 무사들의 도움을 받아 항주를 떠나 다른 의원의 진료를 받자 생각지도 못하게 금방 나았습니다.”
사실 이린이 구해 달라고 부탁하긴 했지만 그들 부자가 혈교에게 왜 노려졌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렇기에 서문제우의 말은 이린에게도 의문이었다.
‘뭘까……?’
이린이 아는 것은 그들 부자가 결국 혈교에 의해 살해당한다는 것뿐이었다. 자세한 내막 같은 것은 몰랐다. 단지 후에 밝혀진 일들 중 하나일 뿐으로, 그나마도 지명이 워낙에 유명한 곳이라 기억에 남아 있을 정도인, 혈교에게 피해를 입은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였다.
“공부를 많이 한 서생이라 글이나 셈에도 능하고 아이를 위해 무슨 일이든 하겠다고 하기에 장사 지부장께 상단에서 일할 수 있도록 청했습니다만……. 아무래도 수상쩍은 자들에게 노려지는 처지이다 보니 장주님의 인가를 받는 것이 도리일 듯싶어 청을 올립니다.”
“장사 지부장이 괜찮다고 생각했다면 나도 허가하네. 그보다 나는 분명 전권을 위임했는데 왜 자꾸 나한테 묻는 건가들? 차라리 장사 지부 경비 담당인 마련야장께 여쭙든가.”
“그분은 너무 신경도 안 쓰시는 분이라…….”
이미 연가상단에 맡기고 여기까지 찾아온 모양이라 이린도 복잡한 마음으로 머리를 굴렸다.
‘좀 더 안전한 방법은 없을까.’
이린이 간섭할 수 있는 범위는 거의 호남과 인근으로 한정되어 있으니 나머지는 개방이나 하오문을 통해 무림맹에게 맡겨야 하는데……. 이번처럼 우연히 혈교의 모습을 잡은 경우가 아니면 대부분 개인사로 시작되기 때문에 그들에게 떠넘기기 어려웠다. 이번 일도 실상 그들과 얽힌 서문제우가 누명을 벗고 살아 있기에 그들의 존재를 알아챌 수 있었을 뿐이지 그들을 찾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만일 이런 일이 또 반복되어선 서문제우의 안위가 위험했다. 본인이야 이번에 자신을 속인 자의 흔적을 찾아 불이 붙어 있는 모양이지만 서문제우에게는 어린 딸이 있었다. 복수 때문에 신변이 위험해질 만한 행동을 해도 되는 처지가 아니었다.
‘우리 집을 너무 믿고 있는 거 아냐?’
물론 이번에는 민영과 비슷한 처지로 보이는 아이 때문에 더 신경이 쓰였겠지만.
‘서문제우가 그들의 뒤를 쫓는 건 납득이 갈 테고, 연가장이 여기저기 퍼 주는 거는 흔한 일이라 아직까지 그리 의심을 사진 않겠지만.’
아직까지는 혈교가 찾기 전에 이린이 선수 친 모양이지만 이렇게 직접 부딪치는 일이 또 생겨선 위험했다.
‘한동안은 좀 조심하자.’
잘못하면 서문제우가 표적이 된다.
혹은 연가장이.
‘또다시 연가장을 위험하게 할 순 없어.’
한숨과 함께 이린은 편안한 얼굴로 쿨쿨 잠들어 있는 민영의 등을 도닥였다.
이제 서문제우를 따라 떠나면 한동안은 보지 못하겠지.
‘민아의 아빠도, 위험하게 하진 않을게.’
사실 이린 역시 아직까지 그들의 목적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확실한 건 그들이 언젠가 그 동굴을 노릴 거라는 사실뿐이었다.
서문제우는 며칠간 머무르다 서문민영을 데리고 연가장을 떠났다.
연적훈은 이린과 의논한 대로 민영과 친하게 지냈던 연가장의 아이들을 함께 보냈다. 어차피 언젠가 그들도 밖에 나가 봐야 할 테니 이것도 나쁘지 않은 기회였다.
연가장에 들어온 이후, 아니 태어나서 처음으로 장사까지 가 보게 된 아이들의 얼굴에는 화색이 만연했다.
“언니도 같이 가면 좋을 텐데.”
“민아도 가고 나면 우리 아빠도 쓸쓸해지니까 언니는 집에 있어야지.”
“응.”
이린은 서운해하는 서문민영을 꼭 끌어안으며 달랬다.
“몇 년 지나면 언니도 민아네 놀러 갈게.”
“정말이지?”
“그래. 민아도 가끔 아빠 따라서 오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린도 어릴 때 장사까지 여행을 해 본 몸이라 그게 그리 쉽지 않은 길임은 알았다. 건강한 이린은 몰라도 민아는 병약했던 시절이 워낙 길었으니.
“다음에 볼 때까지 건강해야 한다?”
“응!!”
민영이 마차에 오르고, 장원에 남겨진 아이들에게 마지막까지 잔소리를 하던 자영이 이린을 못미더운 얼굴로 보며 당부했다.
“아가씨, 사고 치시면 안 돼요.”
“무슨 말인지.”
“애들은 아가씨 말이 법인 줄 알고 따르니까 아가씨가 뭘 하셔도 막을 수가 없다고요.”
“모처럼 장사까지 가는데 가서 잘 놀다 와.”
“아가씨!”
들은 척도 안 하는 이린의 이름을 한숨 쉬며 부르는 자영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