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Goddess RAW novel - Chapter 8
8.
[그럼 오빠는?] […린아.] [나는 검 같은 거, 무공 같은 거 이제 안 할 거야.]언제나 흔들림 없던 오빠의 검이 요새 불안정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이린은 오빠가 맴돌고 있는 부분을 가르쳐 주고 싶었다.
최근 오빠는 허점투성이였으니까, 깨닫고 나면 금방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오빠를 이겨 버리고, 평소와는 다른 오빠의 얼굴을 보고 나서야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이현의 검이 한참 동안 정체되어 있던 원인은 이린 자신이었다.
그날부터 이린은 검술 훈련에 나가지 않았다. 장원의 무인들에게 훈수를 두는 일도 없어졌다.
낮에는 몰래 집을 빠져나가 홀로 산을 쏘다니다 어두워질 때쯤 집에 돌아오곤 했다.
오빠가 집에 없을 때는 다른 양갓집 규수들처럼 수를 놓고 집안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현은 도망 다니는 이린을 설득하기 위해 뛰어다녔지만 이린의 고집을 꺾지는 못했다.
그러다 결국 세상을 보고 돌아오라는 아버지의 명으로 그대로 강호행을 떠나야 했다.
몇 년 후 연가장으로 돌아온 이현과 이린의 사이는 예전 같지 않았고, 이린은 그날 이후로 검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누구보다 가까웠던 오빠와도, 평생을 함께할 거라 믿었던 검과도 헤어지고 그렇게 이린의 세상은 반쪽이 됐다.
‘내가 그때 계속 검을 배웠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날 지현문에 따라가는 건 이현이 아닌 이린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둘 중 하나가 가문에 남는다 해도, 과거 무술을 하지 못하는 자신이 가문을 맡았을 때보다야 사정이 나았을 테지.
하지만 그 때문에 오빠가 예전처럼 방황하는 걸 보고 싶지는 않았다.
진지하게 검을 배우라고 설득하는 이현을 보며, 이린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볼게.”
“그래. 어릴 적부터 이미 체력 단련은 충분히 해 와서 기본은 잡혀 있으니 금방 배울 거야.”
자신의 대답에 기쁜 듯 활짝 웃는 이현을 보자 코끝이 찡해지며 또 후드득 눈물이 흘렀다.
“왜 또 우는 거야.”
“아니… 울려는 거 아닌데…….”
눈이 마주치니 자꾸 눈물이 떨어져 스스로도 당황스러웠다.
정작 두 사람의 시신을 확인할 때도, 장례식 때도 울지 않아서 독한 여자라는 둥 실은 장주 자리를 노려 왔던 거 아니냐는 둥 뒷말도 많이 들었는데.
‘왜 이렇게 눈물이 나지.’
이현이 이린을 달래려 품에 안은 덕분에, 귓가에 쿵쿵 뛰는 오빠의 심장 소리가 들려왔다.
따뜻한 온기와 심장 박동에 오빠가 살아 있다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지는데도 자꾸 눈물이 흘렀다.
“역시 좀 더 잘래? 오랜만에 오빠가 재워 줄게.”
“싫어. 밖에 나갈래.”
“이렇게 울면서?”
“밖으로 나가면 안 울 거야.”
자꾸 이렇게 토닥여 주는 사람이 있으니 더 눈물이 나는 것 같아서, 이린은 차라리 멀쩡한 연가장의 풍경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졌다.
“괜찮으세요. 아가씨?”
잠옷 차림으로 나갈 수는 없어서 옷을 갈아입던 이린은 머리가 빙빙 도는 것을 느끼며 휘청거렸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옷을 입느라 낑낑거리는 이린의 시중을 들며, 자영은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매일 이린의 시중을 들던 자영의 입장에서는 이린의 갑작스러운 감정 변화가 당혹스러울 만도 했다.
“자영.”
“네, 아가씨.”
지금의 자신과 비슷하게 볼살이 통통하게 오른 귀여운 얼굴의 자영을 보며, 이린은 기억 속 이린의 모습을 떠올렸다.
[제가 아가씨를 두고 어딜 가요.]많은 사람이 한순간에 장주와 소장주를 잃고 흔들리던 연가장을 떠날 때도 고집스레 이린의 곁에 남아 있던 사람 중 하나였다.
갑작스레 장주가 된 이린 곁을 지키기 위해 늦은 나이까지 혼인도 하지 않고 곁에 남아 줬던 자영.
자영을 보자 또 코끝이 찡해졌다. 이린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시선을 피하며 물었다.
“자영이 지금… 몇 살이지?”
“아가씨보다 두 살 많은 열 살이잖아요. 괜찮으세요?”
“괜찮아.”
흐트러져 있는 이린의 머리카락을 다듬는 자영을 보며 이린은 속으로 사죄의 말을 건넸다.
‘미안해. 지켜 주지도, 제대로 복수해 주지도 못하고… 시신조차 수습해 주지 못했어.’
아버지와 오라비는 적어도 시신을 수습해 장례까지 치러 주었건만, 마지막까지 함께 고생해 준 장원의 식구들에게는 아무것도 해 주지 못했다.
이린은 자영의 최후를 기억하고 있었다. 자영과 함께 이린의 시중을 들던 이수가 갑자기 칼을 들고 이린에게 달려들자, 망설임 없이 이린의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 대신 목숨을 잃었다.
장주 자리를 이은 후, 다시 검을 익혔던 이린 역시 바로 검을 뽑아 이수를 베었지만 그걸 복수라 부를 수는 없었다.
이수만이 아니었다. 그간 장원의 식구라 여겼던 이들이 방금 전까지 웃으며 대화하던 이에게 비수를 꽂았다.
무림맹에서 온 이들은 이린을 도와 장원에서 탈출했다. 그러고는 저들의 목적은 비고(秘庫)일 테니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먼저 확인해야 한다며 동굴로 안내하도록 했다.
도중에 이린이 뭔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눈치채자, 그들 중 반수 이상이 또다시 검을 들이댔다.
‘처음부터 목적은 그 동굴이었지.’
눈물을 참기 위해 서둘러 옷을 갈아입은 이린이 자영과 함께 방을 나서자, 기다리고 있던 이현이 다가왔다.
일방적으로 오랜만에 보는 오빠에게 어쩐지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진 이린은 뻔뻔하게 팔을 뻗었다.
“기운 없어. 안아 줘.”
“오늘 정말 이상하네. 많이 안 좋아? 역시 의원을 부를까?”
“그냥 좀 기운이 없는 거지, 아픈 거 아냐.”
갑작스러운 어리광에 걱정스러워하면서도 이현은 군말 없이 이린을 안아 들었다. 7살이나 차이가 나다 보니 어릴 적부터 젖먹이인 이린을 안고 달래곤 했었다. 다만 요즘엔 철 좀 들었다고 이런 어리광을 부리지 않았는데.
걱정스러워하는 이현의 어깨에 매달리자, 곧 익숙한 연가장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갑작스레 장주와 소장주를 잃은 연가장이 흔들릴 때에도 변함없이 연가장을 지킨 장 총관 아저씨의 젊어진 얼굴도 보였다.
연무장에서 땀을 흘리며 수련에 열심인 연가장의 무인들도 하나같이 아버지와 함께 참사를 맞았던 얼굴들이었다.
‘모두 살아 있어.’
장 총관이 이현의 품에 안겨 있는 이린을 보고 웃으며 말을 건넸지만, 이린은 목이 메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아가씨, 오늘은 어쩐 일로 늦잠이십니까?”
“오늘 린아 몸이 조금 안 좋아요.”
“의원을 부를까요?”
“일단은 괜찮은 거 같으니 좀 쉬게 하려고요. 아버지는 지금 어디 계세요?”
“연무장에 계십니다.”
자꾸 눈물이 나올 거 같아 이현의 품에 폭 얼굴을 묻고 있었더니 정말 아파 보였는지 걱정스러운 시선이 따라붙는 것이 느껴졌다. 이린은 빼꼼 고개를 들어 장 총관에게 괜찮다고 손을 흔들어 보였다.
‘장 총관 아저씨도 마지막까지 날 살리려고 했지.’
이린을 탐탁지 않게 여겼던 장원의 무인들도 나중에는 이린를 지키기 위해 무기를 들었다.
7년. 이린이 가족을 잃고 장원을 지켜 온 시간.
힘들게 이뤄 낸 미래는 결국 모두 불타 사라졌다. 그것이 꿈이든 아니든 이린에게는 분명히 존재했다.
“소장주님!”
연무장에 들어서자 이린 또래로 보이는 어린 남자아이가 목검을 들고 이현에게 다가왔다. 제법 준수한 얼굴로 자신을 쏘아보는 건방진 눈매가 매우 익숙했다.
‘광한검(獷悍劍) 진여운.’
별호답게 성깔이 더러운… 아니 사나운 검을 휘두르지만 실력만은 확실해 연가장의 무인들 중 으뜸으로 꼽히던 검수였다.
‘실력은 확실해서 내 남편 후보로 거론됐었지만 성격이 성격이라 아버지도 주저하다 결국 결정은 못 내리셨지.’
아버지는 잘 모르셨겠지만, 어릴 적에는 이린만 보면 잡아먹을 듯 굴곤 했다. 지금처럼.
“소장주님께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
“미안하지만 오늘은 안 될 것 같구나. 다음에 상대해 주마.”
“예.”
이현이 부드럽게 웃으며 거절하자, 시무룩해하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물러났다. 그러나 이현이 아버지를 찾아 고개를 돌리자, 다시 눈매가 까칠해지는 것이 보였다.
‘나한테는 원수 보듯 굴면서 오빠 앞에서는 온순한 양처럼 돌변하는 저 성질머리도 오랜만에 보니 좀 귀엽네.’
자신과 또래였으니 지금 8살이나 9살쯤일 터였다.
“아버지.”
“아, 마침 잘 왔다. 잠시만 이리 좀 와 보렴.”
“금방 갔다 올게. 기다리고 있어.”
“응.”
아버지의 부름에 이린을 내려놓은 이현이 사라지자, 연무장에는 아이들만 남았다. 연가장이 거둔 아이들과 부모가 맡긴 아이들이 뒤섞여 있었지만 이린에게 접근하는 아이는 없었다.
한 명 빼고.
“아가씨는 무공 수련 안 하십니까?”
‘이때도 이미 시비 걸고 있었구나.’
깐족거리는 말투를 숨기려 애쓰고 있지만, 그러면 뭐 하겠는가. 얼굴에 네가 맘에 안 든다고 아주 대문짝만하게 쓰여 있는데.
“안 해. 왜, 불만이야?”
“무가로 이름 높은 연가장의 직계 아니십니까. 당연히 무인이 되실 줄 알았습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니 네가 신경 쓸 일은 아니지.”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을 가다듬으며 심드렁하게 답하자, 어딘지 울컥한 얼굴의 진여운이 애써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모두 무인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아가씨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게 부끄럽지 않으십니까?”
“내가 놀아도 여운보다는 강할 테니 쓸데없는 걱정은 안 해도 될걸.”
“―!”
지금 건 좀 심했나.
어린아이를 괴롭히고 있다는 죄책감도 들었지만, 오래전 겪었던 일을 다시 겪어야 한다는 성가심이 더 컸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래.”
여운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보였지만 못 본 척했다.
“그럼 아가씨께 가르침을 청해도 되겠군요. 한 수 부탁드립니다.”
피하고 싶었지만 진여운이 멋대로 자세를 잡는 것이 보였다. 아직 기초 단계를 익히고 있는 어린아이다 보니 검을 들고 있진 않았다.
‘지금 이 몸으로는 무공을 제대로 익힌 게 없지만.’
이린은 자신의 근골과 재능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아무리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 해도, 어릴 적부터 거의 습관적으로 단련해 온 몸이었다. 머릿속에만 있는 무공을 운용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터.
‘상대가 어른도 아니고 또래 어린아이라면 그리 힘들진 않을지도.’
자신의 예상이 빗나간다 해도 여운이 이린을 팰 정도로 경우가 없는 놈은 아니었다. 곧 오빠도 돌아올 테니 존경하는 이현 앞에서 그 여동생을 팰 수 있을 리도 없고.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