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Goddess RAW novel - Chapter 80
80.
“으음. 확실히 지나친 과보호는 좋지 않지.”
오빠가 할 말이야?
본인은 전혀 자각이 없어 보이는 이현을 보니 아마 연적훈도 마찬가지일 거라 짐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으으으, 큰일이네. 아빠랑 오빠한테서 벗어날 방법이 보이질 않아…….’
혈교에게 들키지 않도록 우회하는 건 강호행에서 돌아오며 친구들을 데리고 온 오빠 덕분에 생각보다 쉽게 해결했는데.
‘은근히 지역이 여기저기 퍼져 있어서 다른 사람한테 들은 일인 척 오빠한테 떠보거나 사람 고용해서 적당히 귀에 흘러들어 가게 했지.’
연이현 본인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사람을 도와 왔기 때문일까. 하나같이 이린이 잘 모르는 사람을 도와주고 싶다고 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 오빠 친구들 온다며?”
“응. 린아, 그때 본 오빠 친구들 기억해?”
“오빠, 내가 기억력이 좀 좋아.”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히죽거리는 이린을 보며 이현이 해맑게 웃었다.
“맞아. 우리 린아가 참 머리가 좋지. 누가 가르치지도 않은 책들 내용도 다 꿰고 있고, 어느새 온갖 책들을 줄줄 외우고 있고. 아버지도 깜짝 놀라시더라.”
“아, 음, 아니, 그런 거 말고. 아무튼.”
그거야 옛날에 다 배우고 외운 거라 그렇고.
‘……근데 그거랑 똑같은 게 맞네.’
이린 자신이 예전에 동굴에서 만났던 스승과 이번에는 만나지 못했던 것처럼, 어쩌면 오빠도 예전의 그 친구들과 똑같이 만나지는 못하지 않을까 은근히 미안해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현은 이린의 기억에 있는 그의 친구들을 모두 똑같이 데려왔다.
‘사람 인연이라는 게 정말 있구나 했지.’
옥소공자 백리한, 철비도 봉원우, 천뢰검 심여준, 그리고 곤륜파의 청운진인.
거기에 연이현과 가장 오랜 벗인 형산파의 노악까지 모두 연이현의 마지막까지 함께했던 이들이었다.
‘예전에는 얼굴들은 둘째 치고 성격이 험악해서 그다지 가까이하지 않았지만.’
생각해 보니 딱히 그렇게 못생겼다고 말할 만한 사람은 없었는데 다들 성격들이 그렇다 보니 얼굴은 아무래도 좋았달까. 애초에 연적훈과 연이현을 보고 자란 이린의 눈은 높고 높을 수밖에 없었다.
“오빠 친구들이 마음에 안 들어?”
그런 이린의 얼굴을 읽기라도 한 듯 이현이 곤란한 듯 웃으며 물었다. 친구인 것과 별개로 이현은 자신의 벗들이 대체로 어린 소녀에게 그리 호감을 살 만한 성격들이 아니라는 것은 인지하고 있었다.
“아니야 오빠가 좋으면 됐지.”
벗과 생사를 함께하는 사람이 어디 흔할까. 오빠가 어디든 망설임 없이 뛰어들 성격이라 걱정했는데 다행히 함께해 주고 말려 줄 사람이 하나라도 더 있다니 조금 안심이 되기도 했다.
‘전에는 좀 데면데면했지만 이번에는 좀 잘해 줘야지.’
이린은 오빠의 손을 꼭 잡으며 걱정 말라는 듯 웃었다.
“그래도 오빠 친구니까 친하게 지내볼게.”
“그래, 린아한테는 다들 아저씨뻘이니까 편하게 지내. 나중에 린아도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으면 좋겠다.”
“……? 응. 그럴게.”
예전에 노악에게 아저씨라고 부른 것을 기억한 것인지 아저씨뻘임을 강조하는 이현을 보며 이린은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무 버릇없이 굴지 말라는 뜻인가? 하긴 그때는 어린애였지만 지금은 많이 컸으니까 그렇게 대하면 안 되겠지? 오빠보다 연상인 사람들도 있고.’
오빠의 친구는 어디까지나 오빠의 친구, 친구의 여동생은 여동생.
그 두 가지가 선을 넘는 일은 결단코 일어날 수 없었다. 이현의 양보할 수 없는 일선을 모르는 이린은 그저 자신이 너무 버릇없이 굴까 봐 오빠가 걱정하나 보다 정도로 이해할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오빠 친구들 중에는 노악 아저씨네랑 곤륜파 외에는 구파일방 사람은 없네.”
“없는 건 아닌데 아무래도 그런 문파의 일원들은 좀 더 규율이 엄격하거나 맡은 임무가 있는 경우가 많아서 여기까지 함께 오기는 힘들지.”
“……하긴, 오빠 친구 많았지.”
저 얼굴에 저 성격에 저 능력에 친구가 없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지.
“그러고 보니 아빠도 친구…… 많을까?”
“글쎄……?”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별로 본 적이 없는 거 같기도 하고……?
소싯적에 연이현과 비슷한 명성을 뿌렸던 연적훈은 자식들이 품은 뜻밖의 의문에 어이없어했다.
“니들은 대체 아빠를 뭐로 보고.”
“하지만 아빠 찾아오는 친구분도 별로 없으시고.”
“서신 주고받는 것도 거의 일 관련이고.”
주거니 받거니 사이좋은 오누이를 보며 연적훈은 끙 소리와 함께 잠시 대답을 찾다가 이내 포기하고 한숨만 내쉬었다. 아들이 돌아오고 셋이 함께 식사를 하는 건 좋은데 둘이서 종종 이렇게 아빠를 괴롭힐 때면 일찍 떠난 부인이 그리워지곤 했다.
“바빠서 연락을 못 하고 있을 뿐이지 없는 게 아니란다. 너희들도 나중에 이 애비 나이또래가 되면 알게 될 게다. 게다가 장원에서 떠날 수가 없으니……. 이현이 너, 얼른 장주 자리 가져가 버려라. 애비 좀 놀게.”
“소자가 아직 어리고 미욱하여 배울 것이 많습니다. 아버지.”
“어휴, 놀 수 있는 것도 정말 복이다.”
젊은 시절 제대로 누리지도 못하고 일찍 장원을 물려받아 지켜야 했던 연적훈은 투덜대며 한탄했다.
그리고 식사가 끝나자 네가 노는 꼴은 못 보겠다는 듯 그대로 이현을 끌고 가 버렸다.
‘할아버지 할머니 얘기도 좀 듣고 싶었는데.’
일찍 돌아가셨다는 건 아는데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워낙에 장원에서 오래 일한 사람은 많지가 않고 장 총관 아저씨도 아빠가 주워 온 사람이니 그렇게 아는 게 많을 것 같지는 않았다. 워낙에 바쁜 것은 똑같기도 하고.
‘으음, 일단 나도 일 좀 해 볼까.’
공부를 안 해도 어지간한 교양은 이미 제대로 익히고 있는 데다 무공은 알아서 수련하고 있는 이린의 생활은 태반이 자유 시간이었다.
이린은 식사를 마치고 방에 돌아와 자영이 주는 차를 마시며 물었다.
“자영, 회연이랑 고운은?”
“아가씨가 시키신 일을 하고 있다던데요? 그러고 보니 전부터 궁금했는데 대체 뭘 시키시는 거예요.”
“으음. 일?”
달리 설명할 방도가 없는 이린은 어이없어하는 자영에게 빈 찻잔을 돌려주고 아이들에게 할당된 방으로 향했다.
이린은 4년 전 장사에 데려온 회연, 고운, 하만, 오월 4명의 아이들에게 글을 배우게 했는데, 그중 회연과 고운이 제법 문재(文才)가 있어 좀 더 글을 익히도록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고운은 어린아이답지 않게 글씨를 잘 쓰는 데다 필사도 곧잘 했기에 이린은 약간 위험하고 어려운 일을 부탁해 두었다.
“회연, 고운. 여기 있니?”
“네, 아가씨.”
이린이 문 앞에서 이름을 부르자 회연이 나와 문을 열고 이린을 맞았다. 그리고 그 옆에는 오월이가 함께였다.
“아, 월아도 여기 있었구나.”
“네. 연 언니한테서 글 배우고 있었어요.”
끼이-
끼이이-
그리고 이린이 식사하는 동안 격리되어 오월이와 함께 놀고 있던 청아, 홍아가 이린을 보자마자 빽빽 소리를 질러 댔다. 하루 이틀 일도 아닌데 자기들을 떼어 놓는 것이 억울한지 고개를 들고 항의하는 모습이 웃기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오월이의 어깨 위에서 상체(?)를 들어 올려 뒤로 기울인 후 반동을 이용해 이린의 팔로 이동하는 두 마리의 뱀을 하나같이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덕분에 대화가 끊긴 세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뱀도 뛰어 오를 수 있네요.”
“으음. 좀 다른 거 같긴 한데. 그러게.”
살면서 뱀을 자세히 들여다볼 일이 그리 많지 않다 보니 다들 좀 멍청한 눈으로 이린의 팔로 올라가는 뱀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 들어가자.”
“아, 네.”
역시 가장 익숙한 이린이 먼저 정신을 차리고 안으로 들어가자 아이들은 따라 들어오지 않고 문을 닫은 후 밖에 대기했다. 아이들이 문을 닫는 것을 확인한 이린은 병풍 뒤에 숨겨져 있는 문을 하나 더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아가씨.”
숨겨져 있던 방 안에서 누군가가 이린을 맞았다.
밖에서 들려온 소리 덕분에 이린의 방문을 먼저 알고 있던 고운이 붓을 갈무리하고 일어나 기다리고 있었다. 침착하게 있으려 노력하고 있지만 고운의 눈동자가 방금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궁금해하는 듯했다. 이린은 빙그레 웃으며 아이가 쓰고 있던 책상 옆으로 다가갔다.
“청아, 홍아. 운아한테 가 보렴?”
예전에 오월이가 청아를 데려왔던 일도 있고, 장원에서 이린과 함께 지내며 이미 뱀들과 익숙해져 있는 고운은 흥미진진한 얼굴로 뱀들을 응시했다. 청아와 홍아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끼이이-
끼이-
소리만 들으면 반항하는 거 같은지만 청아, 홍아는 이린의 말대로 순순히 고운의 어깨로 뛰어내렸다.
“우왓!”
“뱀이 이렇게 뛰어내리는 건 처음 보지?”
“……네.”
청아와 홍아도 이제는 익숙한 고운의 어깨에서 끼이끼이 소리를 내려 애교를 부렸다. 저 두 마리 때문에 이 장원 사람들 일부는 뱀에 대한 감각이 살짝 왜곡되고 있는 것 같아 이린은 나중에 뱀에 대한 상식을 재교육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나도 평범한 뱀을 본 기억이 별로 없네.’
전에 남궁세가에서 본 독사들 외에는 산에서도 못 봤다. 주의력 부족이라 못 본 건지 그냥 산에 뱀이 잘 없는 건지.
“그래. 지금 어느 정도까지 진척이 됐니?”
뱀들이 보여 준 뜻밖의 재롱에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도 고운은 흔들림 없이 자신의 어깨에 착지한 청아, 홍아를 무시하고 침착하게 대답했다.
“며칠만 더 있으면 모두 필사할 수 있을 겁니다.”
“점점 빨라지는구나.”
그렇게 말하며 이린은 고운의 책상 위에 있던 천자문이니 시경이니 하는 위장용 책들을 치우고 그 밑에 있는 다른 책과 종이 뭉치를 꺼냈다.
“필체도 많이 비슷해졌구나. 내가 시킨 거지만 다른 글을 쓸 때는 이 필체가 나오지 않도록 조심하렴.”
“네, 아가씨.”
차분하게 자신이 적어 준 내용이 제대로 기술되어 있는지 확인하고 있는 이린을 보며 고운이 떨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고는 결심한 듯 심호흡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