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Goddess RAW novel - Chapter 85
85.
“이제 제 말이 괜한 참견이 아니라는 걸 인정하시겠죠?”
“으, 크읍, 네. 아가씨.”
지금 이린에게 맞아 쓰러져 있는 사람은 장원에서 적당히 중간 수준에 속하는 이들 중 하나였다. 이린이 그보다 강하다는 사실에 다들 살짝 충격받을 정도의.
‘괜히 오빠랑 비교되는 것도 좋지 않고. 본 실력 내보여서 너무 눈에 띄는 것도 좋지 않지.’
명성이 높아지면 그만큼 시선이 모인다. 안 그래도 외모만으로도 튈 텐데 이 이상 튀어서 좋을 게 없었다.
실은 연이현의 여동생이라는 것만으로도 시선을 모으겠지만, 밖에 나가 본 일이 별로 없는 이린은 아직 거기까지 생각하진 못하고 있었다.
“수련에 정진하시길. 너희들도.”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아이들에게 시선을 돌리며 싱긋 웃는 이린의 한 마디에, 쓰러져 있던 무인뿐만 아니라 멍하니 쳐다보던 무인들과 수련생들이 후다닥 흩어졌다.
그리고 새삼 놀랄 것도 없는 진여운은 이린에게 다가와 언제나처럼 물었다.
“대련을 청해도 되겠습니까?”
“안 돼.”
“아, 왜요!”
“바빠.”
이린이 방금 적당히 손봐 준 무인이 자신보다도 약하다는 걸 알고 있는 여운은 억울했다.
‘내가 너보다 센 거 알려지면 귀찮아진다고.’
이린이 눈을 번뜩였지만 대체 아가씨가 실력을 감춰서 뭐 하려고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여운이 포기하지 않고 소곤거렸다.
“왜 그렇게 싫어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아가씨께서 저보다 강한 거 소문낼 겁니다.”
“이러나저러나 똑같잖아. 나중에 장사에 갈 때 데려가 줄 테니까 참아.”
이린의 회유에 여운이 뚱하게 되물었다.
“그게 저한테 뭐가 좋습니까?”
“싫으면 말고. 채석은 데려갈 거니까.”
채석의 이름이 나오자 여운의 눈썹이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저 나름으론 표정을 감춘다고 감추는 모양인데 얼굴에 훤히 드러나는 것이 심히 걱정됐다.
“아가씨!”
“뭐야. 석이는 거기 출신이라 친구들 많으니까 가끔 좀 만나라고 데려가는 건데 왜 과민 반응이야?”
“그런 거 아닙니다. 아가씨가 자주 데리고 나가시니 그놈이 헛바람이 들어서 말을 안 듣는 거 아닙니까.”
“내 외출이라고 해 봤자 그렇게 잦은 편도 아닌데……. 교육도 좋지만 너무 괴롭히지 마.”
이린의 말에 울컥한 진여운이 반발했다.
“괴롭히는 거 아닙니다.”
“원래 때리는 사람들은 다 그렇게 말해.”
나도 너 좀 때려 줄까? 괴롭히는 건가, 아닌가?
이린의 대련과 폭행을 둘 다 경험해 본 적이 있는 진여운은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이린이 늘 차분해 보이지만 가끔 잘못 건드리면 무자비한 폭행을 가할 수도 있는 사람이라는 걸 다년간 몸으로 겪어 온 산증인이었다. 유독 자신에게만 더 무자비하다는 걸 느끼고 있었지만 철없는 어린 시절, 이린한테 시비 걸곤 했던 식은땀 나는 기억은 여운의 입을 조용하게 만들었다.
“난 가 볼 테니 애들 좀 잘 가르쳐 줘.”
청아, 홍아가 들어 있는 가방을 챙긴 이린은 이제 주변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몸을 날려 사라졌다.
“아니, 이미 알 사람은 다 알 텐데…….”
굳이 마지막까지 반항하는 사람을 패시기에 군기 잡는 건가 했더니 공포 분위기만 조성하고 가 버리다니.
‘차라리 평소처럼 나를 패는 게 더 효과적일 텐데.’
물론 맞고 싶어 하는 독특한 취미는 없었으니 굳이 말하진 않았지만.
어쨌든 간에 연이린은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런 연무장의 모습을 지켜보던 연적훈 역시 비슷한 감상을 중얼거렸다.
“난 쟤가 뭔 생각하고 사는지 모르겠어.”
“저도 장주님이 뭔 생각하고 사시는지 잘 모르겠는데요.”
이린이 장원의 무사와 대련한다는 하인들의 말에 걱정되어 달려간 연적훈은 이린이 자신보다 큰 성인 남성을 가볍게 쓰러트리는 것을 보고는 걱정되는 듯 안심되는 듯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런 연적훈 옆에서 마찬가지로 별로 놀라지도 않은 장 총관이 뚱한 얼굴로 자연스럽게 딴지를 걸었다.
“쟤는 누굴 닮았는지 원.”
“……정말 몰라서 하시는 말씀이십니까?”
“뭐가?”
어이없어하는 연적훈에게 장 총관이 더 어이없다는 듯 떨떠름하게 답했다.
“다른 건 몰라도 아가씨 성격은 장주님을 제일 많이 닮으셨는데요?”
“뭐? 그럴 리가??”
“뭐가 그럴 리가……. 소장주님보다 아가씨가 장주님 성격 훨씬 많이 닮았습니다. 거참 정작 본인이 모르시네.”
“으음, 그런가……. 나랑 더 닮았나…….”
뭔가 뿌듯한 듯 히죽히죽 입꼬리가 올라가는 장주를 보며 장 총관은 웃음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장주를 다시 일터로 끌고 갔다. 연가장주는 한동안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았다.
그리고 내심 씁쓸한 기분에 한숨이 이어졌다.
‘그래서 아가씨도 걱정이지만 소장주님이 더 걱정이긴 합니다. 장주님과 아가씨는 그래도 좀 요령이 있는 분이지만 소장주님이 따라가고 있는 그분은…….’
떠오르는 옛 기억에 장 총관의 이마에는 주름이 새겨졌다.
좀 더 이기적인 사람들뿐이었다면 이렇게 걱정되지 않을 텐데. 하필 이 집에 주워진 죄로 이렇게 걱정이 끊이질 않으니 느는 건 한숨과 주름뿐이었다.
* * *
“요새 뭐 하느라 그렇게 바쁜 게냐?”
“네?”
한동안 연적훈이 바빠 함께하지 못했던 세 가족이 오랜만에 단란하게 모여 즐거운 저녁 시간을 가졌을 때였다.
연적훈은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 딸에게 물었고 딸은 어이없다는 듯 답했다.
“바쁜 건 아빠였는데요?”
“그러게요. 한동안 많이 바쁘셨잖아요.”
“아, 뭐 이래저래 바빴지. 근데 린아 네가 요새 나보다 더 바빠 보여서.”
“제가 원래 좀 바빠요.”
당당한 이린의 말에 연적훈도 뭐라 더 따지지 않고 그저 피식 웃었다.
“뭐 알아서 잘하는 거 같다만……. 위험한 일만 하지 말렴.”
“네에.”
뭘 어디까지 눈치챈 건지 몰라 내심 찔끔하면서도 이린은 모르는 척 젓가락만 움직였다. 만약 연적훈이 뭔가 알고 있다면 연가 표국이 고객 정보를 장주에게 무단 유출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비싼 돈 받고 설마??’
보내야 하는 물건이 물건인지라 비밀 엄수를 조건으로 웃돈까지 얹어 줬는데. 아무리 상대가 장주고 의뢰인이 그 딸이라 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뭔지 알았다면 위험하게 무슨 짓을 한 거냐고 캐물으셨을 테니 뭐……. 아니겠지.’
안 그래도 꽤나 장시간이 소요된 노동 끝에 드디어 거대 붕어의 정리를 끝낸 참이었다. 내일 보낼 예정이었는데 시간에 딱 맞춰 다행이었다.
“린아 요새 낚시에 빠졌나 봐요. 만날 생선 잡아 오더라고요.”
“맞다. 요새 계속 생선 요리 올라오던데. 린아가 가져온 거라면서?”
“뭐어, 맛있잖아요. 어쩐지 잘 잡히더라고요.”
실은 악성 재고 처리 중입니다. 하지만 몸에 좋고 맛도 좋아요.
예전에 매일 소금만 쳐서 먹던 때를 생각하면 얼마나 맛있는지. 요즘 이린은 새삼 향신료와 요리의 소중함을 가슴에 새기고 있었다.
“근데 아빠는 왜 그렇게 바빠요?”
“좀 처리해 둬야 할 게 있었단다. 어느 정도 일단락되었으니 이제 한동안은 바쁜 일도 없을 거다. 손님도 올 테고.”
연적훈의 말에 이린은 다가오고 있는 이현의 생일을 떠올렸다.
“오빠 친구들이요?”
“응. 일단.”
일단?
의아해하는 이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연적훈은 심란한 듯 중얼거렸다.
“그리고 린아도, 얼마 후면 강호에 나가 볼 테니까. 준비할 것도 있고 해서.”
“네?!”
뜬금없는 소리에 이린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연적훈과 연이현의 얼굴에 웃음이 터졌다.
“이현이 생일 다음날이 네 생일이잖니?”
“아버지께서 이제 슬슬 데리고 나가도 된다고 하셨거든.”
“어, 정말요?!”
“그래. 흥, 그렇게 나가고 싶다고 매일 얼굴에 써 붙이고 다니는데 어쩌겠느냐.”
자식들 키워 봐야 소용없다고 툴툴거리는 연적훈을 보며 이린이 활짝 웃었다.
“와아. 고마워요, 아빠!”
“이제 좀 컸다고 못 나가게 하면 혼자라도 나갈 기세니 보호자 딸려 보내는 게 낫지.”
“에이, 아빠도 참.”
어떻게 아셨담?
생일 지나고도 못 나가게 하면 적당히 시기 봐서 가출이라도 감행할 예정이었던 이린은 내심 찔려 하면서도 까르르 웃으며 말을 돌렸다.
“그럼 오빠랑 같이 가요?”
“응. 그래서 내 친구들도 부른 거야. 아버지가 나 혼자로는 불안하다고 하셔서.”
“그런가? 오빠만 있어도 될 거 같은데.”
아무리 오빠 친구들이라고 해도 그리 잘 아는 사이는 아니라 좀 부담스러워하는 이린을 보며 연적훈이 고개를 저었다.
“얘가 겁 없는 소릴 하네. 너희들 같은 세상 물정 모르는 부잣집 도련님, 아가씨들이 어정어정 걸어 다니다가 털리는 법이야.”
“아, 걱정하시는 방향이 그쪽…….”
“그래. 그래도 이현이 친구들 중에 세상 물정 밝아 보이는 아이들이 좀 있어 그거 하난 안심이다만……. 음, 그래도 린아 혼자 그 사이에 껴 있으면 심심할 텐데, 지난번에 나갔을 때 친해진 여협이나 소저는 없는 게냐?”
은근한 기대를 담은 연적훈의 말에 이현은 잠시 기억을 더듬더니 고개를 저었다.
“안면만 조금 튼 정도지 그런 부탁까지 할 정도로 가까워진 분은 없어요.”
“……그쪽 의견은 다를 수도 있다만?”
“그만하세요, 아빠.”
부질없는 기대를 담은 연적훈의 질척거림에 이린은 냉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쪽에서야 어쨌든 이쪽이 전혀 마음에 없어 보이는데 폐를 끼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걸로 괜히 빚을 지는 것도 좋지 않고.
“으음. 아직은 여유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너희들이 마음에 맞는 짝을 찾았으면 좋겠구나. 사실 중매결혼은 좀 성가시기도 하고.”
집안에 연륜 있는 어른이 없어서 힘들다고 투덜대는 연적훈을 보고 남매는 키득키득 웃으며 소곤거렸다.
“아빠가 연애 결혼하셨다더니 우리한테도 똑같은 걸 바라시나 봐.”
“어머니가 2년 연상이라 그런가 아버지 꼼짝도 못하셨으면서.”
“아아~ 그래. 그러니까 너희들도 짝은 알아서 찾아오너라.”
당연히 다 들리는 거리라 아이들의 속닥거리는 소리에 연적훈은 삐진 얼굴로 투덜거렸다. 웃으며 시선을 나눈 오누이는 슬금슬금 다가와 한쪽 어깨씩 붙잡고 주무르며 아버지를 달랬다.
“아니 갑자기 뭐가 그렇게 급하세요?”
“흥. 니들이 애비 맘을 어떻게 알아.”
“오빠가 새언니 찾아올 기미가 안 보이면 제가 데릴사위를 찾을게요.”
연적훈은 이린의 말에는 정색하며 답했다.
“넌 또 왜 그렇게 급해? 천천히 찾아. 천천히.”
“와, 아버지. 차별입니다.”
“니들 나이 차이가 7살이나 난다는 거 알고는 있지?”
“그럼 아빠는 제가 7년 후에도 안 가고 있으면 빨리 가라고 하실 거예요?”
“그, 글쎄…….”
7년 후면 이린도 10대 중반. 일반적으로 가야 할 나이니 가야 하긴 하는데…….
어느 쪽도 탐탁지 않은 기분에 아빠의 어깨는 작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