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Goddess RAW novel - Chapter 88
88.
“잘한 거겠지?”
자신이 연가장을 덮칠 불청객의 방문을 늦췄다는 사실을 모른 채 장원으로 돌아온 이린은 뜻밖에도 장원의 시비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아야 했다.
“앗, 아가씨.”
“아가씨, 오셨어요?”
“어서 오세요, 아가씨!”
“뭐야? 왜들 그래?”
중간에 면사를 치우고 돌아온지라 시비들의 수상쩍은 행동을 떨떠름한 얼굴로 바라보던 이린은 장원 앞마당에 쌓여 있는 표물들을 보고나서야 그 이유를 깨달았다.
‘오빠랑 내 생일 선물이 도착했구나.’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붉은 비단으로 포장된 선물 꾸러미로 모두의 시선이 힐끔힐끔 그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이린은 저 물건들을 누가 보낸 것인지 깨달았다.
“이게 사린 언니가 보낸 선물인가 보지?”
“맞아요, 아가씨.”
진사린이 이린의 생일 선물로 귀한 물건들을 보내 주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그러니 이번에는 무엇을 보냈는지 궁금할 수밖에.
“뭐가 그렇게 궁금해?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야, 황룡전장은 엄청 유명한 부호잖아요. 그런 집 따님이 보내는 선물이라면 구경할 만한걸요.”
연가장은 부유하지만 가족들 중 사치하는 취미를 가진 이는 딱히 없어 생활도 대체로 소박했다. 풍성하게 신경 쓰는 건 먹을 것 정도일까?
“구경할 만한 거면 나중에 보여 줄게. 일단 내 방에 가져다 놔 줘.”
“네, 아가씨.”
시비들을 해산시킨 이린은 선물들 대신 진사린이 보낸 서신부터 집어 들어 펼쳤다. 딱 진사린의 성격이 느껴지는 발랄한 필체가 이린을 맞았다.
‘여전히 기운이 넘치네. 잘 지내고 있고, 음……. 드디어 약혼하는구나.’
“오늘 나갔다 오더니 무슨 일 있었니?”
“아니, 아무것도.”
오늘따라 평소보다 말도 없이 묵묵히 식사를 하고 있는 동생을 보며 이현이 걱정스럽게 물었지만 이린은 덤덤하게 고개를 저었다.
연적훈 역시 아이가 기운이 없어 보여 조심스레 물었다.
“곧 떠날 생각을 하니 긴장이라도 한 거냐?”
“그런가 봐요.”
“열 있는 건 아니지? 너무 긴장하지 말고 오늘은 일찍 들어가서 쉬렴. 내일은 손님들도 올 테고.”
“응.”
사춘기 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가족들의 배려로 식사 후 조용히 방으로 돌아온 이린은 쌓여 있는 서신들 중에서도 유달리 고급스러운 비단 배첩 하나를 집어 들었다. 진사린이 보낸 것이었다. 무슨 서신에 비단 배첩까지 하나 싶지만 부잣집이 부티를 내는 방법도 여러 가지였다.
이미 몇 번이나 다시 읽어서 외울 거 같은 서신 내용 중에서도 유독 한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자세한 설명도 없이, 근황을 늘어놓더니 달랑 이거 한 줄. 이린은 저도 모르게 울컥해서 외쳤다.
“아직도 안 했냐고!!”
지금껏 약혼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었기에 당연히 벌써 약혼했다고 생각했는데!
끼??
끼이-??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지른 이린 때문에 졸고 있던 청아, 홍아가 벌떡 일어나 끼이끼이 소리를 내며 두리번거렸다. 당황한 뱀들을 본 이린은 아차 싶어 놀란 아이들을 달랬다.
“앗, 미안해. 잘 자고 있었는데 놀랐지?”
끼이-
끼이-
항의하듯 팔에 매달리는 뱀들을 돌돌 말아 주며 서신과 선물들을 정리하던 이린은 한숨을 내쉬었다.
‘뭐야, 나도 참. 미련이 남았나.’
떠올리지 않은 지 한참 됐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사린에게서 서신이 올 때마다 움찔움찔하는 자신을 자각하고 있던 이린의 미간이 절로 찡그려졌다.
사실 사린 때문이 아니더라도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 동굴에 들어갈 때마다 생각이 나지 않을 수 없었으니까.
‘이건 집착이야.’
상대는 나를 알지도 못하는데 혼자 저쪽이 나를 좋아했던, 이제는 존재하지도 않는 시간을 떠올리며 그리워한다니 입장 바꿔 생각하면 소름 끼치는 일이었다.
“그럴 때도 아니고.”
드디어 강호에 나가 볼 수 있게 되었는데 이런 일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자신의 기억이 맞다면 제갈세가에서 장보도를 도둑맞는 건 내년 일이었다. 그러니 그때까지는 이린도 수련과 정보 수집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 잠시나마 오빠랑 즐겁게 보내 보고 싶었는데.
지금까지 어려서, 예전에는 죽을 때까지 거의 장원에서만 지내느라 강호 경험이란 것이 전무했으니까. 덕분에 들떠 있던 머리에 찬물이 끼얹어진 기분이었다.
‘이번에는 진사린도, 남궁청휘도 안 죽을 거니까! 두 사람은 행복하게 살라고 하고!’
활발한 진사린과 진중한 분위기의 남궁청휘는 분명 잘 어울리는 한 쌍일 것이다. 누가 뭐래도 이린이 만나 본 두 사람은 더없이 다 좋은 사람이었으니 이번에는 불행한 일 없이 행복해야 했다. 하지만 동시에, 가슴속에서 울컥하는 마음이 공존했다.
거기까지 생각한 이린은 답답한 마음에 결국 또, 몰래 장원을 빠져나갔다.
‘진짜 옛날 생각나네.’
오직 달빛아래 바람을 가르는 소리만이 들리는 이 순간만이 기억 속과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만이 같을 리가. 자신이 바꾸지 않은 것들은 이전과 같은 전철을 밟는 것이 옳았다.
너덜너덜해진 연가장을 붙들고 장주 노릇하느라 답답해질 때면 늘 이렇게 몰래 빠져나가 비천산을 미친 듯이 달리고, 동굴을 찾아가 아무도 없는 호숫가에서 소리를 지르곤 했다.
그러니 이린의 경공을 따라오지 못하는 혈교의 간자들이 아무리 뒤를 몰래 쫓으려 해도 동굴을 찾을 수 있을 리가.
“남궁청휘! 이 바보!!!”
내공까지 담긴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동굴 벽을 타고 울려 퍼지자 이린은 씩씩대며 숨을 헐떡였다.
[장주께서도 혼자 달리고 싶을 때가 있으시겠지만, 가끔은 누군가에게 속내를 털어놓는 것이 더 홀가분할 때도 있습니다.]잊으려고 할수록 더 떠오르는 법이라 몰래 빠져나온 이린을 따라왔던 남궁청휘의 모습도, 자신을 걱정해 주던 목소리도 함께 떠올랐다.
‘둘이 약혼하는 게 당연한 일인데.’
그게 싫었으면 자신이 그걸 바꿨어야 했다. 둘의 약혼을 납득하지 말고 훼방을 놓든 사린을 다른 사람과 이어 주든 바꾸려 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냥 그 정도인 거지.’
그러니 이렇게 답답해하는 것도 죄 없는 남궁청휘를 욕하는 것도 불합리한 일이라고, 스스로도 모르지는 않았다.
“이제 됐어. 그런 거 신경 쓸 틈도 없는걸. 청아, 홍아, 이제 가……. 아?”
끼이이…….
답답함이 좀 풀리는 기분에 이제 다시 장원으로 돌아가려던 이린은 그제야 자신의 사자후(獅子吼)… 아니, 고성방가에 괴로워하며 몸부림치는 청아, 홍아를 발견했다. 사실 이린의 어깨에 걸쳐져 비천산을 달릴 때부터 이미 반 기절 상태였지만 정신이 없던 이린이 거기까지 눈치채긴 불가능했다.
“으아아, 미안해!!!”
끼이-
곁에 있는 게 너무 자연스럽다 보니 신경을 못 쓴 이린이 뒤늦게 휘청거리는 뱀들을 붙잡고 사과했다.
끼이! 끼이이!
끼이이이!
“아니, 미안해. 다신 안 그럴게. 응?”
정신을 차린 뱀들이 뒤늦게 화를 내자 이린은 저자세로 빌며 뱀들을 잘 말아서 품에 넣고 도닥였다. 한쪽은 냉기, 한쪽은 열기가 오르는 탓에 조금 큰 후에는 그렇게 해 준 적이 없기 때문인지 이린의 품에서 두 마리 뱀들은 금방 얌전해졌다.
“그러고 보니 너희들을 어떻게 데리고 다녀야 할까. 가방 안은 답답할 텐데.”
끼이이-
또 버둥거리기 시작한 아이들을 도닥이며 이미 기운이 빠진 이린이 머리를 비우고 웃었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그래도 이 아이들 덕분에 혼자라고 느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았다.
[혼자 모든 것을 끌어안으려 하지 마십시오.]남궁청휘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옳은 말이었지만 가능한 누군가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더욱이 다른 여자와 약혼까지 한 사람이라면.
[할 수 없지. 이젠 내가 해 줄게.]그리고 또 하나, 아주 오랜만에 떠오른 목소리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런 사람도 있었지.”
이젠 얼굴도 금방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가물가물한데 용케 목소리는 떠올랐다. 언제나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또 그만큼 능력은 있던 남자가.
부하들만 남기고 떠나서 결국 돌아오질 않았던 사람.
‘그 사람은 대체 정체가 뭐였을까.’
동굴을 나서며 이린은 한때 약혼자였던 남자에 대한 기억을 더듬었다.
“곽천영……이었던가?”
부하들에 대해서는 기억하는데 정작 본인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바가 없으니 웃기는 노릇이었지만, 정말 떠올릴 것이 별로 없을 정도로 함께한 시간은 짧았다.
‘이번에는 딱히 만날 일이 없겠지.’
그때 그 사람이 연가장에 왔을 때도 그에 대해 아는 이가 아무도 없었을 정도로 정체 모를 사람이었으니까.
‘혈교는…… 아니었겠지?’
이미 집안에도 혈교의 일원들이 많았으니 새삼 이린과 혼인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는 당시의 이린을 경공으로 따라잡은 자였으니 그대로 장원에 머물며 잠복해 있다 이린의 뒤를 밟았다면 동굴을 찾을 가능성도 높았다. 그러나 장원에 오래 머물기는커녕 이린과 혼약하고 얼마 되지도 않아 사라져 버렸다. 차라리 서둘러 혼인한 후 잘 구슬려서 알아내거나, 이미 장원에 잔뜩 심어 놓은 혈교의 간자들을 이용해 장원을 장악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었을 텐데.
‘사실 그것보다도 남겨져 있는 그 사람 부하들 중 절반이 배신한 게 더 신경 쓰이기는 하는데.’
그건 그자 역시 혈교 혹은 연가장을 습격한 자들과 적대 관계에 있었다는 뜻이었다.
‘유영도 지금 잘 지내고 있겠지?’
끝까지 자신을 지키며 주군이 올 거라고 말하던 유영의 마지막 모습이 아직까지 생생하게 떠올랐다.
하지만 곽천영을 다시 만나지 않는 한 유영을 다시 만날 날 역시 오지 않을 테지. 이전에 가까이 지냈던 이와 다시 이전 같은 관계로 지낼 수 없다는 것은 역시 조금 맥 빠지는 일이었다.
‘게다가 어디까지나 주군의 명으로 날 지키고 있었던 거니 다시 만난다 해도 나한테 별 관심을 보이지 않을 거 같고.’
하지만 어쩌면, 혈교와 부딪치다보면 그 사람과 마주치는 일도 있지 않을까.
얼굴은 조금 가물가물해도 그의 뛰어난 무위를 기억하는 이린은 어쩌면 나쁘지 않은 조력자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은 그의 부하들 중 그를 배신한 이들이 어느 쪽인지 알고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