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Goddess RAW novel - Chapter 90
90.
“?”
“왜 그래?”
예상했다는 듯 순식간에 웃음기를 지운 아이들에게 내심 감탄하며 이린도 히죽 웃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미심쩍어하면서도 증거가 없어 의혹의 눈초리로 아이들을 힐끔거리는 여운을 보며 이린이 위로 겸 미끼를 던졌다.
“한동안 못 볼 테니 대련이라도 좀 해 줄까? 안 바쁘지?”
“물론입니다!”
눈빛이 바뀌는 진여운의 뒤로 아이들이 슬슬 물러나며 이린에게 고개를 숙였다. 얼른 가 보라고 손을 내저으며 이린은 연무장에 있는 연습용 목검 하나를 빌렸다.
“그러고 보니 전에 쓰시던 건 또……?”
“응. 부러졌어.”
“아가씨가 쓰시는 목검은 소장주님께서 특별히 신경 써서 주문해 오는 물건인데 조금 더 주의해서 쓰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넌 그런 걸 왜 아는데.
“우리 오빠도 암말 안 하는데 네가 왜 잔소리야. 넌 우리 오빠 일에 신경 좀 꺼.”
“다른 분도 아닌 소장주님의 일인데 신경 쓰지 않을 순 없죠.”
“으으음.”
완강한 태도에 이린도 어이가 없어 혀를 내둘렀다.
‘아마 그런 관심, 오빠도 별로 원하지 않을 것 같은데.’
어차피 여행 떠나면 한동안은 못 볼 테니 괜찮겠지만.
“그래, 말로 해선 통하지 않는다는 것은 슬픈 일이지.”
“잠깐만요. 아가씨??”
이제는 제법 익숙한 풍경에 수련생들은 따스한 미소로 두 사람의 훈훈한 대련 풍경을 관전했다.
위로와 충고를 겸해 여운과 가볍게 대련을 해 준 이린은 정원으로 향했다.
생일이 하루 차이인 남매이다 보니 늘 이현의 생일날 저녁에 셋이 함께 차를 마시곤 했다. 그렇기에 그곳에는 자연히 친구들에게 객실 안내를 끝낸 이현도 있었다.
“저 왔어요.”
“흥, 집 떠날 생각에 들떠서 애비 보러 오는 것도 잊고 있던 건 아니고?”
투덜거리는 연적훈을 보며 이린도 지지 않고 받아쳤다.
“그냥 보고 싶었다고 하시지. 자, 한동안 못 보게 될 얼굴인데 실컷 보세요.”
“매정한 것들 같으니…….”
“오빠 뭐 했어?”
“내가 뭘 하겠어.”
온화하게 웃으며 차를 따라 주는 이현을 한 번 꼭 끌어안아 준 이린이 뒤늦은 축하를 건넸다.
“생일 축하해, 오빠.”
“린아도, 생일 축하해.”
그리고는 눈꼴 시리게 알콩달콩 사이좋은 남매를 떫은 눈으로 보는 연적훈에게 다가가 마찬가지로 꼭 끌어안으며 감사 인사를 건넸다.
“아빠 키워 줘서 고마워요.”
“……누, 누가 아빠한테 그런 인사를 해.”
울컥해서 동요하는 연적훈을 보며 이현이 한 마디 보탰다.
“저도 할까요, 아버지?”
“하지 마!”
버럭 소리를 지르는 연적훈을 보며 킥킥 웃는 남매와는 달리 연적훈만 심란한 얼굴로 차를 들이켰다. 그런 아빠를 보며 작은 한숨과 함께 이린이 다시 입을 열었다.
“맞다. 저도 이제 아버지라고 부를까요?”
“싫다. 네가 그러면 갑자기 늙은 기분이야.”
“오빠가 일찍 혼례를 올렸으면 벌써 손자가 있을 수도 있는 연배신데?”
“!!”
뜻밖에 현실에 당황하는 아버지를 외면하고 이현이 부드럽게 충고했다.
“본인이 잊고 있는 현실을 그렇게 직설적으로 말하면 상처받는단다.”
“그렇구나. 죄송해요, 아빠.”
이제는 자신에게 한 마디도 지질 않는 아이들을 보며 연적훈은 기특하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한 복잡한 미소를 지었다.
“하여간에 누굴 닮았는지들.”
“아빠요.”
“아버지겠죠.”
“그만 좀 해, 이 못된 녀석들 같으니!”
가족 간의 단란한 시간은 언제나 웃음이 흘렀다. 이제 한동안 이런 시간을 보낼 일이 없을 거란 사실에 연적훈은 울적해졌지만 자식들 앞에서 티를 내지는 않았다.
대신 준비해 주었던 비단 주머니들을 꺼내 건넬 뿐.
“어휴, 생일 축하한다. 이현아. 이린아.”
“감사합니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아빠.”
비단 주머니를 열어 본 이린의 눈이 동그랗게 떠지는 것을 본 연적훈이 흐뭇하게 웃었다.
“아, 귀걸이? 푸른색이네요?”
“그래. 어울리는 색의 남보석(藍寶石)을 찾느라 고생 좀했단다.”
“작년에 진주로도 주셨잖아요.”
이린이 귓가에서 달랑이고 있는 진주 귀걸이를 툭 건드리며 고개를 갸우뚱 흔들었다.
“작년에 못 구했……. 아니, 올해 상단에 좋은 게 들어왔다고 해서 원래는 비녀로 만들까 생각했는데 마침 한 쌍이라 귀걸이로 주문했단다. 마음에 드니?”
“네! 좋아요. 고마워요, 아빠.”
예전에는 분명 남보석이 달린 비녀였는데, 요새 상단이 확장되며 또 무언가가 바뀌었는지 생각지도 못한 선물에 이린은 활짝 미소를 지었다.
“오빠는?”
“검에 다는 술 장식이야, 자.”
이린에게 자신이 받은 선물을 보여 준 이현은 마찬가지로 비단으로 감싼 선물을 건넸다.
“그리고 이건 내 선물.”
“고마워, 오빠.”
이현이 준 선물은 오밀조밀한 장식의 다용도 소도(小刀)였다.
“너무 실용주의 아니냐?”
“린아한테는 필요할걸요.”
여동생을 잘 알고 있는 오빠는 장식은 우아하게 예쁘지만 날은 깔끔한 칼을 선물했다.
“와, 이거 너무 좋다. 잘 쓸게, 오빠.”
“어째 내 선물보다 좋아하는 것 같구나…….”
서운해하는 연적훈의 목소리를 못 들은 척하고 이번에는 이린이 선물을 꺼냈다.
“잠깐만 린아, 이거 어디서 났어?”
“비밀이야.”
이린이 내민 상자 안에는 얼마 전 잡은 거대 붕어의 내단으로 만든 신상 영약이 들어 있었다.
히죽 웃으며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 대는 딸을 보며 연적훈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뭐 하고 다니는지 알 수가 없는 딸이었다.
“아무튼 고맙다.”
“그리고 이건 장 총관 아저씨 드리세요. 요새 주름이 는 거 같아.”
“직접 주지?”
“아빠가 억지로라도 먹이시라고요.”
제가 주면 안 드실 거 같고.
“우리 딸은 참 거칠구나.”
“이제 험난한 세상에 나가는데 좀 거친 게 차라리 안심이죠.”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 웃고 있는 아들을 보며 연적훈은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부인이 일찍 가고 낙이라고는 애들 크는 것뿐이었는데 어느새 이렇게 자란 걸 보니 감개가 무량할 뿐이었다.
이미 나갔다 온 큰애가 같이 가기는 하지만 그래도 걱정이라 연적훈은 이런저런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참, 마련야장께서 장사에는 꼭 들르라고 신신당부하시더구나. 잊지 말렴.”
“네. 전에 말씀드린 대로 장사까지는 애들도 몇 명 데려가기로 했는데 괜찮죠?”
연적훈은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너희들 알아서 해라. 언젠간 니들이 알아서 운영해야 할 테니.”
“아빠 너무 귀찮아하시는 거 같은데요. 그러고 보니 장원의 수련생들은 원래 강호행을 같이 안 보내나요? 저는 그렇다 쳐도 오빠가 나갈 때는 같이 갔어도 됐을 텐데.”
이린 또래의 수련생들은 거의 남자아이라 같이 보내기에는 아무래도 거부감이 있을 듯했고.
“으음. 예전에는 다들 수련생들과 거의 친구처럼 지내며 강호행도 같이 떠나기도 했는데 지금은 약간 거리를 두고 있단다.”
“왜요? 무슨 일이 있었나요?”
“그냥……. 너무 거리가 가까워도 좋지 않더구나.”
“?”
“잃었을 때의 상실감이 견디기 어렵거든.”
힘들게 입을 뗀 연적훈의 말에 이린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것 같았다.
연적훈과 연이현만이 아닌 함께 떠난 장원의 무인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전멸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개인적인 친분이 깊지 않던 이린마저 정신이 이상해질 것 같았으니까.
그저 매일 봐 오던, 십수 년간 같은 장소에서 지내던 이들이 모두 죽었다는 것만으로도 그러했는데 친구처럼 지내 오던 이들을 잃는다면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혹시 아빠도 비슷한 일을 겪은 걸까.’
어쩌면 단순히 의견 다툼 같은 걸로 장원을 떠났을지도 몰랐지만, 확연히 무거운 연적훈의 분위기에 차마 물어볼 수 없어 이현도 이린도 그에 대해 쉬이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런 아이들을 눈치챘는지 연적훈은 애써 가벼운 목소리로 털어 내듯 말했다.
“내가 어릴 적 장원에 함께 있던 무인들은 아마…… 이미 대부분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게다. 덕분에 장원에는 아주 나이가 많거나 어린 사람들만 남았기에 중간에 사람을 새로 고용하느라 힘들었지.”
“아빠.”
“알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래서 지금 우리 장원에는 나이 든 사람도, 눈에 띄는 고수도 별로 없단다. 나이가 있는 사람들은 그동안 다 은퇴하기도 했고. 덕분에 분위기도 많이 달라졌지. 예전에는 좀 더……. 아니, 이런 얘길 할 때는 아니구나.”
뒷얘기가 궁금했지만 멍하니 옛 기억을 더듬던 연적훈의 표정은 어느새 평소의 그로 돌아와 있었다. 그 이상 말해 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하기야 아들의 생일날 꺼내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화제였다.
“아무튼 이 애비는 장원을 꾸려 나가느라 몹시 힘들었단다. 그러니 너희가 하루 빨리 자라서 이 애비 좀 쉬게 해 주렴.”
“싫어요.”
“아니 이 녀석이?”
이미 한 번 그 고생을 겪어 보았던 이린은 속으로 진저리 치며 칼같이 거부했고, 이현도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약한 소리를 들어주지 않았다.
“저도 싫습니다.”
“이현이 너는 지금 장주 자리 맡아도 될 나이거든?”
“무슨 그런 무리한 말씀을 하세요.”
“내가 장주 대리를 맡은 게 거의 네 나이쯤이었지, 아마? 재수 없으면 그렇게도 되는 거란다. 알아 두렴. 아이고 나도 일찍 은퇴하고 세상 구경 좀 하고 싶구나~”
“송구하지만 강호의 평균에 맞춰 보면 앞으로 20년은 거뜬하실 듯합니다만…….”
“아니 이런 불효자식들을 봤나?!”
연적훈이 분통을 터트리거나 말거나 남매는 못 들은 척 평온하게 차를 마셨다.
안타깝지만 연적훈의 나이는 아직 40대. 저 윗동네 남궁세가 가주도 60대인데 팔팔한 걸 생각하면 그가 은퇴할 날은 아직도 멀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영약 드시라고 챙겨 드렸으니 아끼지 말고 드세요.”
“그래, 우리 린아가 선견지명이 있구나.”
“오빠. 우리 이번에 나가면 어디 영물이나 영약 좀 찾아볼까?”
“그러게. 아버지한테 좀 보내 드려야지 안 되겠다.”
여전히 쿵짝이 잘 맞는 남매를 보며 연적훈은 허탈한 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어차피 연적훈도 본인이 젊을 때 못 놀았다고 자식들까지 못 놀게 할 만큼 쪼잔한 부모는 못 되는 사람이었다.
다만 아이들이 없는 장원을 생각하면 역시 좀 외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