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Goddess RAW novel - Chapter 91
91.
이린의 아침은 생일날이라고 평소와 다를 것이 없었다.
“청아, 홍아, 같이 나갈래?”
끼-
끼이-
이린의 머리맡에서 같이 잠드는 청아, 홍아는 이린이 일어난 기척에 함께 몸을 일으키곤 했기에 아침 운동도 늘 함께였다.
운동을 같이 하는 게 아니라 어깨에서 짐 덩어리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지만.
“으음. 날은 좋고.”
누구와 마주쳐도 문제없을 정도로만 적당히 몸단장을 하고 이린은 오늘도 담장을 넘었다.
무인들의 아침은 운기조식으로 시작된다지만 이린의 경우 거기에 달리기로 몸을 푸는 것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이제 비천산을 한 바퀴 도는 건 가뿐하군.’
이전과 비교하면 어떨까. 전처럼 경공만을 단련했던 게 아니니 도리어 경공의 성취는 전보다 낮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도 있었지만, 이젠 영약까지 충실하게 구해다 먹고 있으니 그렇지는 않을 듯했다.
‘강해져야지.’
어제 연적훈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곱씹으며 이린이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연가장 역시 혈교와의 분쟁에 휘말렸을지도 모른다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당한 일이 되풀이되는 것을 막으려면 우선 자신이 강해지는 수밖에 없다는 것도.
‘뭔가 알면 말을 좀 해 주면 좋을 텐데. 아버지가 애들한테 그런 걸 말해 줄 거 같지가 않고.’
특히나 열일곱이 되었다 해도 이린은 아직 어리니 그런 걸 물어도 가르쳐 줄 리가 없었다.
이제는 익숙한 산길을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와중 때마침 일출이 이린의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누군가의 인영(人影)도.
‘떠나면 한동안 이 풍경은 못 보겠네. 어라?’
산의 풍광과 함께 즐기는 일출은 각별한 법. 이린처럼 새벽같이 산을 즐기는 이가 또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당연히 이린이 아는 사람이었다.
“아.”
“아침 산책 중이십니까? 성실하시군요.”
“청운진인께서도 이렇게 이른 시간부터. 혹시 잠자리가 불편하셨나요?”
집주인의 입장에선 신경 쓰이는 일이었지만 청운은 아직 어린 이린의 그런 태도가 기특하다는 듯 온화하게 웃으며 답했다.
“아닙니다. 본문(本門)도 산에 있다 보니 아침마다 산에 오르는 것이 익숙해서 저도 모르게 일찍 나오게 되는군요.”
“아, 도사님들도 아침 수행을 하실 테니까요.”
곤륜파에 대해서는 그리 알려진 바가 없지만 도가 문파이니 다른 도가 계열과 비슷하겠거니 싶어 이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천산의 풍광은 마음에 드시나요? 괜찮으시다면 안내해 드릴까요?”
“네. 부탁드려도 될까요?”
이린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경치가 좋은 곳들을 떠올리며 청운을 안내했다.
“곤륜산은 어떤 곳이에요? 곤륜파의 도사분들은 다 청운진인 같은 분들이신가요?”
“그럴 리가요. 이상한 사람들뿐입니다.”
곤륜파의 사람을 만나는 것이 처음이다 보니 아무래도 호기심 어린 질문이 쏟아졌다. 그런 이린의 뒤를 따르며 청운은 귀찮아하는 기색 없이 담담하게 대답해 주었다.
‘오빠도 그렇지만 굉장히 차분한 분이시네. 분명 오빠보단 연상이랬지.’
그리고 이린의 뒤를 따르던 청운의 시선에는 살짝 감탄이 스쳤다.
“이현에게도 들었지만 경공 실력이 상당하군요.”
“아, 경공은 좀 자신 있어요. 그런데 오빠가 그런 얘기를 했어요?”
“심심치 않게 여동생 앓이를 하고 다녔지요. 아마 호남제일미남자 연이현의 하나뿐인 여동생에 대해선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을 겁니다.”
청운진인은 절벽 앞에서 바람을 맞으며 무심하게 말했지만 듣고 있는 이린은 그럴 수가 없었다.
‘호, 호남제일미남자……!!! 확실히 이젠 미소년이라고 불릴 나이가 아니긴 한데. 아니, 그보다 오빠 대체 무슨 소릴 하고 다녔어???’
복합적인 이유로 동공 지진 중인 이린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빤히 보이는지 청운진인은 무심하던 얼굴에 슬쩍 웃음기를 띤 채 덧붙였다.
“착하고 예쁘고 경공이 뛰어난 여동생이 있다고요.”
“와아. 우리 오빠지만 좀 부끄럽네요.”
“그렇습니까? 꼭 닮은 오누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뜻밖의 말에 이린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을 보며 청운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지난번 제가 연가장을 방문했을 때, 감숙성(甘肅省)에 있는 어떤 관인(官人)의 딱한 사정에 대해 말씀하신 적이 있었지요.”
“네? 제가요?”
연가장에서 떠날 수 없는 자신이 손대기는 어렵고 서문제우가 더 이상 노출되는 것도 걱정스러워 건너 건너 들은 이야기인 척 은근히 이현을 통해 오빠 친구들에게 흘렸었다. 당연히 그 사실을 기억하고 있는 이린은 동요를 감추기 위해 애썼다.
“전혀 관계도 없는 사람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돕고 싶다고 나서는 사람은 드뭅니다. 심지어 출가한 이들로 가득한 곤륜에서도요.”
“제가 그런, 깊은 뜻은 아니었을 거 같은, 데요. 실제로 돕겠다고 한 것도 오빠잖아요?”
“겸손한 것까지 닮았군요.”
큰 오해십니다…….
‘제 오지랖은 오빠랑 달리 그렇게까지 넓지 않은걸요.’
어색하게 웃는 이린의 뒤를 따라 걸으며 청운진인이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때 일이 어찌되었는지는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어떻게 됐는데요?”
슬금슬금 곁눈질하던 이린이 결국 반응을 보이자 청운도 입을 열었다.
“감숙성은 청해성(靑海省)의 바로 옆에 있지요. 마침 사문으로 돌아가는 길이라 이현의 부탁을 받고 그를 찾아갔었습니다만 그곳에서 뜻밖에 혈교의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네?”
예전에 어디서 들어 본 적 있는 것과 비슷한 전개에 이린이 당황하는 것과 달리 청운의 눈동자는 여전히 잠잠했다.
“애석하게도 혈교의 꼬리를 잡지는 못했습니만 그 관인의 가족들이 모두 무사히 피신하는 데는 성공했지요.”
“다, 다행이네요.”
이린은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내심 긴장되어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혹시 자신 때문에 누군가 다친 것은 아닌지, 청운진인이 자신에 대해 뭔가 수상하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지.
“이현의 소개로 연가상단의 도움도 받았지요.”
곤륜은 청해 서쪽에 있으니 그가 뒷수습까지 돕기는 어려웠고 이현이 부탁한 일이기에 당연한 수순이었다.
“관인이니 관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하급 관리들은 그리 사정이 좋지 못한 모양이더군요.”
“그럴 수가.”
“애초에 관(官)이 제 역할을 다 하고 있다면 협(俠)이 필요한 일은 적겠지요.”
겉보기와는 다른 신랄한 말이었지만 이린은 부정할 수 없었다.
‘애초에 문파나 세가가 세력을 떨치는 이유이기도 하니.’
이린의 떨떠름한 표정을 어떻게 해석한 건지 청운진인은 조금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당부했다.
“연가장의 가풍에 대해 말을 얹을 생각은 없습니다. 단지 출가한 몸으로 할 말은 아니지만 지나치게 다른 사람을 돕다가 본인이 다치지 않도록 주의했으면 좋겠군요.”
“네, 그럼요.”
“연가장 사람들이 선량하다는 것은 인연이 짧은 저도 알 만한 일이지만 주변 사람들이 걱정하고 있다는 걸 이현도 소저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주의할게요. 저기 그런데 혹시 오빠가 동행할 때 무모한 일을 하고 그랬나요?”
“…슬슬 돌아가도록 하죠.”
“…네.”
시선과 대답을 동시에 회피하는 청운진인을 보며 이린은 어쩐지 긴장이 풀리는 대신 머리가 아파 왔다.
‘무슨 무모한 짓을 했니. 오라버니.’
그리고 아무래도 이현 덕분에 자신에 대한 평가도 그와 엇비슷하게 책정되어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엄청난 과대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 아닌지.
당혹스러워하는 와중에도 매일 산길을 오갔던 이린의 발은 본능적으로 장원을 향하고 있었기에 안내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이현과 생일이 하루 차이라고 했으니 오늘이 생일이겠군요?”
“맞아요. 아빠가 생일은 지난 후에 보내고 싶으셨던가 봐요.”
“몰랐으면 모를까, 알면서 그냥 지나가는 것도 염치없는 일이겠지요.”
“?”
그렇게 말한 청운은 품 안을 뒤적거리며 작은 약합을 하나 꺼냈다. 이린은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생김새의 약합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아 이거.’
“곤륜의 금창약(金瘡藥)이랍니다. 강호에서는 제법 호평받는 물건이지요. 다치는 일이 없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쓸 일이 생길지 모르니 받아 두세요.”
“제가 이런 걸 받아도 될까요?”
곤륜파의 도사들은 산에 처박혀서 잘 나오지 않기로 유명했기에 나름 희귀품이었다.
“보통 여러 개를 들고 다니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잘 쓸게요.”
하나 있는 거 뺏는 거면 미안한 일이었지만 여분이 있다는 말에 이린은 감사히 두 손을 내밀었다. 그런 이린을 보는 청운의 눈에 이현이 이린을 볼 때와 비슷한 감정이 흘렀다.
“그럼,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안내 감사했습니다.”
이린의 안내를 받으며 어느새 장원이 나타났다는 것을 깨달은 청운은 고개를 까닥여 인사를 하고는 그대로 훌쩍 담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우리 장원 경비……. 걱정이네.’
늘 탈출하고 있는 본인이 할 말은 아니었다.
‘오빠 친구들은 대체로 오빠랑 엇비슷한 실력들이라고 했으니 이상한 건 아닌가.’
장원을 지키는 평범한 무인들이 어찌 잡을 수 있는 실력들이 아니었다. 어쩌면 장원 무사들의 수준이 떨어진 건 어제 연적훈이 말한 일이 계기였을지도 몰랐지만.
한숨을 쉬면서 이린은 손에 들린 약합의 뚜껑을 열었다.
“역시.”
특유의 은은한 약초 냄새. 예전, 이현이 지현문으로 떠나기 전 이린에게 주었던 물건과 같은 것이었다.
‘본인이 써야지, 장원에 남는 나한테 주면 어떡할 건데.’
물론 결과적으로는 이래저래 꽤 유용하게 썼지만.
또 본의 아니게 옛일을 떠올린 이린은 고개를 휘휘 저으며 청운진인과 마찬가지로 담을 훌쩍 넘어 장원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