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Goddess RAW novel - Chapter 97
97.
그리고.
“아, 오빠 왔어? 백리 공자도 어서 오세요.”
연가상단에 도착하자 오랜만에 면사를 벗은 이린이 아직 살짝 물기를 머금은 금빛 머리카락을 반짝이며 해맑은 미소로 도착한 일행을 반겼다.
끼이-
예전에 있었던 실종 사건 이후로 상단 내에서는 숨기지 않게 된 청아, 홍아도 이린의 어깨 위에서 이현을 반기듯 고개를 들었다.
“언제 도착했어?”
“좀 됐어. 덕분에 공방 구경 좀 하고. 목욕도 하고 뒹굴다 나오는 길이야. 오빠도 얼른 들어가서 여장 풀고 쉬어.”
공방이라는 말에 백리현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어, 혹시 괴기기광의 공방? 나도 가 보고 싶어.”
“말씀은 드려 볼게요. 일단은 나중에 오빠랑 둘이 오라고 하셨거든요. 배고플 텐데 다들 씻고 식사부터 해요. 연 아저씨한테 부탁해 놨으니까.”
이현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상단 소속 하인들이 벌써 나와서 일행의 짐을 받아 주고 말을 인도하고 있었다. 힐끔힐끔 이쪽을 쳐다보는 눈빛에서 이현이 얼굴을 가리고 있는 것에 대한 깊은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지부장한테 아저씨가 뭐야.”
“뭐 어때. 처음 보는 사이도 아니고. 그냥 친척 아저씨 비슷한걸.”
이현 모르게 가끔씩 생각나는 주요 정보를 서신으로 보내곤 했기에 연사훈 지부장과 이린의 관계는 꽤 돈독했다.
“그런데 심여준은?”
“상단에 도착해서 방으로 안내했다는데 피곤해서 쉬고 있나 봐.”
“그래? 청운 형님은?”
“볼일이 있다고 잠깐 나가셨어. 여준 아저씨 방은 이쪽이래.”
여준이 있는 곳을 알려 준 이린은 뭐가 그리 바쁜지 이따 보자며 후다닥 사라졌다.
그 기운 넘치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백리한이 여전히 심술궂은 말투로 이현을 놀렸다.
“따님이 바빠서 엄마는 본 척도 안 하는 거 같은데요.”
“린아는 장사 지부에 아는 사람이 많으니까.”
“그나저나 꼬마 아가씨 얼굴 보니 결과는 안 물어봐도 알 거 같은데.”
“으음. 일단 여준한테 가 보자.”
본인은 여준을 찾아가지 않았다는 티를 역력하게 내는 이린이 가르쳐 준 대로 여준이 있다는 방을 찾았다.
“여준, 방에 있나?”
“대답이 없는데.”
“그냥 열어.”
드륵-
대답이 없어 망설이는 이현을 제치고 백리한이 벌컥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현은 뭐라 한 마디 하려다 그냥 백리한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방 안에 들어서자 침상에 널브러져 있는 심여준의 모습이 보였다.
“어이, 살아 있나?”
“……뭐냐.”
“많이 지친 거 같은데 여기까지 경공으로 오는 게 그렇게 힘들었어?”
“시끄러. 좀 쉴 테니까 나가.”
힘든 거리는 맞지만 백리한의 놀림 섞인 말투에 화도 안 내고 있는 걸 보면 아무래도 상태가 좋아 보이진 않았다.
이현은 그런 여준의 모습에 눈을 반짝이며 긁으려 하는 백리한을 붙잡으며 물었다.
“피곤하면 저녁 식사는 방으로 보내도록 할까?”
“……그래.”
“그럼 우린 가 볼게. 쉬어.”
버둥거리는 백리한을 붙잡아 밖으로 끌어낸 이현이 한숨을 쉬며 질책했다.
“왜 그렇게 괴롭히고 싶어 하나?”
“야. 이럴 때 좀 긁어 놔야지. 저 성질머리가 지 잘난 소리 한 마디도 못 하고 있는 걸 보니 완전 깨졌네. 깨졌어.”
“쉿. 듣겠어.”
“아, 들으라… 으읍!!”
아예 소리를 지르려 하는 백리한의 입을 다급하게 틀어막은 이현이 서둘러 방 앞을 벗어났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했지만 대답해 줄 사람이 보이질 않았다.
모든 일의 전말을 알고 있을 청운진인이 돌아온 것은 정확히 저녁 식사 때였다. 이린이 제갈윤위 내외와 함께 식사하겠다고 해서 저녁식사 인원은 셋이었다.
“무슨 일이라고 할 만한 건 없었습니다. 분명 시작할 때는 둘이 비슷한 속도였는데 연 소저가 자연스럽게 앞서 나갔고 여준이 뒤처졌지요. 저는 연 소저가 걱정되어 그대로 뒤따라 달렸기 때문에 여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무슨 일이 있었다면 더 늦게 도착했겠지요.”
이린이면 모를까 자신이 여준까지 걱정해 줄 필요가 있느냐는 조금 냉담한 반응이 납득 가지 않는 것도 아니라 두 사람도 고개를 끄덕였다.
“차이가 압도적이었나 보죠?”
“아마 여준이 획기적인 경신술이라도 새로 익히지 않는 한 평생 연 소저를 따라잡는 일은 없을 겁니다. 도착하고도 여유로웠던 걸 보면 전력을 다한 것도 아니라 제 경공을 맞춰 달리더군요.”
“헤에.”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이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린아가 경공이 뛰어나다고 제가 몇 번이나 말했는데 왜 다들 믿질 못하는 걸까요.”
“사람이 좀 삐뚤어져서 그런 게 아닐까요.”
“여준이 삐뚤어졌다는 걸 부정은 않겠지만 네가 너무 자랑하니까 오히려 거짓말처럼 들린다고.”
일반인의 의견을 피력해 보았지만 두 사람은 별로 귀담아듣지 않는 듯했다.
“참 훌륭한 경공이었습니다. 자세는커녕 호흡의 흐트러짐도 느껴지지 않더군요. 마치 이런 경주를 많이 해 본 듯한 능숙한 체력 배분도 훌륭했습니다.”
“청운 형님도 그렇게 보셨다니 제 눈이 애정에 흐려지진 않았나 봅니다.”
청운진인의 칭찬에 흐뭇해 죽으려 하는 이현을 보며 백리한은 혀를 찼다.
자신도 이린을 귀엽다고 생각은 하지만 저 팔불출은 이해가 불가능했다.
* * *
“이린 아가씨가 같이 오셨다고?”
“응. 아까 낮에 오셔서 지부장님이랑 뭔가 한참 얘기하시더라.”
본격적으로 상단 일을 배우고 있는 마선은 요즘 바빴다. 심부름꾼 일을 하며 글과 셈을 일찍 깨우친 것이 지부장의 눈에 띈 덕분인지 아니면 얼마 전 자신이 의견을 낸 상품이 받아들여진 덕분인지 금방 실전에 투입되어 몸으로 익히는 중이었다.
연가장에서 온 아이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눈 마선은 바로 이린을 찾아 나섰다. 서신을 주고받고 있어 근황은 알고 있지만 역시 자신의 번듯해진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 오랜만에 아가씨 얼굴을 보고 싶은 것도 있고.
“뵈러 갈 거야?”
“응. 너희들도 갈 거지?”
마선은 연가장에 가지 않고 상단에 남아 함께 일하고 있는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아이들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난 잘 모르겠어.”
“나도. 그야 마선 언니는 훌륭해졌으니까 당당하게 뵈러 가겠지만 우리는 좀…….”
“그런 소리 하지 말고. 너희도 인사는 해야지.”
“하긴…….”
마선 외에는 다들 점소이나 심부름꾼 등으로 일하고 있는 처지였다. 연가상단에 들어오고 몇 년이나 지났는데도 아직도 글을 어려워하거나 셈을 제대로 깨우치지 못해 이린 앞에 서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아이들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들을 거둬 준 이린이 왔는데 인사도 하지 않는 것은 기본적인 예의 문제였다.
“객간 쪽에 계시려나?”
“소장주님은 거기 계실 텐데 아가씨는 잘 모르겠어.”
훤칠한 친구들을 데리고 왔다는 연이현의 소재는 이미 상단 내에 파다하게 퍼져 있건만 이린에 대해서는 애매했다.
‘아가씨는 무시하는 거야, 뭐야.’
그렇다고 상단의 다른 이들이 아가씨에게 너무 깊은 관심을 보이는 것도 달갑지 않은 마선은 아이들과 함께 이린을 찾아다니기로 했다. 워낙에 눈에 띄는 외모니 찾는 건 어렵지 않은 터였다.
“아가씨? 저쪽 건물에, 소장주님 찾으러 가시던데?”
“감사합니다.”
예상대로 금방 이린의 위치를 찾아간 마선과 아이들은 건물에 들어서고 몇 걸음 내딛기도 전에 이린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푹 쉬었나 봐요?”
묘하게 설레는 마음으로 다가가던 마선은 누군가와 대화하는 목소리에 우뚝 멈춰 섰다.
대화라기보다는, 언쟁을 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무슨 일이지. 도와야 하나?’
소장주님이라도 찾아와야 하나 마선이 고민 중일 때, 다시 이린의 목소리가 울렸다.
“아니. 졌으면 인정을 하셔야지 아직도 뒷말이에요?”
“헛되고 비생산적인 일을 계속하고 있잖나!”
마선이 알 리가 없지만 지금 이린과 말다툼 중인 것은 무슨 바람인지 저녁 식사 후 밖으로 나온 심여준이었다. 이현을 만나러 나왔다가 마침 이현을 부르러 온 이린과 딱 마주쳐 버렸는데 아직 앙금이 남았는지 이린을 붙잡고 설교 중이었다.
덕분에 심여준과 뜻밖에도 쓸데없는 논쟁을 하게 된 이린은 깊은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다.
모처럼 마련야장 부부와 즐거운 식사 시간을 보내고 오빠를 부르러온 참에 이상한 아저씨와 부딪쳐 시간을 뺏기고 있으니 불유쾌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뭘 몇 번이나 봤다고 나한테 이렇게 승질인지??’
경공으로 이미 시비가 가려졌다고 생각했는데 저쪽은 아니었나 보다. 명백한 시비조에 이린도 조금 짜증이 났다.
“아이들을 거두는 건 제 맘이고, 거기에 들어가는 건 저희 아버지 장원의 돈이고, 그게 장원 재정에 위협을 주지는 않아요. 게다가 그걸 다른 사람이 상관할 바는 아니죠.”
“세상에 빈곤하고 불우한 처지의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알긴 하나? 그걸 모두 구할 생각인가? 구해 준다고 저들이 충성의 맹세라도 할 것 같나?”
“아이들을 거두는 게 저한테는 조금 손이 가는 일이지만 저 아이들은 이걸로 인생이 바뀔 수도 있는 일이에요. 모든 사람을 돕지는 못해도 눈에 보이는 한두 명이라도 손잡아 주는 게 그렇게까지 못할 일인가요? 충성의 맹세까지는 바라지도 않지만 10명을 주워 와서 그중 1, 2명이라도 전과는 다른 인생을 살 수 있으면 그걸로 좋잖아요.”
이렇게 말했지만 이린도 정말 글렀다고 생각한 이들까지 주워 온 적은 없었다. 가능성이 있어 보였거나, 이번처럼 기억에 있는 경우가 있으니 그냥 지나칠 수 없을 뿐이었다.
“모든 인간이 안 된다고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그냥 비뚤어진 인간 불신이죠. 본인이 그렇게 살겠다는 건 상관없는데 남의 일까지 참견하지는 말아 주세요.”
“결국 네 눈에 띄는 사람만 다른 인생을 사는데 불평등하지 않나?”
끌까지 비뚤어진 소리를 하는 심여준에게 이린도 조금 큰소리를 냈다.
“세상은 원래 불평등해요!! 운 좋으면 나같이 부잣집 딸로 태어나 호의호식하면서 잘살고, 운이 없으면 거리에서 동냥으로 하루하루 살아야 하는 걸인이죠. 그런데 그 운 없는 사람들 중에서 나나 오빠를 만나 조금이라도 운이 좋은 사람이 있는 게 뭐가 어때서요!”
이린의 청산유수 같은 말에 심여준은 잠시 침묵했다. 반박할 말이 없는 것 이전에, 예전에도 이현과 비슷한 대화를 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조금 번거로운 걸로 한 명이라도, 이전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으면 좋지 않나.]비참한 처지의 아이들을. 앞날이 절망뿐인 사람이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