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s First Time Limit RAW novel - Chapter 302
천하제일 시한부 (302)
마진혁.
그는 살고자 했다.
천살의 기운을 받고 태어난 자.
그건 축복이자 저주였다.
무공을 익힌다면 천하제일의 근골과 혈맥을 가질 수 있었고, 지략을 원했다면 공명을 능가하는 두뇌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지배를 택했다.
권력의 최정점.
날고기는 수많은 무림인들이 판치는 제국 내에서 그들조차 감히 거스를 수 없는 단 하나의 존재.
그건 바로 황제다.
하지만 그는 황제가 될 수 없었다.
수많은 황족들.
거기에 더불어 자신의 위로 두 명의 뛰어난 형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작 열 살도 되지 않은 마진혁은 그 둘을 독살해 버렸다.
그 수준이 어찌나 간교한지, 황실의 그 누구도 감히 마진혁을 의심하지 못했다.
나이가 어리다는 점을 노린 마진혁의 한 수였다.
하지만 황제는 괜히 황제가 아니었다.
아니면 너무 어렸기에 마진혁이 겉으로 드러냈다든가.
어찌 됐든 마진혁은 황제의 의해 황궁에서 쫓겨나야만 했다.
고작 열 살 어린 나이.
그런 그의 가능성을 눈여겨본 자가 하나 있었다.
주윤.
황궁 내에서 그를 지칭하는 또 다른 이름은, 바로 진짜 황제였다.
군권, 오호도독부를 손아귀에 움켜쥐고 황족만 움직일 수 있는 감찰권인 자미성을 움직이고.
무림인조차 경시할 수 없는, 금군과 오호도독부마저 그의 명을 듣는다.
현 황제의 스승이자, 제국의 재상.
주윤은 그런 자였다.
황궁은 예로부터 무림을 경계해 왔다.
수준 높은 무공은 황제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해 올 만한 위력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민초들은 천하제일인의 탄생을 기다렸지, 황제의 탄생을 손꼽아 기다리지는 않았으니까.
그 과정을 보며 주윤과 마진혁은 동시에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민초들을 쉽게 움켜쥘 수 있는 그릇.’
그런 그릇을 직접 빚어 보자.
그렇게 선택받은 존재가 바로 주서진이었다.
주윤으로서도 거부할 까닭은 없었다.
어찌 됐든 주서진 또한 자신의 피붙이였기 때문이었다.
주윤은 가장 먼저 헌원세가를 언급했다.
그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가장 먼저 두 팔 벌려 환영할 이들은 다름 아닌 일반 백성들이었기 때문이었다.
“허허.”
주윤이 허탈한 웃음과 함께, 술병을 내려놓았다.
그의 앞에는 잡초만 무성한 봉분 하나가 봉긋 솟아올라 있었다.
그 누구도 찾지 않는 이름 모를 산 중턱.
주윤은 그곳에 정성스레 가져온 술병을 휙휙 둘러 안에 든 술을 쏟아부었다.
“자네 말이 맞았군.”
이제는 죽어 버린 오랜 지기의 모습을 떠올린 주윤이 허탈한 웃음과 함께,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허공에 떠 있는 기의 파편들을 바라보았다.
제마광천진.
마진혁이 그토록 원했던 제마광천진은 효과적으로 무림인들을 통제했다.
내공이 비교적 약했던 무인들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고, 비교적 갑자 이상의 내공을 지닌 무인들은 버텨 냈다.
하지만 그것도 시간문제라는 것을 그들도 곧 깨달을 것이다.
흡수한 진기만큼, 제마광천진의 기세는 무섭게 덩치를 키워 가고 있었으니까.
“내 원망 많이 했겠군, 볼 면목이 없어.”
주윤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저 먼 곳 하늘을 다시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자신의 집이었던 주씨세가가 있던 곳이었다.
거기 어딘가 잠들어 있을 자신의 아들을 떠올리며 그가 한 줄기 눈물을 흘렸다.
“내가 잘못 판단했구나.”
마진혁은 생각 자체가 다른 자라는걸.
주윤은 너무도 뒤늦게 깨달아 버렸다.
수백만의 목숨을 한순간에 앗아가 버린 마진혁은 절대 여기서 끝내지 않을 것이다.
그가 왜 천살의 기운을 받고 태어났다고 했는지 정확히 이해가 되는 대목이었다.
남을 죽이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가 없다고 했던가.
그 말을 너무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마무리는 지어야겠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끝까지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던 주윤에게 마진혁은 해서는 안 될 말을 내뱉고야 말았다.
‘난 주씨세가라 할지라도 절대 살려 둘 생각이 없는데. 이해하지?’
아들을 죽인 아비라 하여, 그것까지 이해하길 바란 것인가?
주윤은 마진혁의 욕심을 읽어 냈다.
“내 불찰이구나.”
마진혁이 이만큼 올 수 있었던 데는 다 자신의 도움이 컸기 때문이었다.
아들을 판에 끌어들여 아홉 개의 정수를 만들어 냈다.
그 정수는 무공의 형태로 구천이라는 이름 아래, 어마어마한 세력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별 볼 일 없던 정보세력인 천지회를 흡수해, 그들을 기반으로 엄청난 세를 만들어 낸 것이다.
딱 거기까지만 해야 했다.
손자의 폭풍과도 같은 성장은 그를 충분히 기쁘게 만들었다.
그래서 움직였다.
‘꽃을 보았느냐?’
헌원가의 비기.
꽃의 발현은, 곧 아홉 개 정수의 뿌리부터 썩게 만들 만악이었으니까.
‘건곤대나이라 들어 봤나?’
지금은 무덤에 묻힌, 지기의 미소가 떠올랐다.
주윤은 가만히 그의 기억을 끄집어냈다.
‘일월신교의 비기이지. 일월신교의 맥을 이은 정통마도는 바로 우리 헌원세가밖에 없거든.’
‘그게 건곤대나이와 무슨 상관인가?’
‘핏줄. 헌원의 피를 타고 태어난 자는 천무의 기억을 가지고 태어나게 되네.’
천무(天武).
하늘이 내린 무인이라던가.
‘내 딸아이가 그 기억을 고스란히 가졌으니, 날 죽여도 그다음에는…… 천무를 상대해야겠지.’
그 말 한마디를 끝으로 가슴에 꽂힌 검을 뽑지 못한 채, 죽어 버린 친우였다.
“미안하구만.”
주윤은 남김없이 술을 봉분에 털어 내고는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스릉-!
그의 허리춤에서 검이 뽑혀 나왔다.
보기만 해도 눈이 부실 것 같은 백색의 검.
친우를 죽이고 그의 검을 가져온 주윤이었다.
그는 그대로 검을 내질러 천천히 진법을 걷어 냈다.
그러고는 열린 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 * *
저벅, 저벅.
누군가 걸어온다.
난 슬며시 눈을 뜨고 앞을 바라보았다.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게냐?”
꼬장꼬장한 목소리와 함께, 서슬 퍼런 기세의 한 노인이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작은 키, 굽은 허리.
자글자글한 주름이 가득했지만, 그의 전신에서는 항거하기 힘든 기세가 줄기차게 뻗어 나왔다.
“…….”
난 다시금 눈을 감았다.
상대가 누군지는 알고 있었다.
마침내.
마침내 만나기는 했지만, 딱히 반가운 얼굴은 아니었으니까.
“꽃을 피웠느냐?”
노인, 아니 조부 주윤 역시 그런 내 마음을 읽었는지, 모든 걸 생략하고 본론부터 꺼내 들었다.
난 다시금 눈을 뜬 채, 피식 웃었다.
“피웠으나, 방금 막 져 버렸습니다.”
“…….”
주윤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내 곁에 자리를 깔고 앉았다.
“서희는…….”
“닥치시지요. 그 주둥아리로 동생의 이름을 꺼내지 마십시오.”
주윤, 그가 누구인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죽인 장본인이다.
“그때부터였다.”
주윤이 자조 섞인 미소와 함께, 힘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넌 내가 죽였다고 생각하느냐? 내 아들을? 내 며느리를?”
“…….”
“내가 죽이지 않았다. 나 또한 며느리를 찾아 헤맸으나 그건 도망시키기 위함이었다. 어찌 그걸 모르느냐.”
“필요 없습니다. 이미 돌아가신 분을.”
“그래서 이리 멍청하게 앉아만 있는 것이냐?”
난 그런 주윤을 삐딱하게 바라보았다.
“여태껏 사륭회를 이용해 무림을 농단하신 분이 이제 와서 왜 이러시는지 갈피를 못 잡겠습니다. 무슨 할 말이 하고 싶으신 겁니까?”
“내가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는 걸 알고 있기에 이리 온 것이다.”
“치명적이라…… 수백만의 생명이 한순간에 날아간 지금의 상황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웃기지도 않다.
고작 그걸 실수라 할 수 있을까.
“이 진법을 닫을 수 있는 건…… 천마를 베어 낸 절대마인, 검마의 진전을 이은 자만이 가능하다.”
“…….”
“서희가 이 진법을 닫을 수 있다.”
“필요 없습니다. 동생은 편하게…….”
“삼황자는 네 동생을 죽일 것이다. 이미 알고 있으니까.”
주윤의 말에 난 결국 터지고야 말았다.
덥석.
그의 멱살을 움켜쥔 난, 그대로 주윤의 몸을 강제로 일으켜 세웠다.
주윤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그대로 말을 이었다.
“네 어미를 찾아 헤맨 이유는 명백했다. 천무의 심득을 들어야 했으니까.”
“…….”
“건곤대나이는 한 개의 형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제 그런 건 아무런…….”
“네 녀석만이 삼황자를 저지할 수 있다. 지금은 수백만이지만, 이제는 수천만이 될 것이다. 무림은 몰살하고 삼황자는 대륙을 피바다로 물들이겠지.”
주윤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처음에는 아무런 상관 없었다. 하지만…… 아들을 잃고, 며느리를 잃고…… 이제는 내 손주들마저 잃는다 생각하니 그제야 내 아둔함을 탓하는 거다.”
“그럼 뒈져 버리시던지. 왜 여기까지 기어 와서 이딴 자책만 늘어놓으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차가운 말에도 불구하고 주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그래서 묻지 않았느냐. 꽃을 피웠느냐고.”
“…….”
난 가만히 그의 눈을 바라보다 이내 포기했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 꽃을 피우긴 했습니다.”
“그래, 검은 꽃.”
주윤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아직 가능성은 있다는 거구나. 그 꽃의 봉오리가 몇 개였느냐?”
내가 펼칠 수 있는 검로를 묻는 것이다.
“도합 열한 개였습니다.”
“열한 개라…… 내가 아홉 개를 피웠는데 가히 대단하구나.”
주윤이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였다.
“천마삼검…… 후반부 초식인 건곤대나이는 기운을 자유자재로 조종할 수 있다. 네 외조부인 헌원진은 도합 일곱 개의 갈래를 피워 냈거든.”
“…….”
처음 듣는 외조부의 이름이다.
“받아라.”
동시에 품을 뒤진 주윤이 내게 뭔가를 꺼내 건네주었다.
난 가만히 그것을 받아 들었다.
“네 어미의 유품이다. 네게 전해 달라던.”
하나의 목걸이.
그것에는 내 새끼손가락 마디만 한 보석이 달려 있었다.
“진기를 주입해 보거라.”
그가 말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다.
목걸이를 받아 든 순간 이걸 어째야 하는지 본능이 알아차렸으니까.
철컥.
목걸이에는 기관 장치가 심어져 있었다.
진기를 주입하기 무섭게, 보석이 비틀리며 그 안에서 하나의 서찰이 튀어나왔다.
“지금으로부터 다섯 시진. 딱 그 시간 동안 모든 걸 익혀야 한다.”
난 주윤의 말을 들으며, 가만히 서찰을 펴보았다.
동시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건곤대나이, 두 번째 형(形).’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의 형상까지.
진정한 ‘형상’을 일깨우는 과정이 적혀 있었다.
그것도 어머니의 고유한 필체로.
“다섯 시진이 넘으면…… 무림은 끝이다. 아니, 이 나라가 끝이다.”
“…….”
“주씨세가는 물론, 앞으로 이 무림이란 단어를 듣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단 뜻이다.”
주윤은 그 말과 함께, 내가 잡고 있던 멱살을 풀었다.
그러고는 그대로 돌아섰다.
그는 자신이 들고 있던 백색의 검을 내려놓은 채, 머뭇대는가 싶더니 그대로 진을 열고 나가 버렸다.
“끝까지…… 미안하구나.”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 한 줄만을 남겨 놓고 말이다.
천하제일 시한부 (마지막 회)
마진혁은 자신의 몸에 흐르는 새로운 기운을 느끼며 희열에 젖어 들었다.
“후후.”
불로초라 불리던 영단의 힘은 막연히 생각했던 모든 것을 뛰어넘었다.
가장 중요했던 것은 병마용의 존재였다.
시황제가 직접 구상하고 설계했고 마침내 만들었다던 병마용은 지금 그의 뒤에 시립한 채, 마진혁의 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강시술과는 또 다른 느낌의 병마용은 하나하나가 엄청난 위압감을 뽐냈다.
“아직 부족하다.”
마진혁은 천천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제마광천진의 색깔이 조금씩 진해지고 있었다.
무림인들을 말살하기 위해 만들어진 진법.
이 얼마나 멋진 일이던가?
시황제는 제국을 통일했다.
또한 새외의 침입을 두려워해 만리장성을 쌓아, 견고하게 제국을 지켜 냈다.
그럼에도 그는 불안했다.
자신은 천년만년 제국의 절대자가 되어 대륙을 호령하고 싶었을 테지만, 정해진 수명이란 것을 뛰어넘을 수는 없었으니까.
그렇게 남겨진 것이 바로 병마용이었다.
그들로 하여금 무림인들을 말살시켜 버리겠다던 시황제는 결국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내가 하면 되니까.”
마진혁은 자신 있었다.
요동마병과 절강군의 목숨을 담보로 부활한 병마용은 게걸스럽게 기운을 빨아들였다.
그들이 쓰러질수록 반대로 병마용은 점점 더 강해진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은 무림맹을 비롯한 무림인들이었다.
“…….”
무림맹과 흑련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 자리에는 다른 새외 세력의 장들도 모여 있었다.
“제길…….”
처음으로 입을 연 것은 귀곡산장의 장주, 염귀택이었다.
그는 일전에 주서진에게 호되게 당한 경험이 있었다.
분명 무공으로 보나 내공으로 보나 자신이 한 수 위라 장담했는데, 주서진은 보란 듯 그 모든 장벽을 깨부숴 버렸다.
“이렇게 눈싸움이나 하자고 어렵게 자리를 만든 것은 아닐 테고…… 할 말 없으십니까?”
흑련주, 반예진이 옆에 앉은 무림맹주, 혈불을 쏘아보았다.
미친 파계승이라 불리던 자다.
그가 사라지면서 흑련은 누구보다 더욱 기뻐했었다.
물론 주서진이란 더 미친놈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
혈불은 반예진의 물음에도 아무런 답 없이 물끄러미 정면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완벽한 무시.
자신을 무시했다고 생각했는지 반예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때였다.
콰앙―!
대전의 문이 터져 나가면서, 거대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철그럭, 철그럭.
마치 쇠붙이가 부딪치는 듯한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대전을 똑바로 걸어 들어왔다.
“날 기다린 건가?”
능글맞은 목소리와 함께, 등장한 사내.
바로 마진혁이었다.
그를 호위하듯, 붉은 안광을 일렁이며 병마용도 함께 들어섰다.
“미친…… 저런 사술을……!”
무림맹의 무사들이 일제히 자세를 낮추고 검 자루를 잡아 갔다.
병마용에게서 느껴지는 사특한 기운이 전신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잠시.”
혈불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손을 들었다.
그러자, 무사들이 다시 검을 놓고 조용히 맹주의 뒤로 시립했다.
“범의 아가리로 스스로 걸어 들어온 꼴이군.”
혈불의 말에 마진혁이 피식 웃었다.
“그쪽이?”
“…….”
마진혁도 지지 않았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상황을 이해했다는 듯 대번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새외 그리고 정, 사지간의 초월한 모습이라…… 흥미롭군.”
마진혁은 허락도 구하지 않고, 혈불의 맞은편 빈자리에 대뜸 자리를 깔고 앉았다.
그의 당당한 모습에 모두는 당황했지만, 함부로 움직일 수는 없었다.
그에게서 풍겨 나오는 기운이 너무도 위험했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로 이리 걸음 하셨소?”
혈불도 모두와 같이 똑같은 기분이었던지, 조심히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나 있겠습니까? 얼굴들이나 한번 보려고 왔을 뿐.”
다른 뜻은 없다는 듯 마진혁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의 천연덕스러운 반응에도 모두는 긴장감을 놓을 수 없었다.
이 모든 사태의 주범이 바로 눈앞에 있는 마진혁이란 걸 이제는 모두 알아차렸으니까.
뭔가를 느낀 마진혁이 슬쩍 대전의 구석을 향해 눈짓했다.
혈불이 다급하게 손을 뻗었다.
“나서지…… 말거라.”
대전을 호위하는 나한승들.
어둠 속에 숨어 때를 노리던 그들이 혈불의 지시에 몸을 움츠렸다.
“아쉽군요. 나한승이라면 제 호위들에게 꽤나 귀중한 양식이 되었을 텐데.”
철컥―!
마진혁의 말을 따라 병마용마저 아쉽다는 듯 잘게 몸을 떨었다.
마진혁은 이내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기가 시작이겠군요.”
그가 씩 웃었다.
동시에 대전의 문이 닫히고, 병마용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쿠당탕―!
대라마의 혈수인이 무력화됐다.
그의 전신은 넝마가 된 채, 대전의 한구석에 그대로 처박혀 버렸다.
“쿨럭.”
피를 흘리는 혈불의 안색도 좋지 않기는 매한가지.
촤악―!
동시에, 반예진은 허리에 깊은 검상을 입은 채, 그대로 나가떨어졌다.
조족지혈.
마진혁의 근처에도 다가가지 못했다.
고작 두 기의 병마용은 토병이라 생각지도 못할 만큼 너무도 자연스레 움직였으니까.
자연스레 움직이기만 해도 무서운 일인데, 그들은 너무도 능숙하게 상대의 무공을 따라 했다.
마치 그렇게 태어난 것처럼 말이다.
“……이래서 숨어들었던 것인데.”
혈불은 자신의 무능함을 탓했다.
진작 나서서 정천맹을 무너뜨려야 했다.
상황을 살피고자 숨었던 그 모든 계획이 저 괴물을 키워 낸 꼴이나 다름없었다.
“내 탓이다.”
그는 자신의 아둔함을 탓하며, 검을 집어 들었다.
이미 심각한 내상 탓에, 전신 기혈이 제대로 꼬여 버렸다.
토병은 소림의 무공도 곧장 따라 했다.
방금 손을 섞던 화산파의 검술로 화산파 장로의 목을 날려 버리고는, 소림의 무공으로 혈불을 상대했으니까.
촤악―!
맹주의 가슴에 토병의 검이 깊숙이 꽂혔다.
“맹주!”
“맹주님!”
털썩.
동시에, 혈불은 결국 한쪽 무릎을 꿇고야 말았다.
모두의 안타까운 외침 아래, 토병의 검이 번쩍 들렸다.
금방이라도 맹주의 목을 내려칠 기세였다.
하지만 그때였다.
“…….”
대전의 문이 열려 있었다.
토병은 뭔가를 느낀 듯 움찔대며, 천천히 돌아섰다.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 가장 거대한 존재.
그것을 먹이로 인식한 토병이 그대로 몸을 날렸다.
텅―!
대전이 뒤흔들리며 토병이 단번에 거리를 격하고 날아들었다.
턱―!
순간, 상대에게 잡힌 토병이 그대로 박살 나며 허공에서 흩어져 버렸다.
“그만해라.”
짧은 한마디가 대전 가득 울렸다.
“서진.”
마진혁 역시 굳은 표정으로 상대를 돌아보았다.
* * *
난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곧장 진법을 찢고 걸어 나왔다.
이 진법을 거둘 방법은 지금 내게 없다.
서희가 열쇠라면 내 동생을 데리고 오면 된다.
그리고 지금 마진혁이 가장 먼저 갈 곳이라면, 단 한 군데밖에 없었다.
스륵―!
일보를 내딛기 무섭게, 주변 풍광이 일그러졌다.
반 푼의 호흡만으로 거리를 격해, 난 무림맹 건물로 들어섰다.
문을 지키던 토병이 두 기.
간단히 몇 번 손을 섞는 것만으로 난 토병의 약점을 알아차렸다.
‘무공.’
상대방의 무공을 복사한다.
그것도 토병 특유의 기운으로 상대보다 더한 움직임을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내게 이걸 주신 것인가?”
난 가만히 어머니가 남겨주신 목걸이를 내려다보았다.
목에 걸고 있는 목걸이는 이미 빛을 잃고, 잠들 듯 검게 물들어 있었다.
그 안에 내재된 단 한 장의 비급서.
건곤대나이.
그건 검술이 아니었다.
내가 검술로 착각한 것일 뿐.
쐐액―!
날 적으로 인식한 토병이 달려들었다.
난 그대로 목을 틀어, 가만히 기운의 흐름을 뒤틀었다.
기운 자체를 만질 수 있는 체술.
건곤대나이는 그런 유형의 체술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효과는 지대했다.
터엉―!
토병이 터져 나갔다.
내 무공을 단번에 파악한 토병은 내가 익힌 삼재검법으로 응전을 시도했다.
웃긴 건 나 역시 토병의 기운을 받아 내고, 그대로 되돌려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기운의 흐름을 뒤튼다.
사기적인 기술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난 대전 안으로 너무도 쉽게 몸을 들였다.
“서진.”
마진혁의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저 새끼 하나 때문에 무림이 이 꼴이 났다.
뭐 무림 하나 없어진다고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자신은 있었다.
하지만 저 빌어먹을 자식의 욕심 하나 때문에 내 동생도 이용당했다고 생각하니 그게 열받았을 뿐이다.
“끝내자.”
화륵―!
주변 대기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또 다른 토병 하나가 내게 달려들었다.
수많은 목숨을 흡수한 토병이다.
하지만 내게는 그저 그런 장난감처럼 비췄을 뿐이다.
퍼석―!
토병이 뿜어낸 기운으로 도리어 토병을 박살 냈다.
건곤대나이의 완벽한 응수 교환이었다.
“한 가지 남은 정.”
친구라고 생각했기에, 애써 무시했고 돌아보지 않았다.
그것이 실수였다.
무림이 주는 교훈은 가장 가까이 있을수록 의심하라였는데.
역시 옛 선인들의 말씀은 틀린 것이 하나도 없다.
“어차피 넌 황제가 될 수 없어.”
“…….”
마진혁이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수백만의 목숨을 취한 네가 어떻게 황제가 된단 말이냐?”
공포 위에 군림하려는 자.
절대 군주가 될 수 없다.
이렇게 나처럼, 또한 지금 대전 바닥을 뒹구는 저들처럼.
모두가 따르지 않는 군주는 절대 군주가 될 수 없다.
“넌 살려 주마. 너를 비롯한 너와 관계된 이들은 모두 살려 주마.”
“그래?”
마진혁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이들이 살아 있으면 골치 아플 것 아니더냐? 네게 뭘 해 준 게 있다고!”
“…….”
마진혁의 말처럼 난 저들에게 받은 것도 준 것도 없다.
난 천천히 저들을 돌아보았다.
모두의 시선이 하염없이 땅을 향했다.
“나와는 상관없는 이들이지.”
내 한마디에 모두가 질끈 눈을 감았다.
토병을 너무도 쉽게 처리하는 내 모습에 희망을 걸었던 것일까?
“나와 관계된 모두를 살려 준다라…… 확실한가?”
내 말에 마진혁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두 눈에 비친 광망에는 희열과 기대가 가득했다.
“너만 있으면 토병 따위 없어도 그만이다. 넌 나랑 둘도 없는 지기가 아니더냐?”
그토록 이용할 때는 언제고.
뻔뻔하기가 아주 그지없다.
“난 무림인이다.”
한마디면 족했다.
잠시 고민하던 마진혁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결국 난 무림인이기에 이들 모두와 관계된다는 뜻이었다.
“끝내자.”
일보를 내디뎠다.
기운이 뒤틀리고, 마진혁의 전신이 그대로 터져 나갔다.
“끄윽…… 이런 말도 안 되는 무공…….”
“네가 그토록 경계하던 헌원가의 무공이다. 아니, 시황제를 도와 통일제국을 이룬 일월신교의 대비책이지.”
쩌정―!
또 한 번 기운이 터져 나갔다.
그대로 마진혁이 두 무릎을 꿇었다.
“어, 어차피…… 너도 나와 같은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아직 남은 것은…….”
“응, 걱정하지 마. 네가 심어 둔 파편들은 내가 모조리 베어 버릴 테니까.”
마진혁의 몸에서 영롱한 빛깔의 오색의 정수가 떠올랐다.
“지배의 정수.”
아버지가 심어 둔 정수의 한 조각.
어쩌면 이것이 그를 이 길로 인도한 것이 아닐까?
난 거침없이 정수를 움켜쥐었다.
파앗―!
동시에 마진혁의 눈에서 생기가 사라졌다.
난 곧장 돌아섰다.
이곳에서의 볼일은 끝났다.
“어딜 가려 하는가?”
혈불의 물음이 잠시 발목을 잡았다.
“할 일을…… 해야겠지.”
“…….”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 * *
시간이 훌쩍 지났다.
한바탕 소란이 휩쓸고 지나간 무림도 이제는 제법 제자리를 되찾는 모양새였다.
“오 년이 지났습니다.”
“그러게요.”
서희의 웃음을 마주한 진청운은 뭐가 그리 행복한지 마주 웃음을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서희의 어깨를 다정하게 껴안았다.
“혼례식 때도 형님은 결국 오시지 않으셨군요.”
“바쁘시겠지요. 대장군님이신데.”
대장군가, 주씨세가.
새로운 황제는 주씨세가를 무림과 황실의 대비책으로 삼았다.
그 이후로 주서진의 모습을 본 자는 없었다.
하지만 모두는 알고 있었다.
그는 남은 사륭회의 잔당을 추적하고 있다는 것을.
* * *
“댁에는 가 보지 않으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종서의 물음이었다.
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융중산 한 기슭.
저 위에 한때 둘도 없던 지기의 무덤이 있다.
난 천천히 진랑을 보기 위해 산을 올랐다.
한데, 그때였다.
“대, 대장군!”
철갑주를 갖춰 입은, 무장 하나가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의 안색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
팟!
동시에 난 단숨에 산을 올랐다.
“허…….”
허탈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봉분이 터져 나갔다.
그 안에 넣어 둔 관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스스스―!
스산한 바람이 휘몰아쳤다.
철그럭.
허리춤에 매달린 채, 오 년간 한 번도 뽑혀 나오지 않았던 세 자루의 검이 반가운 듯 움찔 몸을 떨었다.
《천하제일 시한부》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