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s First Time Limit RAW novel - Chapter 71
천하제일 시한부 (71)
“흑흑…….”
내 거처에 흑련주의 서글픈 울음소리로 가득했다.
방금 전보다 두 배는 더 부어 버린 얼굴로 흐느끼던 흑련주가 내가 다시 주먹을 들어 올리자, 이내 울음을 멈췄다.
“자, 그만 닥치고. 제대로 얘기해 봐.”
난 자세를 잡고 입을 열었다.
“검마의 장보도가 여기 주씨세가에서 발견됐단 그 소문이 어디서 흘러나온 건지.”
“저도 잘은 몰라요.”
흑련주가 고개를 저었다.
“군사에게서 들은 게 다라…….”
“군사? 군사라면…… 이주악 그 새끼?”
“네.”
흑련주의 말에 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흑련은 정천맹처럼 군사가 존재한다.
이주악 그놈이 유일하게 흑련에서 머리를 좀 쓰는 인물이긴 했다.
“그놈이라면 흑검대 애들 데리고 있겠네.”
“헙, 넵.”
마치 어떻게 알았냐는 듯한 표정으로 흑련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정천맹은 각기 세력들의 무사단 구성도를 세밀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것은 정천맹의 정보원들이 보다 우수하기 때문에 일어난 결과였다.
“흑검대를 좀 조져 보면 소문의 출처를 알아낼 수 있으려나.”
난 이곳이 시끄러워지는 것은 딱 질색이다.
다행히 흑련 쪽에서도 자기들끼리 독식하기 위해 소문을 감춘 듯했지만, 그래서 더 문제였다.
소문의 발원지를 알아낼 수 없다는 것.
“왜 하필 주씨세가지?”
이것이 내가 품은 의문이었다.
이 소문이 퍼질 때쯤에는 이미 주씨세가는 털릴 대로 털린 뒤였다.
만약 주씨세가가 망하길 원했다면…… 멀쩡했을 때 이런 소문을 흘려 다른 문파들의 공격을 받게 하는 것이 유효했을 터.
“망해 가는 가문에 흘릴 정보는 아니긴 하죠. 얻을 것도 없고.”
멍청한 흑련주마저 말뜻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마치…….’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 보니, 불현듯 번쩍하고 뭔가가 떠올랐다.
‘내가 이곳에 올 때를 노려 고의적으로 소문을 퍼트린 듯한 느낌이다.’
만약 표적이 주씨세가가 아니라…… 주씨세가에 돌아올 나였다면?
‘나를 표적으로 삼아서 얻을 이득.’
이 부분은 딱히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하, 모르겠네.”
“저두요.”
흑련주는 말똥말똥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정말이지, 아무런 생각이 없다는 걸 몸소 보여 주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그거 물어보려고 혼자 온 거냐? 어찌 보면 적일지도 모를 상대한테?”
내 말에 흑련주가 고개를 저었다.
“에이, 신기검단주가 어찌 적인가요.”
“지랄하네. 아까 낮에는 검까지 들고 덤볐으면서.”
“흠. 흠…….”
흑련주가 헛기침을 해 대며 시선을 피했다.
“저 그래서 말인데…….”
흑련주가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제가 여기서 좀 머물러도 될까요?”
“왜?”
뜬금없는 개소리에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사실 그동안 심심하기도 했고…… 단주님이랑 있으면 뭔가 재밌는 일이 일어날 것 같기도 하고.”
단지 저런 멍청한 이유로?
분명 뭔가 속내를 숨긴 것 같은데…… 그걸 알 길이 없다.
“좋아.”
그렇다면 곁에 두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내가 경험한 흑련주는 심성이 그리 악한 녀석은 아니니까.
“아싸.”
흑련주가 진심으로 기쁜 듯, 주먹을 말아 쥐며 몸짓으로 그 기쁨을 드러냈다.
“그럼 앞으로 네가 애들 훈련 좀 맡아라.”
“예?”
“밥값을 해야지?”
“그, 그렇긴 한데…….”
뭔가 떨떠름한 반응이다.
“대신 검마의 장보도가 진짜 나오게 되면 그거 팔아서 너한테 반 떼어 줄게.”
“헉, 지, 진짭니까?”
흑련주의 눈이 또 금전처럼 황금빛으로 번쩍였다.
역시 이 새끼 속셈은 이거였다.
“그래.”
난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 훈련을 맡으면 되겠습니까? 패검단?”
“아니, 신기검단.”
“예엣?”
흑련주가 화들짝 놀랐다.
사실 정천맹의 신기검단은 내가 손수 가르친 애들이다.
이런 반응이 나오는 것은 당연했다.
“내가 새로 만들어 낸 애들이야. 신기단과 신검단.”
“아아…… 그럼 아까 혹시 신기검단이 있다고 한 것도?”
“응, 맞아. 걔네야.”
“…….”
내 말에 흑련주의 표정이 억울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변했다.
“왜? 신기검단이 없으면 뭐, 광귀단 동원해서 어떻게 해보려고?”
“아, 아닙니다.”
흑련주가 고개를 저었다.
“광귀단이 덤벼서 내 식솔들을 다 죽인대도 나는 살아남겠지.”
“…….”
“내가 살아 있는 자체만으로도 너희 흑련은 지옥이 될 거고.”
“마, 맞지요.”
흑련주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들었으면 허튼 생각하지 마. 진짜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상태로 평생 고통과 공포만 느끼게 해 줄 수도 있어.”
“며, 명심할게요.”
흑련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난 가만히 그의 말을 듣다가 이내 뭔가 이상함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 근데 왜 말투가 그 모양이냐? 사내새끼가 마치…….”
“저 사내 아닌데요?”
뜻밖의 말에 정적이 일었다.
“어?”
“예?”
“뭐?”
“뭐가요?”
뭐야 이건.
“너 남자 아니었어?”
“저 여잔데요.”
와씨, 어쩐지 남자치고는 근골이 너무 연약하다 했더니.
“야 미안하네, 이거.”
미리 말했으면 좀 살살 팼을 건데.
얼굴을 아주 아작을 내 놨으니 어쩐다.
“괜찮아요. 얼굴로 벌어먹고 살 것도 아닌데요. 흐흐.”
게슴츠레한 표정으로 헤헤거리는 흑련주를 보며 내 입가에도 자연스레 웃음이 걸렸다.
‘보면 볼수록 웃기는 녀석이란 말이지.’
이상하게도 적으로 만났음에도 같이 있으면 마음이 편안하다.
“총관한테 말해 둘 테니까, 안채에 빈방 아무거나 써.”
“옙.”
“내일부터 애들 훈련 좀 도와주고.”
“알겠습니다!”
우렁찬 대답을 들으며 난 그대로 안채를 빠져나왔다.
* * *
다음 날 아침.
난 기력을 회복한 북궁설을 찾았다.
다행히 그녀는 쉽게 원기를 회복했다.
애초에 살수들의 독이 워낙 싸구려 독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그녀의 내력이 고강했기에 며칠 만에 툴툴 털고 일어날 수 있었다.
“괜찮냐?”
내 물음에 북궁설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불편한 것은 없어요. 이제 슬슬 떠나도 될 것 같아요.”
“그래.”
난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북궁설의 빙정까지 흡수한 마당에 조금 미안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빙궁의 유일한 후계자를 이곳에 두기에는 너무 위험했다.
뭐 적이 어디 한두 군데여야지.
“어디로 갈 건데?”
“흩어진 세력을 찾아볼 생각이에요. 이래 보여도 제가 유일한 후계자니까요.”
북해빙궁은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그렇기에 더욱 핏줄에 엄격했다.
정통성을 가진 북궁설이야 말로 존재만으로 반동분자들에게 충분한 위협이 될 터.
“내가 안 도와줘도 돼?”
슬쩍 물었다.
사실 그녀는 내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이 먼 길을 달려왔을 것이다.
그런 내가 냉정하게 내쳐 버리니 앞길이 막막하지 않을까?
“도와준다면 고맙지만…… 일단은 제가 힘닿는 데까지는 홀로 해 보려고요.”
“빙정은?”
“맡아 주세요. 그걸 뺏기면…… 빙궁은 진짜 끝이니까요.”
흡, 이미 먹어 버렸는데 어떡하지.
“그, 그래.”
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어딜 간다구요?”
우리 둘의 대화를 들었는지, 서희가 안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다친 몸으로 어딜 가요. 갈 데도 없는 사람한테 너무 냉정하네.”
서희는 날 흘겨보며 북궁설의 팔을 붙잡았다.
“나랑 지내요. 나도 동생 생기니까 좋던데, 뭘.”
“안 돼. 위험해.”
“오라비.”
서희가 짐짓 엄한 표정으로 날 꾸짖듯이 외쳤다.
“어려운 사람을 이렇게 보내면 나 마음이 너무 아플 것 같아. 계속 생각나고 불편해.”
“…….”
미안한데, 그건 나도 그래 서희야…….
하지만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거다.
“그래도 안 돼. 지금 흑련주도 있는 마당…….”
잠깐.
흑련주?
“잠깐만, 좋은 방법이 있었네?”
최고의 호위가 옆에 있었잖아?
“너 안 가도 되겠다.”
흑련주랑 붙여 놓으면 그것 나름대로 든든한 조합이긴 했다.
북궁설도 무공으로 어디 꿇리진 않을 것이고 흑련주는 두말해야 입 아프다.
“세력을 찾는 건 도와줄게. 물론 지금 당장은 무리고.”
“그, 그렇다면야 저로서는 좋긴 한데.”
북궁설이 눈치를 살폈다.
나 역시도 빙정을 꿀꺽해 놓고 나 몰라라 하는 건 너무 양심 없다 생각하고 있었다.
“도와주신다면 시간은 상관없습니다. 너무 늦지만 않는다면…… 오히려 제가 감사한걸요.”
북궁설의 말에 이미 결정은 났다.
그렇게 흑련주와 북궁설, 식구가 늘어났다.
* * *
난 아침에 가볍게 몸을 풀고 오후에는 집을 나섰다.
어제 못 했던 일을 끝낼 참이었다.
“오늘은 조용하네.”
번화가로 나왔는데, 어제와는 달리 썰렁한 분위기만 가득했다.
아무래도 흑련의 무사들이 한바탕 뒤집어 놓고 간 탓인 듯했다.
이내 번화가를 지나쳐 난 마을의 입구 쪽으로 향했다.
내가 가려던 곳은 바로 먹쇠 아재의 대장간이었다.
“계십니까?”
굴뚝에는 연기가 나지 않았다.
아직 화로에 불도 지피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난 조용히 기척을 내며 안으로 들어섰다.
안에는 이제 막, 문을 연 듯한 먹쇠 아재가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서진…….”
“이제 문 여십니까?”
정중하게 물었다.
아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금 할 일에 몰두했다.
누가 봐도 차가운 반응이었지만, 난 알 수 있었다.
내가 다시 들른 것만으로도 먹쇠 아재는 분명 기뻐하고 있단 사실을.
“뭐 하러 왔느냐. 바쁜 시간이거늘.”
“여쭐 것이 있어 들렀습니다.”
내 말에 먹쇠 아재가 하던 일을 멈추고 천천히 돌아섰다.
“빨리 물어보거라.”
“일전에 말씀하셨지요. 제가 보는 것만이 세상의 전부는 아니라고.”
“그랬지.”
당연한 말이다.
어찌 일개 사람 하나가 세상 전부를 볼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곰곰이 생각하다 보니 먹쇠 아재의 말은 분명 다른 뜻을 품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가문을 재건하는 것도 말리셨습니다. 맞습니까?”
“그랬다.”
티는 내지 않았지만, 당시 먹쇠 아재는 세가의 재건을 바라지 않았다.
세가의 전속 대장장이였음에도 오히려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티를 냈다.
하지만.
“걱정하셨습니까?”
난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다 나와 서희가 염려되어 했던 행동이라는 것을.
“끌끌, 당연히 걱정할 수밖에. 아직 어린 너희들이 세가를 어떻게…….”
“지금 꾸리고 있습니다. 먹쇠 아재가 염려하는 게 뭔지는…… 몰라도.”
사실 알 것 같긴 했다.
사륭회.
분명 그 존재를 먹쇠 아재는 알고 있으리라.
하지만 말을 아껴야 했다.
내가 온 것은 바로 이 먹쇠 아재를 데리고 가기 위함이었으니까.
“세가로 오시지요. 본 세가의 무사들을 위해 다시금 망치를 잡고 철을 주물러 주시지요.”
“…….”
먹쇠 아재가 빤히 내 두 눈을 쳐다보았다.
“난 싫다.”
그때와 같이 먹쇠 아재는 고개를 저었다.
절대 돌아가지 않겠다는 듯, 먹쇠 아재는 다시금 하던 일을 계속하기 시작했다.
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먹쇠 아재.”
난 그를 불렀다.
그러고는 조용히 기운을 드러냈다.
“지금 부탁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서늘한 한기가 후끈한 열기로 가득한 대장간을 삽시간에 얼려 버렸다.
“명령입니다. 세가의 직계 혈족이 전속 대장장이 막금에게 내리는 명령.”
“…….”
먹쇠…… 아니 막금이 돌아섰다.
하지만, 내 바람과 달리 막금의 입가에는 비틀린 미소만이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