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l Divers RAW novel - Chapter 110
헬 다이버즈 109화
109화
“엄마! 탱크!”
“탱크는 무슨 탱크야? 얼른 밥이나 먹…어?”
충청북도 서북부 구역에 위치한 한 고속도로 휴게소.
겨울이라 여행을 가는 사람들이 많아 피크라고 할 수 있는 점심 시간에는 사람과 차가 미어터졌다.
바로 그때, 떡하니 버스 정차 구역에 멈춰 서는 전차가 한 대 있었으니, 조명과 통제관 4인방을 태운 미래형 전차였다.
“신기하네요. 이만한 크기의 전차라면 아스팔트 도로가 다 뭉개질 줄 알았는데.”
해치를 열고 나온 조명이 차가운 겨울 공기를 들이마시며 말했다.
반대편 해치를 열고 나온 8282는 연신 어깨를 으쓱거리며 전차 자랑을 한껏 늘어놓았다.
“실제로는 이런 물렁한 지반 따위 뭉개 버릴 만큼 무거운 전차가 맞아. 하지만 실시간으로 지반의 강도를 파악하고 반중력 시스템으로 전차의 중량을 ‘줄인 것’처럼 만들 수 있다면? 이 전차가 바로 그런 전차라 이 말이야.”
“알았으니까 화장실이나 다녀오죠. 휴게소에 들르면 귀찮아도 화장실은 무조건 가야 해요.”
사람이 휴게소에 들르는 이유는 딱 두 가지뿐이다.
빈속에 뭘 집어넣거나, 배 속에 있는 걸 배출하거나.
게다가 조명 일행은 여기까지 오는 길에 음료수며 과자며 실컷 퍼먹은 터라, 제아무리 통제관이라도 오줌보가 견딜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근육이 너무 튼튼해서 요실금 걱정이 없는 조명도 신호가 오기 시작했는데, 통제관이라고 별수 있겠나.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우린 화장실 같은 거 안 가.”
“…잘 모씀다?”
“우린 섭취한 음식에서 필요한 만큼의 에너지만 흡수하고 나면 남은 찌꺼기는 전부 소멸시켜 버려. 그래서 뭘 먹어도 인간들처럼 남는 게 없다고.”
“……?”
조명도 일단 중퇴자이긴 해도 대학물은 먹었다. 그래서 질량 보존의 법칙이나 열역학의 기본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게 말이 돼요?”
“돼.”
“왜 되는데요?”
“우린 그냥 돼.”
하다못해 물을 증발시켜도 수증기가 남고, 종이를 태워도 매연이 남는데, 체내에서 찌꺼기를 완벽히 소멸시켜 버린다니. 저 방호 마스크 안쪽은 대체 어떻게 돼먹었단 말인가.
“설마 다 큰 사내새끼가 화장실 혼자 가는 게 부끄럽냐?”
“그럼 제가 같이 가드리겠습니DA!”
쾅!
전차 전면부의 조종석 해치를 열고 나온 1004가 손을 들며 동행을 자처했다.
같이 가도 상관없다는 말을 하려다, 문득 조명은 의아함을 느꼈다. 예전부터 당연하게 가졌어야 할 의문이지만, 어째서인지 단 한 번도 가진 적 없던 의문.
1004는 남자인가, 여자인가. 아니, 그보다 다들 확고하게 자신이 ‘남자다’ 혹은 ‘여자다’라고 밝힌 적이 없었다.
조명은 1004의 화장실 동행을 허락하기 전에 팩트 체크부터 들어갔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묻는 건데, 의무관님은 남자인가요?”
“어른이 아이의 화장실에 따라가는 게 문제가 되진 않습니DA.”
“아니, 성별 확인을 해야…….”
“문제없다.”
또다시 확 바뀐 1004의 말투에 조명은 입을 다물었다. 위대하고 위대하신 의무관님께서 문제가 없으시다는데, 아무렴.
결국 8282와 11500이 전차에 남기로 하고, 1004와 666이 조명을 따라나섰다.
휴게소에 진입했을 때부터 이미 상당수의 시민들에게 주목을 받고 있었지만, 이제 와선 딱히 신경 쓸 만한 일도 아니었다.
뉴스에서나 보던 인간들이 고속도로 휴게소에 떡하니 전차를 몰고 나타났는데, 당연히 신기할 것이다. 게다가 그 전차가 현대인 기준에서 보면 좀 많이 SF스럽다는 점을 감안했을 때, 대한민국 군대가 총출동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기적에 가까웠다.
‘한국 정부에 미리 통보해 두지 않았다면 큰일 날 뻔했지.’
세계 최초, 세계 유일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개인 자격으로 해양 플랜트를 소유한 조명의 신분은 꽤 대단한 위치에 있었다.
사실 이전까지만 해도 조명은 자신을 그냥 돈 많은 졸부쯤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서울시청에 전화를 한 것만으로도 자신의 말이 대통령의 귀에 들어갈 만큼 힘이 있는 위치라는 걸 깨달았다.
한국 정부는 여전히 자신을 싫어할 거라 생각했는데, 일전의 군대 카르텔을 깨부수면서 그나마 눈치 있는 사람들이 공직을 꿰찬 듯했다.
“남자 화장실이라고 해서 퀴퀴한 홀아비 냄새만 날 줄 알았는데, 꼭 그런 건 아니네?”
“666은 뭘 모르네YO. 항상 청소부가 청결하게 관리하고 있기 때문에 깨끗해 보이는 겁니DA. 인간들은 기본적으로 돼지우리에서 뒹구는 걸 선호합니DA.”
“…….”
결국 화장실까지 따라 들어온 둘을 내쫓고 나서야 용무를 볼 수 있었다.
손을 씻으며 나온 조명은 한겨울에도 입김을 불어가며 휴게소를 거니는 가족이나 연인 사이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뉴스에선 항상 경제불황에 대한 얘기가 나오지만, 소소한 행복을 아는 사람들은 다들 저렇게 누군가와 함께하는 순간을 즐긴다.
이제는 더 이상 가족도 없고, 연인을 만들어본 적도 없는 조명에게 있어선 꿈만 같은 광경이었다.
어머니가 직접 짜준 것 같은 목도리와 벙어리장갑을 낀 아이가 부모의 손을 잡고 지나갈 때는… 왠지 가슴 한 켠이 시리는 것 같았다.
‘부모님께서 살아 계셨더라면 질리도록 효도해 드렸을 텐데.’
희미한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려 보면, 믿음직한 가장이자 호쾌한 아버지는 조기 축구를 곧잘 즐기는 스포츠인이었다.
아예 전용 돔 구장과 축구팀도 창단해서 스포츠인이던 아버지의 노후를 즐겁게 보내게 해드릴 수도 있었다.
어머니는 요리를 참 좋아하셨으니, 고급 식재료와 주방 기구, 최신형 부엌을 선물할 수 있었겠지. 같이 식도락 여행도 다니면서 유명한 요리사에게 뒷돈을 찔러주고 요리를 대접받는다거나, 어머니가 요리를 배울 수 있게끔 해드릴 수도 있었다.
이제 그럴 능력이 있고 여유도 생겼는데, 정작 기회가 없다.
너무나도 빨리 모든 걸 잃어버렸다.
어쩌면 지금껏 자신이 온갖 욕망을 절제하면서 살아온 건 그분들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분들은 더 이상 누릴 수 없게 된 것을 자신이 누려선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이 아닐까?
‘그러면 뭐 해, 전부 부질없는데.’
조명 자신이 거지같은 인생을 비관하며 비행청소년으로 자라고, 돈이 생기는 족족 흥청망청 써재끼는 망나니 새끼였다고 한들 달라지는 건 딱히 없다.
여전히 그들은 조명의 곁을 떠난 상태이며, 조명의 효도든 불효든 받을 수 없는 것은 똑같으니까.
그러니 이제 와서 후회한들, 아쉬워한들, 어쩔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앗, 뜨거!”
자신의 곁을 지나친 단란한 가족을 바라보며 멍하니 있던 그때, 뺨에서 느껴진 열기에 조명은 화들짝 놀랐다.
급격한 체온 변화에 꽤 내성이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리 그래도 엄청난 열기를 내뿜는 닭꼬치의 고열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물론 그걸 건넨 이는 1004였기 때문에 화상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감상에 빠져 있는 건 오랜만에 보는 것 같네YO. 이미 겨울인데 가을을 타기라도 하는 건가YO?”
“그렇게 티가 났나요? 하하.”
멋쩍게 웃어 보인 조명은 뜨거운 닭꼬치를 받아 들었다.
휴게소의 명물인 버터감자, 맥반석 오징어와 함께 쓰리 톱을 달리고 있는 메뉴답게 굉장히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일부 마니아들이 휴게소의 진짜 명물은 호두과자와 핫도그 아니냐고 따질 수도 있겠지만, 천편일률적인 맛을 자랑하는 고만고만한 메뉴들보다야 바리에이션이 다양한 닭꼬치야말로 진짜 휴게소 명물이라고 할 수 있었다.
“마음으로는 아픔을 느끼고 있지만, 머리로는 훌훌 털어버렸다는 게 느껴집니DA. 그러니 그건 고민이 아니라 찰나의 감정을 깊이 느낀 것에 지나지 않겠지YO. 그러니 의무관으로서 딱히 할 말은 없습니DA.”
“다행이네요. 혹시 주사라도 놓으시려고 하면 어쩌나 싶었어요.”
“약물적, 수술적 치료가 만능은 아닙니DA. 다이버는 이미 충분히 강인한 정신력과 육체를 가지고 있어YO. 까놓고 말해서 의사가 보기에 가장 이상적인 상태라고 할 수 있어YO.”
“많이들 도와주셨으니까요.”
조명은 자신 혼자서 그 많은 일들을 다 해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피를 토하고, 상처 입고, 정신이 갈기갈기 찢겨져 나가는 노력을 한 것은 틀림없지만, 그러한 과정을 거치고 결과에 도달하기까지 주변인들의 도움을 조금도 받지 않았다고 말하는 건 어폐가 있으니까.
“기특하네YO. 머리를 쓰다듬어 드릴까YO?”
“다음에 해주세요. 사람들 없는 곳에서.”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1004와 대화를 할 때면 주변 공기가 포근해지는 것 같았다.
적당히 따뜻한 목욕탕 욕조에 푹 잠긴 채 멍하니 시간을 보내는 느낌.
언제까지고 그런 시간이 이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조명은 1004와의 대화에 무심코 빠져들지 않도록 정신을 바로잡았다.
누구 말마따나 다 큰 사내새끼가 이제 와서 남에게 응석을 부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두 사람은 한겨울의 휴게소 앞에서 뜨거운 닭꼬치를 먹으며 조용히 주변의 분위기에 녹아들었다.
그렇게 잠깐의 휴식을 끝낸 뒤, 둘은 휴게소의 넓은 홀에서 자리를 잡은 채 아이들을 관객 삼아 권총 돌리기를 선보이고 있는 666에게 다가갔다.
“슬슬 가죠. 애들 상대로 불법 무기 보여준다고 어른들한테 한 소리 듣겠어요.”
“수류탄 마술만 보여주고 가면 안 돼?”
“그게 뭔데요?”
“수류탄 핀을 뽑으면 관객들 중 누군가의 옷 속에서 수류탄이 나오는 마술.”
순간, 조명은 666의 뒤통수를 후려치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를 느꼈다.
거의 절간의 스님 수준으로 무욕적인 삶을 살아온 조명에게 있어서 이건 정말 참기 힘든 유혹이었다.
반쯤 올라간 손을 간신히 내린 조명은 ‘건전’한 마술만 보여주라는 경고를 했다.
영 못마땅한 태도로 수류탄을 집어넣은 666은 총알이 실린더에 꽉 차 있는 리볼버로 ‘러시안 룰렛’을 해 보이겠다며 큰소리를 쳤다.
666의 잔혹끔찍 마술쇼는 조명에 의해 즉시 중단(제압)되었다.
* * *
박씨 일가의 본가는 충청권 내에서도 제법 유명세를 탔을 만큼 으리으리한 대저택이었다.
서양도 아니고, 대한민국 땅에 으리으리한 대저택이 뭐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6.25 전쟁 이후 충청도에 자리를 잡은 박씨 일가의 선대가 사업 대박을 터뜨리면서 집을 크게 지었다고 했다.
자고로 큰 사람이 되려면 환경도 거기에 맞춰야 한다며 돈을 쓰는 것에 주저함이 없었다고 하니, 그만큼 사업을 크게 번창시킨 박씨 가문 선대가 대단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처음에는 고래 등 같은 기와집을, 1990년대에는 현대식으로 맞춰 양옥집을, 2020년이 넘었을 때는 대규모 공사를 진행해서 해외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대저택을 지어놓았다.
별세하기 전의 박봉화(烽火)가 소유하고 있던 사업체와 거래처는 모두 자식들에게 양도되었는데, 하필 조명의 아버지 되는 박전등(電燈)이 너무나도 이른 나이에 사고로 비명횡사하면서 그 형제자매들에게 재산을 가로채였다.
재산을 가로챈 것도 모자라 조명의 어머니를 죽음으로 내몰고, 어린 조명은 고아원에 처박아넣은 박씨 일가가 지금은 대저택의 식당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기다리고 있는 인물은 다름 아닌 조명이었다.
박봉화의 아내 되는 이순자도 별세한 지금, 집안의 가장 큰 어른은 첫째이자 가장 큰 사업체를 가져간 박전기(電氣)였다.
그가 상석에 앉아 팔짱을 낀 채 시계만 쳐다보던 것이 벌써 30분도 더 된 일이었다.
“이 자식은 대체 오는 거야, 마는 거야? 야, 전도. 너 정말 연락한 거 맞아?”
“아, 그렇다니까요, 형님. 제가 언제 한 입으로 두말하는 거 봤습니까? 그놈이 제 입으로 직접 찾아뵙겠다고 답장까지 보냈다니까요?”
자신의 스마트폰 문자 기록까지 보여주며 짜증을 낸 인물이 박봉하의 셋째 아들인 박전도(傳導). 박씨 일가의 실패작, 망나니, 돈 까먹는 기계라고도 불리는 집안의 천둥벌거숭이였다.
또한 집안에서 유일하게 아직도 결혼하지 못한 노총각인 그는, 잘 차려입은 가족과 외가 쪽 사람들 사이에서 꽤나 후줄근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