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l Divers RAW novel - Chapter 119
헬 다이버즈 118화
118화
조명의 예상대로 이동식 해양 플랜트로 똑바로 접근해 온 선박들은 모두 특정 국가에 소속되어 있지 않은 민간 선박이었다.
군함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것들은 진즉에 퇴역했어야 할 낡은 깡통들이지만, 그럼에도 통제관들이 저들을 이동식 해양 플랜트로 끌어들인 것은 인재가 필요했기 때문이리라.
이동식 해양 플랜트의 후미로 차례차례 접근한 화물 선박이 도킹을 시도하고, 뒤이어 시추선과 군함들이 그 뒤를 따르는 형태로 이어졌다.
도킹이란 게 우주선들이 할 법한 그런 대단한 기술은 아니고, 그저 선박들이 앞과 뒤를 거대한 쇠사슬로 연결하는 것뿐이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몇몇 대기업은 화물선을 도킹해서 해양 선단으로 만들기도 했는데, 이 선박들이 해양 플랜트와 거래를 하면서 세계 각지에 헬 게이트산 원자재들이 공급되는 것이다.
항공기로 운반할 수 있는 원자재의 양은 너무 적은데다 비용도 비쌌기에, 운송 거래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해양 선단들이 바다의 택배 기사 노릇을 해주는 셈이었다.
이동식 해양 플랜트 소속 헬 다이버들이 멍하니 항공 갑판 위에 서서 선박 도킹을 지켜보고 있을 즈음, 지금쯤 술에 취해 뻗어 있어야 정상인 정비병들이 항공 갑판 위로 우르르 튀어나왔다.
“아, 좋은 아침입니다, 다이버님들!”
“어후, 속이야. 얼큰한 해장술 한 병 마셨으면 좋겠네.”
“파도에 선박이 흔들리지 않게 추가 연결 작업 진행해. 8282 통제관님께서 아예 용접을 해버려도 상관없다고 하셨다!”
“합금 강판이랑 콘크리트 더 가져와! 선박 연결하고 길 만들어야 해!!”
개인 공구함과 중장비 차량까지 끌고 나온 정비병들이 선박 연결 작업에 투입됐다.
저쪽에서도 예상치 못한 작업 속도였는지, 이동식 해양 플랜트의 베테랑 정비병들이 순식간에 선박을 연결하고 길을 만드는 광경에 입을 쩍 벌렸다.
“그런데… 이쯤 되면 책임자끼리 얘기해야 할 타이밍 아닌가? 왜 통제관님들은 안 나오시지?”
창환이 주변을 둘러봤지만, 어디서든 뿅 튀어나오는 통제관들은 보이지 않았다.
사실 그게 당연했다. 통제관들은 이동식 해양 플랜트의 전반적인 관리와 헬 다이버(조명)의 육성을 통해 과오를 해결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다.
지금 이곳에 도착한 민간 선박들은 비즈니스 파트너 축에도 들지 못한다. 통제관들이 선심 쓰듯 그들을 받아준 것에 불과할 뿐.
그 정도라면 인간 중에서 유일하게 이동식 해양 플랜트의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는 조명이 처리할 일이었다.
계속 통제관들을 찾는 헬 다이버들을 뒤로한 채 조명은 첫 번째로 도킹한 화물선의 갑판 위로 올라갔다. 그곳에는 진즉에 접견 준비를 끝마친 선장과 책임자가 있었다.
선장으로 보이는 사람은 노년에 가까운 듬직한 덩치의 사내였다. 전형적인 바다 사나이답게 잘 그슬린 구릿빛 피부와 두꺼운 팔근육에 자잘한 상처들이 돋보였다. 바다 위에서 먹은 밥이 육지에서 먹은 밥보다 훨씬 많은 사람인 듯했다.
크고 뚜렷한 이목구비와 푸른 눈 때문에 서양인이라는 건 대충 알 수 있지만, 첫마디를 꺼내기 전까진 어느 나라 사람인지도 몰랐다.
반대로 책임자로 보이는 남자는 말쑥한 인상의 동양인이었다.
형찬과 인상이 비슷했는데, 조명은 책상 앞에 앉아 펜대를 굴리는 사람이 가지는 특유의 분위기가 느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먼저 인사를 건넨 것은 무덤조차 박력이 느껴질 것 같은 백전노장의 선장이었다.
“반갑수. 나 알렉세이 바르자코프요. 이 어마어마한 놈을 몰고 다니는 선장이지. 솔직하게 말하믄 고용된 바지 선장이지만, 그건 딱히 신경 쓸 필요 없수다.”
2급 통제관들만큼은 아니지만, 악수를 한 것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파워가 넘치는지 알 수 있었다.
특히 혀가 꼬부라지는 사투리는 귀에 자동번역기를 끼워두지 않았다면, 전혀 알아듣지 못했을 것이다.
뒤이어 장갑을 벗고 악수를 한 말쑥한 남자는 조명과 같은 한국인이었으나, 한국계일 뿐이지 국적은 영국이었다.
“제임스 영이라고 합니다. EU에서 헬 게이트산 원자재 공급을 철저하게 규제하고 있는지라 사업이 망해서 제안을 받고 이곳에 합류했습니다.”
“유럽 시장이 그렇게 얼어붙어 있나요?”
조명의 이름으로 공급해 주는 각종 원자재들이 시장에서 큰 인기를 타고 있어 예전에 비해 훨씬 더 동력이 생겼을 것이라고 생각했건만. 제임스 영은 오히려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헬 게이트산 원자재 공급량이 크게 증가하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EU의 국가들이 서로 나눠 먹기 바빠서 민간 시장은 빈 깡통만 차고 있는 상황입니다. 저도 이 애물단지 화물선을 굴려가며 열심히 발품을 팔아봤지만, 어림도 없더군요. 다들 민간 기업이나 민간단체에 헬 게이트산 원자재를 공급하는 걸 크게 꺼려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조명은 얼마 전 프랑스의 명품 의류 제작 장인들에게 갑질한 것을 떠올렸다.
조명이 수틀리면 공급을 끊어버리겠다고 협박하자마자 원하는 대로 최고급 의류(정장)를 만들어 퀵으로 보내주지 않았던가.
그런 자들조차 원자재의 부족한 물량에 허덕이는데, 제임스 영처럼 달랑 화물선 하나 가지고 있는 영세 해운 기업은 말할 것도 없었다.
혹시나 귀중한 원자재를 바다 위에서 잃게 될까 봐, 누군가가 자신의 원자재를 가로챌까 봐, 모든 국가들이 원자재를 꽁꽁 싸두고 조금씩, 직접 공급하는 것이다.
“발품을 팔아서 계약을 맺고, 원자재를 타국에 대신 팔아주는 조건으로 이익을 남겨먹는다. 이론상 그럴듯한 계획이었습니다만, 막상 시도해 보니 절대로 뚫을 수 없는 벽과도 같더군요.”
“헬 게이트산 원자재를 가장 많이 소비하는 건 민간단체가 아니라 정부니까요.”
멀리 내다볼 필요도 없이 당장 대한민국의 기업들만 살펴봐도 불편한 진실이 보였다.
정부와 군에서 주도하는 각종 프로젝트로 인해 하루에도 어마어마한 양의 원자재가 소모되는 것에 비해, 기업들은 거기서 남는 자투리라도 주워먹고 개발 사업에 투자해 보겠다며 안간힘을 쓰고 있는 형국이었다.
그 문제는 조명이 이동식 해양 플랜트를 통해 새로운 공급 루트를 뚫어주면서 어느 정도 해소되었지만, 지금도 민간인이 헬 게이트산 원자재로 새로운 상품이나 약품을 만들어내는 건 매우 힘든 실정이었다.
“지금까지는 그냥 자잘하게 일반적인 화물만 운송하면서 간신히 적자는 면하고 있었는데, 제가 원하던 건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진정 헬 게이트산 원자재를 원하는 기업이나 민간단체에 적절한 물량을 팔아넘기면서 다 함께 상부상조하는, 인류의 과학기술과 문명 발전에 이바지를 하고 싶다는 것이 당초의 제 꿈이었습니다. 그걸 포기하고 평범한 해운업이나 한다는 건… 엄청난 자괴감이 느껴지더군요.”
“그래서 우리 측에 합류하신 거네요.”
“물론이죠. 박조명 헬 다이버, 이 바닥에서 당신을 모르는 사람은 기억상실증 환자이거나 그냥 병신입니다. 시장 상품을 독점하지 않고 필요한 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눠 주고 있지 않습니까? 제가 원하던 이상을 그대로 실현하고 있는 선구자가 바로 당신입니다.”
딱히 자기소개를 하지도 않았는데 제임스 영은 조명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살짝 쑥쓰러워진 조명이 뒷머리를 긁적이는 와중에 다른 선박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제임스 씨의 화물선만이 아니라 다른 선박들도 줄줄이 따라온 것 같은데, 모두들 같은 목적으로 오신 건가요?”
“사실 저도 모르는 선박들입니다. 그냥 우리는 이동식 해양 플랜트의 한 통제관으로부터 비밀스러운 연락을 받았고, 모두 같은 좌표로 집결한 다음, 함께 이곳으로 온 겁니다.”
잠수함, 군함, 고속정, 시추선, 해양 연구선들이 순차적으로 이동식 해양 플랜트에 도킹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쪽에서도 책임자들이 조명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누군가는 민간 용병 기업을 이끌고 있는 전직 용병이며, 또 다른 누군가는 민간 해양 경비 회사의 시 가드(Sea Guard) 책임자였다.
무기를 다루는 자부터 무언가를 조사하고 연구하는 자, 거래를 하는 자… 그야말로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이동식 해양 플랜트에 모였다.
그 수만 무려 6천2백.
세계 최초로 유일무이하게 이동식 해양 플랜트를 개인 소유하고 있는 박조명을 모르는 이들은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미리 짜고 친 것처럼 조명에게 자신들을 전부 고용해 달라고 애원했다.
이미 통제관에게 연락을 받았다면 1차적으로 ‘재능’과 ‘인성’ 면에선 합격을 했다는 뜻. 다음으로 살펴야 할 것은 ‘업무 수행 능력’이지만, 그것도 큰 걱정은 없어 보였다.
다들 큰 단체나 기업이 아니기에 지금껏 자본과 지원이 부족해서 빛을 내지 못했을 뿐, 이동식 해양 플랜트에 소속되어 충분한 지원을 받는다면 최고가 될 자질이 있어 보였다.
‘물론 당장은 눈으로 보기만 해서 판가름할 수 있는 게 아니지만… 너무 까탈스러울 이유는 없지.’
다른 누구도 아니고 통제관들이 직접 선별한 인간들인데, 하자가 있으면 얼마나 있겠는가.
조명은 각 선박의 책임자들에게 본인이 원하는 분야를 계약서와 함께 정리해서 가져올 것을 요구했다. 무기를 다루는 용병들에게 고기 잡는 일을 지원해 주겠다고 계약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또한 조명과 함께 항공 갑판으로 나온 헬 다이버와 정비병들을 새로 합류한 자들에게 소개했다. 앞으로 함께 일해야 하는 식구들인 만큼, 미리 얼굴을 익혀둘 필요가 있었다.
또한 일부 헬 다이버들에겐 임시로 저들을 지휘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지휘 권한이라고 해봐야 그들을 노예처럼 막 부릴 수 있는 갑질 권한은 아니고, 그저 대기업처럼 각자의 전문 분야에 맞춰 계열사 비스무리하게 분배해 준 것에 불과했다.
예를 들어 군인 집안 자식인 지석에겐 용병들의 지휘 권한을, 현 기업인이자 헬 다이버를 겸하고 있는 형찬에겐 해운업 종사자들의 지휘 권한을, 지윤에겐 해양 조사 및 연구단의 지휘 권한을 맡겼다.
“나는?”
“넌 연락, 보고 체계 총괄 담당으로 하자.”
“뭔진 모르겠지만, 감투 하나 쓰니까 좀 낫네.”
금방 주변 사람들과 친해지고, 쉴 새 없이 떠들어 대면서 정보 수집에 열을 올리는 창환에겐 그쪽이 딱 어울렸다. 대충 통신병 몇 명 붙여주면 알아서 보고, 연락 체계를 구성할 것이다.
매번 귀찮게 전체 방송을 때리거나, 개인 연락처로 연락을 보내는 것보단 이렇게 연락 체계를 확실하게 잡는 편이 나았다.
그래야 서로 간의 소통이 원활해지면서 잘못된 정보가 오가거나, 오해로 인해 감정이 상할 일이 크게 줄어들 것 아닌가.
지금까지는 통제관들에게 맡겼지만, 이제 새 식구도 늘어났으니 직접 챙겨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아마 통제관들도 조명이 이러한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직접 나서지 않은 것이리라.
지금까지의 조명은 단순히 커다란 권한을 가졌을 뿐인 사회생활의 애송이였다면, 이제는 조직의 구성과 체계를 신경 쓰게 된 ‘책임자’의 위치에 서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경험이 머지않아 쓸 일이 있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과오를 해결하기 바쁜 내게 굳이 이런 일을 시킬 리가 없으니까.’
조명은 2031년의 시작을 알리는 새해 첫 일출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 세계가 2032년, 2033년… 어쩌면 그 이상으로 향후 수백, 수천 년 이상 더 이어 나갈 수 있을지 어떨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까 더 열심히 해야지.’
아직 인생을 제대로 즐겨보지도 못했는데 이 세계가 허무하게 무너지는 꼴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다.
모든 불안 요소를 완전히 제거하는 그날, 조명은 63빌딩 위에서 발가벗고 춤추겠다는 각오를 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