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l Divers RAW novel - Chapter 127
헬 다이버즈 126화
126화
겨울 아침의 쌀쌀함을 느낀 조명은 천천히 눈을 떴다.
‘잠깐 환기하려고 창문 열어뒀는데… 그냥 자버렸네.’
어제 늦은 저녁에 임무에서 복귀한 조명과 팀원들은 다 함께 채굴한 각종 자원을 ‘물자관리반’에 납품하고서 헤어졌다. 거의 한계 시간이 다다를 때까지 작업을 했기 때문에 팀원들 모두 지쳐 있는지라, 함께 저녁을 먹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아무리 슈트의 도움을 받고 있다고는 해도 결국 조명을 제외한 다른 헬 다이버들은 인간미가 느껴지는 한계가 있었다.
육체적, 정신적… 전 방위에서 압박해 오는 헬 게이트 내부의 환경은 어지간한 베테랑 헬 다이버라고 해도 쉬이 두려움을 떨쳐 내지 못했다.
보통이라면 사소한 실수 정도는 만회할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헬 게이트에서의 실수는 곧장 죽음으로 이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꼭 실수가 아니어도 본인의 재량이 부족하면 그 또한 개죽음이 될 가능성이 높다.
재량. 조명은 목숨을 깎아가면서 남들보다 좀 더 우월한 재량을 손에 넣었다. 목숨을 깎을 만한 가치가 있었냐고 묻는다면 살짝 망설여지겠지만.
‘보통 사람이었다면 감기 걸렸겠지.’
육지도 아니고, 무려 바다 한복판의 이동식 해양 플랜트에서 창문을 열어두고 잤다. 농담이 아니라 1월의 바닷바람은 시베리아 벌판의 혹한보다도 매서웠다.
‘이것도 전부 개조를 받은 덕분인가?’
개조인지, 수술인지, 조정인지 콕 집어 말하기는 애매하지만, 어쨌든 조명은 자신의 몸이 예전과는 확연히 달라졌다는 것을 느꼈다.
지금만 해도 찬바람이 방 안으로 들어와 실내 기온이 어마어마하게 내려갔음에도 막 춥다고 생각되진 않았다.
그냥 조금 선선한 수준?
혹시 자신의 감각만 둔해졌을 뿐이고, 신체는 제대로 추위를 느끼고 있을까 싶어 피부를 쓰다듬어 봤지만, 닭살이 돋지도 않았다.
“뭐, 아무렴 어때.”
침대를 박차고 나온 조명은 빠르게 아침 단장을 했다.
1월 중순이 넘어선 지금, 헬 다이버 1팀의 팀장이자 실질적인 이동식 해양 플랜트의 수장 자리를 맡고 있는 조명은 해야 할 일이 꽤 많았다.
어제는 오랜만에 복귀한 헬 다이버 임무에 잔뜩 들떠 있었지만, 오늘부터는 다른 업무도 할당받을 예정이었다.
‘관리, 지휘, 교육, 훈련.’
관리. 상급자 된 입장으로서 하급자가 능률적으로 재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방향성을 제시해 주는 능력.
지휘. 상급자 된 입장으로서 하급자의 지위와 직책에 걸맞은 임무를 하달하고, 정확하게 지시를 내리는 능력.
교육. 가르칠 수 있는 능력과 경험을 가진 자로서 부족한 자들에게 가르침을 주고 올바른 길로 이끄는 능력.
마지막으로 훈련.
철저하게 몸을 쓰는 일에 몰두해 온 조명에게 사실 훈련 담당만큼 어울리는 능력도 없었다. 자신이 배운 것이 있기에 그대로 훈련해 왔고, 자신과 같은 사람들을 양성하는 법이 곧 그런 방식이란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제 헬 다이버 임무에서 복귀한 뒤에 잠깐 만난 11500은 조명이 위의 네 가지 능력을 필수 소양으로 익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통제관들은 어디까지나 그 보조를 해줄 뿐이라는 입장도 밝혔다.
공적인 자리에서만 입는 헬 다이버 제복을 걸친 조명은 11500과의 대화 속에서 숨겨진 의도를 약간 읽어냈다.
아직 알려줄 수는 없지만, 미래에 일어날 무언가를 대비하라는 듯한 뉘앙스가 풍겨 나온 것이다.
‘나를 단순히 헬 다이버 1팀 팀장 자리에만 머무르게 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어.’
구체적으로는 조명을 지휘관으로 만들기 위한 포석처럼 느껴졌다.
개인 룸을 빠져나와 복도를 거닐면서, 중간중간 마주치는 직원들과 인사를 나누며 조명은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내게 필요 이상의 능력을 요구한다는 건, 내가 그만한 능력을 발휘해야 할 순간이 도래한다는 거지. 하지만 그런 능력쯤은 통제관들에게 있어서 아무것도 아니야. 고작 인간이 노력해서 손에 넣은 능력 같은 건 통제관들에게 소꿉장난처럼 보일 테니까. 그럼에도 ‘인간’에게 능력을 요구한다는 건…….’
개입 불가능.
조명은 통제관들이 직접 헬 게이트에 뛰어들지 못한다는 점을 상기했다.
별 힘을 들이지 않고도 지구를 정복할 힘이 있는데다, 지금의 인류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한 지식과 경험, 그리고 기술력까지 갖추고 있다. 그런 자들이 헬 게이트에 뛰어들지 못할 만큼 중요한 이유가 있다.
마찬가지로 미래에 일어나게 될 어떤 ‘사건’도 그것과 같은 맥락이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흐름이었다.
‘젠장, 난 그냥 과오만 해결하고 세계 1위 갑부가 돼서 남은 여생을 편히 보내고 싶은 것뿐인데…….’
영화에서 나오는 갑부들의 럭셔리한 삶이 꿈에서도 드문드문 나올 지경이다.
내리쬐는 따스한 햇살, 초호화 저택, 손에 들린 세계에서 가장 비싼 술!
그리고 자신의 근처에는 손가락질 한 번만으로도 움직여 주는 부하들과, 즐겁게 놀 수 있는 친구들까지.
그 광경을 현실로 즐길 수 있을 때까지 이제 머지않았다는 사실에 종종 흥분해 버리곤 했다.
‘사실 지금도 충분히 가능한 것 같지만, 지금은 바쁘니까.’
통제관들이 맡긴 일을 모두 해결하지 못하면 그런 미래도 없다. 지금 시간을 낭비하면서 찔끔찔끔 즐기느니, 차라리 귀찮은 일을 한꺼번에 처리하고 나서 편하게 즐기는 편이 더 나을 거라는 이유도 한몫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아침은 식당에서 먹는 대신 이동식 해양 플랜트 상점가에서 토스트를 구입해 으적거렸다.
헬 다이버 제복 차림의 남자가 꼴사납게 걸어 다니며 토스트나 씹어 대고 있는 모습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움찔거리는 게 보였다.
헬 다이버씩이나 되는 양반이 왜 싸구려 토스트나 먹고 있냐는 듯한 시선이었다.
‘내 입맛이 싼 걸 어쩌겠어.’
돈 씀씀이가 달라져도 입맛까지 바뀌는 건 아닌지라, 조명은 서민적인 맛을 즐기며 항공 갑판으로 걸어 나갔다.
“아, 박조명 다이버님 아니십니까? 오늘은 1팀 임무가 없는 날인데, 여긴 어쩐 일로…….”
“오늘부터 헬 다이버 임무가 없는 날은 다른 업무를 맡기로 했거든요.”
턱수염이 덥수룩한 정비반 아저씨와 인사를 나눈 조명은 이동식 해양 플랜트와 연결된 화물선으로 건너갔다.
이 화물선은 8282의 손길을 거쳐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탈바꿈되었는데… 아주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바다 위를 떠다니는 돔 경기장이 되었다.
게다가 크기도 몇 배나 더 커졌기 때문에, 안 그래도 거대하던 화물선이 지금은 자그마한 섬으로 탈바꿈되었다.
‘겉보기엔 아무리 봐도 떠다니는 돔 경기장인데… 내부는 아니란 말이지.’
이 광경을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돔 경기장을 떠올렸으나, 8282의 설계력은 완전히 다른 물건을 만들어 버렸다.
[박조명 헬 다이버님. 최고 권한 관리자로 확인되었습니다.]거대한 격벽 앞에서 ID 카드를 제시하면, AI가 인증 절차를 거친 뒤 직접 격벽을 개방시켜 주었다.
[제1해양 쉘터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설마 쉘터였을 줄이야.’
본격적으로 이동식 해양 플랜트에 사람을 받아들인다기에 뭔가를 대대적으로 준비한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대놓고 쉘터를 마련할 것이라곤 미처 예상치 못했다.
이동식 해양 플랜트는 바다 위의 도시라 불릴 만큼 넓고 거대하기에 충분할 줄 알았는데, 8282는 그마저도 ‘자리’가 부족하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쉘터라고 해서 단순히 넓기만 한 임시 피난처 같은 것도 아니었다.
제대로 생활 구역, 방역 구역, 물자 보관 구역 등이 나뉘어 있는데, 꼭 종말을 앞둔 국가의 높으신 분들을 위한 마지막 지상 낙원 같은 풍경이었다.
그곳에서 새해 첫날부터 유입된 전 민간 용병 기업 소속, 현 해양 플랜트 소속 수비군이 실전을 가정한 훈련을 하고 있었다.
‘설마 자경단과 수비군을 별개의 조직으로 나눌 줄은 몰랐지.’
자경단은 어디까지나 이동식 해양 플랜트 내의 치안 유지를 위한 목적으로 운용되고 있기에, 통제관들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조직이다.
반면, 새롭게 유입된 무장 병력들은 모두 이동식 해양 플랜트 수비군으로 재편성되었는데, 놀랍게도 조명에게 그들의 지휘권이 있었다.
병사 훈련을 받기는 했지만 장교, 나아가 지휘관 훈련이나 교육 같은 건 받아본 적 없는지라 조명은 적잖이 당황했다.
“아, 우리의 해방자님께서 오셨군! 오늘도 탐스러운 엉덩이가 보기 좋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스매싱의 기운에 조명은 재빨리 뒤로 돌아 니킥을 날렸다.
퍼엉!
무릎과 손바닥이 충돌했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어마어마한 폭음이 터져 나왔다.
“상사님!”
조명의 엉덩이 대신 무릎을 두들기게 된 근육 거인은 다름 아닌 2급 통제관 ‘상사’였다.
그 극악무도한 라켄롤 행성 출신의 군인이자, ‘과오’로부터 해방된 통제관.
그가 바로 이동식 해양 플랜트 수비군 훈련과 함께 조명에게 지휘관 자질을 가르치기 위해 파견된 조교였다.
“이야, 못 보던 사이에 실력이 늘었군. 아니, 이 경우엔 근육이 늘었다고 해야 하나?”
“그 머슬 조크, 매일 하면 지겹지 않나요?”
“전혀! 늘 새로워! 짜릿해!”
그렇게 외치며 상사는 온갖 포즈를 취하며 자신의 우락부락한 근육을 선보였다.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그냥 갈색 고깃덩어리가 제 몸을 마구 비틀고 있는 광경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물론 찌르면 바늘이 구부러질 만큼 단단한 고깃덩어리지만.
조명은 괴로운 얼굴로 구르고 있는 수비군들을 측은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저들은 조명이 이곳에 오기 전까지 이 끔찍한 근육 덩어리를 보면서 얼마나 굴렀을까.
“훈련을 하실 거면 해가 좀 뜨고 하시지, 이러다 사람들 잡겠어요.”
“무슨 소리! 새벽의 푸른 기운을 받아 근육을 단련하고! 저녁의 붉은 기운을 받아 근육을 단련한다! 그래야만 궁극의 머슬 가이가 될 수 있다는 걸 모르는 거냐? 우리가 함께 보낸 그 소중한 나날들을 떠올려 봐라!!”
“토 나오는 나날들이겠죠. 솔직히 지금도 그때 마신 프로틴 음료를 생각하면 속이 메스껍거든요?”
물론 그 덕분에 획기적으로 근육을 키울 수 있고, 또 라켄롤 행성의 주민들이 어떤 성향을 지녔는지도 사전에 알 수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전부 덮을 수 없는 끔찍한 트라우마였다.
당장 조명의 눈앞에서 열심히 뛰거나, 근육 단련을 하고 있는 사람들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래도 전직 용병들이라 체력만큼은 어지간한 특수부대 군인 못지않을 텐데, 그런 양반들도 개처럼 혀를 내민 채 헥헥대고 있었다.
무식한 근육 통제관의 훈련 스케줄이 얼마나 빡빡했는지는 말할 것도 없었다.
“저야 헬 다이버니까 저런 훈련이라도 어찌어찌 버텼지, 일반인들로는 얼마 못 버텨요. 뭐든 적당히 해야 최고의 효율을 볼 수 있는 것 아니겠어요?”
“으음, 이제 대가리 좀 컸다고 의견도 내고 그러는 건가?”
“맞아요. 제 대가리가 좀 크긴 했죠.”
조명이 씨익 웃어 보이자, 상사는 군용 풀페이스 헬멧을 착용한 얼굴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다른 통제관들은 다 온몸을 감싸고 있는 반면, 2급 통제관들은 근육을 과시하기 위해 노골적으로 헬멧과 군복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다.
“확실히 너 정도면 대가리가 좀 크긴 했지.”
“그렇죠? 그러니까 이제 저도 훈련할 수 있게 근육 단련은 그만하라고 해주세요.”
“좋다.”
상사는 호루라기를 불어 모든 근육 단련을 종료시켰다.
이제 와서 조명에게 근육 단련이나 전투법을 가르칠 수는 없으니, 조명에게 지휘관의 자질을 교육하기 위해서라도 명령에 따라줄 아랫것들이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