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l Divers RAW novel - Chapter 129
헬 다이버즈 128화
128화
“훈련은 문제없이 잘 진행되고 있는 모양이야.”
전망이 탁 트인 이동식 해양 플랜트의 함장실에서 창가에 기대선 한 통제관이 입을 열었다.
전형적인 두툼한 방호복을 갖춰 입고 있으나, 마치 군복처럼 우드랜드에 가까운 디지털 위장이 되어 있었다.
“아무렴, 당연히 문제가 없어야지. 누가 날밤 까면서 시스템을 만든 건데.”
“고생했습니다, 8282.”
평소엔 공돌이에 대한 대우가 박하던 11500이 새삼스럽게 공치사를 하자, 8282는 흠칫 놀랐다.
의무병은 치료, 공돌이는 수리와 제작, 첩보 요원은 적지 침투와 요인 암살.
각 직책에 맞는 임무들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생각하는 11500이 타인을 칭찬한다는 건 굉장히 드문 일이었다.
어린아이가 자신이 가지고 논 장난감을 잘 정리했다고 해서 딱히 칭찬을 하지 않는 것처럼, 11500 또한 남들이 하는 일에 대한 평가가 박한 편이었다.
“뭐야, 뭐 잘못 처먹었어?”
“무슨 소립니까?”
“무슨 소리긴! 네가 언제 다른 통제관더러 잘했다고 칭찬한 적 있어? 빈말로도 그런 적은 없었잖아. 가장 좋게 말한 것도 ‘이 정도면 뭐……’ 수준이었다고!”
“최근 본 통제관이 팀원들에게 너무 소홀히 하지 않았나, 하고 문득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본 통제관이 바라는 기준점을 살짝 낮추기만 한다면, 팀원들에게 공치사를 하는 것도 어렵지 않을 거라 생각했을 뿐입니다.”
“미친놈. 84만 년 만에 양보한 게 딱 그 정도라고?”
결국 11500 본인이 만족한 것이 아니라, 기준점을 낮췄기 때문에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는 게 판명되었다.
8282는 다 집어치우라는 듯 손을 내저으며, 얼마 전 조명이 가르쳐 준 대로 인스턴트커피를 찻잔 가득 따라 마셨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놀러 가서 구입해 온 각종 과자 세트와 인스턴트커피 세트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대부분의 통제관들이 개인 업무가 끝나면 곧잘 이곳에 들러 티타임을 가졌다.
8282도 날밤을 까며 만든 ‘전장 지휘 시스템’을 적용시킨 뒤, 이제 막 소파 위에서 두 다리 뻗고 쉬려던 참이었다.
“그보다 666, 정말 네가 직접 가르치지 않아도 괜찮겠어?”
“난 병사가 해야 할 일을 이미 가르쳐 줬어. 조명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멍청하진 않으니, 내게 배운 전술전략을 역설계해서 그대로 지휘에 써먹겠지.”
“하긴 그놈이 좀 순박하고 단순하긴 해도 말귀 하나는 잘 알아먹었지.”
아마도 20대로 성장하기 전까지 치열한 삶을 살아온 탓에 자연스럽게 인간을 멀리하고 그저 열심히 노동만 하고 살아온 이유가 클 것이다.
인간들은 일을 못하는 놈을 노동력으로 쓸 만큼 관대하지 않으니, 역설적으로 조명은 일을 잘하기 위해 이해력과 인내심을 극한까지 기른 것이다.
이해력이 높으니 일의 능률이 올라가고, 인내심이 뛰어나니 남들보다 더욱 많이, 오래 일을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그러한 행동들이 박조명이란 인간을 독종으로 키우는 데 일조했으리라.
‘다만, 열심히 살아오긴 했어도 사회적 경험이 부족한 건 치명적이지.’
밑바닥 인생을 살아온 탓에 습득한 지식과 정보가 매우 제한적이며, 상류층의 삶에 익숙지 않은 모습을 곧잘 보여주었다.
그래서 통제관들은 조명에게 상류층, 즉 위에서 명령하고 손가락질 하나로 사람을 부리는 입장이란 걸 알려줄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다.
“이러나저러나 I―바이러스는 이미 터졌고, 이 세계가 멸망하기 전에 우리의 과오를 해결해야 해. 그리고 머지않아 조명이 이동식 해양 플랜트의 인간 대표로 나서야 할 일이 생길 거야. 그때를 위해서라도 지금 저 감각을 익혀두지 않으면 안 돼.”
“직접 가르치는 게 훨씬 더 빠를 테지만, 직접 가르치면 ‘이해’만 하고 끝나니까?”
“맞아. 저런 건 자연스럽게 터득하는 거라고.”
8282의 익살스러운 질문에 666은 스스럼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행동과 말투가 상류층의 자세다’라고 가르친다면 조명은 잘 알아듣고 그대로 실천할 것이다. 하지만 그걸 하나의 가면으로 받아들이면 결국 어색한 광대놀음에 불과하다.
본인이 자연스럽게 깨닫고, 스스럼없이 활용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마련해 주는 것이 올바른 교육법이다. 적용과 적응은 엄연히 다른 것이니까.
“녀석도 깜짝 놀랄 거야. 자기는 과오만 해결하면 되는 줄 알았더니, 그 뒤에도 일거리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을 테니까.”
“그래서 이 세계도 멸망하게 될 거라고 귀띔해 줬잖아. 단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사건들이 세계 멸망의 전조인지 아닌지 모르고 있을 뿐이지.”
사실 지금 세계는 꽤 시끄러운 상태였다.
이미 중국에서 터진 I―바이러스 확산 사태는 중국 정부의 정보 통제만으로는 감출 수 없을 만큼 규모가 거대해졌기 때문이다.
중국 전역에선 비상계엄령이 선포된 상태이며, 중국 국민들은 정부의 명령에 거스르면 죽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 때문에 쉽사리 대피하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보통이라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운명인지 뭔지 하는 것이 그들을 강제로 붙들어두고 있었다.
가장 먼저 I―바이러스 사태가 터진 단체나 국가는 가장 먼저 고기 방패로 희생된다.
지난 84만 년간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던 이 공식에 따라, 중국 구민 대다수가 감염체들과 생존 경쟁을 벌이며, 그들의 수를 실시간으로 줄이거나 늘리고 있었다.
“러시아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고, 미국으로도 정보가 넘어간 모양이야. 13이 알려주더라고.”
“헛짓거리는 안 해줬으면 좋겠는데…….”
“어느 국가도 헛짓거리 안 한다는 전제하에 최대한 버틸 수 있는 기간이 2년이었던가?”
“하지만 타국이 헛짓거리를 하지 않은 세계가 열 손가락으로도 꼽을 만큼 적었지.”
8282는 킬킬 웃으며 쿠키를 하나 집어 먹었다. 방호 마스크 사이로 쏙 들어간 쿠키는 깔끔하게 사라졌다.
“그 점에서 해양 플랜트 계획은 진짜 괜찮았어. 죄다 육지에만 처박혀 있으니 바이러스가 굉장히 빨리 퍼졌는데, 해양 플랜트 계획을 실행했을 때부턴 헬 다이버를 지킬 수 있는 시간이 조금 더 늘어났으니까.”
“하지만 결국 마지막엔 모두 죽어버렸지.”
666은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듯 넘실거리는 겨울 바다를 바라보았다.
한동안 커피만 홀짝이던 8282는 이내 찻잔을 내려놓고, 조금 전과는 달리 착잡한 어조로 한탄했다.
“역시 조명이, 그 녀석도 죽겠지?”
“헬 게이트에 들어가서 유골을 찾았다며?0 그럼 뭐…….”
“…….”
666 또한 착잡한 것은 마찬가지인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하지만 11500은 조금 다르게 생각하는 듯했다.
“다이버 또한 이전 세계의 적성자들처럼 죽음이 확정되어 있다면, 죽음이 다가오기 전에 과거의 뿌리를 뽑아내게 하면 됩니다.”
“그게 지금까지 몇 번이나 실패했다는 건 너도 알고 있잖아.”
8282의 지적에도 11500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번 세계가 마지막이라면, 모든 걸 걸어야 합니다. 본 통제관도, 당신들도, 다이버도. 그 ‘역겨운 년’이 죽음의 표식을 새겼다고 한들, 이번에야말로 앞질러 나가면 그만입니다.”
“하긴, 그러려고 걔 몸에 그런 짓까지 했으니까.”
헬 게이트에서 절대로 발견될 리 없는 고등 생명체의 흔적.
러시아처럼 처음부터 이 세계의 인간들을 헬 게이트에 투입했다면 모를까, 그러지 않고서야 완전히 뒤죽박죽인 헬 게이트 내에서 지구인과는 전혀 다른 고등 생명체의 흔적이 발견될 리가 없다.
그런데 얼마 전, 조명은 팀원들과 함께 새로운 탐사를 떠났다가 유골 하나를 발견하고 말았다.
이전 세계의 적성자들이 모두 그런 것처럼…….
더 이상 발견되지 않는, 단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 유골.
그걸 우연처럼 발견해 버린 적성자들은 모두 머지않아 죽음에 이르렀다. 마치 저주를 받은 것처럼.
통제관들은 그것을 죽음의 표식이라 규정하고 해주하거나, 죽음 자체를 막아내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했다. 물론 모든 노력이 실패했기에 이 세계에 도달한 것이지만.
이번에는 아예 모든 변수를 원천봉쇄하기 위해 올드 원(1)이 준비한 비장의 수단까지 동원했다.
84만 년의 실패 끝에 완성된 마지막 수단. 그마저 실패한다면 더 이상 자신들에게 이 고약한 운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없다고 봐야 했다.
“이왕 마지막에 도달했으니, 판돈을 있는 대로 싹 긁어서 올려야겠어.”
666은 천장이 덮여 내부를 어둡게 만든 거대한 화물선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 * *
“M―1이 코너에서 나오는 적을 기습해서 제압, M―2는 우회해서 소란을 듣고 달려 나올 또 다른 적의 배후를 급습, M―3는 M―1과 M―2가 처리한 적을 보이지 않는 곳에 숨긴다.”
M―4, M―5, S―1이 시간을 끌어주는 사이, 마크스맨 셋은 순조롭게 선박 내부에 침투해 거점 점령지로 향했다.
가는 길에 수상쩍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제자리를 지킨 초병들이 존재했지만, 전장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조명에게 그들을 각개격파하는 건 누워서 떡 먹기였다.
지휘명령도 종류가 꽤 다양하기에 굳이 무전을 넣지 않아도 세부적인 명령을 내릴 수 있었다.
가령 ‘대기했다가 기습’이라는 명령을 내릴 때, 총기를 사용할지 군용 대검을 사용할지 정할 수도 있다. 여기서 또 사살과 단순 제압으로 나뉘며, 바로 제압된 적을 감출지, 재빨리 자리를 벗어날지를 정하는 것도 가능했다.
마치 턴제 RPG 게임을 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명령 체계가 잘 잡혀 있었다.
“좋아. 앞으로 건물 내에 남아 있는 적의 수는 다섯 명뿐. 저 다섯만 처리한다면 거점을 점령하고, 양동작전에 속아 넘어간 놈들의 배후를 칠 수 있어.”
거기서 항복 권유를 하면 거의 100% 확률로 시뮬레이션이 끝날 것이다.
적이 싸움에 미친 광전사라면 끝까지 싸운다는 전개가 될 수도 있겠지만, 앞뒤로 적을 둔 시점에서 수적 우위를 점하더라도 전투에서 승리하는 건 매우 힘들다.
“마지막 다섯 명은 거점 근처에 똘똘 뭉쳐 있네.”
거점은 화물선의 함교 뒤편에 존재하는 함장실이었다.
적은 함교에서 진을 친 채 엄폐물 뒤에 숨어 혹시 모를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엄폐물에 숨어 있는 다섯 명의 적을 어떻게 단 세 명으로 이길 수 있겠느냐고 궁금해할 사람들이 많겠지만, 사실 남아 있는 적이 배수의 진을 친 판단은 감탄이 나올 만큼 멍청한 수였다.
‘내가 왜 지금까지 마크스맨들의 무장 사용을 최소한으로 했겠어? 한 장소에 우르르 몰려 있지 말고 따로따로 움직이면서 각자 역습 기회를 엿봤어야지.’
저렇게 빠져나갈 길이 없는 폐쇄적인 공간에 적이 몰려 있다면, 답은 하나뿐이다.
“M―1이 먼저 연막탄을 투척, 뒤이어 M―2가 시간 차를 이용해 섬광탄을 투척, M―3가 수류탄을 투척한다.”
딱 세 명만 있다면 어린애 손목을 비트는 것보다 쉽게 이길 수 있는 상황이다.
우선 함교의 입구를 재빠르게, 아주 살짝 열어젖힌 M―1이 연막탄을 투척했다.
그러면 적들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가스! 가스! 가스!’를 외칠 것이고, 순서대로 방독면을 착용해 연막에 대비할 것이다.
그러나 거기서 그치지 않고 섬광탄이 따라 들어와 함교 내부를 진탕 상태로 만들어 버린다. 소음과 번쩍이는 빛으로 정신을 못 차리는 적들에게 수류탄이 날아들면 끝.
엄폐물에 숨어 있더라도 좁은 장소에서 터지는 수류탄의 위력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건 불가능했다.
“깔끔하네.”
수류탄에 셋이 한 번에 다운되고, 나머지 둘은 마크스맨 셋이 가볍게 처리했다.
곧 거점 점령이 완료되고, 중앙에 갇힌 적에게 항복 권유가 먹히면서 시뮬레이션이 종료되었다.
병사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계획하니, 지휘란 게 그렇게 어렵지만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지휘도 배워볼걸.’
조명은 손을 탁탁, 털며 좁고 어두운 컨테이너 박스를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