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l Divers RAW novel - Chapter 143
헬 다이버즈 142화
142화
‘계승’ 작업이 시작된 지 정확히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한 달.
약 100년을 살아가는 인간에겐 결코 적지 않은 시간이지만, 84만 년을 넘게 살아온 또 다른 생명체에겐 눈을 깜빡이는 것과 다름없을 만큼 찰나의 순간일지도 모른다.
‘나도 그렇게 느끼는 날이 찾아올까?’
조명은 전망 좋은 곳에 앉아 손에 감긴, 땀과 피에 젖은 붕대를 풀어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자신의 정신은 틀림없이 인간인데, 심지어 외관조차 흠잡을 데 없는 인간인데.
올드 원(1)은 조명의 몸이 더 이상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지난 한 달간 뼈에 사무치도록 확실하게 알려 주었다.
농담을 싹 빼고 말하자면, 지금 조명은 통제관과 맞붙어도 ‘죽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통제관을 이긴다’, ‘제압한다’까지는 도달하지 못해도 죽지 않을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의 몸은 지켜 낼 수 있다는 의미. 이건 결코 가볍게 말할만한 것이 아니었다.
인간이 인간이 아니게 되어 가는 감각은 말로 정의하기 어렵다.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감각이 확장된다. 새롭게 느껴지는 것이 한둘이 아니며, 사고방식이나 가치관도 점점 평범한 인간으로부터 멀어지는 것 같았다.
자신의 의도적으로 마음에 담아 두고 있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닌, 일분일초의 시간이 흐를 때마다 ‘인간 박조명’에서 ‘통제관 박조명’으로 바뀌는 듯한 느낌이다.
무심코 주먹을 쥐자 빠드드득, 하고 뼈와 근육이 인간에겐 과분한 힘을 자랑했다.
한 달 동안 많은 것을 느꼈다. 많은 사실을 알게 되고, 많은 것을 포기하면서 많은 것을 타협해야 했다.
그 사실이 괴롭게 느껴지면서도, 한편으로는 막연하게 모든 걸 해결해면 끝이라고 생각해 버리는 자신이 있었다.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란 걸 빤히 알고 있으면서.
[I―바이러스 창궐로부터 약 2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조명이 옆에 놔둔 스마트폰으로부터 실시간 뉴스 속보를 전해 주는 여성 앵커의 말이 울려 퍼졌다.
통제관들이 그토록 말하기 꺼려하던 세계의 종말이 현재진행형으로 지구를 집어삼키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현재 파악된 감염자의 수만 해도 약 20억에 육박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중국을 기점으로 빠르게 확산된 I―바이러스가 몽골과 러시아 동부 지역, 그리고 동남아와 일본을 집어삼켰습니다.]20억이란 숫자도 사실 중국의 완전한 멸망과 동남아, 일본이 차례대로 I―바이러스에 당하면서 내놓은 ‘최소치’일 것이다.
감염은 지금도 빠르게 확산되어, 머지않아 서아시아와 중동, 아프리카, 유럽까지 무시무시한 속도로 집어삼킬 것이다. 그렇게 되면 20억이 아닌 40억이란 숫자도 우스워질 터.
쉽게 말해서 인류의 절반이 I―바이러스에 당했다는 소식이 들려오기까지 머지않았다는 얘기였다.
“후우…….”
통제관들이 미리 준비를 해 둔 덕분에 이동식 해양 플랜트는 I―바이러스 창궐 전에 대량의 선박과 인재를 확보할 수 있었다. 또한 I―바이러스를 피해 도망쳐 온 보트피플도 꽤 많이 받아들였다.
덕분에 이동식 해양 플랜트와 연결된 선단을 포함하면 약 20만에 육박하는 대인구가 바다 위에서 근근이 버텨 나가는 중이다.
제3자의 시선에서 보면 아슬아슬하기 짝이 없겠지만, 식량을 비롯한 생산 물자도 충분하며, 질서도 유지되고 있다.
통제관과 헬 다이버, 그리고 잘 훈련받은 완전무장한 세력이 이곳을 철저하게 통제하고 있었다.
이동식 해양 플랜트가 내세운 규칙을 어기는 자는 예외 없이 바다 위로 던져져 상어 밥이 되었기에, 난민들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철저하게 통제에 따랐다.
‘하지만 설마 저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난민으로 받아 준 게 아니었을 줄이야.’
조명은 며칠 전, 통제관들로부터 이렇게 많은 수의 난민을 조건 없이 받아 준 이유를 듣고, 저도 모르게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쉽게 말하자면, 저들은 I―바이러스에 대해 직접적으로 관여할 수 없는 통제관들을 대신해서 이곳을 지켜 줄 고기 방패 역할이었다.
‘하긴, 어차피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똑같은 죽음이라고 생각한 거겠지.’
멸망의 파도에 허무하게 휩쓸려 죽을 것이냐, 아니면 멸망을 막으러 나설 자들을 위해 스스로 방파제가 되어 잠깐의 시간을 벌어 줄 것이냐.
통제관들은 지극히 합리적이면서도 극한의 효율을 추구했다.
수많은 세계의 멸망을 봐 왔을 그들은 더 이상 동정심과 영웅심만으로 사람을 구한다는 행위를 이해하지 못하게 된 것이리라.
“박조명 헬 다이버님, 여기 계셨습니까?”
조명이 앉아 있는 컨테이너 박스 위로 올라온 한 자경단 대원이 흐르는 땀을 닦으며 말했다.
“1급 통제관님들께서 호출하셨습니다. 지금 즉시 함장실로 오라는 지시입니다.”
“슬슬 때가 됐나 보네요. 아저씨는 준비 많이 해 두셨어요?”
“저는… 하하, 사실 요 근래 들어 훈련을 하지 않는 시간엔 항상 술만 마셨습니다.”
자신보다 나이가 많지만 헬 다이버님이라고 깍듯이 대해 주는 그에게 조명은 희미한 미소를 지어 주었다.
다들 어렴풋이 느끼고 있는 것이다.
사이비 교주들이나 미친 예언가 놈들이 떠들어 대는 엉터리 멸망이 아닌, 진짜 멸망이 코앞까지 닥쳐왔다는 것을.
자신들의 조국인 대한민국이 아직까지 어떻게든 버티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머지않아 고향 땅마저 잃게 될까 봐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
그리고 이미 상당수의 이동식 해양 플랜트 근무자들은 조명을 비롯한 헬 다이버 1팀이 이 일을 해결해 주리라 믿고 있었다.
그게 신빙성이 있느냐, 없느냐는 제쳐 두고라도 그냥 이런 시기인 만큼 뭐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이리라.
“슬슬 가 봐야겠네요.”
“저도 다시 근무지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컨테이너 박스를 내려가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조명은 가볍게 도약해 함교로 날아갔다.
헬 다이버 슈트를 착용하면 다소나마 ‘억제’가 되겠지만, 슈트를 착용하지 않은 맨몸은 점점 더 통제관의 그것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차라리 이제 와 모르는 게 나았을 거라는 말은 배부른 소리겠지.’
함교에 들어서자마자 꽤나 살벌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세계 각지와 다른 해양 플랜트에서 들어오는 정보를 취합 중인 오퍼레이터들은 거의 공돌이 수준으로 갈려 나가고 있었다.
특히나 13이 정보에 민감하기 때문에 오퍼레이터들이 허투루 일하는 모습은 거의 볼 수 없었다. 조금 쓴소리를 하자면, 다들 막판 스퍼트를 끌어 올리는 것처럼 지나치게 열정적이었다.
부관의 경례를 받아 준 조명은 무심한 얼굴로 함장실의 문을 열었다.
그곳에는 이미 조명보다 앞서 도착한 인원들이 회의용 테이블 앞에 착석한 상태였다.
“늦었습니다.”
“몇 분 지각한 걸로 너무 그러지 마세요.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라고들 하잖아요?”
11500의 날카로운 지적에 조명은 손을 휘휘 내저으며 자신의 자리를 찾아 앉았다.
예전이었다면 좀 더 창피해하며 사과했을 텐데, 지금은 통제관을 상대하는 데 있어 거리낌이 없었다.
넓은 함장실에 모인 것은 다섯 명의 헬 다이버와 일곱 명의 통제관.
마치 올림픽을 하루 앞둔 국가 대표 선수단을 연상케 했다.
올림픽보다 더 긴장되고 어려운 일을 준비한 사람들이란 건 맞는 말이지만.
조명은 슬쩍 시선을 돌려 자신의 믿음직한 팀원들을 살펴보았다.
벌크 업에 성공한 고지석은 구릿빛으로 잘 탄 피부와 숨 막힐 듯 탄탄한 근육을 손에 넣었다. 필시 자신의 한계를 몇 번이나 뛰어넘었으리라.
창환은 더 이상 헤실헤실 웃으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짓지 않았다. 팀 내의 분위기 메이커였던 그는, 이제 세상을 객관적으로 보는 시선과 자신의 감정을 완벽하게 갈무리할 수 있는 심리전의 달인이 되었다.
지윤은 반대로 과거에 비해 여유가 생긴 것처럼 보였다. 머릿결이 살짝 푸석푸석해지고 눈가에 다크 써클이 내려왔지만, 본인은 계승 작업을 통해 쟁취한 지식과 힘이 마음에 드는 듯했다. 더 이상 자신의 나약함에 대해 불평불만과 초조함을 가지지 않게 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형찬은 매우 한정적으로 사용해 온 날카로운 눈썰미를 더욱 열심히 갈고닦은 듯했다. 헬 다이버 본연의 능력보다는 기업인, 장사꾼의 능력을 키우길 원하던 그가 지금은 흉악한 사냥꾼으로 변해 있었다. 저 눈에 한 번 포착된 사냥감은 절대로 그의 시야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게 분명했다.
근 한 달 만에 만나는 반가운 얼굴들이라 조명은 기세를 다소 누그러뜨렸다.
다들 지난 한 달간 목숨 걸고 계승 작업을 해 왔을 텐데, 여기서 쓸데없이 자신이 능력적으로 더 대단하다는 것을 어필하고픈 생각은 없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저들이 조명을 리더로 인정해 주고, 조명이 그들을 동료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짧은 인연이긴 하나, 조명에겐 그 어떤 이들보다 진지한 관계였다.
“다들 모였으니 이제 너희를 소집한 이유를 알려 주겠다.”
정보 담당인 13이 앞으로 나서서 본격적인 설명을 시작했다.
“너희들도 이미 알고 있다시피 이 세계는 현재진행형으로 멸망 중이다.”
짧지만 무거운 의미를 지닌 한마디에 다들 무거운 침음을 흘렸다.
매일같이 뉴스나 라디오 방송을 통해 세계 각지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해지고 있으니, 이쯤 되면 모르는 게 이상했다.
오늘은 기어이 감염체들이 인도 국경을 돌파했다는 소식도 들려온 참이었다.
“우리가 최초로 겪은 I―바이러스에 의한 종말은, 사실 I―바이러스에 의한 종말만이 아니었다.”
다소 뜬금없는 얘기지만, 다들 쓸데없는 질문을 하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1급 통제관들이 인간이던 시절에도 현 지구 인류에 비하면 절대 나약하지 않았을 테니까. 오히려 그들이 감염체들에 의해 멸망당했다는 사실이 미스터리에 가깝다.
즉, 다른 무언가가 더 있었다는 의미다.
“‘놈’은 애초에 그런 걸 즐기는 놈이었다. 감염체에 의해 세계가 박살 나도록 유도한 다음, 그 세계의 인류가 어찌어찌 이겨 낼 수 있을 것 같다고 판단한 타이밍에 기습을 하는 거다. 그럼 방심하던 인류는 ‘놈’에 의해, 그리고 감염체들에 의해 속수무책으로 멸망당하는 거지. 압도적인 절망 속에서 아주 작은 희망조차 짓밟히면서.”
“즉, 우리도 그렇게 될 거라는 말씀인가요?”
조명의 질문에 13은 더 이상 뭘 숨기겠냐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구상의 감염체 수가 현재 30억 마리를 돌파했다. 머지않아 인류 절반을 집어삼키게 되겠지.”
뉴스에선 20억이라고 했지만, 13의 정보력이 훨씬 더 정확하다는 것에 의심의 여지는 없었다.
이미 중국과 몽골, 러시아 일부 지역에 핵폭탄이 투하되었지만, 수십억에 달하는 감염체들을 모두 처리할 수는 없었다. 애초에 놈들은 직접적인 폭발에 휩쓸리지 않으면 충격파나 방사능 정도는 그럭저럭 버티는 편이기도 했고.
그렇다면 결국 ‘감염체들의 진격은 유라시아 대륙 전체를 집어삼키는 것에서 끝날 것인가’ 하고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었다.
왜냐하면 놈들이 바다를 넘지 못했다면 수많은 세계들을 멸망시킬 수 없었을 테니까.
“그리고 어느 정도 예상했겠지만, 안정기에 접어든 I―바이러스가 본격적인 변이를 시작했다.”
조명은 분위기가 조금만 더 유쾌했더라면 자신의 무릎을 탁,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급격하게 변이하기 시작한 바이러스.
유라시아 대륙 전역을 집어삼키고도 아직 한참이나 굶주린 감염체들.
그렇다면 놈들은 바다를 건너고, 하늘을 날아다닐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런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변이하는 것이니까.
“머지않아 하늘을 새 떼처럼 날아다니고, 물고기처럼 바다를 헤엄치는 놈들과 마주하게 되겠지. 우리는 당초 3년이라는 시간을 기대했지만, 이번 I―바이러스는 꽤 막강하더군. 이대로라면 지구는 1년도 채 버티지 못 할 거다.”
13이 내놓은 회의적인 대답은 어처구니없게도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당장 총과 폭탄으로 지상을 휩쓸어도 꾸역꾸역 밀려 들어오는 게 감염체들인데, 놈들이 하나둘씩 변이해서 대륙 간의 경계마저 사라진다면 인류의 멸망이 앞당겨지는 건 당연했다.
“그러니 이젠 예정과 맞지 않더라도 너희에게 최종 통보를 내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다음에 어떤 말이 나올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들 헬 게이트 잠화를 준비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