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l Divers RAW novel - Chapter 144
헬 다이버즈 143화
143화
“예상보다 엄청 빠른 통보네요.”
조명도 어렴풋이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막상 이 모든 일이 일어난 ‘처음’으로 가야 한다는 사실에 조금 당황했다. 그것도 지금 당장.
“앞서 말했지만, 우리는 직접적으로 이 사태에 개입할 수 없다. 감염체가 몰려오면 맞서 싸워야 하는 건 인간이지, 우리가 아니니까.”
그런 강대한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운명의 굴레에 속박되어 멸망, 그 자체에 대응할 수 없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이 얼마나 모순적인가.
“그럼 이제 통제관님들은 그저 기다리기만 하실 건가요?”
조명은 은근한 말투로 자신들이 뒤틀린 시공간에서 뺑이치는 동안 손가락만 빨고 있을 거냐고 되물었다.
11500이라면 시원스럽게 ‘그렇습니다’ 하고 대답할 줄 알았건만, 통제관들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부정했다.
“우린 예정된 멸망에 손쓸 순 없지만, ‘멸망을 이끄는 자’와 싸울 수는 있지.”
“그럼…….”
“인간들은 멸망과 싸우고, 우리는 멸망을 이끄는 자와 싸운다. 그리고 너희는… 우리가 최대한 버텨 주면서 헬 게이트를 유지하고 있는 사이에 ‘과오’를 청산해야 한다.”
그제야 조명은 통제관들이 지금껏 놀고먹기만 하던 게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저들은 지난 84만 년간 단 한 번도 놀고먹은 적이 없다.
왜냐하면 그 강대한 힘을 대부분 사용해서 헬 게이트를 유지시켜 왔으니까.
숱한 적성자들을 선발해서 헬 다이버로 육성했으며, 그들을 헬 게이트로 밀어 넣었다. 그들이 실패하면 다음, 다음, 다음, 그리고 또 다음 세계에서 재도전했다.
그리고 이제 그 마지막 순간이 도래한 것이다.
“우리에게도, 너희에게도 더 이상 기회는 없다. 이번이 확실하게 마지막이지. 우리는 지난 84만 년간 무수한 실점을 기록했지만, 어차피 적에게서 딱 한 번의 점수만 따내면 된다. 그리고 그 점수는 너희가 따내는 거다.”
84만 년 전에 조직된 최후의 결사대.
84만 년 후에 다시 한 번 조직된 최후의 결사대.
통제관들은 이번에야말로 끝을 볼 작정인 듯했다.
“게다가 박조명 다이버는 적성자라 뒤틀린 시공간으로 뛰어들어도 상관없지만, 나머지 넷은 적성자가 아니기 때문에 뒤틀린 시공간에 들어가면 매우 높은 확률로 갈기갈기 찢겨 나간다.”
“헬 다이버 슈트라면 버틸 수 있는 것 아니었나요?”
“존재가 찢겨 나간다는 의미다. 인간 한 명을 구성하고 있는 물질, 의미, 그리고 존재 의의. 그 모든 것이 갈기갈기 찢겨서 수많은 시공간 속으로 흩어져 버리는 걸 고작 슈트로 막을 수 있겠나? 당연히 우리가 지원해 줘야지.”
물질적으로 도와줄 수 없다면 대체 어떻게 도와주는 건가 궁금했지만, 그 해답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밝혀졌다.
“매 시간마다 너희 넷의 존재를 뒤틀린 시공간 속에서 유지시키기 위해 네 명의 통제관이 희생한다.”
“……예?”
어떤 말이 나와도 좀처럼 당황하지 않을 거라 생각한 조명이 이번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그게 무슨…….”
“너희들도 알다시피, 우리 통제관들은 절대무적의 존재이면서도 지난 84만 년간 꾸준히 수가 줄어들었다.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그러고 보니 확실히 행성 단위로 멸망했는데 고작 10만 명밖에 남지 않았다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어요.”
“84만 년간 헬 게이트를 유지시키는 건 매우 힘들지. 그 헬 게이트의 뒤틀린 시공간 속으로 헬 다이버들을 보내는 것도 힘들고. 그래서 우린, 우리의 존재를 직접 찢어발겨서 에너지로 사용했다. 당초엔 수백억 명이던 통제관들이 이젠 고작 10만 명밖에 남지 않은 이유가 그것 때문이지.”
항상 제멋대로 살아가는 인종들인 줄 알았더니, 그런 비밀을 감추고 있을 거라곤 조명도 미처 예상치 못했다.
그들이 항상 하이 텐션이던 이유, 인간들과 깊은 관계를 맺기보단 비즈니스적 관계를 유지해 온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했다.
“어차피 과오가 해결되면 우린 모두 제대로 굴러가는 우주의 섭리에 따라 올바른 길을 걷게 되겠지. 미리 말해 두지만, 우린 ‘다시 살고 싶어서’ 과오를 청산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 지독한 운명에서 벗어나고 싶기 때문이지.”
이런 식으로, 그런 놈에 의해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는 운명.
그 염병할 운명에서 벗어나고자 지난 84만 년간 수백억에 달하는 통제관들이 기꺼이 자신들의 존재를 불태웠다.
“그건…….”
“너무 비참하다고 생각합니까?”
조명이 말끝을 흐리자, 지금껏 얌전히 있던 11500이 대뜸 말을 내뱉었다.
“우리가 그렇게 아무런 의미도 없이 바스러져 갔던 것이, 견딜 수 없을 만큼 괴로운 일이라고 생각합니까?”
“…아닌가요?”
“아닙니다.”
11500은 더 말할 것도 없다는 듯이 확실하게 선을 그었다.
“우린 어처구니없게 멸망을 당한 못난 선배들이고, 당신들은 이제 막 멸망을 목전에 둔 새파란 후배들입니다. 선배들이 후배를 위해 몸을 내던지는 것은 당연한 것. 최소한 우리와 같은 못난이들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렇게 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성공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잖아요? 그걸 알면서도 무의미한 시간과 생명을 낭비했는데,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여긴다고요?”
미쳐도 한참 미쳤다.
나름 통제관과 가까워졌다고 생각한 조명조차 혀를 내두를 만큼 괴악한 가치관이었다.
그럼에도 11500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그저 연소되기만 할 뿐인 불꽃이었다면, 차라리 미래의 불쌍한 후배들을 위해 희망의 불꽃이 되어 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수백억 명의 통제관들이 모두 그 의견에 동의했습니다.”
“…….”
조명은 어깨가 조금 더 무거워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자신은 딱히 세상 모두가 알아주는 위대한 영웅이나 위인 같은 것이 될 생각은 없었다. 물론 명예나 영광 같은 것이 있으면 나쁠 것도 없지만, 기본적으로는 그저 많은 재산을 원했을 뿐이다.
그런 자신에게 이런 삶과 목적이 정해졌다. 마치 피할 수 없는 숙명처럼 목에 족쇄를 채운 것 같았다.
다만, 그 족쇄를 벗어던지기엔, 이 숙명을 피하기엔 너무 늦어버렸기 때문에 이제 와서 못 해 먹겠다고 외치지 않는 것이다.
만약 이런 미래를 알고 있었다면, 조명은 헬 다이버가 되는 미래를 어떻게든 피했을지도 모른다.
“선배님들이 그렇게까지 해 주셨는데 이걸 후배들이 못 받아먹으면 사람 새끼들이 아니죠.”
조명은 중압감과 긴장감으로 꽉 움켜쥐고 있던 손아귀를 풀었다.
“마지막 불꽃까지 화끈하게 태워 보세요. 그래야 늘그막에 미래의 후배들이 잘 먹고 잘사는 꼴 보실 거 아니에요.”
조명과 그의 팀원들이 각자의 완전 구현화 슈트를 착용했다.
브리핑하는 시간도 아까웠는지, 이미 모든 과거 자료는 각자의 슈트에 내장된 AI에 업로드된 상태였다.
항공 갑판으로 나간 다섯 명의 헬 다이버는 각자에게 배정된 캐터펄트에 슈트를 고정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수백 명의 정비관들이 몰려들어 마지막 안전 점검에 나섰다.
자체 진단 프로그램까지 돌려가며 AI의 상태를 확인했고, 슈트의 부품 하나까지 확대경을 갖다 대며 마모, 불량을 점검했다.
모든 점검이 끝나자, 각자의 요청하에 준비된 보급 물자들이 슈트의 추가 외부 장갑과 함께 장착되었다.
“이 외부 장갑은 각종 충격와 부담으로부터 다이버님들을 잠시나마 보호해 줄 겁니다. 일단 목적지에 도착하고 나면 더 이상 쓸모가 없으시겠지만, 그전까지는 절대로 탈착시켜선 안 됩니다.”
한 안전 점검관의 말에 조명이 엄지손가락을 척 올려 보였다.
저들도 8282의 밑에서 밤을 새워 가며 고생했을 것이다.
어떻게든 자신들에게 가장 안전하고 효율적인 장비를 준비해 주기 위해, 안 그래도 부족한 잠까지 줄여 가며 작업했을 터.
조명은 자신이 공사판을 전전하던 시절부터 이런 3D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자랑스러웠다.
힘들고, 더럽고, 위험한 직업이지만, 다들 눈물 대신 땀을 흘린다.
불안감 속에서 공포로 떨리는 손을 필사적으로 부여잡으며, ‘어떤 장비가 도움이 될까?’, ‘어떻게 하면 더 튼튼하게 만들 수 있을까?’와 같은 고민을 했겠지.
군인들이 모두를 위해 전장에서 목숨을 바친다면, 그들은 미래를 위해 자신들을 불태우고 있었다.
“항상 감사드립니다.”
“…아닙니다. 다이버님들께선 사지로 가시는데, 오히려 이렇게밖에 못 해 드리는 게 죄송할 따름입니다.”
아버지뻘 되는 또 다른 정비관이 다가와 붉어진 얼굴로 대답했다. 그의 말투에는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뉘앙스가 담겨 있었다.
“걱정 마세요. 한숨 자고 일어나면 전부 없던 일로 만들어 드릴 테니까요.”
전부 없던 일.
애초에 멸망 같은 건 없고, 멸망을 이끄는 자의 침공도 없는, 평화로운 미래.
생명 연장을 위해 필사적으로 싸우고, 도망쳐 온 사람들이 다음 날 아침 떠오르는 태양과 함께 찬란한 미래를 바라볼 수 있게 하고 싶다.
물론 자신도 그러고 싶고.
‘내 계좌에 꽂힌 돈이 얼만데.’
너무 많아서 이리저리 분산시켜 두긴 했지만, 그 돈도 지금은 종이쪼가리만 못 했다.
그러니 자신이 쌓아 올린 부를 정당하게, 즐겁게 펑펑 쓸 수 있는 미래를 맞이하고 싶다. 오래전부터 그런 미래를 꿈꿔 왔으니까.
“모든 갑판 요원들은 안전지대까지 물러나 주십시오!”
통제 요원이 확성기로 크게 소리치자, 안전 점검관과 정비관들이 일제히 물러섰다.
추가 장갑을 장착한 헬 다이버 1팀은 한층 더 비대한 몸집을 자랑하게 되었는데, 흡사 소형 전투기 같은 외관을 자랑했다.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까지 헬 다이버들을 최대한 보호해야 했기 때문에 추가 장갑은 최신예 기술의 집약체나 다름없었다. 오죽하면 추가 장갑과 함께 장착된 보급품 상자조차 튼튼해 보일까.
“헬 다이버 1팀은 최종 확인을 해 주십시오!!”
조명이 먼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 손을 들어 올리자, 뒤이어 다른 팀원들도 차례대로 수신호를 보냈다.
“캐터펄트 상태 확인, 헬 다이버 장갑 및 보급품 장착 여부 확인, 최종 확인 오케이. 올 그린. 사출 카운트!”
사출 통제반에서 통제 요원의 무전을 전해 받고 시스템을 작동시켰다.
이윽고 항공 갑판 정면에 홀로그램형 전광판이 나타나 카운트다운을 알려 주었다.
카운트다운이 시작될 무렵, 정확히는 이 세계와의 통신이 단절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을 때, 11500의 목소리가 조명의 헬멧 속에서 울려 퍼졌다.
5…….
[그곳에 도착하면 당신이 가장 먼저 보게 될 광경은 다소 생소한 모습일 겁니다.]4…….
[우리는 그 어떤 종족보다도 발전했으며, 때문에 평화로운 한때를 살아가고 있었습니다.]3…….
[하지만 최초의 멸망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는 그리 어렵지 않게 알게 될 겁니다.]2…….
[그러니 망설이지 말고 자신이 행해야 하는 바를 반드시 행하십시오.]1…….
[본 통제관과 같은 실수는 범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사출!”
촤아아아아아아!
조명을 필두로 헬 다이버 1팀 전원이 차례대로 캐터펄트를 통해 허공으로 사출되었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헬 게이트의 정중앙, 가장 깊은 곳, 모든 것의 시초가 되는 장소였다.
이 모든 사건의 발단이 된 그날.
이 모든 사건을 없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그날.
지금껏 누구도 도달하지 못한, 오직 실패만 겪어야 했던 개미지옥.
그곳을 향해 헬 다이버 1팀이 처음이자 마지막인 ‘점프’를 시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