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l Divers RAW novel - Chapter 147
헬 다이버즈 146화
146화
슬럼가에서도 생명체 반응이 보이지 않는 곳에 은밀하게 착륙한 일행은 빠르게 외부 장갑을 해제했다.
이 묵직한 외부 장갑은 뒤틀린 시공간을 건널 때는 슈트가 버틸 수 있도록 도움을 주지만, 안정된 시공간에 진입한 시점에서 더 이상 쓸모가 없었다.
‘이곳에서의 일이 잘 풀리면 더 이상 시공간이 뒤틀리지 않을 거라는 자료도 있고.’
조명은 이곳에 오기 전에 통제관들이 준비해 준 방대한 양의 자료를 대략적으로나마 훑어보았다.
애초에 시공간이 뒤틀린 것은 운명의 굴레에 묶인 통제관들이 그저 순종하지 않고, 강제로 헬 게이트를 열어 모든 시공간을 연결했기 때문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즉, 바꿔 말하자면, 모든 사건의 시초가 ‘없던 것’으로 되는 순간, 모든 문제가 해결되면서 시공간이 뒤틀릴 일도 없다는 얘기.
물론 일이 잘 풀린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건 아니다.
딱 하나, 조명에게만 작은 ‘뒤틀림’이 남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지금 생각해 봐야 의미없는 일이기에, 조명은 묵묵히 장비를 해제하면서 팀원들의 상태를 살폈다.
현재 일행이 착륙한 지점은 슬럼가에서도 꽤 오래된 것으로 보이는 낡은 빌딩이었다.
빌딩이라고 말하기도 뭣할 만큼 그렇게 높은 건물은 아니지만, 오랫동안 보수가 이루어지지 않은데다 세월의 풍파에 그대로 노출된 탓에 생각 이상으로 낡았다.
그래서인지 빈민들이 몸 하나 누일 곳 찾기 힘든 슬럼가에서도 이런 위태로운 건물은 사람이 들어오지 않은 듯했다.
유리창은 다 깨지고, 뼈대까지 앙상하게 드러난 폐건물이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일이니까.
하루하루 아득바득 살아가는 빈민들도 제 목숨은 소중했다.
“외부 장갑은 쓸모없으니 여기서 처리해 두고, 보급 상자에서 보급품부터 꺼내자.”
“뒤틀린 시공간이 안정화되면 우리에게 제공된 슈트만으로도 충분히 견딜 수 있을 거야. 리더 말대로 외부 장갑은 더 이상 필요없겠어.”
조명을 포함한 팀원들이 슈트의 특수 기능을 이용하자, 슈트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는 나노 로봇이 개미 떼처럼 기어 나와 외부 장갑들을 집어삼켰다.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 외부 장갑은 ‘잉여 자원’으로 분류해 두었다가, 슈트나 무기에 손상을 입을 경우 응급 수리에 사용할 수 있었다.
입장상 현지에서 무기나 장비 조달이 힘든 1팀을 위해 정비관들이나 8282가 머리깨나 쓴 듯했다.
“대기 오염이 조금 심하지만, 슈트를 벗어도 호흡에 문제는 없어.”
1004로부터 특수 화학이라는 분야를 계승받은 지윤이 가장 먼저 대기 성분 분석 결과를 알려 주었다.
그녀의 팔목에는 길쭉한 스마트패드가 부착되어 있는데, 외부에서 들어오는 각종 정보들을 표시해 주는 것으로 보였다.
“내려오면서 잠깐 살펴봤는데, 성층권에서 보던 하늘과 지상에서 보는 하늘이 다른 이유를 알겠어.”
지윤이 대기 오염을 거론하자, 창환도 자신이 본 것들에 대한 정보를 늘어놓았다.
“인구밀집도가 과하게 높은데다 문명 발전도가 우리가 살던 곳보다 최소 2~30년은 더 앞서고 있어. 이곳은 헬 게이트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가 사는 곳보다 사용하는 에너지가 더 많을 거야. 폭증한 인구를 감당하기 위해서 각종 생필품과 식량을 만들어 내야 하고, 결과적으로 끝없이 돌아가는 공장들을 감안하면 대기 오염이 심각해도 이상할 게 없어.”
어디 공장만 문제겠는가.
인구 과포화 문제 때문에 쾌적한 거주지를 마련하기 위해 산림도 꽤 밀어 버렸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산림 대신 이런 슬럼을 밀어 버리지 않았냐고 물어봐도, 조명으로서는 알 길이 없다. 왜냐하면 지구에서도 인구가 늘어나든 경제가 활성화되든 빈부격차는 항상 존재했으니까.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듯, 어딜 가나 못사는 빈민들을 위한 슬럼은 존재했다.
이곳 또한 그런 논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 장소가 분명했다. 그 증거로 저 멀리 보이는 도시 속에는 엄청난 수의 인구와 그들이 만들어 내고, 소모하는 에너지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반면, 이곳은 생기조차 느끼기 힘들 만큼 모든 것이 죽어 있다.
아마 이 슬럼은 도시에서 거주하는 자들이 경각심을 느낄 수 있게끔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 같았다.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말처럼, 화려한 도시에서 쫓겨난 낙오자들이 가게 될 곳은 결국 이런 슬럼뿐이라는 의도가 다분했다.
“그래서 이제 어떡할 거야, 리더?”
고지석이 자신이 애용하는 중화기와 탄약 박스를 육중한 슈트 후방에 장착하면서 물었다.
그는 천생 전투원이기 때문에 팀원들이 주는 정보, 리더가 내리는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최고의 장기말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지시 사항을 원하는 것은 필연적.
조명은 헬멧의 라이트를 이용해 홀로그램 자료를 띄워 올렸다.
“이 행성의 이름은 퍼스트 플래닛(First Planet). 통제관들이 말하길,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는 의미에서 그런 이름을 붙였다더라.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이 FP에서 최초의 I―바이러스 창궐 사태가 정확히 어느 시점에, 어디에서 터지느냐가 중요한 건데… 이건 통제관들도 몇 가지 가설만 세웠다고 해.”
조명은 통칭 FP의 전 세계 지도를 활성화해서 몇 가지 포인트를 찍어 주었다.
FP는 지구와 다르게 대륙이 딱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대신 그 대륙 하나가 지구상에 존재하는 유라시아 대륙과 아메리카 대륙을 합친 것보다 1.5배는 더 거대했는데, 특이하게도 지구와는 달리 지각 변동으로 대륙이 쪼개지지 않은 케이스였다.
덕분에 해운업보다는 항공기나 열차를 이용한 운송업이 발달했으며, 대륙 외곽보다는 대륙 중심부에 인구가 밀집되어 있는 형태였다.
대륙 외곽에 존재하는 해양 도시들 대부분은 관광이나 수산자원으로 먹고 사는 도시이며, 중국의 상하이처럼 경제특구는 아니라고 한다.
애초에 다른 대륙이 없기 때문에 대륙 외곽 도시들의 주 고객은 대륙 중심부에 위치한 도시들. 그중에서도 소위 잘사는 도시나 기업이 ‘고객’이었다.
게다가 FP 역시 라켄롤 행성처럼 단일 국가에 의한 통치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라켄롤은 국민 대다수의 호전적이면서도 유쾌한 성향을 잘 반영해서 국가를 운영했다면, 이곳은 철저하게 약육강식의 논리를 따르고 있었다.
자유 시장에서 당연하게 발생하는 무한 경쟁, 그리고 돈과 자원이면 뭐든 할 수 있는 황금만능주의가 극에 달한 행성이었다.
“다들 자료를 봐서 알고 있겠지만, 이 행성, 이 대륙에 사는 인간들은 굉장히 직관적인 성향을 띄고 있어. 약육강식이라는 단순한 논리 덕분에 부익부 빈익빈이 극에 달한, 양극화의 지옥 같은 곳이지. 덕분에 I―바이러스의 최초 발생지도 지금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슬럼 같은 곳이라고 추정한 것 같아.”
조명이 찍어 준 포인트는 이 대륙에서도 악명 높은 슬럼이 위치한 곳이었다.
마치 미국의 디트로이트처럼 완벽하게 망해 버린 공장 도시, 불칸.
각종 생태계 오염으로 인해 수산자원량이 턱없이 줄어들자 빠르게 망해 버린 항구 도시, 말릭.
한때는 천혜의 자연 경관을 자랑하는 아름다운 산림을 가진 관광특구였으나, 각종 개발과 투기꾼들의 자본 침식으로 인해 과거의 멋을 잃고 슬럼화된 옛 관광지, 조인어스.
마지막으로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심각한 오염과 황폐화의 길을 피하지 못해 결국 사막의 모래 속에 반쯤 잠겨 버린 유흥 도시, 콜 하프.
설명에 의하면, 현 시점에서 절대로 사람이 살 것 같지 않은 장소들이지만, 놀랍게도 이곳에선 꽤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는 통계 자료가 존재했다.
그들은 쓸 만한 고철을 떼어 팔아먹는 빈민이거나, 선량한 자를 약탈해서 먹고사는 범죄 조직들이거나, 둘 중 하나였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위생 관념은 개나 줘 버리고, 당연한 상식에 무지한 빈민들이라는 사실은 변함없었다. 그리고 그런 빈민들은 바이러스 앞에선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숙주)에 불과했다.
생각해 보라. 모든 것이 잘 관리되고 있는 도시는 비록 인구가 차고 넘칠 만큼 많지만, 전염병이 터지더라도 빠른 대처가 가능하다.
신속정확한 방역과 백신 개발, 그리고 깔끔한 사후 처리까지.
무엇 하나 빈민들이 모여 사는 슬럼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대처들이다.
그러니 발전한 도시에 아무리 집어먹을 먹이가 많다고 한들, 바이러스란 놈은 결국 신체적으로 나약하고 사회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약자들을 먹이로 삼는 것이다.
“그럼 이제부터 I―바이러스가 창궐했을 것이라 추정되는 각 지점들을 확인해 봐야 하는 건가?”
잠자코 있던 형찬이 대뜸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그건 원론적이면서도 현실성이 없는 방법이었다.
조명을 제외한 팀원들이 각자 한 포인트씩 맡아서 흩어진다고 해도 결과적으로 손이 부족하기 때문에 I―바이러스의 조짐을 파악하기도 전에 감염 사태가 발발할 게 빤했다.
사람 한 명이 도시 규모의 지역 하나를 24시간, 개미 새끼 하나 거르지 않고 꼼꼼하게 살피는 건 불가능하니까. 실제로 그건 통제관이라도 불가능한 일이다.
통제관의 신체를 가지게 된 조명이라면 후각, 청각, 시각을 통해 인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방대한 양의 정보를 수집하는 게 가능하겠으나, 조명의 몸은 하나뿐이기에 마찬가지로 현실성이 없었다.
“우린 I―바이러스가 창궐하는 시점이 아니라, 창궐하기 전의 시점을 파악해서 원흉 자체를 제거해 버리는 게 주된 목표예요.”
“불가능할 것 같은데?”
셈이 빠른 형찬은 즉시 부정했다. 일말의 가능성도 느낄 수 없다는 단언이었다.
“맞아요. 불가능하죠. 통제관들이 준비해 준 방대한 양의 정보가 있고, 최신예 슈트까지 지급받은데다, 각종 훈련과 교육도 받았지만, ‘모르는 것’을 미리 알고 대처하는 건 불가능해요.”
“그럼 어떻게?”
지윤이 짧게 되묻자, 조명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내가 쓰던 무식한 방식을 써야지.”
라켄롤 행성에서 행한 임무 무한 반복.
하지만 그건 필연적으로 작전시간을 늘리는 꼴이 되어 1팀이나 바깥에서 헬 게이트를 유지해 주는 통제관들 모두에게 부담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은 없었다.
자신들이 도달한 이 시점은 FP의 멸망이 코앞까지 다가온 아슬아슬한 시점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몇 번의 희생이 이어지든 반복해서 최대한 확실한 정보를 획득한다. 그 과정을 1팀과 통제관들이 버틸 수 있느냐는 전혀 다른 문제이지만, 동시에 필승법이기도 했다.
애초에 이런 상황에서 불필요한 희생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감수성 풍부한 이야기는 커플끼리 영화관에 가서 로맨스 영화나 보며 떠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린 처음부터 각 포인트를 돌면서 언제 사건이 터지는지, 뭐가 원흉인지 무작정 알아내려 할 필요가 없어. 그냥 이 행성의 대륙 전체에서 발생한 사건의 정보가 가장 빠르게 전달되는 곳에서 기다리기만 하면 돼.”
그리고 그 지점은 조명이 새롭게 추가한 포인트인 대륙의 최중심부, 통제관으로 구성된 최후의 결사대가 첫걸음을 시작한 최후의 방위 도시였다.
“그럼 여기서부턴 인간답게 움직이자고.”
벌써부터 슈트의 내구도를 깎아먹을 필요는 없다며, 조명은 이곳을 벗어나 최후의 방위 도시로 향하는 플랜을 짜기 시작했다.
물론 가는 길에 인간답게 위장하려면 슈트를 일시적으로 해제하게 되겠지만, 이런 얘기를 꺼낸 시점에서 다들 예상하고 있어 큰 반발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