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l Divers RAW novel - Chapter 36
헬 다이버즈 035화
35화
고된 노동과 정신적 스트레스로 피곤함에 찌들어 있었으니 열두 시간 내내 잠을 잤다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운동복과 운동화까지 갖추고 한밤중의 선착장까지 와서 우두커니 서 있는 것은 어떻게 봐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설마 몽유병인가?”
무심코 혼잣말을 내뱉었지만, 조명의 표정은 심각하게 굳어져 있었다.
건강함만이 유일한 장점이던 자신이 갑자기 몽유병에 걸리다니, 좀처럼 믿기지 않는 현실이었다.
‘정확히는 그날부터야. 그 정체불명의 무덤에서 도깨비불을 보고 난 뒤로… 이렇게 된 거야.’
처음에는 이틀의 기억을 잃었다. 다음으로는 하루.
혹시 그 절반인 12시간의 기억을 또 잃을까 내심 걱정했는데, 몇 주간 그런 낌새는 없었다.
그래서 조명은 저도 모르게 방심하고 있던 것일지도 모른다. 설마 그런 일이 이곳에서도 벌어질 거라곤 전혀 예상치 못했으니까. 애초에 신체검사에서도 의사가 별문제 없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생각해 보면 참 이상했다.
단순히 몽유병 때문에 기억도 없이 이곳저곳 돌아다닌 것은 둘째 치고, 몽유병 환자의 행동이 이렇게까지 정확하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몽유병 환자가 어떻게 지방에서 서울까지 스스로 올라갈 수 있으며, 또 어떻게 지하철을 타고 신체검사를 받으러 갈 수 있겠나. 그리고 이젠 옷까지 갈아입고 적막함이 내려앉은 선착장에 와서 우두커니 서 있기까지 했다.
이쯤 되니 조명은 몽유병보다 자신이 알 수 없는 무언가에 의해 ‘이끌렸다’라고 추측했다.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는 것처럼, 이끌리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것처럼 조명의 몸은 그 무덤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병무청으로, 그리고 병무청에서 해양 플랜트까지 도달했다.
조명은 꼭 누군가의 장기말이 되어 움직인 것 같은,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돌아가자.”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무언가 꺼림칙했다.
넘실거리는 깊고 어두운 바다 저편에서 누군가가 자신에게 손짓을 하는, 괴상망측한 착각 따윈 하지 않았다. 다만, 무언가가 느껴졌을 뿐이다.
낙하대 위에서 망설임 없이 헬 게이트로 뛰어들 때와 그렇지 않은 지금, 조명은 이 기기묘묘한 감정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정신이상 내성 강화의 힘이 발동하고 있어.’
자신이 섭취한 강화제의 능력이 발동하고 있다는 건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체력이 방전되었을 때는 체력 회복률 상승이, 상처를 회복하기 위해 피부와 맞닿은 에너지가 변환 능력에 의해서 흡수될 때처럼.
지금도 무언가가 조명의 정신을 갉아먹으려 하고 있었다. 쥐어잡아 흔들고, 지배하려 했다.
만약 정신이상 내성 강화제를 먹어두지 않았더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감히 그런 생각을 해보았지만, 조명은 명확한 답을 낼 수 없었다.
적어도 자신이 생각하는 최악의 상황 중에서 이렇게 멀쩡하게 두 다리 딛고 서 있는 광경은 없었으니까.
“왜 다들 날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지?”
살짝 짜증이 치밀어 허공에 대고 질문을 던졌으나, 돌아오는 것은 쌀쌀한 바닷바람뿐이었다.
대답 따윈 기대하지도 않은 조명은 그 길로 곧장 사람을 찾아 나섰다.
아무래도 후보생 거주 구역에서 상당히 떨어진 곳까지 온 듯하여, 해양 플랜트의 랜드마크라고 할 수 있는 초대형 크루즈선 밀집 지역을 찾기까지는 무려 30분이나 걸렸다.
그 과정에서 사람 한 명쯤은 만날 법도 하건만, 기이하리만치 경계 근무를 하는 초병도, 사설 경비 업체 직원도, 바삐 움직이는 엔지니어와 상인들도 만나지 못했다.
그러다 크루즈선에 접근했을 무렵, 조명은 의문점을 느꼈다.
‘왜 인기척이 없지?’
분명 불빛은 있었다.
하지만 불빛 속에서 움직이는 사람은커녕 생활 소음조차 들리지 않았다.
너무나도 고요한 나머지 파도가 철썩이는 소리마저 들리지 않았다면, 그대로 미쳐 버렸을 상황이다.
조명은 익숙한 길을 따라 크루즈선의 거주민 관리국으로 향했다. 평소라면 그곳에서 근무를 하고 있는 관리 직원과 초병들이 크루즈선을 드나드는 사람들의 신분을 확인하고 있을 터.
하지만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혹시라도 모두 쉬러 갔나 싶어 크루즈선의 측면에 뚫린 깊고 어두운 통로를 들여다보았지만, 음침하다 못해 섬뜩한 기분만 들 뿐이었다.
“리프트는… 작동하네.”
레버를 당기고 스위치를 누르니, 리프트는 덜컹거리면서도 제대로 작동했다.
조명을 홀로 태우고 선상 갑판까지 올라간 리프트는 굳게 닫혀 있던 울타리 같은 문을 열어주었다.
선상 위로 보이는 거라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누군가 있었을 법한 외부 테이블과 거주민들을 위한 오락 시설, 그리고 풀장이 전부였다.
외부 테이블에는 아직도 차가운 김이 서린 음료와 따뜻한 김이 피어오르는 음식이 놓여 있으며, 오락 시설과 풀장은 이미 개방된 지 오래였다.
잔잔히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는… 조명이 알지 못하는 클래식이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그렇게 중얼거리며 갑판 위로 내려선 순간, 크루즈선의 모든 불빛이 꺼지고 음악 소리도 멎었다.
‘침착하자.’
정신은 이미 침착했다. 침착하지 않은 것은 몸뿐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조명을 반겨주던 환한 불빛과 잔잔한 클래식 음악, 먹음직스러운 음식은 모두 바람 앞의 불꽃처럼 사그라들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본연’의 모습, 그 자체로 돌아가 버렸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음식은 구더기가 들끓는 곰팡이 더미로 변했으며, 놀이 시설은 수십 년간 방치된 것처럼 낡고 녹이 슬어 있었다.
그나마 멀쩡해 보이는 야외 스피커에선 클래식 음악이 아닌, 들으면 들을수록 마음이 꺾여 나갈 것 같은 노이즈가 흘러나왔다.
소금기를 머금은 쌀쌀한 바닷바람이 조명의 머리를 간지럽히며 스쳐 지나갔다.
‘이곳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곳이 어떤 장소인가를 알게 되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깨달을 테니까.
음산하기 짝이 없는 야외 카페를 지나쳐, 파라솔과 의자 따위가 마구 널브러져 있는 선실의 입구로 다가갔다.
건장한 20대 남성에 해당하는 조명에게 이 정도의 조잡한 장애물은 문제될 것이 없었다. 얽히고설킨 것들을 하나씩 끄집어내서 틈을 만드니, 사람 한 명 정도는 능히 지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조명은 섣불리 안으로 진입하지 않았다. 자신은 이런 초거대 크루즈선의 내부 구조를 모를뿐더러, 안에 무엇이 있을지 장담할 수도 없었다.
잠화복이라도 있었다면 슈트의 내구도를 믿고 선뜻 발걸음을 옮겼을 법하건만, 조명은 어정쩡한 자세로 입구 근처의 벽을 손으로 더듬거렸다.
“있네.”
아니나 다를까, 수용 인원이 최대 수만에 이르는 초거대 크루즈선답게 입구 근처에는 비상용 손전등이 비치되어 있었다.
손전등은 매우 낡았지만, 천만다행스럽게도 불은 들어왔다. 그 말인즉슨…….
‘내부 전력은 제대로 공급되고 있다는 뜻이야.’
조금 전의 그 광경은 결코 헛것이 아니었다. 다만, 헛것 같은 현실을 조명이 제대로 알아채지 못한 것이다.
손전등을 이리저리 비춰보았지만, 내부는 바깥과 크게 다를 바 없게 으스스한 광경이었다.
천장은 반쯤 무너져 내려 끊어진 배선이 내장처럼 흘러나와 있고, 사람들의 휴식터였을 휴게 공간은 완전히 뒤엎어진 상태였다.
안쪽의 메인 홀로 향하는 넓은 복도는 두더지가 파헤치기라도 한 것처럼 크고 작은 구멍들이 마구 뚫려 있었다. 바닥과 벽, 천장의 구분 없이 뚫린 구멍들에선 으스스한 한기 같은 것이 새어 나오는 느낌이었다.
때마침 발치에 걸린 둥근 항아리 모양의 꽃병을 발견한 조명은 그것을 볼링공처럼 굴렸다.
드르르르.
조용히 굴러가던 꽃병은 그대로 깔끔하게 홀인원.
그러고는 다시 숨이 막힐 듯한 적막함이 이어졌다. 정말 아무런 소리도 울려 퍼지지 않았다.
“…….”
조명은 조심스럽게 한 걸음, 한 걸음 뒤로 걸었다.
그러기를 약 5초.
숨을 한 번 크게 내쉬었다가, 있는 힘껏 되돌아 달렸다.
그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야만 했다.
하아아아아!
으그으…….
조명이 되돌아 달리는 순간, 구멍의 지척에서 숨죽여 기다리고 있던 것들이 일제히 튀어나왔다.
“씨발, 씨발, 씨발!”
아직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지만, 조명은 자신의 등 뒤를 맹렬하게 뒤쫓아오는 한 무리의 정체를 어렴풋이 알 것만 같았다.
단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그에 대한 이야기도 들은 적이 없지만, 본능적으로 저것들이 ‘무엇’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래서 달렸다. 입구를 빠져나와 널브러져 있던 의자와 파라솔을 마구 헤집어 다급히 장애물을 만들고, 물때만 잔뜩 끼어 있는 풀장 위를 달렸다.
이 넓은 배 위에서 도망칠 곳이야 무수히 많겠다마는, 결국 배 안에 저것들이 가득하다면 바깥으로 도망치는 것이 상책이었다. 갑판과 수표면과의 높이만 해도 수십 미터에 달하는데, 저것들이라고 마구잡이로 뛰어내릴 것 같진 않았다.
다행히 한발 앞서 리프트에 도달한 조명은 미친 듯이 레버를 당기고 버튼을 후려 갈겼다.
덜컹덜컹!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리프트.
물론 그 속도는 굼벵이처럼 느리고, 손쉬운 장애물을 마구 집어 던지며 나선 것들이 갑판 위를 미친 듯이 질주했다.
리프트가 아래로 내려가는 상황이라 갑판 위를 볼 수는 없지만, 조명은 직감적으로 상황이 여의치 않음을 알아차렸다.
서둘러 리프트의 울타리를 잡고 아래로 내려간 조명은 젖 먹던 힘을 다해 나무늘보처럼 매달렸다.
그 순간, 무언가가 쿵! 리프트의 갑판 위로 착지했다.
하마터면 떨어질 뻔한 것을 가까스로 버텼다. 행여나 소음이라도 낼까 봐 숨소리까지 죽이면서, 조명은 리프트의 아랫면에 진드기처럼 들러붙었다.
그러기를 10초가량 흘렀을까.
리프트가 어느덧 중간 지점을 넘어 지상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하지만 조명은 지상으로 올라갈 생각 따윈 눈곱만큼도 없었다.
희미하지만 갑판 너머로 무언가의 거친 숨소리가 느껴졌다. 모습이 보이진 않지만, 선박 위에선 놈들이 아우성치며 주위를 난장판으로 만드는 소음이 울려 퍼졌다.
이대로 리프트가 지상에 도착하며 자아내는 소음과 함께 조명은 그대로 바닷물에 입수할 생각이었다.
‘물속에선 열, 냄새, 숨소리까지 모두 외부와 차단할 수 있다. 중요한 건 타이밍이야.’
너무 빨리 입수해도 안 되고, 그렇다고 너무 늦게 입수해서도 안 된다. 이 낡은 리프트가 도착 지점에 도달할 때마다 자아내는 소음에 맞춰야 완전범죄가 가능했다.
‘조금만, 조금만 더!’
고개를 들어 리프트가 지면과 맞닿기까지 앞으로 2미터도 채 안 남겨둔 것을 확인했다.
고작 수초의 간격을 두고, 조명은 마침내 손을 놓았다. 이대로 중력에 맡겨 물속으로 입수하면 들키지 않고…….
“커흑?!”
그래, 그건 어디까지나 입수가 ‘가능하다면’의 이야기였다.
갑판을 단숨에 꿰뚫고 나온, 두껍고 미끌미끌한 팔뚝이 조용히 입수하려던 조명의 흉곽을 움켜쥐었다.
날카로운 손톱이 갈비뼈의 틈새를 하나하나 파고들어, 갈고리처럼 갈비뼈를 단단히 고정시켰다.
인간의 갈비뼈는 의외로 내구성이 낮은데, 아이러니하게도 조명의 몸은 일반적인 인간보다는 좀 더 튼튼한 축에 속했다.
그 덕분인지 거중기처럼 들어 올려지는 팔뚝에 의해 조명의 흉부는 너덜너덜해진 상태로 끌려 올라갔다. 꼭 낚싯바늘에 걸린 물고기처럼,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펄떡거리기만 해야 했다.
“어, 어흐흐으으으…….”
물때가 잔뜩 낀 탓인지, 퀴퀴한 냄새를 내뿜는 놈의 팔뚝은 흡사 파충류의 몸처럼 매끈매끈했다. 그런 주제에 과한 근육과 불거져 나온 핏줄이 인상적인데, 그마저도 조명은 오래 볼 수 없었다.
갑판이 놈의 손길에 의해 우악스럽게 뜯겨져 나간 그 순간, 톱날처럼 솟아난 수백 개의 이빨이 조명의 얼굴을 덮쳤다.
산 채로 두개골이 씹혀 터져 나가고, 심장이 도려내지고, 이윽고 살점과 뼈가 하나하나 분해되는 끔찍한 감각을 맛봤다.
…그렇게 눈을 떴다.
“으흑, 흐으으윽! 쿨럭쿨럭!!”
눈을 뜨자마자 보인 것은 언제나처럼 익숙한 자신의 개인 룸 천장이었다.
불은 꺼져 있지만, 창문 너머로 새어 들어오는 바깥의 불빛에 의해 앞은 잘 보였다.
몇 번이고 숨을 고르며 가슴을 움켜쥔 채 침대에서 발광을 했을까, 조명은 침을 질질 흘리면서 간신히 침대를 벗어날 수 있었다.
“커흑, 쿨럭!”
기침을 할 때마다 입가에서 새어 나온 것은 쓴 위액과 침뿐이었다.
당장 피를 토해도 이상할 것 같지 않은 통증이 전신을 괴롭히고 있는데, 정작 몸에선 피 한 방울 나오지 않고 있다는 것이 죽을 만큼 괴로웠다.
차라리 시원스럽게 피라도 한 움큼 토했다면 몸에 문제가 생겼구나 싶을 텐데, 정작 조명은 그 어떤 신체적인 문제도 느끼지 못했다.
“시, 시바아아알! 이게 뭐야! 뭐냐고 대체!!”
비척비척 움직여 화장실로 달려 들어간 그는 불을 켜고 거울을 살폈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수면을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초췌하기 짝이 없었다. 다크 서클이 짙게 내려앉았으며, 눈동자를 들여다볼 수도 없을 만큼 시야가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조명은 세면대를 주먹으로 내려치곤, 갑자기 겉옷을 벗어 던졌다. 생활복처럼 착용하고 있던 운동복을 벗어 던지자, 이내 드러난 것은 무수히 많은 멍 자국이 새겨진 몸이었다.
목덜미 아래를 기준으로 크고 작은 멍 자국이 즐비했다.
그건 마치 무언가에게 물어뜯긴 것 같기도 했다.
자신의 멍 자국을 하나하나 손가락 끝으로 짚어보며, 조명은 불과 몇 분 전까지의 기억을 떠올렸다.
두개골이 통째로 으스러졌지만, 그럼에 목 아래로 깨물리고 잡아 뜯긴 감각은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멍 자국이 어떻게 생긴 것인지, 그 멍 자국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파악하기까지는 5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주먹으로 자신의 얼굴을 후려쳤다.
무기력하게 나자빠질 뻔했지만, 저도 모르게 ‘진짜’ 고통을 줘서 정신을 일깨운 것이다.
‘정신이상 내성 능력이 사그라들었다.’
주먹으로 얼굴을 후려친 순간, 시야가 고정되었다. 전신을 자극하고 있던 격통도, 혼잡한 기억으로 인해 속이 메슥거리던 느낌도 말끔하게 사라졌다.
이번에야말로 침착함을 되찾은 조명은 자신이 벗어 던진 겉옷을 챙겨 입었다.
개인 룸의 벽에 걸려 있는 아날로그시계를 확인해 보니, 정확히 밤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곳에서 확인한 시간과 같았다.
“쓰으으읍…….”
그때의 일을 떠올리니 다시 한 번 격통이 찾아오는 것 같아, 조명은 필사적으로 그곳에서의 기억을 한 켠으로 밀어버렸다.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기억인지라, 차라리 자신의 진짜 기억과 동조화되는 것만은 필사적으로 막으려 했다.
뇌를 속이고 속이다 보면 있던 일도 없던 것으로 만들 수 있다. ‘분명 기억에는 존재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망상에 불과하며, 사실은 애매한 기억이다’라고 얼버무리면, 자연스럽게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는다.
기억상실증이라도 걸리지 않는 한 영원히 지워 없앨 수는 없겠지만, 그것은 인내심으로 커버했다.
‘힘든 과거는 모두 잊고 행복할 미래만 생각하자’라고 흔히들 말하듯, 조명은 자연스럽게 머릿속에서 그 기억을 구석으로 밀어버린 것이다.
“후우.”
조금 전보단 한결 나아진 것 같다.
하지만 조명은 다시 침대로 기어 들어가는 것만큼은 할 수 없었다.
정신은 미치도록 피곤하지만, 다시 한 번 잠들면 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장담할 수 없었다. 설령 해프닝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다시는 마주하고 싶지 않은 광경이었다.
늦은 시간이지만 산책 겸 조깅을 하기 위해 단말기와 운동화를 챙겼다.
막 개인 룸을 나가려던 찰나, 충전되어 있던 단말기가 울렸다. 누군가로부터 연락이 온 것이다.
단말기를 집어 든 조명은 발신자를 확인하지도 않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차피 담당 통제관이거나 지창환, 혹은 정형찬 선배이리라.
하지만 통화 버튼을 눌렀음에도 불구하고 단말기의 벨 소리는 계속 울려 퍼질 뿐이었다.
“…클래식?”
수면 아래로 처박은 기억 속에서 익숙한 ‘음정’을 캐치해 낸 그 순간!
무언가가 조명의 발목을 잡아채 아래로 끌어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