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l Divers RAW novel - Chapter 4
헬 다이버즈 003화
3화
“저, 저기… 의사 선생님? 아니, 군의관님?”
“왜 그러십니까?”
“혹시 오늘이 며칠인지 알 수 있을까요?”
“오늘은 7월 21일입니다. 그래서 아까 얘기로 돌아가자면…….”
7월 21일.
집에서 잠들었을 때가 20일이니, 그새 하루가 지났다.
정말 우스꽝스럽고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조명은 또다시 기억의 공백을 느꼈다. 어제는 이틀간의 공백이지만, 오늘은 하루의 공백이라는 점이 그나마 작은 위안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예, 예?!”
“하아… 박조명 씨, 신체검사상으로는 문제가 전혀 없어서 현역 판정을 받을 텐데, 이제 와서 이상한 척해봐야 의미 없습니다. 그리고 제가 하는 얘기가 지금 무슨 의미인지도 이미 이해하셨을 것 아닙니까.”
“아, 그게… 죄송합니다.”
얼떨결에 사과한 조명은 눈알을 요리조리 굴렸다.
돌아가는 상황으로 보건대, 이곳은 신체검사를 받는 병무청일 터.
모든 검사를 끝내고 마지막으로 군의관과 면담을 가지는 차례인 듯했다.
바로 이때가 군 면제를 노리는 자들이 자신의 신체적 허약함을 증명하는 마지막 기회라고 들은 적이 있다.
혹자는 철저하게 준비한 진료 기록을 제출하기도 하고, 할리우드 배우 뺨치는 연기력으로 신체적 이상을 호소하기도 한다. 그렇게 절대갑인 의사에게 어떻게든 들러붙는 것이다. 면제를 받기 위해서.
하지만 조명에겐 이미 그 기회가 물 건너간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뭘 준비하기도 전에 군의관과 마지막 면담을 진행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난 그냥 집에서 깜빡 잠들었을 뿐인데, 대체 이게 무슨 귀신 곡할 노릇이야?’
“제가 진짜 딱해 보여서 박조명 씨에게 특별히 추천해 드리는 겁니다. 약간의 조건이 따르긴 하지만, 현재 시행중인 이 새로운 대체복무제도에는 획기적으로 병역 기간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운이 따른다면 1년 반 정도 줄이는 건 일도 아니죠. 물론 특별한 일을 해야 하는 만큼 위험부담이 조금 더 높긴 하지만, 다들 조금 위험하더라도 빨리 사회로 복귀하고 싶어 하는 법 아니겠습니까?”
머릿속에서 상황을 정리하고 있던 조명은 갑자기 대체복무라는 단어가 튀어나와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거 사라진 제도 아니었나요?!”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이 대체복무제에 목을 매다가 결국 죄다 군대에 끌려갔다.
대체복무제는 기존의 병역 제도에서 폐해만 일으키는 것이라며 높으신 분들이 과감하게 폐지해 버렸으니까.
한데 그게 의사의 입에서 나왔으니, 조명은 기절초풍할 노릇이었다.
“지금에 이르러선 의미가 살짝 바뀌긴 했지만, 아예 사라진 건 아닙니다. 사정이 너무 딱한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따로 권하는 특별한 제도로 바뀐 겁니다. 다만, 대체복무인 만큼 위험도가 따르는 건 어쩔 수 없고요. 과거에도 대체복무를 주장하던 자들을 최전방 지뢰 제거반으로 보낸 거 기억하십니까? 그거랑 비슷한 맥락입니다.”
조명의 기억에 따르면, 전방 지뢰 제거반은 그 위험성 때문에 얼마 안 가 폐지된 대체복무지만, 어찌 됐든 잠깐이나마 실행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었다.
“그런 걸… 제가 할 수 있다고요?”
“그렇습니다. 제출된 신원 정보서를 살펴보니, 양친 모두 타계하셨더군요. 거기에 보육원 출신이시고……. 솔직히 말해서 군 복무로 3년이나 낭비하기엔 너무 안타깝잖습니까?”
“그건… 그렇죠.”
나날이 쌓여가는 빚, 나아질 전망이 없는 삶.
조명에게 있어서 군대는 현실 도피처가 아니라 발목을 잡아끄는 지옥의 구덩이였다.
자신처럼 불쌍한 사람들을 사회가 아직 버리진 않았구나, 하고 생각하며 조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왕 피할 수 없는 군대라면 복무 기간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는, 조금 덜 위험하고 여유로운 대체복무가 답이었다.
“하겠습니다! 제발 하게 해주세요!!”
“그럼 이 동의서와 내용 유출 금지 서약서에 사인해 주시고… 오늘은 이대로 귀가하시면 됩니다. 조명 씨가 하게 될 특별한 대체복무는 별도의 훈련소 과정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일을 하러 가게 될 겁니다. 며칠 안에 픽업하러 가는 사람들이 있을 테니, 마음 편하게 먹으세요.”
“예! 감사합니다!!”
썩어도 노예근성은 빠지질 않는지, 조명은 동의서와 각서들을 제대로 살피지도 않은 채 휘리릭 사인하곤 깍듯이 인사를 했다.
군 면제는 이룰 수는 없지만, 그래도 자신이 얼마나 일을 잘하는지에 따라 복무 일수가 크게 단축된다는 점이 만족스러웠다.
노동하면 박조명, 박조명하면 노동이었으니까.
조금 힘들더라도 이후엔 꽃길만 걷자는 생각으로 맘 편히 귀가했다.
“예, 예. 연고자가 없고, 가난하며, 건강한 체격으로 한 명 골랐습니다.”
늦은 저녁. 자신의 업무를 모두 끝마친 군의관 최형기는 스마트폰을 붙들고 있었다.
[뒤탈 없는 인간인 건 확실하겠지? 괜히 나중에 이상한 얘기가 나오면 곤란해. 안 그래도 요즘 서민들의 자원입대가 나날이 줄고 있는 마당이니까.]“그건 저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성공만 하면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그 직업에 어째서 서민들이 아득바득 달려들지 않는 건지…….”
[돈에 미친 서민들이라도 제 목숨 귀한 줄은 아는 거지. 훈련 기간은 최장 3년이지만, 그 3년 안에 각종 정신병을 얻어 나가거나 사고로 시체조차 못 찾는 경우가 허다해. 그래서인지 더 많은 부귀영화를 노리는 있는 집 자식들 아니면 아예 자원입대를 하지 않더군.]“역시 정보 통제 쪽에 문제가 생긴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서민들이 죄다 일반 군 전형으로만 몰려들 리가 없지 않습니까.”
[매스컴이나 인터넷의 검열은 잘 이뤄지고 있어. 하지만 사람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것만큼은 막을 수가 없지. 아무래도 해양 플랜트에서 계약직으로 근무하던 민간인들이 바깥으로 나가서 루머를 퍼뜨리는 모양이야.]“정말 방법이 없습니까? 이런 식으로 몰래몰래 뒤탈 없는 인간들만 찾아서 보내는 것도 머지않아 한계에 봉착할 겁니다. 솔직히 이번에 올린 박조명이란 청년도 좀 어리숙해 보여서 어렵지 않게 속일 수 있었지만, 조금만 생각을 할 줄 아는 인간이라면 이런 것에 속지 않을 겁니다.”
[끌끌, 정 뭣하면 대한민국 전역에 퍼져 있는 보육 시설의 고아들을 죄다 미래의 노동자 후보로 삼으면 되지 않겠나.]순간, 최형기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다 해양 플랜트의 실상이 들통나기라도 하면…….”
[그런다고 제깟 놈들이 뭐 어쩔 거야? 기업과 민간 업자들이 해양 플랜트에서 열심히 개발하고 신기술을 발명해서 아랫것들도 잘 먹고 잘사는 것 아닌가. 낙수효과로 위에서 떨어지는 콩고물이나 주워 먹으면 그만인 것들이 주제도 모르고 감히 주인을 물려 들겠어?]“그래도 인권유린 문제로 몰고 가면 국제사회에서 큰 비난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사실 그게 제가 가장 걱정하는 일입니다.”
[그거라면 더더욱 걱정할 필요 없어. 다른 국가들도 다 알게 모르게 이것보다 더한 일들을 벌이고 있으니까. 국제적으로 비난을 받게 되더라도 잠시뿐이야. 찔리는 놈들이 한둘이 아닐 텐데 우리만 쪼아대는 건 말도 안 되잖아? 우리도 수틀리면 다른 나라 해양 플랜트 정보를 풀어버린다고 하면 그만이야.]자신감으로 가득 찬 상대의 말을 듣다 보니, 최형기도 겨우 안심이 되었다.
오늘 낮에 속인 박조명이란 청년도 그 어리숙함 때문에 결국 해양 플랜트에서 곱게 살아남지는 못할 것이다. 아니, 사실 아득바득 살아 돌아와서 자신을 고소한다고 해도 상관없다.
왜냐하면 자신에겐 든든한 뒷배가 있는데다, 뒤가 켕길 만한 증거는 남겨두지 않았으니까. 법정 싸움으로 가도 증거를 확보하지 못한 박조명은 정신병자 취급이나 받으며 패소할 것이다.
그렇게 겉으론 아무런 문제가 없기에 오히려 죄책감이 더 컸다.
하지만 스피커 너머의 상대는 노예들이 부족해지면 미래의 노예들까지 끌어 쓰자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 있었다.
자신은 이미 그가 주도하는 흐름에 휩쓸린 피라미다.
한 번 올라탄 이상 내릴 수는 없다. 내리려고 해서도 안 된다.
멀쩡한 한 사람을 속인 자신이 말할 바는 아니지만, 상대는 자신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피도 눈물도 없는 남자였다.
‘이런 양반이 국가의 고위직이라니. 아니, 나도 할 말은 없군.’
옅게 한숨을 내쉰 최형기는 곧 박조명이 해양 플랜트로 이송될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는 마침내 전화를 끊었다.
앞으로도 자신은 이런 일을 수백수천, 어쩌면 수만 번 넘게 반복해야 할지도 모르니까.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왜 했는지 모르겠네.”
사람을 사지로 내모는 놈이 의사라니, 사탄도 박수를 치며 한 수 접어줄 행태였다.
하지만 히포크라테스 선서가 ‘성공’을 보장해 주지는 않는 법.
필요하다면 사탄의 박수라도 얼마든지 받겠다.
* * *
조명은 눈앞에 펼쳐진 현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휴학 신청을 하고 원룸 건물주에게도 사정이 있어 당분간 집을 비우게 될 것이라고 말을 해두었다.
이제 대체복무만 하면 된다고 마음 편히 늘어져 있던 찰나,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정체불명의 사내들에 의해 강제로 차량에 태워져 어딘가로 끌려왔다.
그래, 드넓은 바다가 펼쳐진 강원도 속초의 항구로.
“대체복무라는 게… 설마 원양어선이었나?”
중얼거리는 조명의 뒤로 몇 대의 차량이 속속 등장했다. 그곳에서 끌려 내리다시피 한 이들은 젊은 대학생부터 시작해서 중년인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남자들이었다.
“아, 진짜 옷 늘어진다니까…….”
강제로 바닥에 내친 사람에게 신경질을 부리며 조명의 곁으로 걸어온 남자는 부스스한 머리의 청년이었다.
후줄근한 트레이닝복 차림에 슬리퍼를 질질 끄는 것으로 보아, 조명처럼 갑작스럽게 납치되어 온 것이 분명했다.
그는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아저씨, 혹시 담배 있어요?”
“아뇨…….”
“담배 안 피워요? 이야, 어떻게 담배도 안 피우고 이 망할 세상을 살고 계시지? 혹시 산에서 도라도 닦으셨나?”
조명은 술 담배로 이겨낼 수 있는 세상이라면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겠느냐고 쏘아붙이려다 참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조명은 통장 잔고도, 지갑도 텅텅 빈 가난한 휴학생일 뿐이니.
자신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 않을 사람을 상대로 허세를 부리고 싶진 않았다.
그는 빈털터리인 조명을 제치고 주위를 빙빙 돌아 기어코 한 중년인으로부터 담배를 얻어냈다. 그 여유로운 태도가 지금 상황과는 너무나도 맞지 않았다.
“후우~ 뭘 그렇게 쫄아 있어요, 아저씨. 우리 어디 팔려 나가는 거 아니니까 걱정 안 해도 돼요.”
담배 연기를 후욱, 내뿜으며 다시 조명에게 말을 건넨 그는 먼바다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조명은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되물었다.
“강제로 끌려온 시점에서 누가 봐도 팔려 나가는 것 같은데요? 조금 있으면 원양어선에…….”
“에이, 그런 건 다 옛날 얘기예요. 요즘 같은 시대에 정부가 고작 원양어선 따위에 파릇파릇하게 젊은 인력을 내주겠어요? 빚쟁이도, 범죄자도, 직업도 없는 한량 백수도 다 끌어다 쓰는 마당에.”
“예?”
“얼레? 반응이 왜 그래요? 설마 아무것도 못 들으셨나? 뭐, 설명 못 들었다고 해도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요. 조금 있으면 우린 대한민국 정부가 직접 관리하는 해양 플랜트에 가게 될 거예요. 거기서 세금으로 먹고 자면서 훈련받는 거고.”
“예? 훈련이라뇨?”
이 또한 처음 듣는 얘기였다. 왜냐하면 조명은 훈련을 받지 않아도 되는 대체복무제를 선택했으니까.
정확히는 선택을 받은 것이지만, 어쨌든 일반적인 군 입대와는 다른 방식으로 병역 의무를 이행할 예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