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l Divers RAW novel - Chapter 57
헬 다이버즈 056화
56화
“헛된 희망을 사람들은 미련이라고들 하지. 하지만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그건 미련 따위가 아니야! ‘어쩌면’ 하고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르는 희망이지!”
다 꺼져 가는 횃불에 새로운 불씨가 깃들 때의 그 희열감, 기쁨, 감동을 어찌 미련 따위로 치부할 수 있을까.
미련은 버리지 못해 바스러져 가는 찌꺼기이지만, 희망은 쓰러졌던 이를 다시 한 번 일어나게 만들어주는 삶의 원동력이다.
오직 순수한 생명만이 이해할 수 있는, 격렬한 호르몬의 분비, 감정의 변화!
조명은 그것을 미련이라는 말로 덮어씌우고 싶지 않았다.
[다이버, 현재 당신의 신체 손상률은 7%입니다만, 이 또한 슈트의 생명 유지 시스템 덕분에 가능한 수치입니다. 하지만 이 이상 무리를 하면 큰 부상을 피할 수 없습니다.]“원래 다들 그렇게 살다 그렇게 가는 거야! 내가 알던 최씨 아저씨는 암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꿋꿋이 공사판에서 일을 했어. 눈이 침침해져도 용접을 그만두지 못하는 아저씨도 있었고, 각종 신경통에 시달려도 쉴 새 없이 시멘트를 나르는 사람도 봤다고!”
자신의 처지를 알면서도 누군가를 위해 몸을 내던질 수밖에 없을 때, 인간은 그 어떤 생물보다도 비효율적이며 비합리적인 선택을 한다.
‘자신이 아니면 안 돼’, ‘이번이 아니면 안 돼’… 그런 식으로 자신을 채찍질하며 한 몸 불사른다.
대단한 이유가 있을 수도, 불가피한 이유가 있을 수도 있다. 어쩌면 정말 아무런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도 각오를 다진다면 못할 것이 없다.
인간이란 그런 생물이다.
“배터리 팩 아직 남아 있었지?”
[다이버.]“걱정 마. 나도 여기서 허망하게 죽을 생각은 없어. 물론 저 사람들도 죽게 내버려 둘 생각이 없고!”
조명은 수납함에서 꺼낸 예비 배터리를 다시 한 번 끈으로 묶었다. 공장에서 가져온 것이라 포탑에서 주은 빈 깡통들과는 달리 에너지가 그득하게 충전되어 있었다.
잘 보관해 뒀다가 지구로 가지고 돌아가면 하나하나 뜯어서 분석해 볼 요랑이었던 물총도 배터리와 함께 묶었다.
“아주 잠깐이면 돼. 남은 사람들이 모두 대피하고, 나도 탈출할 수 있는 잠깐의 틈.”
[저 막대한 양의 에너지 파동이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어지간한 에너지 폭발로는 괴생명체들의 시선을 끌 수 없을 겁니다.]“알아. 그러니 더 열심히 뛰어야지. 최선을 다해서!”
이 타이밍에 뮤직 큐를 외쳤다면 제법 그럴듯한 장면이 연출되었을 텐데, 조명은 입맛을 다시며 제트 팩의 출력을 한계까지 높였다. 남아 있는 연료의 잔량은 77%가량. 안전하게 복귀하려면 일정량은 남겨둬야 했다.
슈트의 손상도가 심각한 탓에 제트 팩의 출력이 높아질수록 조명의 속도 미친 듯이 뒤틀렸다.
하나 이미 엎질러진 물. 이제 와서 되돌릴 수는 없었다.
‘놈들의 관심을 잠깐 끌기만 하면 돼!’
이를 악물고 가속도의 압박감을 버티며 날았다.
이 몸으로는 더 이상 괴물들과의 육탄전을 벌이며 땀내 나는 육체의 대화를 나눌 수는 없지만, ‘고작’ 이 정도라면 얼마든지 가능했다.
파괴된 거주 시설에 거의 도착했을 즈음, 조명은 속도를 줄인 것과 동시에 끈으로 한데 묶어둔 배터리의 덮개를 일일이 잡아 뜯었다. 물총의 탄창도 악력으로 균열을 일으켜 액상화 에너지가 줄줄 새어 나오게 만들었다.
그러고는 흘러나오기 시작한 액상화 에너지를 모조리 자신에게 들이부었다.
중력이 낮은데다 진공 환경이라 액체는 아무렇게나 흩날릴 가능성이 있지만, 고농축 액상화 에너지는 점성이 높아 슈트에 진득하게 눌어붙었다.
생각해 보라. 아직 자신들의 손에 닿지 않는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이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는데, 그 중심으로 당장 손에 거머쥘 수 있을 것만 같은 큼지막한 고깃덩어리가 날아든다면 어떤 기분이겠는가.
길거리 한복판에서 절세미녀를 본 20대 청년처럼 눈이 홱 돌아가지 않겠는가.
그래서 조명은 어쭙잖은 에너지의 폭발보단 시각적 효과를 노리기로 했다.
고농축 에너지를 잔뜩 뒤집어쓴 고깃덩어리 신세가 되어 놈들의 눈앞에서 아슬아슬하게, 잡힐 듯 말 듯한 움직임으로 곡예비행을 펼쳤다.
대피하는 거주민들을 쫓고 있던 놈들은 자신의 시야에 들어온 조명에게 곧바로 애정(식탐)을 쏟아부었다.
[다이버, 이런 식의 곡예비행은 슈트의 내구도를 크게 손상시킵니다.]“조금만… 더!”
조명은 곡예비행의 대부분을 안전 모드에게 맡겨두었다. 처음부터 상한 몸으로 일일이 제트 팩을 조정할 수 있을 여력 따윈 없었다.
그걸 알면서도 안전 모드는 조명의 고집을 들어주었다. 이 이상 거친 비행을 하면 조명과 슈트가 함께 우주 한복판에서 흩어져 버릴 위험성이 있더라도, 그의 우직함에 도박을 걸었다.
인간도 아니고, 무려 기계인 안전 모드가 자신의 마지막 도박에 응해준 것에 대해 조명은 감사를 표하는 것 대신 탈출의 신호를 알렸다.
“지금이야! 탈출해!!”
[고도 상승합니다. 탈출 확보 고도에 도달하면 억지력의 ‘막’과 충돌합니다. 충격에 대비하십시오.]스팅의 독침, 길게 몸을 내뻗은 지네, 꿀단지 개미의 진득한 산성액 분비의 공격들을 요리조리 피하면서 조명의 몸은 하늘 높이 솟구쳤다.
때마침 조명과 함께 마지막 차례로 워프 게이트에 진입하던 ‘대표자’가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빠르게 발광하는 그의 몸에서 조명은 기분 좋은 한마디를 들을 수 있었다.
[헬 게이트 구역 이탈, 카운트. 5, 4, 3, 2, 1…….]성난 괴물들을 지상에 남겨둔 채 조명은 마침내 불쾌하기 짝이 없는 막에 머리부터 부딪쳤다.
마치 얼굴만 이용해 억지로 포장지를 뚫는 것처럼, 제트 팩의 엔진이 다시 한 번 과부하 상태에 빠질 만큼 조명의 몸은 게이트를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다.
[구역 이탈 성공. 지구에 진입했습니다.]“하하……!”
얻은 거라곤 상처밖에 없는 최악의 임무였다.
이글거리는 불길의 구름을 헤쳐 나온 조명의 몸은 순식간에 1,000m의 고도로 올라갔다.
그러더니 화표면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중국 해양 플랜트 근처에서 정박하고 있는 자신의 보금자리를 향해 나아갔다.
[이미 기절했습니까?]혼자였다면 절대로 해낼 수 없었을 임무. 믿고 따라와 준 안전 모드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그는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으리라.
이동식 해양 플랜트를 향해 날아가는 사이, 안전 모드는 제트 팩의 출력을 유지해 둔 상태로 스스로를 리부트했다.
[헬 다이버 서포트 시스템 온라인. 바디 캠에 녹화된 열 시간 47분가량의 녹화 기록 분석 완료. 해당 자료에 특급 기밀 등급을 부여.] [AI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에 해당 자료를 등록. 헬 다이버 박조명에 대한 등급 재조정 심사를 요청.] [등급 재조정 확인.] [루키(Rookie)에서 익스플로러(Explorer) 등급으로 상향 조정 완료.]* * *
“너, 진짜 괜찮냐?”
“괜찮다니까 그러네.”
이동식 해양 플랜트의 핫 플레이스라 할 수 있는 곳. 자영업자나 기업의 프렌차이즈 음식점이 몰려들어 먹자골목을 형성한 거리에 네 명의 남녀가 들어섰다.
“아니, 너 일주일 동안 기절해 있었다니까? 우리가 그때 얼마나 걱정한 줄 아냐?”
“창환이 말이 맞아. 지석이나 너라면 쟤랑 다르게 어떻게든 살아남을 거라고 믿고 있지만, 열 시간이 넘어서야 복귀했잖아.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로.”
지윤이 근처에 푸드 트럭에서 구입한 과일 음료와 와플을 양손에 든 채 지적했다.
후보생 시절에는 달거나 짠 음식들은 입에 대지도 않더니, 헬 다이버가 되면서 허리띠를 풀어헤친 사람마냥 이것저것 먹기 시작한 그녀였다.
정작 조명은 일행들의 걱정 반, 의심 반 섞인 잔소리가 지겨워 태클 걸 기분도 들지 않았지만.
“아니, 뭐, 기억나는 게 있어야지. 분명 잠화하고 나서 이상한 우주 공간에 진입한 것까지는 기억하는데… 그 이후부턴 기억이 없더라고. 내가 거기서 뭘 했는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데 뭘 어떻게 설명해?”
“그때의 일을 설명 못하니까 더욱 병원에 있어야지. 그때의 기억만 통째로 증발해 버렸잖아. 뇌에 문제 있는 거 아냐?”
“정밀 검사만 세 번을 받았어, 세 번을. 의무관님도 멀쩡하다고 말해주셨잖아. 자고로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이 있으니, 내 정신도 건강하다고 봐야지.”
괴팍한 논리를 들이밀자, 어쩔 수 없다며 지윤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일주일 전, 홀로 좌표에서 이탈한 조명을 두고 세 사람이 먼저 귀환할 수밖에 없던 이유는, 잠정적으로 그의 처분을 ‘실종 사망’으로 결론지었기 때문이다.
연락은 두절된데다 올바른 좌표에서 몇 시간이나 기다렸지만 조명이 끝내 나타나질 않은 것이다.
결국 복귀한 세 명은 설비 담당관에게 그의 실종을 다급히 보고했지만, 돌아온 대답이 실로 가관이었다.
“박조명 다이버와 너희들은 다르다. 그러니 잠화 좌표도 다를 수밖에.”
그 말과 함께 대기 명령이 내려져, 결국 세 사람은 손가락이나 빨며 조명이 돌아오는 것을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임무가 시작된 지 열 시간이 조금 넘어 돌아온 조명은 너덜너덜한 상태로 의무대에 실려 갔다.
같은 1팀임에도 면회가 불가능해, 다시 1주일이나 기다린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의식을 되찾은 지 하루도 안 된 인간이 ‘나는 멀쩡하다, 고로 존재한다’를 떠벌리고 있으니, 기가 찰 수밖에 없었다.
“역시 뇌 절제 수술을 당한 게 아닐까? 통제관들이 좀 수상한 게 아니잖아.”
“이상한 말 좀 하지 마. 그때의 일을 기억 못하는 거 빼면 평소랑 다를 게 없잖아.”
“하지만 그만한 부상을 입은데다 기억까지 잃었다는 건 헬 게이트 내에서 큰 사고를 겪었다는 거겠지. 그리고 통제관들은 우리에게 그걸 알려줄 생각이 없는 눈치다. 수상한 건 사실이야.”
지석이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날카롭게 핵심을 찌르자,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통제관들은 조명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눈치지만, 이상하리만치 그들에게 공유해 주진 않았다. 오히려 조명의 얘기를 꺼내면 노골적으로 불편해하는 태도를 보였다.
“생각해 보면 진짜 이상해. 그 천사 같은 의무관도 어떻게든 면회 한 번 해볼 수 없겠냐고 했더니, 분위기가 확 바뀌었잖아?”
“그건… 그랬지. 좀 무서웠어.”
이 자리에 없는 형찬도 사업 파트너의 상태를 꼭 좀 확인해 보고 싶다며 의무대를 찾았다.
하지만 문전박대를 당한 것은 세 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조명을 단순한 돈벌이 수단 취급하면 따끔한 불주사를 놔주겠다며 으름장을 놓았다나 어쨌다나.
“저것 봐. 사제 음식에 미쳐서 눈 돌아갔잖아. 저런 건 평소랑 다를 게 없는데…….”
창환이 가리킨 곳에는 동해에서 갓 건져 올린 신선한 생선들로 만든 초밥이 자랑인 가게가 있었다. 그리고 가게의 창유리에 거머리처럼 들러붙어 초밥 메뉴를 노려보는 조명은 마치 굶주린 하이에나와도 같았다.
“가만 보면 촌놈 같다고 해야 하나… 싼 티가 난다고 해야 하나. 후보생 시절부터 서민 기준에서 비싸고 고급진 음식에 유독 관심이 많아 보였지.”
“특히 고기에 상당한 집착을 보였다. 그래서 종종 내 고기를 뺏어 먹곤 했다.”
창환과 지석의 말을 못 믿겠다는 듯 지윤은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항상 먼저 가벼운 식사를 끝내고 식당을 나선 그녀라 조명의 식성을 잘 몰랐던 것이다.
지금의 그녀는 의무대에만 처박혀 있다가 겨우 눈을 뜬 조명이 자극 강한 바깥 음식을 찾고 있는 것이라고만 여겼다.
하지만 조명은 언제나 항상 이런 것을 원했다.
바깥에 있을 땐 항상 혼자 맛없고 싼 식사를 했는데, 지금은 식사도, 임무도 함께할 동료들이 있지 않은가.
“야! 초밥 먹자!!”
다만… 팀원들은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