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l Divers RAW novel - Chapter 75
헬 다이버즈 074화
74화
“이 결과를 가지고 돌아간다면, 박사님께서도 기뻐하시겠어.”
보노아르 주코브.
세계에서 가장 빨리 최고 심도 기록을 세운 나라이자, 가장 빠르게 헬 게이트에 적응한 국가인 러시아의 엘리트 헬 다이버 중 한 명.
주변 사람들은 다들 그를 러시아의 수많은 별들 중 한 명이며, 타국의 헬 다이버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영웅이라며 추켜세워 준다.
실제로 러시아는 중국과 달리 국가의 힘으로 개인을 억압해서 성과를 따내기보단, 국가의 힘으로 개인을 적극 지원해서 성과를 따내는 걸 좋아했다.
문화, 스포츠, 산업, 각종 연구 등등 특출 난 자들이 있으면 국가의 힘을 내세워 다소 겁을 줄지언정, 그들이 러시아를 떠날 수 없게끔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보노아르 또한 그런 부류 중 하나였다.
한창 유망주로 각광받던 젊은 헬 다이버가 뛰어난 생명공학자와 손을 잡은 결과, 러시아 정부는 희대의 미스터리로 남겨진 심도 200m 구간에서 하나의 프로젝트를 진행할 것을 명령했다.
프로젝트명은 ‘불로불사’.
과거, 중국의 진시황제가 그토록 찾아 헤맸다던 불로초를 찾을 수 없다면, 차라리 직접 만들어내라는 역발상에서 시작된 프로젝트였다.
러시아는 미국을 뛰어넘고 싶어 한다. 과거의 소련 시절부터 현대의 러시아에 이르기까지, 오직 미국이란 나라를 넘어서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들을 해왔던가.
헬 게이트의 등장으로 발빠르게 노를 젓기 시작한 러시아는 금세 G2의 자리를 되찾았지만, 여전히 불만스러웠다.
위대한 러시아!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는 만큼,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국가로 발돋움하고 싶은 것은 당연지사.
경제력이면 경제력, 군사력이면 군사력, 심지어 진보된 기술력까지 두루 갖춘 미국을 뛰어넘기 위해서 러시아는 마의 구간이라 불리는 심도 200m를 실험장으로 삼은 것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런 광경은 아니었지.’
처음 학회에 보고된 심도 200m 구간은 수많은 맹수형 괴생명체들이 살고 있던 어두컴컴한 대자연이었다.
하지만 러시아가 대부분의 헬 다이버들을 심도 200m 구간에 집중 투입하면서 괴생명체들을 쫓아냈다. 절멸시킬 수는 없으니, 각종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괴생명체들이 살 수 없는 환경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것이 바로 숲 전체의 산성화였다.
얼마나 많은 실험들이 진행되었는지는 프로젝트의 주도자인 보노아르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그저 소련 시절부터 거슬러 올라간 온갖 흉악한 연구들이 이 지역에 모조리 쏟아졌다는 것 정도만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어찌 됐든 자신은 연구를 완성시키기만 하면 되고, 국가에선 그 공로를 인정해 줄 테니까. 다소의 ‘희생’ 정도는 위대한 연구 결과에 자연스럽게 잊혀질 것이다.
지금 눈앞에서 소실되고 있는 사다유키 미나미처럼.
“아, 아아…….”
사다유키 미나미는 헬멧이 벗겨진 채 얼굴부터 녹아 들어가고 있었다.
그녀를 천천히 녹이면서 집어삼키고 있는 존재가 그런 방식을 매우 즐기기 때문이다.
수많은 인간들을 흡수하고, 그렇게 인간의 형태로 진화하기 시작한 식물.
이제 곧 수확을 앞둔 그것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나머지, 보노아르는 흡족한 얼굴로 통신 장비의 송출 신호를 조정했다.
* * *
“이걸로 벌써 몇 번째지?”
[총 30회의 탐색 작업에서 12회의 발견에 성공했습니다.]“…….”
조명은 바오밥나무처럼 우뚝 솟은 거대한 나무 기둥을 전기톱으로 갈아버렸다.
이상할 정도로 볼록하게 튀어나온 곳을 직사각형의 틀을 만들어 베어낸 뒤, 삽으로 파편을 긁어내자, 예상한 것이 튀어나왔다.
사실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예상이 맞아떨어질 때마다 조명은 역겨움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런 낯선 장소에서 자신이 동네 바둑이처럼 열심히 헤집고 다닌 결과가 수년 전에 사망한 것이라 추정되는 자들의 구형 슈트라니.
시체는커녕 혈흔조차 남아 있지 않은 것들뿐이지만, 모두 슈트의 산소 공급용 노즐이 해제되어 있거나, 헬멧의 바이저가 파괴되어 있었다.
식물이 슈트의 내부로 침투한 뒤, 그대로 산성액을 슈트에 꽉꽉 채워 넣어 인간의 몸을 그대로 녹여 버린 것이다. 그들이 살아 있었는지, 아니면 죽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구형 슈트에는 최신형 AI도, 오랜 기간 동안 데이터를 온전히 보존해 주는 대단한 바디 캠도 없었다. 그저 ‘이곳에서 어떠한 일을 당했다’라는 것만 추측할 수 있을 뿐.
“심도 200m 구간은 굉장히 넓어. 우리가 탐험해 본 건 새 발의 피 수준도 안 되겠지. 그런데… 고작 그 정도의 좁은 탐험 지역에서 이만한 수의 피해자들이 발견됐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96%의 확률로 이곳에서 ‘실험’이 있었을 것이라 추정됩니다.]“…근거는?”
[우선 지금까지 발견한 모든 피해자들의 슈트에 무장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그 점은 조명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다른 장소도 아니고, 심도 200m 구간에 내려오는 건데 변변찮은 무장 하나 없이 내려온다?
차라리 ‘날 죽여줍쇼’ 하고 맨몸으로 헬 게이트에 뛰어드는 게 더 낫다.
“하지만 순수하게 작업만을 위해서 내려보냈을 가능성도 있어. 지켜주는 사람 따로, 작업하는 사람 따로였다면 옛날 방식에 딱 맞지 않아?”
[그렇다면 더더욱 이상합니다. 이만한 수의 작업자들을 지키기 위해선 당연히 그에 걸맞은 수의 보호자들이 존재해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발견한 이들 중 보호자라 추정되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그도 그랬다.
만약 격렬한 전투가 있고, 작업자들이 그 전투에 휘말렸다면 당연히 보호자들이 적극적으로 지키기 위해 나섰을 터. 그 과정에서 보호자들이 단 한 명도 당하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 있나?
아니, 어쩌면 보호자 따윈 처음부터 없었을지도 모른다고 조명은 생각했다.
보호자들이 제대로 작업자들을 지켜주었다면, 이만한 수의 사상자가 생기기 전에 이미 후퇴(탈출)했을 것 아닌가.
보호자가 있었다면 이만한 수의 작업자들이 피해를 당한 것은 말이 안 되고, 반대로 보호자가 없었다고 해도 이만한 수의 작업자들만이 이곳에 있던 이유가 말이 안 된다.
보호자 없이 작업자들만 내려보냈을 리는 만무할 테니, 결국 안전 모드가 언급한 대로 모종의 실험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가 된다.
“게다가 우리가 발견한 건 전부 러시아 구형 모델이야. 다른 지역에서 더 찾아보면 다른 나라의 모델이 나올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이건 이상해.”
생각하기도 싫지만, 조명은 점점 커지는 확신에 인상을 찡그렸다.
아이러니하게도 러시아는 티타늄 합금을 많이 사용하는 나라에 속한다. 물론 군용 장비를 만드는 데 주로 사용하지만, 헬 게이트가 열린 당시라면 군용 장비 대신 헬 다이버 전용 장비에 기술과 자원을 쏟아부었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사람까지 쏟아부은 것이 가장 큰 문제이지만.
“내가 만약 이곳에서 발견한 것들의 녹화 자료를 가지고 올라가면 어떻게 될까?”
[이곳에서 발견된 모든 피해자들은 ‘사고사’로 분류되어 있기 때문에 다이버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입니다. 설령 러시아의 인체 실험 의혹을 주장한다고 한들, 그것을 뒷받침할 핵심적인 증거가 없습니다.]“이런 걸로는 핵심적인 증거가 안 된단 말이야? 사람이, 그것도 러시아 쪽의 다이버들이 이렇게나 죽어 있는데?!”
[헬 게이트란 그런 곳입니다. 헬 게이트에 잠화한 다이버가 죽는 것은 당연하며, 어떠한 방식으로 죽었다고 한들 ‘타살’이라는 증거가 없다면 그것은 사고사입니다.]조명은 라이프 라인에 구조 신호를 보내려다 말았다.
이대로 올라가 봐야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뭘 주장한다고 한들 저쪽에선 입 싹 닫고 ‘우린 헬 게이트에 많은 투자를 했다. 우리 측 피해자(사고자)들이 많은 건 당연한 것 아닌가’라고 시치미를 뗄 것이 빤했다.
게다가…….
‘난 여기서 아무것도 얻지 못했어. 이 기분 나쁜 광경을 보고, 말도 안 되는 것들을 기록에만 담아뒀을 뿐. 여기까지 내려와서 내가 얻은 거라곤 극심한 스트레스뿐이야.’
이러면 수지타산이 안 맞는다.
기분이 더러운 건 더러운 거고, 빌어먹을 인간들 때문에 처음부터 아무것도 얻지 못할 장소에 잠화해서 개고생만 하다가 올라간다?
조명의 입장에선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의 신조는 ‘일한 만큼 받자’니까.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게 없다면, 적어도 날 고생시킨 놈들을 좆 되게 만들고 싶어.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핵심적인 증거를 수집하는 것이 우선순위입니다. 그다음 헬 게이트를 벗어나 세간에 그 내용들을 폭로해 버리면 상대를 ‘페니스’로 만들어 버릴 수 있습니다.]좋다. 상대방을 페니스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니. 이보다 더 기분 좋은 일이 어디 있겠나.
하지만 그것만으론 임팩트가 부족했다.
굳이 폭로해 봐야 저쪽에서 언론플레이를 해버리면 쉽게 사그라들 것이 빤했다.
미국 다음 가는 초강대국이 고작 헬 다이버 한 명의 폭로에 전복된다?
차라리 동네 바둑이가 대통령이 되는 게 더 현실성이 있을 것이다.
“폭로보다 좀 더 괜찮은 방법… 예를 들면 저쪽이 절대로 이득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방법이 좋겠어.”
[그렇다면 그들의 실험 자료를 빼돌리거나, 실험 자체를 무용지물로 만들면 될 것입니다.]“그렇지! 굳이 내가 세간에 이 사건을 폭로해서 귀찮게 진흙탕 싸움을 하지 않더라도 상대방을 엿 먹일 수 있겠지.”
아무것도 가질 수 없다면, 불합리하게 떠안아야만 했던 이 스트레스라도 풀어야겠다.
그렇게 다짐한 조명은 방향을 북쪽으로 잡고 미친 듯이 내달렸다. 도중에 방해하는 식물들은 슈트의 출력을 높여 문자 그대로 파괴하면서 달려 나갔다.
처음엔 슈트의 에너지를 아끼려 소극적으로 행동했지만, 이제는 거리낄 것이 없었다.
‘보노아르, 그 새끼가 범인이다!!’
앞뒤 다 잘라 먹은 추리지만, 조명은 확신할 수 있었다.
보노아르가 챙겨 온 장비들. 그건 전부 통신용 혹은 감시용 장비들이었다.
생각해 보면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
통신용 장비들을 이용해서 혹시라도 흩어질 가능성이 있는 팀원들을 한곳으로 모으는 데 사용했다 치자. 그다음은?
모든 팀원들이 모이는 순간, 쓸모없는 짐짝으로 전락하는 것이 통신용 장비다. 이곳에선 외부와 통신을 취할 수도 없으니까.
하지만 보노아르는 굳이 설치를 해야 할 만큼 커다란 통신용 장비를 가져왔다.
마치 처음부터 팀원들이 뿔뿔이 흩어질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러시아 측 낙하대에서 각각의 잠화 좌표를 조금씩 수정했겠지. 그래서 사다유키와 샤오펑이 멀찍이 떨어진 곳에 낙하하게 된 거야.’
조명만 보노아르와 가까운 장소에 낙하하게 된 것 또한 의도된 것일지도 모른다.
조명과 먼저 합류하는 것으로 보노아르는 통신용 장비를 사용해 팀원들의 소재를 파악한다는 명분을 세울 수 있었다. 또한 자신은 수상하지 않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조명을 증인으로 확보한 것이다.
‘그래서 계속 함께 다녀야 한다고 말했던 거야. 혹시라도 추후에 문제가 생기면 나를 증인으로 삼아서 자신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잡아뗄 생각이었겠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헤어지기 직전, 그가 ‘라이트를 꼭 켜라’고 말한 것은 조명이 죽기를 원했다는 말이다.
자신의 증인이 되어줄 수 없다면, 차라리 이곳에서 사고사를 당해 증거와 함께 사라지라는 의도였던 셈이다.
이곳의 식물들은 강렬한 불빛에 반응해 공격을 해오는 만큼, 멋모르고 숲으로 들어간 조명이 라이트를 켰더라면 그가 의도한 대로 되었을 것이다.
‘역겨운 새끼!’
이제야 모든 의문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흐트러져 있던 퍼즐들이 하나둘씩 제자리를 찾아가면서 겨우 그림 하나가 완성된 것이다.
‘소실자 사태는 러시아 측이 만들어낸 인체 실험의 결과였어!’
지금은 소실자 사태의 조사 건 때문에 심도 200m 구간에 잠화한 다이버는 자신들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즉, 원래는 수많은 타국의 다이버들 역시 이 구간에 쉴 새 없이 잠화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러시아 측을 손을 써뒀을 것이다. 특정 타깃을 실험 대상으로 삼아 식물의 먹이로 던져 주는 일 같은 것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건 불가능하다. 이 숲은 빛을 쬐는 즉시 반응해서 상대를 덮치니까.
특정 타깃만을 먹잇감으로 삼는, 그런 편한 설정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어쩌면…….’
어쩌면 그런 편한 설정이 없더라도, 저들은 이미 자신들이 원하는 상대만을 식물에게 먹이로 던져 줄 수 있는 기술을 확보한 게 아닐까?
그렇다면 지금껏 수많은 다이버들이 이곳에서 탐험했다고 해도 전체 수에 비해 소실자 사태의 피해자 수가 적은 것이 납득이 된다.
“뜬금없는 질문이긴 한데, 인간의 힘으로 식물을 조종할 수 있을까?”
“그럼…….”
[하지만 ‘기술’이라면 존재할 것입니다. 인간은 그러한 기술이 확립된 시절부터 특정 생물의 유전자를 건드리는 것으로 다양한 실험을 진행해 왔습니다.]그 정도라면 조명도 알고 있었다. 가장 쉬운 예로 요즘 시대의 맛 좋고 수확량도 많은 농작물들이 바로 그런 것들이니까. 현대의 농작물과 과거의 농작물을 비교해 보면 굉장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헬 게이트의 출현으로 인류의 과학기술은 한층 더 진보했습니다. 희귀 자원과 각종 샘플, 연구 자료 등의 확보로 대연구시대의 막이 올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일부 학계에선 현 시대를 과학기술의 황금기라고도 주장합니다.]“즉, 가능하긴 하다는 거야?”
[못할 건 없습니다. 예를 들어 유전자를 조작한 식물에 특별한 전기신호나 진동, 혹은 발광 패턴을 이용해 간단한 명령을 내리고, 그것을 수행하게끔 할 수도 있을 겁니다. 어찌 됐든 식물 또한 생명체이기에.]“그거면 충분해.”
조명은 다리에 좀 더 힘을 불어넣었다.
지면을 거칠게 박차고 뛰어나가는 그의 속도는 이미 프로 육상 선수를 가볍게 상회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