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l Divers RAW novel - Chapter 78
헬 다이버즈 077화
77화
[다이버, 본 안전 모드가 만약 조선 시대의 충신이었다면, 다이버에게 이렇게 말했을 겁니다.]“말해봐.”
말랑말랑한 젤리 같은 구슬을 씹으며 조명이 허락하자, 안전 모드는 즉시 음성을 변조했다. 사극풍 노인네의 목소리였다.
[님, 도르신?]“곤장 맞기 딱 좋네.”
[진정한 충신이었다면 사약을 받거나 목이 잘리는 그 순간까지도 말했을 겁니다.]꿀꺽.
씹다 씹다 결국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아 구슬을 삼켜 버린 조명은 먹기 전과 별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결국 조명이 구슬을 삼켜 버린 것을 확인한 안전 모드는 ‘이제 본 안전 모드에게 책임 소재는 없습니다’라고 혼잣말을 내뱉었다.
“야, 야, 네가 무슨 쫄보냐? 그런 걸로 걱정하게. 나 봐. 아무 일도 없잖아? 뭔가 대단한 거였으면 벌써 무슨 일이 생겼겠지.”
[하지만 인체에 유해한 물건일 가능성이 다분했습니다. 본래 군이 끼어든 ‘실험’이란 건 결국 인간에게 해로운 것을 만들어내기 위한 것입니다.]그 말에는 조명도 쉽게 반박할 수 없었다.
군이 어디 인간 사회에 편의성을 가져다주겠답시고 이런 끔찍한 실험을 자행하겠는가. 천부당만부당한 말씀.
군이 엮여 있는 실험이란 건 대개 살상 무기나, 살상 무기를 인간 대신 사용해 줄 기계다. 생명공학으로 파고들면 생화학 무기가 만들어지는 대참사가 벌어지기도 한다.
“그렇다고 아깝게 버리고 갈 순 없잖아.”
[슈트에 보관해 두었더라면 어떻게든 바깥으로 빼낼 수는 있었을 겁니다. 통제관의 호위도 있지 않았습니까?]“놈이 말했잖아, 안전 담당관들이 낙하대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지금쯤 그놈이 떡이 되어 올라갔을 테니, AI 칩이 빠져 있다는 것도 눈치챘겠지. 그럼 놈들은 일이 잘못됐다는 걸 알고 즉각 생존자들을 조사하려 들 거야. 나도 예외는 아니겠지.”
[그 과정에서 발각될 우려가 있으니 그냥 섭취하셨다는 의미입니까?]“맞아. 난 일단 독립 탐사대 소속이니, 내 개인 물품들을 빼앗을 순 없겠지. 통제관이 버젓이 지켜보고 있는데 지들이 어쩔 거야. 하지만 몸 수색 정도라면 안전 절차 운운하면서 반강제로 시도하려 들겠지. 그러니까 그냥 먹은 거라고.”
여기에 버려두고 가긴 너무 아깝다.
그렇다고 파괴하자니, 그것 역시 아깝다.
당연하게도 놈들에게 넘겨줄 수는 없으니, 남은 선택지는 결국 조명이 직접 섭취하는 것뿐이었다. 딱 봐도 먹기 좋은 구슬 모양이니까.
“이제 잔소리는 그만하고, 우리도 올라가자. 소실자 사태는 러시아가 심도 200m 구간에서 벌인 끔찍한 인체 실험이었다는 전말이 밝혀졌어. 바디 캠에 녹화된 자료와 회수한 AI 칩에서 골라낸 자료들은 모두 정리해서 미국에 보내 버리면 돼. 그럼 힘세고 강한 미국 형님이 알아서 해주시겠지.”
헬 게이트의 등장으로 러시아가 당당히 G2의 자리를 탈환했다고는 하나, 여전히 세계 최강국은 미국이었다.
압도적인 경제력과 군사력, 본국에서 동원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자원과 우수한 인재들까지… 부족한 걸 찾는 게 더 힘든 나라가 바로 미국이다.
그런 미국이 국제사회가 보는 앞에서 증거를 들고 강하게 압박한다면, 러시아도 쥐 죽은 듯이 찌그러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조명은 자신의 라이프 라인에도 전류를 흘려보내 곧바로 탈출했다.
항상 느끼면서도 이제는 슬슬 익숙해지기 시작한, 막을 뚫는 감각. 그 뒤에 확 달라지는 풍경과 열기를 느꼈다.
이내 헬 게이트의 화표면에서 빠르게 솟구친 조명은 러시아의 낙하대에 무사히 오를 수 있었다.
장장 열한 시간 20분 만의 귀환이었다.
이대로 해양 플랜트에 돌아가면 땀내 풀풀 풍기는 몸을 냉탕에 던져 넣어 수영을 즐길 생각이었다.
하지만 세상만사가 언제나 쉽게 풀리진 않는다.
“엄밀히 따지고 보면, 나도 피해자 아닌가? 하마터면 저 안에서 죽을 뻔했는데.”
[백번 맞는 말씀입니다만, 저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끌려 올라오자마자 눈앞에 총구 여러 개가 보였다. 방화복을 껴입은 러시아 군인들이 조명에게 총을 겨눈 채 ‘두 손을 머리 뒤에 올려라!’와 같은 말을 지껄이고 있었다.
다이버도 아닌 일반인 상대쯤이야 슈트를 착용한 조명에게 있어서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들 뒤에 대기하고 있는 또 다른 러시아 다이버들이 눈에 밟혔다.
보노아르가 임무에 실패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마자 즉각 동원된 다이버들인 듯했다.
“내가 그쪽의 일방적인 체포에 응해야 할 이유가 있나? 난 어느 국가에도 간섭받지 않는 독립 탐사대 소속 헬 다이버인데?”
“너는 작전에 함께 투입된 헬 다이버들을 습격한 혐의를 받고 있다. 순순히 조사에 응해주길 바란다. 그렇지 않으면 무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다. 이는 국제법상으로도 인정되는 사안이다.”
뒤쪽에서 대기 중이던 한 다이버가 나서며 제 좋을 대로 떠들었다.
음성 변조 시스템을 사용하고 있지만, 왜소한 체구나 몸매로 봐서 또래의 여성 헬 다이버임을 알 수 있었다.
“그쪽이랑 비슷한 또래의 여자애가 산성액에 반쯤 녹아서 죽은 걸 봤어.”
“…….”
“사다유키 미나미라고, 앞날이 아주 창창할 것 같은 여자애였는데, 말같지도 않은 국제법이나 떠들어 대는 좆같은 집단이 벌인 좆같은 실험에 휘말린 안타까운 희생자였지.”
“쓸데없는 언행은 자제해 주길 바란다. 병사들은 뭘 하고 있지? 어서 저자를 포박해.”
“포박은 내가 아니라 그쪽들이 당해야 하는 것 아닌가? 아무렇지도 않게 죄 없는 사람들 죽여놓고 애꿎은 나한테 뒤집어씌울 생각인 것 같은데, 난 그렇게 호락호락한 놈이 아니거든.”
파일 벙커는 망가져서 사용할 수 없지만, 아직 전기톱이 남아 있었다.
일부러 전기톱을 작동시켜서 고막이 찢어질 것 같은 소음을 발생시키니, 군인들이 지레 겁을 먹고 몇 걸음 물러났다.
저들도 일반인들인 이상 슈트를 착용한 다이버가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알고 있는 것이다.
“멍청하긴! 저자는 혼자야. 게다가 피로가 쌓여 있어서 그리 대단한 움직임을 보이지도 못할 거라고!”
“왜 애꿎은 부하들을 윽박지르냐? 꼬우면 네가 직접 나와. 난 희대의 남녀 평등주의자라 여자를 상대로도 코브라 트위스트 걸 수 있거든?”
팔다리를 흐느적흐느적 흔들어주자 열깨나 받았는지 녀석이 성큼 앞으로 걸어 나왔다.
국제적 마찰을 빚을 수도 있겠지만, 일단 이 자료를 무사히 미국으로 보내기만 한다면, 러시아의 국가적 갑질을 막을 수는 있다.
‘그럼 이곳에서 약간의 분란이 발생하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우선 저 잘난 듯이 떠들어 대는 주둥이부터 전기톱으로 썰어버리려던 그때였다.
콰가가가가가!
일촉즉발의 대치 상태에서 갑자기 격납고의 거대한 문이 박살 났다.
소수의 작업자들이 따로 드나드는 출입용 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격납고 문을 파괴하며 걸어 나오는 존재가 있었다.
후욱, 후욱.
익숙한 숨소리를 내뱉으며, 보기만 해도 답답함이 느껴지는 방호복 차림의 통제관…….
5882였다.
“재미있군요.”
5882는 무거워 보이는 산소통을 짊어진 채 천천히 낙하대 갑판 위를 걸었다. 그가 한 걸음씩 움직일 때마다 뚜벅뚜벅, 크게 울려 퍼지는 발소리엔 모든 이들이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조명은 갑작스럽게 서프라이즈 등장을 한 5882보다 격납고 내부의 모습이 더 눈에 들어왔다.
안쪽에선 요란스럽게 고함치고 있는 러시아 군 장교들과 식은땀을 흘리며 어떻게든 중재해 보려는 플랜트 키퍼, 그리고 탁자 위에 올라선 11500이 있었다.
‘대체 저 양반은 탁자 위에 올라가서 뭘 하는 거지?’
자세히 들여다보니 탁자 위에 올라간 11500은 러시아 측에서 준비한 각종 서류들을 발로 차서 마구 흐트러뜨리고 있었다.
화가 나도 단단히 난 듯했는데, 화를 내는 방식이 조금 귀여웠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 5882가 러시아 측 헬 다이버들에게 접근했다. 그러고는 자신의 양옆에서 어쩔 줄 몰라 하던 두 남녀의 목덜미를 재빨리 움켜쥐더니…….
“지금 누구에게 총을 겨눈 겁니까?”
“커, 커허어어!”
“끄흑…….”
슈트를 착용한 헬 다이버 둘을 아무렇지도 않게 제압했다.
일반인의 시선에선 마치 어른이 갓난아기 둘을 잡고 있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격납고에서 한창 회의를 하고 있던 도중에 슬금슬금 움직인다 싶더니, 박조명 헬 다이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까?”
“우, 우린 상층부에서 명령을 받았을 뿐입니다! 그에게 보노아르 주코브의 습격 혐의가 있으니, 조사를 위해서 데려오라는…….”
“그런 것치곤 무장을 갖춘 군인 다섯과 헬 다이버 셋의 조합은 너무 이상하지 않습니까? 마치 그가 반항하려 들면 치명상을 입혀서라도 강제로 끌고 가려는 것처럼.”
“혐의가 있는 이상 안전을 위해서… 큭!”
“제 앞에서 같잖은 소리를 지껄이지 마십시오, 버러지.”
조명은 지금 이 순간, 양손에 팝콘과 콜라가 없다는 점이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팝콘과 콜라란 있는 자들의 사치품이라고 생각했지만, 설령 과거의 자신이었다고 해도 당당히 지를 만큼 팝콘과 콜라가 절실했다.
“이런 감성을 두고 아침 드라마 감성이라고 하는 거야. 주인공이 위기에 처했을 때 조력자가 나타나면서 싹 다 처발라 버리는 거지.”
[인간들의 취향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네가 뭘 몰라서 그래. 여주인공 숙자가 시어머니인 말숙 여사한테 혼나고 있으면, 남편인 승권 씨가 무서운 얼굴로 달려 들어와서 정색을 하곤… ‘어머니! 제발 그만 좀 하세요!!’라고 호통치는 거지. 흔한 래퍼토리인데, 그게 또 쾌감이 있어.”
조명의 인생에서 문화 콘텐츠란 곧 TV이기에, 남자들은 잘 보지 않는 국산 드라마도 심심찮게 봤다.
거기서 느껴지는 묘한 카타르시스란… 직접 보지 않은 사람들은 느끼기 힘든 것이었다.
“여기에 버러지들은 필요 없습니다.”
“그래. 저렇게 말하면서 이제 기절시킨 다음 쿨하게 한쪽에 던져 버리는…….”
“사라지십시오.”
순간, 화염이 치솟았다.
바다처럼 푸르고, 얼음처럼 차가우면서도, 어딘가 친근하고 익숙한 느낌의 푸른 불꽃이 두 명의 다이버를 집어삼켰다.
“……?”
순식간에 두 사람이 불꽃에 타 사라지는 광경은, 한 줌의 재가 되었다는 표현으로도 어딘가 부족했다.
문자 그대로 소멸했다.
재조차 남기지 않고 소멸해 버린 그들은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은 것처럼 깔끔하게 모습을 감췄다.
그 적나라한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군인들은 모세의 기적처럼 좌우로 넓게 퍼졌다. 그 중심에 선 조명과 홀로 남은 여성 헬 다이버만이 5882의 도착을 기다렸다.
천천히, 하지만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도달한 5882는 조명의 앞에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던 여성에게 넌지시 말했다.
“방금 제 말을 듣지 못했습니까?”
“……?”
“여기에 버러지는 필요 없다고 했습니다.”
빠악!
무언가 두들기는 소리가 난다 싶더니, 조명의 앞에 서 있던 그녀의 헬멧이 찌그러지는 것과 동시에 옆으로 날아갔다. 몇 걸음만 잘못 내디뎌도 떨어질 우려가 있는 낙하대에서 굉장히 멀리 튕겨 나갔다.
그녀는 라이프 라인도 착용하지 않은 채 새된 비명을 내지르며 화표면의 불길 속으로 떨어졌다.
[이런 장면도 드라마에서 나옵니까?]“아니. 하지만 나오기만 하면 시청률 30%는 가볍게 찍을걸?”
조명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5882의 안내를 받아 무사히 격납고에 들어갈 수 있었다.
둘이 격납고에 들어갔을 즈음, 사태는 이미 진정되어 11500은 팔짱을 낀 채 조명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쪽은 또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시는 건지, 조명은 알 길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