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l Divers RAW novel - Chapter 89
헬 다이버즈 088화
88화
조명이 상황을 관망하는 사이에도 시간은 흐르고 또 흘렀다.
슬슬 일일 행사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도시 방위군의 훈련 시설 내부엔 촉수 괴물들의 시체가 나날이 쌓여갔다.
얼마나 많은 촉수 괴물들을 잡아들이고, 그걸 또 우르르 몰려들어서 곤죽으로 만들어 버렸는지 세는 것도 귀찮은 수준이었다.
그나마 알게 된 것이 하나 있다면, 라켄롤의 국민들은 자신들과 같이 지성을 지닌 고등 생명체라 할지라도 ‘종’이 다르다고 판정되면 일단 붙어본다는 점이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소도 지구의 소와 다르게 굉장히 거대하고 어마어마한 근육을 지녔는데, 그런 소라는 종을 정복하고 가축으로 삼은 것도 라켄롤 전투 역사의 사례 중 하나였다.
바다에서 잡히는 물고기들도 본래는 피라냐처럼 식인 어종이었는데, 라켄롤 국민들이 작살 하나만 들고 우르르 바다에 뛰어들어서 정복해 버렸다고 했다. 이후 바다 전체를 양식장으로 삼았다나 어쨌다나.
“모르겠어.”
그래서 모르겠다.
대체 이런 전투 민족이 어떻게 멸망을 피할 수 없었는지, 이런 전투 민족을 멸망시켜 버릴 만큼 적이 얼마나 강대했는지 전혀 모르겠다.
지금껏 잡혀온 촉수 괴물들이 라켄롤 멸망의 주범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그런 것치곤 너무나도 약했다.
덩치는 거대하지만 제대로 된 힘을 사용하지 못했으며, 촉수가 전체적으로 말랑말랑해서 공격을 해도 큰 피해를 주기 어려웠다.
그런 주제에 내구력은 또 어찌나 낮은지, 병사 한 명이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풍선처럼 펑펑 터지는 게 일상다반사였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말이 안 돼. 어린애랑 함께 놔둬도 유해할 것 같지 않은 저런 생물체가 이 미친 작자들을 멸망시켰다니.”
[집단생활을 하는 곤충에 빗대면 어떻습니까? 예를 들어 개미나 벌처럼 모두 같은 종이라 할지라도 다른 체격,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저 괴생명체도 전체 집단에선 최하위에 속하는 약체일지도 모릅니다.]“그렇다면 더더욱 말이 안 돼. 싸움에 미치다 못해 전쟁의 신도 혀를 내두를 만큼 호전적인 양반들이 저 괴생명체의 상위 개체를 아직도 찾지 못했잖아. 찾았다면 벌써 잡아왔겠지.”
[저 괴생명체를 생포하러 나간 자들이 역으로 당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그랬다면 다들 ‘전쟁이다!’ 하면서 뛰쳐나갔겠지. 그런데 그런 분위기도 아니야. 최근엔 훈련이 마음에 든 건지 다들 즐거워 보인다고.”
조명이 근 10일에 달하는 시간 동안 지켜본 결과, 라켄롤 국민에게 빠꾸란 없었다.
1L 대용량 주스는 애새끼들이나 마시는 것이며, 밥상에 고기가 없으면 그건 식사가 아니라 고문이다. 또한 느려 터진 대중교통을 이용하느니 두 다리로 뛰는 게 더 빠르겠다며 건물 위를 휙휙 날아다닌다.
재미있는 건 혹시라도 법을 어기는 불량 시민이 있을 경우, 시민들이 합심하여 그놈을 반 죽여놓는다는 점이다. 뒤늦게 출동한 도시 방위군은 입맛을 다시며 아쉬운 듯이 불량 시민에게 꿀밤을 몇 대 더 때려준다.
이 양반들은 내일 떠오르는 해를 보기 위해 오늘을 사는 것이 아니라, 어제도 살았으니까 오늘도 살겠지, 하는 느낌으로 살고 있었다.
샌드백 신세가 된 촉수 괴물보다 더욱 강한 상위 개체?
그런 놈들이 있었다면 라켄롤 전체가 축제 분위기에 휩싸여 국민 모두가 전쟁 준비에 들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인지, 폭풍전야 같은 분위기는 없었다. 오히려 평소처럼 모두가 자신들의 근육을 뽐내며, 근육에서 뿜어져 나온 열기로 행성 전체의 기온을 올리는 데에 동참하고 있었다.
한창 훈련 중일 터인 마틴과 잠시 헤어져 높은 빌딩의 옥상 위로 올라온 조명은 한없이 푸르기만 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상사의 증언에 따르면, 바로 오늘입니다.]“그래, 오늘 갑작스럽게 멸망이 시작되었다고 들었어. 하지만 주변을 봐. 그 어느 때보다도 평화로워. 어쩌면 상사의 착각이었던 게 아닐까?”
[사실은 멸망이 일어난 시기를 잘못 말해줬다든지, 혹은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매우 천천히 멸망이 진행되었을 수도 있습니다.]이 세계가 뒤틀린 시공간 속에 존재하는 ‘정지된 시간’인 이상, 2급 통제관들의 과오인 것은 확실하다.
정지된 시간 속에서 멸망은 무한하게 반복된다. 라켄롤 국민들의 비참한 죽음은 끝이 없고, 그들은 수많은 멸망을 겪은 후에 또다시 멸망 전으로 되돌아갔다.
조명이 이곳에 오기 전까지 얼마나 많은 멸망을 겪었을지 알 수 없을 만큼.
[이제 어떻게 하실 건가요? 지금 당장이라도 라켄롤 군부의 힘을 이용해 대피선에 많은 사람들을 실어 우주 밖으로 대피시킬 수도 있습니다.]“그러려면 확실한 증거가 필요해. 누구도 이렇게 평화로운 시기에 ‘곧 멸망이 올 테니 대피선에 탑승하세요!’라고 떠들어봤자 안 들어줄 게 빤하잖아.”
그런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으려니, 조명은 자신이 꼭 노아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자신만이 세계의 멸망을 알고 있으며, 멸망으로부터 많은 사람을 구할 방법을 알고 있지만, 정작 누구도 자신의 말을 믿어주지 않을 것이다.
방주를 준비하고, 열심히 마을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방주에 오르길 권한 노아는 끝끝내 그들을 태우지 못했다. 고작 자신의 가족과 암수 한 쌍의 동물들만을 구하는 게 전부였다.
‘지금 내가 열심히 뛰어다니면서 세계 멸망을 예고한다고 한들, 노아와 똑같은 상황을 겪게 될 거야. 세상사가 모두 근육으로 해결될 거라고 굳게 믿고 있는 이 미친 종족을 설득하려면 확실한 증거가 필요해.’
그래서 수도 알앤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을 찾아 옥상 위로 올라왔다.
태양광 충전 패널 덕분에 슈트의 배터리는 항상 만땅이었다. 제트 팩의 연료도 다행히 이곳에서 보급받을 수 있었다. 남은 것은 그저 기다리는 것뿐.
“분명 멸망은 저녁노을이 지기 전이라고 했는데…….”
곧 푸른 하늘이 붉게 물들고 저녁노을이 질 시간이다.
그때, 안전 모드가 조심스럽게 충고를 건넸다.
[다이버, 일전에도 말했지만, ‘뒤틀린 시공간’에서 바디 캠의 녹화는 의미가 없습니다.]“나도 알아. 정지된 시간을 촬영하는 것은 불가능하잖아. 하지만 ‘모션 캡처’라면 할 수 있을 거야.”
[정지된 시간, 그 자체를 촬영할 수는 없지만, 정지된 시간 속에 존재하는 것들의 형틀만 따낸다는 겁니까?]“언뜻 모순적이지만, 불가능하진 않을 거야. 왜냐하면 우린 이미 정지된 시간 안으로 들어왔잖아. 때문에 이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인식할 수 있고, 느낄 수도 있어. 다만, 고정되어 있기에 영원히 같은 시간이 반복될 뿐이지.”
그래서 안전 모드의 센서에 탑재된 기능 중 하나인 모션 캡처를 떠올렸다. 우리가 느끼는 모든 것의 움직임과 형태를 복사해서 데이터로 저장해둔다. 그 자체를 담을 순 없겠지만, 그 자체와 다를 바 없는 것을 하나 더 만들어서 따로 보관해 두는 것이다.
“네 기술이라면 그걸 자체 그래픽으로 재설계할 수 있겠지.”
[복잡하지만… 가능합니다.]쉽게 말하자면, 100% CG 처리다. 실존하는 것이지만, 실제로 담을 수 없는 것을 실존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기술.
조명은 이 세상의 일을 바디 캠으로 녹화하는 대신, 이 상황 전체를 가상의 그래픽으로 재현해 한 편의 영화를 만들 생각이었다.
그리고 모두가 바라 마지않는 멸망이 어느 순간 갑작스럽게 도래했다.
한없이 푸르기만 하던 가을의 하늘은 눈 깜짝할 사이에 시커먼 색으로 변모했다. 따스하게 내리쬐고 있던 햇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평화롭기만 하던 라켄롤은 더 이상 평화롭지 않게 되었다.
“…멸망이 갑작스러웠다는 말이 틀린 게 아니었네.”
[대규모 생체 반응이 확인되었습니다. 센서로 모두 탐지할 수 없을 만큼 대량입니다.]“이 풍경을 복사하는 것에 집중해. 우리가 보여줘야 할 건 적의 세세한 모습이 아니라, 적이 침공한 것으로 이 세계가 어떤 꼴이 되는지야!”
조명이 외치기가 무섭게 하늘에서 시커먼 운석들이 빗방울처럼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벤트 비행을 하는 전투기처럼 검은 연기를 늘어뜨리며 지상을 향해 맹렬한 속도로 돌진했다.
안전 모드의 센서에 잡힌 것만 해도 그 수가 무려 수천 개!
라켄롤의 주요 보급 거점이자 수도인 알앤비를 집어삼키기에는 충분한 수의 운석들이었다.
[운석의 분석을 완료했습니다.]“정체는? 역시 그 약해 빠진 촉수 괴물이야?”
[아닙니다.]“뭣?!”
조명이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되물었으나, 그 직후에 빌딩 근처에 추락한 운석이 충격파를 터뜨리면서 목소리가 묻히고 말았다.
콰르르르르!
도시 방위군이 존재하는 한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거라던 초고층 빌딩들이 도미노처럼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 그중에는 도시 방위군이 거주하고 있던 군 시설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잔해 속에서 몇 명의 군인들이 튀어나오는 게 보였다.
‘근육 마초도 이런 공격에는 살아남을 수 없던 건가…….’
대부분이 충격파에 휩쓸리고, 건물 잔해에 짓눌리며 죽어버렸다.
열정으로 키운 근육은 수천수만 톤이 넘는 건물 잔해를 들어 올릴 수 없었고, 그들이 자랑하던 근성과 전투를 향한 올곧은 마음가짐만으로는 적의 기습에 대응하지 못했다.
조명은 위태로운 초고층 빌딩의 꼭대기에서 한순간에 폭발하고 무너져 내리는 도시의 전경을 내려다보았다.
비명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건 이 종족 고유의 성향 덕분일까. 비명 대신 기합을 내지르며 운석에서 튀어나온 촉수형 괴생명체에게 달려드는 이들이 보였다.
하지만 군이 생포한 촉수 괴물들과는 달리, 타오르는 운석을 알처럼 깨고 나온 촉수 괴물들은 어마어마한 전투력의 차이를 보여주었다.
촉수의 약한 내구력을 보조하기 위해 군데군데 운석 조각들을 갑옷처럼 착용한 것도 모자라, 촉수를 현란하게 휘둘러 인간들을 생포한 뒤, 비틀거나 찢어 죽였다. 후려치기 같은 단조로운 공격도 긴 사거리를 이용할 때나 선보였다.
“조금 다르긴 하지만 그 촉수 괴물이랑 같은 종인 것 같은데, 대체 어디가 다르다는 거야?”
[분석 결과, 저 괴생명체들은 ‘가죽’입니다.]“가죽이라니, 그럼…….”
[체내에 다른 무언가가 존재합니다. 기생체의 한 종류일 것이라 추측됩니다.]그제야 조명은 이 멸망으로부터 살아남은 2급 통제관들이 큰 착각을 했음을 깨달았다.
그들이 라켄롤 멸망 당시에 본 것은 틀림없는 촉수 괴물이지만, 정작 라켄롤을 멸망시킨 것은 촉수 괴물이 아니라 기생체였던 것이다.
[하늘을 보십시오, 다이버.]안전 모드의 말에 조명은 무심코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아직까지도 운석들이 비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는 하늘에는, 어느새 구름 대신 괴이한 무언가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것은 거대한 구멍이었다.
그 어떤 전조도 없었으며, 환경의 변화도 느끼지 못한 찰나의 순간에 하늘 전체를 뒤덮어 버릴 만큼 거대한 구멍이 출현한 것이다.
조명의 배움이 대학생 중간 즈음에 멈춰 있다고는 하나, 그것이 현실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아니, 뒤틀린 시공간 속으로 들어온 내가 할 말은 아니지.’
그 2급 통제관마저도 ‘갑작스러웠다’라는 표현을 쓸 만큼, 조명 역시 거대한 동굴이나 다름없는 하늘의 구멍을 보고 같은 생각을 품었다.
자세히 보면 촉수 괴물을 담은 운석들은 모두 검은 구멍으로부터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벌집을 건드린 것처럼 쉴 틈 없이 운석을 토해내고 있는데, 이대로라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 행성 전체를 집어삼킬 게 분명했다.
“…….”
나름대로의 작은 사명감과 성공에 대한 열망을 품고 헬 게이트에 뛰어든 것이지만, 조명은 삽시간에 평화라는 말이 쏙 들어가 버린 도시의 전경을 보고서 입을 다물었다.
모든 것이 너무나도 빠르게 붕괴되고 있었다.
군인 정신을 강조하던 마틴도 잔해에 깔렸거나, 촉수 괴물들에 의해 당했을 것이다. 마틴의 부모님 역시 농지를 지키다가 화를 피하지 못했을 게 빤했다.
문득, 참을 수 없을 만큼 역겨운 감정이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당장에라도 구토하고 싶은 것을 필사적으로 참으며, 조명은 제트 팩의 엔진에 시동을 걸었다.
“이러려고 여기에 온 건 아니지만,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 게… 참 더러운 기분이야.”
[모션 캡처는 이미 완료했습니다. 서둘러 탈출하십시오.]정지된 세계인 이곳에선 그 누구도 살아남지 못하고, 탈출하지도 못한다. 모두가 죽어버렸기에 과오로 남은 세계가 아닌가.
지금 이 순간, 탈출이 허락된 것은 조명뿐이었다.
빠르게 고도를 높인 조명은 슈트의 배터리를 소모해 특수한 전자파를 흩뿌렸다.
불쾌한 ‘막’을 통과해서 헬 게이트 내부를 빠져나오기 위한 자력 탈출 방법 중 하나였다.
억지로 막을 찢고 솟구친 조명은 검은 구름과 불길이 존재하는 화표면에서 당장 벗어나지 않았다.
지금 돌아간다면 통제관들에게 실패했다는 사실 외에 전해줄 것이 없다.
그래서 결국 다시 한 번 빠져나온 좌표로 뛰어들었다.
불쾌한 막을 통과하는 순간, 조명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모든 것이 파괴된 지상과 검은 구멍이 자리 잡은 라켄롤의 하늘이 아니었다.
기분 좋은 햇살이 등 뒤에서 느껴지는 푸른 하늘과 새하얀 솜사탕 같은 구름을 뚫고 자유낙하를 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원상복귀된 라켄롤의 수도 알앤비가 한눈에 보였다.
양심의 가책이 느껴지는 2회 차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