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l Divers RAW novel - Chapter 91
헬 다이버즈 090화
90화
“이제 어떡하지?”
조명은 손을 마구 휘저어 아무거나 잡히는 것을 끌어당겼다.
병사에게 보급되어야 할 보급 상자에는 각종 물자들이 보관되어 있는데, 조명의 손에 잡힌 것은 다름 아닌 빳빳한 새 잡지였다.
이 나라의 군대는 특이하게도 병사에게 보급 물자를 아낌없이 퍼주었는데, 그중에는 섹시한 근육미를 뽐내는 여성이 메인 표지를 장식하는 잡지도 있었다. 한국으로 치면 병사들이 곧잘 사서 돌려보는 종류의 잡지였다.
문제는 근육녀가 메인이라도 지나치게 선정적이라는 점이었다.
“…너무 선정적이잖아. 19세 이상 성인도 못 볼 만큼 선정적이야.”
구체적으로는 평생 섹스라고 말만 하게 되는 저주를 받은 조각 미남이 높으신 분의 손짓 하나에 지워져야 한 것만큼이나 선정적이었다.
왠지 모르게 그리운 이름, 김스타브릿지를 떠올리며 조명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곳에 처박혀 있어봤자 죽도 밥도 안 된다.
일단은 조금 전부터 침묵을 유지하고 있는 안전 모드를 갈궜다.
“안전 모드, 넌 좋은 아이디어 없어? 명색이 서포트 AI인데, 정작 중요한 서포트를 전혀 안 해주고 있잖아. 설마 지금 반항하는 거야?”
[서포트 AI는 다이버에게 반항할 수 없습니다.]“그럼 왜 가만히 있는데? 네 주인은 뭐가 빠지도록 뺑이를 치고 있는데, 넌 아까운 배터리나 축내면서 구경하고 있으니 재밌다, 이거야?”
[지난 12회 차의 데이터들을 종합해 분석하고 있었습니다.]막상 제대로 일을 하고 있어서 뜨끔했다.
하지만 갈굼이란 원래 끝이 없어야 하는 법. 대한민국 군대의 병영 부조리는 무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지 않는가.
“그럼 우선순위부터 보고를 해야 할 거 아냐. 네 배터리는 땅 파서 나오는 줄 알아? 네 주인 힘들어하는 거 안 보여?”
[죄송합니다.]시원시원하게 사과해 버리는 안전 모드의 태도에 조명도 짓궂은 분위기를 거뒀다.
“그래서, 지난 12회 차 동안의 내 헛고생을 통해 알아낸 게 뭔데?”
[라켄롤 국민들은 포기하십시오.]“…그 말은 나더러 2급 통제관들에게 맞아 죽으라는 건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라켄롤 국민들을 지휘, 통제, 유도하려는 모든 행위를 포기하라는 의미입니다.]“그거랑 그거랑 뭐가 다른데?”
[라켄롤 국민들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전쟁광에 절대적인 애국심, 전체주의 성향을 보입니다.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지만, 그 어떤 사회보다도 억압적이며 또한 상층부의 통제를 불만 없이 따릅니다. 범죄자들조차 전쟁이 벌어진다면 발 벗고 나설 정도이니, 더 이상 논할 가치도 없습니다. 따라서 라켄롤 국민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해결책을 찾아야 합니다.]12회 차나 헛고생을 하고서야 겨우 그런 결론을 얻게 될 줄이야. 실제 시간상으로도 두 달이나 걸렸다.
이미 심신은 만신창이가 돼버렸고,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는 상황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라켄롤 국민에게서 해결책을 찾는 걸 포기하라니.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아니, 많이 억울한 조명이었다.
“후우… 그래. 고명하신 서포트 AI님의 충고인데, 뼛속 깊이 새겨들어야지. 그럼 이제 어디서 해결책을 찾아야 하지?”
[라켄롤을 침공한 기생체들은 하나같이 촉수 생명체의 몸을 숙주로 삼아 막강한 전투력을 선보였습니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도시 방위군의 훈련용 샌드백으로 쓰인 촉수 생명체는 매우 소극적이며 온순한 성향을 보였습니다. 또한 전투력도 그렇게 뛰어나지 않았습니다. 이로써 촉수 생명체는 기생체가 원하는 이상적인 숙주임과 동시에, 인간에게는 무해한 고등 생물이라 추측됩니다.]“힘숨찐이니까?”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된 힘숨찐은 올바른 표현이 아닙니다. 좌우지간, 촉수 생명체는 제대로 타 종족을 인식하며, 또한 섣불리 타 종족에게 상해를 입혀선 안 된다는 확고한 의지와 사고를 할 줄 압니다. 이를 근거로 해당 생명체와 접촉해 볼 것을 권장합니다.]빙빙 돌려서 말하긴 했지만, 결국 그 미끈거리는 해초 덩어리와 조명이 육체의 대화(?)를 나누길 원한다는 것 아닌가.
‘생각해 보면 지난 회차 동안 그 녀석들과는 한 번도 접촉한 적이 없었지.’
그냥 대머리 근육 종족에게 맞아 죽고, 우주 기생체의 숙주로도 쓰이는 다용도 샌드백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접촉한다고 해도 문제가 있어. 대체 어떻게 의사소통을 할 건데? 3급 통제관들과 달리 그놈은 발광하지도 않는다고.”
3급 통제관의 원형인 젤리 종족은 어마어마하게 빠른 발광 패턴으로 대화가 가능했다. 때문에 안전 모드의 힘을 빌려 어찌어찌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지만, 촉수 괴물과는 도저히 의사소통을 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말하지 않았습니까. ‘접촉’하는 겁니다.]“…내가 생각하는 ‘그거’는 아니지?”
[맞습니다.]그 말과 함께 안전 모드는 제멋대로 슈트의 통제권을 가져가 버리곤, 조명의 몸을 목각 인형처럼 움직였다.
지난 회차간의 경험으로 도시 방위군 본부의 구조를 빠삭하게 외워둔지라, 누구에게도 들키는 일 없이 촉수 괴물이 보관되어 있는 화물 창고에 도달할 수 있었다.
보안 키패드와 이중 잠금 장치로 엄중하게 관리되고 있는 화물 창고의 보안은 안전 모드에게 손쉽게 뚫렸고, 조명은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유리 케이스 앞까지 끌려가야 했다.
“미친놈아! 외계 생명체한테 안녕이라고 말해봐야 알아듣겠냐? 아니면 뭐, ET마냥 손가락 인사라도 해볼까?!”
[바로 그겁니다.]안전 모드는 슈트의 장갑 파츠를 일부 해제했다. 통상 모드와 달리 안전 모드는 슈트의 모든 권한(외부 통신 제외)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에 슈트의 해제도 가능했다.
억지로 장갑이 해제된 손으로 유리 케이스의 잠금 해제 버튼을 누르자, 좁은 공간에 갇혀 있던 거대 촉수 괴물이 토사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표현이 상당히 거시기했지만, 바로 앞에 서 있던 조명에겐 정말 토사물이 쏟아져 나오는 광경과 다를 바 없었다.
“으웨에에에에엑……!”
[상대방에게 실례되는 표현은 가급적 자제해 주십시오.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입니다.]“지금 내가 슈트를 입고 있어서 이 정도지, 맨몸으로 접촉했으면 기절했을 거다, 인마!”
실제로 오른손은 와르르 쏟아져 나온 촉수와 마구 뒤엉켜서 미끈미끈 공격에 완전히 노출되어 있었다. 물리적인 대미지는 없지만, 정신적인 대미지는 이미 즉사급이었다.
젤리 종족과는 감촉이 조금 다르다고 해야 할까. 매끈매끈보다는 미끌미끌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부드럽고 끈적한 체액이 촉수 전체에서 묻어 나왔다.
마치 해파리에게 로션 한 통을 죄다 들이부은 느낌이었다. 만지면 만질수록 부드럽지만 굉장히 오묘한 기분이 되는,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였다.
“너무… 미끌거려! 그리고 선정적이야!!”
[상대방이 지금 다이버의 생체 전기신호를 읽고 분석하는 중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실례되는 표현은 자제해 주십시오.]“…진짜 그게 된다고?”
ET식 인사는 농담 삼아 한 것인데, 설마 촉수 덩어리가 조명의 손을 과할 정도로 만지작거리고 있는 이유가 의사소통을 하기 위함이었다니.
너무나도 부담스러웠다.
“넌 뭐라고 말 못하냐? 생체 전기신호를 읽고 있다면서? 그럼 너도 전기신호 보내서 뭐라고 말해봐!”
[본 AI는 유기체가 아닙니다. 상대는 유기체의 생체 전기신호를 읽어 의사소통을 나누는 고등 생물이기에 저와 같은 무기체는 접촉이 불가능합니다. 그저 서로가 일방적으로 상대를 분석하고 이해하는 것만이 가능합니다.]지금 이 순간만큼 서포트 AI가 쓸모없기 짝이 없다고 투덜거리던 때였다.
조명은 갑자기 손끝을 타고 전해져 오는 찌릿한 느낌에 인상을 찡그렸다. 뭔가… 뭔가가 일어나고 있었다.
‘상대방의 감정이… 느껴진다?’
어차피 안전 모드 때문에 움직일 수도 없으니, 이 미끌미끌한 흐름에 몸을 맡기기로 한 조명은 찌릿한 감각에 집중했다.
손을 타고 흘러 들어온 특이한 신호는 이윽고 뇌에 도달해, 조명으로부터 특정 감정들을 느끼게 만들었다.
‘흥분, 흥분, 흥분, 그리고… 흥분?’
화가 났을 때의 흥분이 아니었다. 그런 흥분이라면 벌써 이 촉수들이 조명의 몸을 옭아맨 뒤 즙을 짜내듯이 비틀어 버렸을 테니까.
이건 문자 그대로의 흥분이었다.
[상대가 어떤 의사를 표하고 있습니까?]“…야, 네 분석에 따르면 얘는 자아를 지녔고, 사고를 할 줄 아는 고등 생물이 맞지?”
[맞습니다.]“그럼 너는 생전 처음 보는 외계 생명체가 다른 외계 생명체를 상대로 흥분을 느낀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이 좁고 열악한 환경에 갇혀 지낸데다, 다이버는 라켄롤 국민의 축소판 버전으로 보입니다. 아무리 온순한 생물이라 할지라도 화를 내는 것이 결코 이상한 것은…….]“아니, 그런 흥분이 아니야. 날 성적 대상으로 보고 있다고.”
[…….]“…….”
[에러, 에러, 에러. 시스템을 리부트합니다.]“이건 풀어주고 가, 이 새끼야!!”
결국 조명은 안전 모드가 리부팅되는 몇 분간 촉수 괴물이 격렬하게 자신의 손을 만지작거리는 것을 온전히 느껴야 했다.
* * *
“죽진 않았습니다.”
1급 통제관들이 모인 자리에 불려 나온 상사는 무덤덤한 어조로 말했다.
그는 평소 미친 사람처럼 매달려 있던 운동도 지금은 접어둔 상태였다. 자신들의 과오를 ‘없던 것’으로 만들기 위해 헬 게이트로 잠화한 박조명의 잠화 기간이 어느새 2개월을 초과하고 있었다.
과오를 맡긴 건 자신들이기에, 거기에 책임감을 느낀 일부 2급 통제관들은 운동을 멈추고서 이동식 해양 플랜트의 갑판에 서서 그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게 벌써 3주가 넘어가고 있었다.
“역시 과오를 짊어진 사람은 느낄 수 있는 건가?”
담배를 꼬나물고 있는 8282의 질문에 상사는 미묘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렇다 할 만한 것을 집어낼 수는 없습니다만,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과거에 조금씩이지만 변화가 생기고 있습니다. 이것을 일부 통제관들은 개찬(改撰) 현상이라고 부르는 것 같더군요. 저 역시 그러한 의견에 동의합니다. 실제로 그의 존재가 느껴지고 있습니다.”
“그 말에 거짓은 없겠지?”
“통제관 모두의 존망이 걸린 문제입니다. 제가 거짓을 고해서 무슨 득이 있겠습니까.”
“…그건 그래.”
잠자코 666이 한마디 거들었다.
모든 통제관들이 여러 세계를 거닐면서 자그마치 84만 년이라는 시간 동안 자신들의 과오를 처리해 줄 해결사를 찾아 나섰다.
겨우 제대로 된 해결사를 찾아낸 마당에 이제 와서 일을 방해할 이유나 의미는 없었다.
통제관들은 과거라는 족쇄에 묶여 있는 존재인 만큼, 그 누구보다도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싶어 했으니까.
박조명은 그들에게 있어서 열쇠이며, 희망이고, 또한 미래였다.
“과오의 난이도가 확 올라서 아직 적응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아.”
666은 테이블 위에 놓인 과자를 집어 주먹으로 잘게 부순 뒤, 가루를 입에 털어 넣었다. 그러고는 단숨에 우유를 들이켜서 시원한 목 넘김의 쾌감을 맛보았다.
그런 예의 없는 태도에도 불구하고 의견은 제대로 내놓았기에 다른 이들도 크게 신경 쓰진 않았다.
“3급과 2급의 차이는 커. 특히나 2급은… 내 입으로 말하기도 뭣하지만, 협조성이 없기로 유명하잖아?”
“우린 신념이 확고한 것뿐입니다.”
“아, 오해는 하지 마. 딱히 너희 종족을 폄하하려는 의도는 아니니까. 다만, 지구인의 ‘합리적’인 사고방식으로는 너희 종족을 이해하기도, 협조를 구하는 것도 어려울 거라는 의미지.”
“하지만 우리가 간섭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결국 전적으로 그에게 맡길 수밖에 없는데, 굳이 저를 호출하신 이유가 있습니까?”
“별것 아니야. 그냥 확인차 불러본 거지.”
너무나도 불합리한 답변이지만, 상사는 불평 한마디 내뱉지 않았다. 원한다면 욕을 한 바가지라도 퍼부을 수 있겠지만, 그래봐야 긁어 부스럼이란 걸 그도 알고 있었다.
항상 근육 단련에 미쳐 있지만, 1급과 2급의 위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1급은 그래도 된다. 1급이니까.
가장 큰 과오를 짊어지고 있으니까.
때문에 박조명이 무사히 돌아오지 못한다면 2급 통제관을 싹 쓸어버릴 거라는 무언의 경고를 하기 위해 자신을 호출한 것도 납득할 수 있었다.
그들은 유일한 열쇠이자 희망이며 미래인 박조명을 놓칠 생각이 없다. 어떻게든 자신들의 과오를 ‘없던 것’으로 해주길 원한다. 그걸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만큼 필사적이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래, 수고해.”
무심하게 축객령을 내리는 그들을 뒤로한 상사는 곧장 항공 갑판으로 향했다.
다른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조명의 무사 귀환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