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l Divers RAW novel - Chapter 92
헬 다이버즈 091화
91화
“어우, 왜 이렇게 끈적거려. 이건 너무 선정적이잖아!”
[딱히 성행위를 하는 것도 아닌데, 선정적이라고 말할 것까진 없습니다.]“쯧쯧, 요즘 같은 시대엔 섹스라고 말하기만 해도 선정적이라며 존재를 말살당한다고. 이건 내가 아는 먼 친구의 친구에게서 들은 이야기니까 확실해.”
[선정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존재를 말살당합니까? 그건 너무나도 불합리하군요.]“나도 알아. 하지만 높으신 분들은 그런 걸 병적으로 싫어하니, 어쩔 수 없지. 잘생긴 남자가 주위에 여자를 잔뜩 끌고 다녀도, 그 여자들이 남자에게 온갖 섹스 어필을 해도 그건 절대 선정적인 게 아니지만, 단순히 섹스라고 말하는 건 죽어도 용납할 수 없으신 모양이야.”
[어른들의 복잡한 사정이 느껴지는군요. 그래서 그분과 대화는 좀 해보셨습니까?]조명이 촉수 괴물의 이름이 SC―P106라는 것, 그리고 370세라는 간략한 정보를 알려준 뒤부터 안전 모드는 SC 뭐시기를 깍듯이 대했다. 덧붙여서 조명은 ‘그녀’를 에스라 부르기로 했다.
SC라고 하는 건 좀 미묘하고, P106은 너무 길었다. 그래서 에스라고만 부르기로 했다. ASS와 같은 발음이라서 홧김에 끌린 호칭은 절대 아니었다. 그건 너무 선정적이니까.
“이곳에 잡혀오기 전까지는 자기네 종족들이 새로운 보금자리를 만들 수 있는 안정적인 행성을 찾아다니던 조사관이었대. 그리고 쓰리 사이즈는 위에서부터 1,500… 아니, 그딴 건 필요없는데요.”
조명은 왜 자신의 주변 사람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쓰리 사이즈에 과한 자신감을 가지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애초에 에스가 암컷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벌써 맨손에 닿고 있는 촉수의 감촉이 몇 배로 불쾌해지고 있었다.
수컷이라면 더욱 큰 문제겠지만, 암컷이 완전히 다른 종족인 자신을 그렇고 그런 눈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 바로 불쾌함의 원인이었다.
그렇다고 촉수를 떼어놓자니 의사소통을 할 방법이 없었다. 무엇보다 에스가 조명에게 의사를 전달하는 방식은 단어와 단어를 조합하는 간단한 문장의 형태였기에, 그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려면 어쩔 수 없이 계속 촉수를 붙잡고 있어야 했다.
에스의 몸집이 너무 거대하기에 도시 방위군의 본부에서 빠져나오는 것도 힘들었다.
우선 조명이 지난 12회 차 동안 수련한 대(對)라켄롤 국민 제압권법을 이용해 초병들을 기절시킨 뒤, CCTV를 몇 개인가 박살 낸 후에야 겨우 지하도로 숨어들 수 있었다.
지하도에 숨어드는 것도 에스에겐 꽤 고역이었는데, 수많은 촉수들이 해초처럼 뭉친 형태인 에스를 뱀처럼 길게 늘어뜨린 후에야 겨우 움직이게 할 수 있었다.
이미 수백 번도 넘게 들어와 본 적이 있는 지하도는 조명에게 아무 문제도 아니었다. 눈 감고도 어디로 이어지는지 알 수 있으며, 머릿속에서 펼쳐지는 정밀한 지도는 라켄롤의 국토 일부와 도시의 구조까지 모두 묘사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 조명도 당황하게 만드는 것은 에스의 빠꾸 없는, 퇴폐적인 질문들이었다.
“아이는 몇 명인 게 좋겠냐고요? 저는 애들을 별로 안 좋아하는데요.”
“가사 분담은 그쪽이 8, 제가 2라고요? 안 물어봤는데요.”
“첫째 아이 이름은 173, 둘째 아이 이름은 049? 아니, 그러니까 안 물어봤다니까요.”
이마저도 조명이 최대한 순화하여 통역하는 것이었다. 실제로는 평범한 일반인이라면 뇌가 녹아버릴 정도로 퇴폐미가 진한 단어들이 쓰나미처럼 밀려 들어왔다.
만약 시공간을 열두 번이나 되돌리지 않았더라면 조명의 정신력으로는 조금 버티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조명이 입 밖으로 말을 꺼낼 필요도 없이, 속으로 생각만 해도 그것이 전기신호가 되어 에스에게 전달된다는 점이었다.
즉, 조명이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징그럽다’, ‘역겹다’, ‘너무 선정적이다’ 같은 생각들을 품고 있음에도 에스의 애정 공세는 그칠 줄을 몰랐다.
이 정도라면 삼고초려를 한 유비조차도 한 수 접어주는 수준.
솔직한 심정으로 이런 이상 성욕 촉수 괴물이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마는, 정말 이것 외엔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어쩔 수 없었다.
자연스럽게 지난 12회 차간의 실패한 기억들이 떠오르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세기말 신혼 생활을 꿈꾸고 있던 에스의 태도가 갑자기 바뀌었다.
조명이 떠올린 기억 속에서 자신과 같은 종족이 이 행성을 침공한 것을 알아챈 것이다.
“전 우주적… 멸망?”
차마 입에 담기도 힘들 만큼 선정적인 단어들이 싹 사라지고, 조명에게 새롭게 흘러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에스가 지닌 기억의 편린들이었다.
조명이 모르는 또 다른 은하계의 이야기.
그곳에서 벌어진 골디락스 존(생명체 거주 가능 영역)의 무차별적인 파괴, 그리고 멸망.
생명체가 거주하는 행성이라면 예외 없이 ‘그들’이 찾아왔으며, 다양한 형태와 방법을 동원해 해당 행성을 반드시 멸망시켰다.
주변을 배회하는 운석들을 한데 뭉쳐 행성으로 투하시킨다든가, 전염성과 즉사율이 높은 극악한 바이러스를 퍼뜨린다든가, 그 밖에도 에스의 모성처럼 기괴한 기생체들이 생명체를 반쯤 죽여 숙주로 삼는다든가 하는 식이었다.
그녀는 본래 모성에서 편한 삶을 누릴 계획이었지만, 여러 행성들이 공격받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뒤, 촉수 협회의 협회장이 에스를 포함한 여러 촉수 괴물들에게 임무를 내렸다고 한다.
‘그들’의 눈에 절대로 띄지 않으면서 생명체가 거주할 수 있는 최저한의 조건을 지닌 골디락스 존을 찾아낼 것을.
그것을 위해 에스를 포함한 여러 촉수 괴물들이 우주 각지로 퍼져 나갔다. 에스 역시 벌써 20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쓸쓸하게 우주를 유영(游泳)했다는 기억이 흘러 들어왔다.
‘그래서 가까스로 발견한 라켄롤 행성에 쉽게 잡혀 들어온 건가?’
라켄롤의 군 보급대는 행성 인근에서 그녀를 포착해 포획했다고 하는데, 탐사대에서 가장 먼저 잡힌 것은 그녀였다고 한다.
조명의 기억에 의하면, 촉수 괴물들이 라켄롤에 잡혀 들어온 건 적어도 10회 이상이기에, 탐사대의 최소 구성도 10체 이상이었을 것이라 추정되었다.
‘게다가 탐사대는 전원 암컷이라서… 욕구가 쌓였다?’
기억 속에서 조명의 손과 맞닿은 그 순간, 인간의 피부를 통해 부드럽고 따스한 온기를 느낀 것이 하트(촉수)를 작렬했다는 것을 기억에서 읽었다.
다시 떠오른 불쾌감에 조명은 이번에야말로 촉수를 떼어놓았다.
그러고는 재빨리 슈트의 장갑을 복구해서 물 샐 틈 하나 없이 완벽하게 외부와 차단시켰다.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안전 모드가 한마디를 툭, 던졌다.
[조금 너무한 것 같습니다.]“필요한 정보는 모두 얻었고, 난 몇 시간 동안 저 미끌거리는 촉수랑 손을 잡아주고 있었는데, 이만하면 성인군자 아니냐?”
[하지만 여성을 대하는 올바른 자세는 아니라고 봅니다.]“인간 여성이었다면 말이지!”
인간 여성이었다면 조명은 하루 종일이라도 손을 잡고 있을 자신이 있었다. 거기에 여자들은 화장실도 우르르 몰려가는 걸 좋아한다고 하니, 뭣하면 화장실까지 따라갈 의향도 있다.
하지만 촉수는 아니다. 특유의 미끌거리는 감촉은 기분이 좋으면서도 굉장히 불쾌했다. 호불호가 동시에 존재한다고 해야 할까? 인간에겐 너무나도 이른 감각이었다.
‘게다가 냄새도 좀…….’
장갑을 통해 슈트 안으로 흘러 들어온 촉수의 점액 냄새가 코끝을 살랑살랑 자극했는데, 차라리 구린내였다면 다행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구린내는커녕 목욕을 막 끝낸 뒤에 맡을 수 있는, 향기로운 샴푸 향과 비슷했다. 어찌나 향긋한지 계속 맡고 싶어질 정도였다.
[흥분 효과를 지닌 화학물질이 검출되었습니다. 슈트 내부의 정화 시스템을 작동하겠습니다.]“…그래, 이럴 줄 알았지.”
내부 정화 시스템으로 냄새가 싹 사라지자 빠르게 이성을 되찾았다.
흡사 잠에서 깨자마자 머리 위로 찬물을 바가지째 들이붓고 뺨까지 맞은 것처럼 냉정해졌다.
20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무욕적인 삶을 살면서 우주를 돌아다녔다면, 충분히 굶주릴 법도 했다. 자신과 다른 종족이라 할지라도 무심코 이상 성욕을 마구 발현할 만큼 괴로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얘가 역겹다는 사실은 변함없어.”
축 늘어진 촉수를 슈트 장갑으로 탕탕, 두들겨 보인 조명은 거침없이 지하도를 걸어 나갔다.
적이 어디로부터 오는지, 무엇을 목표로 하고 있는지 대략적이나마 알게 되었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해결할 차례였다. 지난 12회 차가 튜토리얼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확실한 실마리를 잡았다.
‘적과 싸워 이길 수 없다. 라켄롤 국민들을 피난시킬 수도 없다. 그렇다면 남은 건 딱 하나야. 침공, 그 자체가 일어나지 않게 만들면 돼!’
이 세계의 과오를 청산하는 방법은 라켄롤 국민들의 ‘완전’한 생존.
따라서 기존의 방식은 적의 침공으로부터 벗어나 안전한 곳까지 라켄롤 국민들을 대피시키는 것이라면, 이번에는 방향성을 완전히 바꾸기로 했다.
라켄롤 행성에 적이 침공하지 않았다면, 구태여 전쟁을 일으키거나 모두가 대피하는 일 없이 완전한 생존 조건을 달성할 수 있다. 단 한 번 성공하는 것만으로도 라켄롤 종족 전체를 구할 수 있는 것이다.
[다이버가 도시 방위군 본부에서 축 늘어져 있는 동안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열세 번째 침공을 하루 앞둔 지금, 좋은 계책이 있습니까?]“있고말고.”
에스의 기억에서 읽어낸 ‘그들’은 골디락스 존, 그 자체를 찾는 게 아니었다. 정확히는 생명체를 찾아 자연스럽게 골디락스 존으로 흘러 들어오는 것뿐이었다. 그게 인간이든 짐승이든 상관없다. ‘그들’은 생명, 그 자체에 반응하는 것이니까.
“설마 13회 차 만에 찾아가게 될 줄은 몰랐지만, 라켄롤 국방군 대원수 각하 나으리를 찾아가야겠어.”
[국민들을 순식간에 우주 먼지로 만들어 버린 그 사람 말입니까?]“그래. 책상 위에 달려 있는 빨간 버튼을 눌러서 대피선 폭발시킨 그 양반.”
그건 구라 한 점 섞이지 않은 100%의 팩트였다.
아무리 전쟁이 미친 라켄롤 종족이라 할지라도 최소한 적이 대규모 침공을 감행하는 상황이라면 민간인들의 자발적인 피난 정도는 눈감아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걸 전부 탈영군으로 싸잡아서 즉결 처형시킬 것이라곤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다.
외기권을 막 돌파한 대피선이 문자 그대로 폭발하는 장관은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 만큼 대단했다.
어릴 적에 본 불꽃 축제는 정말 어린애 수준이었는데, 그 거대한 대피선들이 줄줄이 터져 나갔을 때는 조명의 멘탈도 바사삭 부서졌다.
라켄롤의 전군을 통솔하는 대원수가 그 짓을 벌였다는 걸 알아차린 순간, 조명은 즉각 탈출해서 다음 회차를 시작하는 것과 대원수를 잡아 족치는 것을 두고 심각하게 고민했다.
[군부와 협상해서 라켄롤 전 인구를 피난시킬 생각입니까?]“라켄롤이 소유한 모든 우주선을 사용한다면 불가능할 것도 없겠지만, 그 이전에 군부와 협상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 난 더 이상 라켄롤에 기대 따윈 안 한다고.”
전쟁, 절대 전쟁.
아기가 태어나서 울음을 터뜨릴 때 내지르는 것을 장군의 포효라고 부를 만큼 미친 종족들이다. 그런 자들을 상대로 다 같이 짐 싸 들고 대피하자는 말을 해봐야 씨알도 안 먹힌다는 건 지난 경험을 통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반대라면 어떨까?
정확히는 전쟁을 부추기는 건 아니지만, 전쟁을 하고 싶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 말이다.
“군인의 희생을 최고의 업적이라 쳐주는 종족이야. 나가서 죽기 살기로 싸우겠다고 하면 얼씨구나 하고 나한테 우주선 한 척쯤은 주겠지.”
조명이 누구든 상관없다. 라켄롤을 위해 싸울 것을 맹세하고, 강한 전투 의사를 표현하면 그것만으로도 라켄롤 종족을 뻑 가게 만들어 버릴 수 있다.
실제로 지난 12회 차 동안 그런 방법으로 라켄롤 종족들을 적당히 속여 먹은 적도 있었다.
‘이번에는 규모가 좀 크지만… 어떻게든 되겠지.’
안 되면 어쩔 수 없다. 그때는 대원수를 인질로 잡아 우주선을 요구할 것이다.
우주선 지급이 한 시간 늦어질 때마다 대원수가 어마어마한 근손실을 입게 될 것이라고 협박하면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