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l Divers RAW novel - Chapter 94
헬 다이버즈 093화
93화
“후욱, 후욱…….”
조명은 제대로 쥐어지지 않는 왼 주먹을 내려다보았다. 힘이 빠져서 주먹을 쥘 수 없는 것이 아니다. 뼈가 부러졌다.
“대단하군.”
메이거스는 입가에 고여 있던 피를 퉤, 뱉어내며 말했다.
공방은 생각보다 길지 않았다. 기껏해야 3~5분 정도 지났을까.
하지만 양측은 서로 치명상에 준하는 피해를 입었다. 조명은 왼팔 골절과 갈빗대 서너 개에 금이 갔으며, 복근 일부가 파손되어 내장에도 손상을 입었다. 재생 능력이 없었다면 벌써 곤죽이 되어버렸을 만큼 심한 상처였다.
메이거스 역시 만만찮은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안면은 퉁퉁 붓고, 치아 몇 개가 박살 나 바닥을 굴러다녔다. 특히 조명의 왼팔과 격돌한 오른팔은 뼈마디가 완전히 박살 나서 축 늘어져 있다. 이는 조명이 슈트와 추가 장착한 외골격의 힘을 빌렸기에 이끌어낼 수 있는 성과였다.
덧붙여서 그는 한쪽 무릎을 꿇은 상태였는데, 조명이 하단 돌려차기와 오른 주먹으로 무릎 관절을 연이어 두들겼기 때문에 무릎 연골이 박살 난 것이었다.
또한 제복 상의는 시커멓게 그슬려 있었다. 이것 역시 조명이 안전 모드의 힘을 빌려 즉석에서 제조한 충격식 폭탄을 때려 박은 흔적이었다.
“왜소한 체구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대단한 근력과 순발력을 보여주는군. 거기에 내 주먹을 정면에서 맞받아치고도 서 있을 줄이야…….”
“변기에 앉아 있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가 이렇게 차이가 심한 줄 알았다면, 저도 정면으로 맞붙지는 않았을 거예요. 조금 후회하고 있어요.”
“하지만 맞붙었지. 그리고 이 메이거스와 대등하게 싸웠다. 그 점은 충분히 자랑스러워해야 할 일이라고 보네만?”
“그래선 의미가 없죠. 당초 목적은 그쪽을 완벽하게 제압하고 키 코드를 빼앗는 거였는데…….”
“말이 나온 김에 묻지. 왜 그렇게나 내 키 코드에 집착하는 건가? 그렇게나 이 행성을 멸망시키고 싶은 건가?”
“저는 멸망을 막고 싶다고 말했는데요.”
조명은 골절된 왼팔의 뼈를 억지로 움켜쥐어서 짜 맞췄다. 상당한 격통이 밀려들었지만, 지난날의 고생과 고된 훈련 덕분에 빠르게 고통을 잊을 수 있었다.
하지만 8282가 준비해 준 나노 장갑판은 결국 내던질 수밖에 없었다. 단 한 번의 격돌로 박살 나버렸기 때문이다.
만약 나노 장갑판이 없었다면 조명의 팔이 부러지기는커녕, 문자 그대로 소멸해 버렸을 만큼 강력한 일격이었다. 과연 라켄롤 국방군의 정점에 오른 자다운 전투력이었다.
‘이런 종족이 그 이상한 우주 괴물들에게 허무하게 패배한다는 게 아이러니하지만…….’
그 사실이 바뀌지 않는다면, 조명이 돌아갈 방법도 없었다. 정확히는 빈손으로 돌아가 봤자 통제관들에게 패배자 낙인이 찍힐 것이다.
그들은 조명에게 모든 것을 약속했다. 마치 요술 램프의 지니처럼 모든 소원을 들어줄 힘도 있었다. 그런데 정작 조명이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면, 소원을 이룰 수 없었다.
‘사실 평범한 헬 다이버로 전락해도 먹고사는 건 어렵지 않아.’
평범한 헬 다이버라도 월수입이 최소 천만 단위에 달한다. 다만, 조명은 즐거운 노후를 즐기기도 전에 지구가 멸망해 버리면 곤란하니까 통제관들에게 협력하고 있는 것뿐이다.
자신이 꿈에 그리던 미녀들과의 선상 파티는?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서 하루 종일 놀고먹고 자고 싸기만 하는 일상은?
어릴 때의 자신과 달리 돈 걱정 없이 카드 하나만 내밀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부르주아 생활은?
전부 원한다. 양손에 금은보화와 미녀들을 잔뜩 쥐고 화려한 인생을 즐겨보고 싶다. 남자답게 단 한 번뿐인 인생을 불사르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단 한 번의 실패도 용납해선 안 된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완벽한 미래이듯, 통제관들이 바라는 것 역시 완벽한 성공이니까.
“얌전히 키 코드만 내놓으면 제가 다 해결해 줄게요. 그게 싫으면 더 두들겨 맞고 내놓으셔도 돼요.”
부러진 뼈를 제대로 짜 맞추자 빠르게 붙었다. 자신의 재생 능력만으로 이런 기적 같은 일은 불가능하다. 슈트 내에서 전신을 돌고 있는 치료 젤 덕분이다.
일부 파열된 근육도, 터져서 내출혈을 일으키고 있던 내장도 빠르게 회복했다. 체내에 남은 찌꺼기는 땀샘을 통해 전부 배출되었다. 컨디션을 되찾기까지 1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 방법도 몇 번이고 사용할 순 없다. 치료 젤은 1회용 약품이라 사용 횟수에 제한이 있어.’
8282에게 잔뜩 받아온 치료용 앰플도 지난 회차들을 거듭하면서 대부분 소모해 버렸다. 오히려 자신의 신체보다 슈트가 지금까지 버텨준 것이 더 신기할 정도였다.
“그럼 나를 더 두들겨 패서 직접 가져가야겠군.”
“꽉 막힌 양반 같으니…….”
조명은 격한 몸놀림으로 여기저기 뭉쳐 있던 근육들을 풀어주었다. 미리 경보 장치는 꺼두었지만, 곧 이상을 감지한 국방군이 메이거스의 관저로 몰려들 터. 정말 몇 분도 남지 않았다.
그 안에 저 고집불통 노친네를 패대기치고 사령관의 키 코드를 받아 갈 것이다. 그것만 있다면 이 행성의 멸망은 의외로 쉽게 막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이상 시간을 끄는 것도 무의미하니까, 깔끔하게 한 방으로 끝냅시다.”
“이 몸이 비록 노쇠했으나, 그래도 딱지치기로 대원수의 계급장을 취한 것은 아닐세. 가능하겠나?”
“안 되면 되게 하라. 천생 노가다꾼들이 입에 달고 사는 말이에요.”
벽돌 수십 장을 한 번에 나르는 게 안 된다고?
그럼 오늘 일당은 없다.
오함마로 층 전체를 때려 부수는 게 힘들다고?
그럼 오늘 일당은 없다.
항상 일당을 인질로 잡힌 채 안 되는 것을 되게끔 만들어야 했던 조명이다. 이번에 걸려 있는 건 단순 일당 따위보다 훨씬 더 큰 것이지만, 어쨌든 그게 인질로 잡혀 있다는 사실만은 변함없다.
‘내 욕심은 고작 저런 노친네의 똥고집에 꺾일 만큼 적지 않아!’
총알처럼 튀어나간 조명은 메이거스의 부상당한 무릎으로 파고들었다. 그것을 예상한 메이거스가 거대한 주먹을 휘둘러 조명의 돌진을 저지하려 했다.
하나 2m 50㎝에 육박하는 거구의 사내와 1m 70㎝를 간신히 넘는 땅딸보의 시야에는 커다란 차이가 존재했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자는 상대의 움직임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으나, 그 의도를 알아차리는 것이 힘들다. 상대의 아래로 깔린 시선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미친놈이 왼쪽을 공격하는데 오른쪽을 보고 있겠나.
본디 격투라는 것은 시선이 가는 곳에 주먹이 가는 법이다. 이는 단순 격투가 아니라 무기를 사용하는 전투에서도 통용되는 논리였다.
그래서 조명은 정면으로 충돌하는 대신, 처음부터 메이거스의 주먹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유도만 하고 슬쩍 몸을 빼버렸다.
조명의 머리통을 단숨에 으깨 버릴 듯한 기세로 내려쳐진 주먹은 아슬아슬하게 지면을 두들겼고, 조명은 유연하게 몸을 비틀어 그의 두꺼운 팔을 스쳐 지나갔다.
자신과 달리 그는 오른팔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라켄롤 종족은 그냥 더럽게 강한 거지, 딱히 특별한 재생 능력 같은 건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메이거스는 축 늘어진 오른팔을 움직여 훤히 드러난 복부를 막으려 했다. 이번에 오른팔이 타격당하면 정말로 팔을 못 쓰게 될 수도 있지만, 그는 과감하게 팔을 버리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군인정신이야말로 정신없는 육박전에서 최대의 단점으로 작용하지.’
우직하게 막고, 때리고, 다시 막은 다음 때린다?
그런 건 개싸움에 특화된, 무식한 덩치들이나 쓰는 전투 방식이다.
그런 부류는 자신의 몸이 다치는 것도 개의치 않지만, 그럼에도 급소만큼은 어떻게든 방어하려고 한다. 설령 뼈가 부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싸움에서는 반드시 이기고 싶으니까.
메이거스도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기꺼이 오른팔을 내주려는 심산이 분명했다. 조명이 오른팔을 타격하면서 작용반작용의 법칙으로 잠시간 딜레이에 빠지면, 그 틈에 반격을 가할 생각이었다.
물론 조명은 처음에 한 말을 잊지 않았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한 방으로 깔끔하게.
메이거스가 복부를 가드하자, 오른팔을 완전히 박살 내는 선택을 포기했다. 그 대신 오른팔을 짓밟고 뛰어올랐다.
노리는 곳은 그 어떤 인간도 절대로 단련할 수 없는 치명적인 급소!
바로 목젖을 노리고 주먹을 휘둘렀다.
“어림없다!!”
그것을 예견하지는 못했지만, 빠른 반응속도로 턱을 아래로 내리깐 메이거스가 주먹을 막았다. 목젖을 정확히 후려칠 생각이었던 주먹은 메이거스의 턱을 후려쳤다.
턱도 치명적인 급소 중 하나이나, 강대한 턱뼈의 내구도와 정신력 덕분에 완전한 급소는 아니었다.
“어림도 없기는 뭐가 없어.”
조명은 허공에 붕 뜬 상태로 피식 웃었다.
완전한 급소가 아니어도 급소는 급소. 라켄롤 종족이 지닌, 특유의 죽여주는 근골격 구조에 대해선 이미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때문에 어디를 어떻게 노려야 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1차 목표는 목젖이지만, 그게 막힌다면 2차 목표는 턱으로 잡아두고 있었다. 자신의 주먹을 보조해 줄 무기를 이용해서!
“이거나 먹고 뻗어 계십쇼.”
“……?!”
메이거스의 턱에 막힌 조명의 주먹.
순간, 손등 위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본래는 자신을 비롯해 동료 헬 다이버에게 약물을 주사하기 위해 만들어진 응급용 약물 주사기였다.
날카로운 주사기의 바늘이 메이거스의 입술을 정확히 파고들었다. 주사기에 들어 있는 것은 대량의 진정제였다.
전장의 의무병이 휴대용 모르핀을 들고 다니는 것처럼, 헬 다이버즈들에겐 최악의 경우 편히 죽을 수 있도록 신체를 극도로 진정시킬 수 있는 과(過)진정제가 존재한다.
아니나 다를까, 일부러 힘을 뺀 약한 주먹은 쉽게 견뎌낸 메이거스였으나, 예상 밖인 진정제의 투여는 견뎌내지 못했다.
지구의 성인 남성에 비해 최소 두 배 이상 체격을 자랑하는 라켄롤 국민이라면 이 진정제를 투여받고도 깊은 잠에 빠지는 선에서 그칠 터.
스르르륵, 쿵!
결국 강인한 메이거스마저 진정제를 맞고 뻗어버렸다.
“후우, 비장의 수단을 이렇게 사용하게 될 줄이야. 진짜 이 행성 종족들은 징글징글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다이버.]“나도 알아.”
조명은 메이거스에게서 사령관 키 코드를 탈취한 뒤, 곧장 관저를 빠져나갔다.
그 길로 곧장 제트 팩을 이용해 에스를 미리 태워둔 우주선에 탑승했다. 사령관의 키 코드를 이용하면 그 어떤 잠금장치도 쉽게 해제되기에 안전 모드를 닦달할 필요도 없었다.
군용으로 제작된 대형 우주선의 함교는 조명이 독차지했다. 그런 뒤, 함장 전용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좌석에 다리를 꼬고 앉아 구두로 지시했다.
“각 우주선 기지에서 대기 중인 모든 우주선들을 원격제어해서 발사 준비시켜.”
[시간이 없다고 말한 건 본 AI입니다만, 정말 하실 생각인가요?]“그럼 다른 방법 있어? 없잖아. 10회 차가 넘은 우리의 대서사시는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했어. 라켄롤 국민에게 기대할 수 없다면, 라켄롤 행성의 가축들에게 기대해야지.”
조명은 눈앞에 나타난 보안 홀로그램에 사령관의 키 코드를 갖다 대서 모든 보안 체계를 강제로 해제해 버렸다. 대원수만이 지닐 수 있는 단 한 개의 키 코드. 이것을 가지고 있는 자가 곧 국방군의 대원수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대단한 물건이었다.
‘게다가 이게 있어야만 자폭 버튼을 누를 수 있지.’
자국 군대의 함선을 폭파시키는 권한을 대원수라는 인물에게 쥐여 준 라켄롤 정부도 참 미련하지만, 정말로 자폭을 시켜 버리는 메이거스 대원수도 미련한 인물이다.
그래서 조명은 이번 회차를 시작하면서 처음부터 라켄롤 국민들의 손은 빌리지 않기로 결정했다. 단 한 명의 손도 필요 없다. 필요 없으니까 제발 가만히 있어주기만 하면 그걸로 충분했다.
‘내가 또다시 라켄롤 국민을 믿는다면, 그땐 머리 깎고 절로 기어 들어간다.’
단 한 번의 기대도 저버리지 않는 기가 막힌 통수.
라켄롤 국민들은 자신들을 돕는 사람의 통수를 치지 않으면 근손실이 일어나기라도 하는 건지, 모두가 빠짐없이 조명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그것도 열 번 이상이나!
그러니 이젠 됐다. 라켄롤 국민에게 어떤 기대도 하지 않으니, 이 작전이 끝날 때까지 얌전히 집에서 근력 트레이닝이나 해주길 바란다.
“좋아. 가축들을 그득그득 채워놨구만. 이러면 ‘생명 반응’이 엄청나겠지?”
모든 보안망이 해제되자, 조명은 헬멧에서 전선을 뽑아내 우주선의 계기판에 연결했다. 안전 모드는 통신이 불가능하지만, 이렇게 기계와 직접 연결해 주면 프로그램을 옮겨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날뛸 수 있었다.
빠르게 우주선의 시스템을 장악한 안전 모드는 통신이 불가능하다는 안전 모드의 벽을 깨버렸다. 통신이 가능한 우주선의 시스템으로 옮겨갔기 때문에 원격제어로 다른 우주선들을 통제하는 것도 가능했다.
[축산업이 활발한 각지에서 거둬들인 가축들을 태운 우주선 52기, 발사 준비 완료됐습니다.]“카운트다운 같은 거 셀 필요 없어. 준비되는 대로 모두 쏘아 올려.”
지금쯤 우주선 기지를 지키고 있을 국방군들은 한바탕 난리가 났을 것이다.
어느새 우주선의 화물칸을 가축들이 가득 채우고 있는 것도 모자라, 상층부의 명령도, 탑승한 인간도 없이 우주선들이 하늘을 향해 쏘아져 올라가기 시작했으니까.
“그리운 마이 스위트 홈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이윽고 조명을 태운 우주선 역시 그그그그그그, 하는 엄청난 진동과 함께 이륙했다.
지구의 형편없는 로켓에 비해 라켄롤의 우주선은 굉장히 스무스하게 대기권을 돌파했다. 지금 생각해 봐도 어떻게 이 바보 병신 머슬맨들이 이만한 과학기술을 보유할 수 있었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아무렴 어떠랴.
조명은 심드렁한 얼굴로 함장 전용 좌석에 늘어져 밝은 태양이 존재하는 우주의 광경을 구경했다.
라켄롤 행성 각지에서 쏘아져 올라간 우주선들은 안전 모드의 원격제어에 의해 일사불란한 움직임으로 한곳에 모였다.
그 모습이 흡사 바다에서 뭉쳐 다니는 정어리 떼를 연상시켰다. 차이가 있다면, 고래처럼 몸집이 거대한 우주선들이 라켄롤 행성의 차고 넘치는 가축들을 가득하게 싣고 있다는 것 정도.
라켄롤 행성은 머슬맨이 넘치는 만큼 식량 사정이 매우 좋았다. 국민들에게 완벽한 고기(단백질)를 지급하기 위해 어마어마한 양의 가축들을 합성 사료로 키우고 있었다.
그 우수한 과학기술력 덕분에 가축들에게 신선한 풀이나 곡물을 먹이지 않아도 문제가 없고, 환경을 훼손하지도 않았다. 채식주의자든 육식주의자든 라켄롤 행성에선 모두가 안전하고 배부르게 먹을 수 있다.
거기서 가축 좀 가져왔기로서니, 저들의 식량 사정이 갑자기 나빠지는 일은 없으리라.
[불명확한 다수의 개체들이 접근 중임을 확인했습니다.]“그것들이지? 죄다 끌어들여.”
에스의 증언에 따르면, ‘놈들’은 거대한 생명체의 반응에 이끌려 전 우주의 골디락스 존만 찾아다닌다고 했다.
라켄롤 행성과 마주하기도 전에 어마어마한 생명 반응이 느껴지는 우주 함대가 자신들을 지나치려 하고 있었다. 마치 먹음직스러운 고깃덩어리가 ‘나 잡아봐라’ 하고 놀리면서 도망치는 것과 같다.
“우주선을 가능한 이 태양계에서 멀리 떨어진 대규모 가스 행성으로 처박아 버려.”
[뒤쫓는 자들을 가스 행성에서 함께 폭파시킬 생각이십니까?]“그게 실패한다고 해도 라켄롤 행성은 이미 살아남았으니까 상관없어.”
밝은 태양계를 시커멓게 뒤덮으며 날아든 정체불명의 존재들이 우주 함대를 뒤쫓기 시작한 순간부터 2급 통제관들의 과오는 사라졌다.
무어라고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조명은 그들의 과거가 완전히 바뀌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건 인공지능인 안전 모드는 느낄 수 없는, 인간만의 ‘감(感)’이었다.
“이제 끝났으니까 집에 가자.”
안전 모드가 모든 우주선의 자동 항행 설정을 끝마쳤다. 이제 이 우주선들은 멈추는 일 없이 이 태양계를 가능한 멀리 벗어나, 외딴 가스 행성에 처박힐 것이다. 동시에 그 뒤를 따르는 놈들은 우주선의 폭발에 휘말려서 큰 피해를 입을 테지.
도중에 추격을 관둔다고 해도 상관없다. 작전 자체는 싱겁게 성공했으니까.
안전 모드를 도로 되돌린 조명은 우주선의 사출칸으로 튀어나왔다. 우주에서도 마찬가지로 일정 거리 이상 날아오르기만 한다면 즉시 헬 게이트 공간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에스 양은 어쩌실 겁니까?]“그런 게 있었어? 난 모르겠는데.”
조명은 이미 이곳에서 만난 모든 이들의 기억을 지워 버린 지 오래였다. 아무도 떠오르지 않는다. 떠올리고 싶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