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l Divers RAW novel - Chapter 98
헬 다이버즈 097화
97화
평소라면 눈을 뜨자마자 힘차고 강한 기상을 외치며 몸을 벌떡 일으켰을 것이다.
하지만 조명은 전신을 짓누르는 듯한 무거운 중압감을 느끼곤 바로 포기해 버렸다. 근육에 힘을 조금 넣는 것만으로도 안 아픈 곳이 없었다.
분명 자신은 고통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헬 다이버라고 생각했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마치 열 시간이 넘는 대수술이 끝난 중환자마냥, 전신에 연결된 각종 튜브들은 조명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무언가에 의해 뇌를 제외한 전신의 장기를 강탈당한 순간부터 자신의 몸은 더 이상 인간이라고 부를 수 없을 만큼 망가졌다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무엇 하나 이루어낸 것 없이 그곳에서 허무하게 죽어버리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처음 보는 통제관의 도움으로 어찌어찌 살아남긴 했다.
‘하지만 기껏 살아남고도 이런 신세라니…….’
라켄롤 국민들을 구하기 위해 지난 2개월간 미친 듯이 무리했다는 건 조명 스스로도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을 실패하기엔 어깨 위에 짊어진 짐이 너무나도 무거웠고, 짐을 떨어뜨리는 순간 자신이 원하던 행복한 미래도 덩달아 멀어질 것만 같은 불안감을 느꼈다.
그래, 평범하게 헬 다이버를 해도 언젠가는 행복한 미래를 꿈꿀 수 있겠지. 하지만 평범한 헬 다이버로는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
태생이 흙수저인 조명은 가능한 오랫동안 많은 것을 즐기고 싶었다. 열심히 일해서 다 죽어가는 말년에 즐기면 뭐 하나. 자신이 노력한 만큼의 반의반도 못 즐길 텐데.
그러니 통제관들의 도움을 받아 빠르게 모든 것을 가지고 싶었다.
가능한 오래오래, 자신의 인생이 억울하고 비참했던 것의 곱절만큼 많은 것을 즐기고 싶었으니까.
그래서 무리를 한 것이지만, 그 결과가 이렇게 이어질 거라곤 조명조차도 알지 못했다.
설마 자신이 헬 게이트에서 빠져나오는 순간에 습격을 당할 것이라고 어느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게다가 그건 우발적인 습격 같은 게 아니었다.
처음부터 조명이 헬 게이트에서 언제 빠져나오는지, 어디로 향하는지 전부 알고 있던 놈이 한발 앞서 선수를 친 것이다.
자신의 몸을 휘어 감싸던 투명한 촉수. 그건 매우 익숙한 감촉이었다.
‘처음부터 날 노리고 있던 거야.’
‘그 시간대’의 라켄롤 행성 인근을 맴돌며 조명이 도착한 시기에 맞춰 라켄롤의 군대에 일부러 잡혀주었다.
그런 후, 조명의 일거수일투족을 확인하며 기회를 노렸다. 직접 신체를 통해 접촉해 보기도 했으니, 얼마나 쉽게 제압할 수 있는지 조명의 전투력을 가늠하는 건 일도 아니었을 터.
이제야 생각이 좀 정리가 된다.
‘라켄롤 행성을 비롯해서 다른 행성들을 습격하던 건 에스와 같은 종족들이었어. 정확히는 전투를 위해 기생체를 심은 촉수 괴물과 정찰을 위해 기생체를 심지 않은 촉수 괴물로 나뉘었겠지.’
놈인지 년인지는 지금도 확실하지 않지만, 라켄롤 행성에서 인연을 쌓은 에스라는 녀석은 아마도 본체가 아닌, 단순히 정신체의 한 가닥에 불과한 연결체였을 것이다.
조명이 특정 시간대로 되돌아가 라켄롤 행성을 끊임없이 공략하는 것을 목격했을 것이고, 조명의 정신력과 체력이 극도로 소모되는 것을 기다렸다.
그리고 마지막에…….
‘분명 놈을 우주선의 화물칸에 가뒀지.’
하지만 탈출했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 조명의 뒤를 쫓아온 것이다.
‘내가 귀환하는 포인트를 정확하게 알았겠지. 애초에 그 시간대에서 내게 간섭할 정도라면… 처음부터 그 시간대의 존재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아.’
자신과 마찬가지로 현 시간대에서 헬 게이트와 같은 이차원 공간 너머를 통해 뒤틀린 시공간으로 뛰어든 존재. 혹은 그런 공간에서 살아가는 괴물.
어느 쪽이든 조명을 긴장하게 만드는 존재였다.
“후우.”
겨우 입 밖으로 한숨을 토해낸 순간, 조명은 문득 시선을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
익숙한 모습의 남녀가 가만히 서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 히사시부리.”
어색하게 웃는 얼굴로 인사를 건네자, 대답으로 돌아온 것은 눈앞까지 짓쳐 든 주먹이었다.
“환자라서 봐줬다.”
창환이 건들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무려 2개월 만에 본 녀석은 이전의 비쩍 마른 모습에 비해 좀 더 살과 근육이 붙어 있었다. 맵시 있게 차려입은 긴팔 와이셔츠 너머로 알 수 있을 만큼 다부진 체격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뒤에 서 있는 고지석과 정형찬, 그리고 정지윤은 흡사 악귀나찰과도 같은 형상으로 조명을 노려보았다.
“야, 편해 보인다?”
지윤의 퉁명스러운 한마디에 조명은 쾌적한 환경임에도 식은땀을 흘렸다. 생각해 보니 지금껏 팀원들을 잊고 있었다.
“어, 어어… 편해. 여기 침상 엄청 좋아. 어디 브랜드인지는 모르겠는데, 나중에 하나 사야겠다.”
“그래. 이참에 관도 하나 맞추는 게 어떨까? 내가 잘 아는 곳 하나 있는데. 아, 화장할 거니까 관은 필요 없나?”
당장에라도 태워 죽일 것 같은 기세인지라 조명은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한마디라도 더 했다간 리더고 나발이고 팀원들이 단체로 봉기를 일으켜 자신을 탄핵시킬 것 같았다.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부정적인 아우라에 ‘분기탱천’이라는 글자들이 날아다니는 것 같았다.
“네가 투자한 사업도 착착 진행되고 있어서 이번에 배당금이 짭짤하게 나올 것 같다고 알려주려 했거든. 그런데 정작 본인은 2개월간 돌아오지를 않더라고. 기업인인 내가 사업 파트너를 잃어버리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
평소 조명을 상대로 쓴소리는커녕 불평불만 한마디 한 적 없는 형찬도 이번에는 차가운 목소리로 힐난했다.
원래 투자자라는 양반들이 사업에 심하게 관여하는 경우는 드물지만, 형찬은 최소한 자신을 믿고 거액을 맡긴 조명이 자신의 사업에 관심 정도는 가져 줬으면 했다.
고작 지인이라는 이유로 냅다 거액을 투자한 것도 호구스러운데, 본인은 그게 불안하지도 않은지 허구한 날 헬 게이트로 뛰어들었다. 애초에 사업은 잘돼가냐는 질문조차 한 적이 없었다.
“아니, 그건… 형찬 선배의 사업 수완을 믿으니까…….”
“네가 내 사업 수완을 어떻게 아는데? 너, 내가 일하는 거 제대로 본 적이 있긴 하냐?
형찬의 날카로운 지적에 조명은 다시 한 번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생각해 보면 조명은 형찬에게 거액을 투자하고선 나 몰라라 하고 일을 하거나 놀기만 했던 것이다.
형찬이 몇 번인가 건넨 사업 기획서나 보고서?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지 싶어서 쳐다보지도 않았다.
“죄송합니다.”
“알면 됐어. 그래도 날 믿고 거액을 투자했다는 사실 자체는 순수하게 감사하고 있어. 단지 네가 사업이란 걸 허투루 보지 않았으면 하는 것뿐이야. 돈이란 건 있다가도 없는 것처럼, 사업이라는 것도 얼마든지 실패할 수도 있는 거니까.”
“주의할게요.”
왜 환자가 그런 일로 꾸중을 들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자신이 잘못한 건 맞기 때문에 조명은 잠자코 사과했다.
하지만 다른 팀원들은 여전히 2개월간 감감무소식이었다가 다 죽어가는 상태로 나타난 조명에게 불만이 많은 듯했다.
특히 평소에 과묵하기로 정평이 난 고지석도 이번만큼은 한마디 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보기만 해도 숨이 막히는 근육을 앞세워 조명을 몰아붙였다.
“네가 1팀의 리더인 이유는 우리 중에서 가장 기량이 뛰어나다는 이유도 있지만, 네가 우리를 이곳으로 이끌어주었다는 이유도 한몫한다. 그래서 널 1팀의 리더로 세우는 것에 이의를 가진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리더답게 우릴 잘 이끌어줬고, 매 탐사마다 괜찮은 수익과 성과를 올리면서 1팀 모두를 어엿한 헬 다이버로 성장시킨 건 네 역할이 가장 컸지. 하지만 지금의 널 보면, 차라리 우리 중 누군가를 리더로 삼아서 널 끌어내려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넌 리더이면서 팀원들을 걱정시키기만 하니, 리더의 입장을 역이용해서 묶어두는 편이 나을 것 같으니까.”
“…하지만 그건 하극상이잖아.”
“그래, 하극상이지. 하지만 팀원들을 2개월간 걱정시키면서 간신히 살아 돌아온 리더에게 우릴 탓할 자격이 있을까?”
없다.
팀원들 모두 조명이 어떤 임무를 맡았는지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리더를 잃을 준비가 된 것은 아니었다.
무려 2개월 동안 무소식이던 리더가 간신히 살아 돌아왔으니, 팀원들 입장에선 괘씸하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힘으로 리더를 도울 수 없다는 사실에 큰 자괴감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조명이 아무리 인간관계에 익숙하지 않다고 한들, 그 정도는 눈치챌 수 있었다.
팀원들은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해 주고 있다는 사실을.
‘그래. 생각해 보면 내 욕심이 너무 컸어.’
일이 안 풀리면 차라리 일단 한 번 복귀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통제관들과 좀 더 커뮤니케이션을 취하고, 팀원들과 브레인스토밍을 통해 다양한 아이디어를 제공받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적당한 휴식을 취해서 신체의 컨디션을 최적의 상태로 만들고 다시 최전선에 복귀해도 괜찮았다.
하지만 자신의 알량한 고집과 자존심, 그리고 의무감 때문에 2개월간 죽어라 헬 게이트 안에 붙어 있지 않았던가.
한 번쯤 복귀해서 자신은 무사하다는 걸 팀원에게 알려줄 수도 있었을 텐데.
자신의 일이 잘 풀리고 있으니 너무 걱정할 필요 없다고 해양 플랜트에 거주하는 모두를 안심시켜 줄 수도 있었을 텐데.
자신은 그러지 않았다.
그래서 저들은 자신을 탓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진심으로 걱정했으니까. 걱정하고 있으니까.
“미안.”
결국 조명이 내뱉은 건 짤막한 사과 한마디였다.
부귀영화에 미쳐 하마터면 일을 그르칠 뻔한 건 사실이다. 주변인들에게 걱정까지 끼쳤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게 당연하다.
“그래, 사과하니까 못생긴 얼굴이 좀 잘생겨 보이네.”
이제야 미소를 보여준 지윤이 조명의 볼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아, 하지 마.”
“흐지 마~”
“하지 말라고.”
“흐지 말라고~”
어쩌면 진짜 자신을 리더 자리에서 끌어내리려는 게 아닐까?
그런 의심 속에서 조명은 저녁이 되기 전까지 팀원들과 함께 지난날 동안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눴다.
면회 시간이 끝났다며 1004가 모두를 떠나보냈을 즈음, 조명은 차례차례 병실로 들어오는 1급 통제관들을 바라보았다.
분명 예전에는 5인 1조 꽁트 팀이었을 텐데, 5882를 비롯해 한 명의 통제관이 더 끼어들면서 7인의 1급 통제관 무리는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안뇽.”
희미해져 가는 의식 속에서 본, 특이한 1급 통제관의 모습은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평범하게 두툼한 흰색 방호복 차림이지만, 1004와 비슷할 정도로 왜소한 체구가 인상적인 상대였다.
“나는 1이라고요 해요. 올드 원(Old―One)이라고 불러도 좋아요.”
“올드 원은 늙어서 올드 원인 건가요?”
짝!
“방금 건 네가 잘못했다.”
벽에 기대서 있던 666이 뺨을 맞은 조명을 놀렸다.
“나이를 가지고 사람을 놀리는 건 아주 못된 짓이에요! 저쪽의 11500이나 할 짓이에요!”
“어르신이 늙은 건 사실 아닙니까?”
“벽보면서 손들고 서 있으세요!”
11500은 씩씩대면서 벽을 바라보며 손을 들었다. 저건 11500이 잘못한 것이라고 한마디 하려던 조명은 강제로 작은 손에 턱을 잡혔다.
분명 1004와 비슷한 체구임에도 불구하고 손의 힘이 어찌나 강한지, 만약 조명의 신체가 튼튼하지 않았더라면 턱이 빠질 뻔했다.
“음음, 다행스럽게도 개조는 잘된 것 같네요. 아주 좋아요!”
“실례지만, 뭘 말씀하시는지…….”
“더러운 오물로 가득 채워져 있던 몸을 이 올드 원이 말끔하게 처리해 줬다는 얘기예요!”
그제야 조명은 자신의 몸이 눈앞의 올드 원에 의해 이것저것 바뀌었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전신을 휘어 감싸고 있던 불쾌한 감각들이 눈을 떴을 때부터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 올드 원이 자신의 몸을 마구 파헤친 덕분에 다시 멀쩡한 몸을 되찾은 듯했다.
“감사합니다.”
“솔직하게 감사 인사를 하는 예의바른 아이는 좋아해요. 사탕 줄까요?”
“인간은 원래 인사를 잘합니다.”
“조용히 하세요, 11500!”
그 FM 냉혈한 11500이 올드 원을 상대로 꼼짝 못하는 모습을 보자, 조명은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저 싹퉁 바가지 통제관을 상대로 지금껏 어떻게 엿 먹일 방법이 없나 고민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의외로 그 방법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절로 스트레스가 해소되는 것을 느끼며, 조명은 얌전히 자신의 신체를 확인하는 올드 원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 솔직히 아래쪽까지 보여주는 건 좀 부끄러웠지만, 저 통제관에게 어르신이라 불리는 분이니 수치스럽지는 않았다.
“좋아요. 예후도 괜찮은 것 같고, 특별한 부작용도 발견되지 않았어요. 제 생애 처음 성공한 개조네요!”
“…예?”
생애 처음이란 건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실패가 있었다는 말인가.
또 얼마나 위험했다는 것인가.
그런 질문들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오기 직전, 올드 원은 조명의 관심이 쏠리는 이야기를 입에 담았다.
“그럼 이제 인간의 두 눈으로 직접 본, ‘종말을 이끄는 자’에 대해 얘기해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