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l special! Dungeon Master RAW novel - Chapter 108
108
노스라인 성의 그 누구도 우리에게 무언가를 더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아모스 왕자를 구해 준 것, 그리고 얼음 유적을 공략해 줬다고 해서 앞으로 벌어질 내전에서도 활약을 부탁드립니다, 라고 할 사람은 없는 것이다.
물론 나도 얼마나 길어질지 알 수 없는 전쟁에 매달려 있을 생각 따위 없었다.
억울하게 누명을 쓴 자를 구한 것은 그 일 자체로 의미가 있었고, 일반인들에게도 피해를 주는 던전 문제를 해결한 것 또한 모험가 흉내를 내는 우리의 영역과 겹치는 부분이 있으나, 앞으로 벌어질 일들은 전혀 아니었다.
어디인지도 모를 합의점을 찾기 위한 지난한 정치적 신경전이 될지, 아니면 극단적인 무력 다툼이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이제는 우리가 나설 일들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리엔만큼은 지난 며칠간 당장 내일이라도 전쟁터에 나서야 하는 지휘관의 얼굴을 하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아마도 자신이 한 일로 인해 내전으로 번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부채 의식과 그렇다면 최대한 빨리 내전을 종식시키기 위해 뭐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 것일 터.
그러나 나는 그녀를 알고 있었다.
리엔이 전쟁터에 서게 된다면, 그녀는 분명 죄 없는 자들의 죽음에 서서히 마모되어 갈 것이다.
아모스 왕자를 데리고 탈출할 때 마주친 마법사의 머리부터 터뜨리고 본 나와 병사들을 죽이지 않고 제압한 리엔의 차이였다.
해서 나는, 딱 모험가 흉내를 내는 선에서 물러나기로 한 것이다.
“그래도 될까……? 미약하긴 하겠지만 조금이라도 빨리 상황을 종식시키는 편이…….”
역시나 내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는 대답을 하는 리엔.
나는 그런 그녀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 정도면… 병이었다. 정의의 용사 바이러스에 감염된 용사병 말기 환자 말이다.
“우리가 아니었어도 상황이 더 나아지진 않았어. 아모스 왕자는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 희생되는 게 아니라 혼란을 야기하기 위해 선택된 희생양이었으니까.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를 구한 것 때문에 내전이 벌어지는 거라고는 할 수 없어.”
그리고 따로 덧붙이진 않았지만, 우리가 더 이상 깊게 관여하는 것은 오히려 아티프가 허락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신분을 감춘 때라면 또 몰라도, 타국의 귀족인 것을 넘어서 라메리안 왕국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대마도사의 제자가 자국의 민감한 사안에 깊게 얽히는 것을 바라지는 않을 테니까.
그러나 이런 정치적인 이유를 근거로 리엔의 마음을 편하게 해 줄 수는 없다는 것을 알기에, 나는 그녀의 입맛에 맞을 만한 것을 들이밀었다.
“최악의 경우에는 내전… 그게 아니더라도 험악해지는 분위기만큼 평민들은 더 힘든 시기를 보내게 될 거야. 완전히 손을 쓸 수 없는 순간이 되기 전에 환부를 도려내는 과정이라고 해도, 그것을 감당해야 하는 사람들이 기꺼워하진 않겠지.”
내 말대로, 네즈빌 왕국은 곪을 대로 곪아 있는 환부를 도려내야 하는 상태였다.
완전히 죽어 버리기 전에 수술은 해야 하는데, 그게 언제가 되느냐의 문제였을 뿐이다.
하지만 모든 수술이 그러하듯 환자의 상태가 안 좋을수록, 그리고 수술의 규모가 클수록 생존율은 물론이고, 수술 경과 또한 안 좋아지기 마련.
수술실에서 바닥에 버려지는 피가 될 가장 약한 자들에게 이번 위기는 정말 크게 다가올 것이다.
리엔의 생각은 환자가 과다 출혈로 죽기 전에 최대한 빨리 수술을 끝내자는 것에 가까웠다.
하지만 우리가 전장에 서 있음으로써 종식에 가까워지는 긍정적인 영향이 얼마나 될까.
아마 그리 큰 영향을 주기는 힘들 것이다.
당장 이 성에 있는 자들만 따져도 나나 리엔보다 훨씬 강한 자들이 심심찮게 돌아다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우리는 강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나이에 비하면, 이라는 단서가 붙을 때의 이야기.
이들이 고전하던 얼음 유적을 공략할 수 있었던 것은 방법과 효율, 운의 문제지, 힘으로 찍어 누른 것이 아니었다.
차라리 내가 간접적으로 끼칠 수 있는 영향이 훨씬 클 것이고, 그건 굳이 내가 냄새나는 사내놈들로 가득한 전쟁터에서 시간을 허비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다.
“차라리 다른 방향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걸 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다른 방향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반문하는 리엔에서 나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내전이 벌어지면 양쪽 모두 총력을 기울일 거고, 그건 곧 대규모 징집이 동반될 거란 뜻과 마찬가지지. 그렇게까지 상황이 나빠진 곳에 모험가들이 남아 있을까? 아마 그 전에 전부 다른 나라로 사냥터를 옮기겠지. 그러면…….”
“…아무것도 아닌 몬스터들이 재앙이 되겠군.”
리엔이 내 말을 받았다. 아주 심각한 얼굴로.
나는 그녀의 예상이 맞았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나머지 말을 이어 갔다.
“원래대로라면 잠재적인 위험 요소들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영지를 나서는 것이 영주의 역할이지만, 지금까지 본 영지에서 그런 걸 바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리엔은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우습게도 지금까지 겪은 모든 곳 중에서 노스라인 성이 가장 생기 넘치는 곳이라는 점에서 네즈빌 왕국이 얼만 병들었는지를 알 수 있다.
륑겐 백작이 저지른 일이 지저분해서 악당처럼 보일 뿐이지, 유리 같은 권력을 지키기 위해 평민을 쥐어짜 힘을 불리던 것은 이 나라 귀족 전체의 행위였다.
그런 이들에게 평민에 대한 배려를 바라는 건 사치였다.
“지금도 모험가들이 상주하지 않는 변두리 마을은 돈을 모아 주기적으로 모험가를 고용하거나 자신들끼리 목책을 세우고 자경단을 꾸리는 것으로 몬스터들을 상대하는 실정이야. 그런데 그런 곳에서 젊은 남자들이 싹 사라지면… 보나 마나 결과는 끔찍하겠지.”
리엔은 가뜩이나 고민하는 와중에 내가 새로운 문제를 제시하자 머리가 아픈지 미간을 찌푸렸다.
“겨우 우리 둘이 전쟁터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을 거야. 하물며 우리는 타국의 귀족이니 쓸데없는 견제를 당하게 될 거고, 그렇게 되면 더욱 할 수 있는 게 사라지겠지. 하지만 당장 고블린 따위에게 습격당해 몰살당할지도 모르는 자들에게는 많은 것을 해 줄 수 있어.”
“솔직히… 네 말을 따르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커. 그래서 더욱 잘 모르겠다. 그저 내가 짊어져야 할 책임에서 도망치려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도망쳐. 그러라고 해 주는 말이니까. 네가 서려는 전장은 야만족과 싸울 때와 다른 전장이 될 거야. 적의 절대다수가 억지로 끌려온 징집병들이고, 병사들도 그저 먹고살기 위해 영주 밑에서 사병 노릇을 하는 평범한 사람들이 네 적이 될 거라고. 증오로 가득 찬 광전사도 아니고, 신념을 갖고 전쟁에 뛰어든 투사도 아냐.”
나는 흔들리는 눈동자를 한 리엔을 똑바로 바라보며, 진심이 섞인 말을 꺼내 놨다.
“나는 네가 그런 자들을 죽여 가면서 슬퍼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아. 무력하게 죽어 갈지도 모를 사람들을 구하는 게 절대 의미 없는 일이 아니란 건 네가 가장 잘 알잖아. 굳이 고통스러운 길을 걸을 필요는 없어.”
그런 평범한 자들을 희생시켜 가면서 한쪽에 힘을 실어 주는 행위는… 나 혼자만으로 충분했다.
나는 내 울타리 안에 들어온 친구가 자신이 한 행위로 인해 더욱 빛나는 사람이 되길 바라지, 위정자들의 숫자놀음 속에서 점점 마모되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더러운 것들 안에서 빛을 잃기엔 그녀라는 보석은 지나치게 맑고 투명하다.
그런 면에서, 내가 내놓은 선택지는 아주 이상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곤란한 사람들을 돕는다는, 리엔의 이상에 가장 부합하는 행위였고, 그러면서 돌아다니는 던전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으니 애당초의 목적에도 부합했다.
거기에 더해 전쟁에 영향력을 행사하고플 때는 네즈빌 왕국 내에 퍼져 있게 될 던전들을 이용하면 될 일.
어느 것 하나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보이는 계획이었다.
“네 말대로 할게……. 그리고… 고맙다.”
그렇게 대답하는 리엔의 얼굴에는 편안함과 탈력감이 동시에 담겨 있었다.
* * *
내 예상대로, 아티프는 어디까지나 우리를 모험가로서 대했다.
아모스 왕자를 구한 것과 얼음 유적 문제를 해결해 준 것은 고맙지만, 이제부터 일어날 일들은 자신들의 영역이라는 것을 은연중에 내비친 것이다.
겨우 몸을 추스르고 일어난 후의 만남에서 아티프는 이렇게 말했다.
‘그대들은 이미 우리에게 너무 많은 것을 해 줬네. 나는 미래를 볼 수 없어 이제부터 네즈빌 왕국이 어떻게 흘러갈지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지금보다는 나은 왕국을 만들기 위해 노력할 생각이야. 언젠가 그대들이 다시 이 땅을 밟았을 때, 나와 내 동생에게 주었던 도움이 후회되지 않도록 말일세. 지금은 여건이 안 되어 어쩔 수 없으나, 언젠가 내 도움이 필요한 날이 온다면 꼭 다시 찾아 주길 바라네.’
얼핏 듣기에는 고마운 감정이 묻어나는 말들이었으나, 우리와 선을 긋는 것이기도 했다.
우리의 배경이 그저 실력 좋은 모험가였다면 은근히 추가적인 도움을 바랐을지도 모르지만, 그러기엔 내 배경이 너무 껄끄러웠을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모험가들이 받았다고 생각하면 지나치게 큰 금액의 돈도 선을 긋는 것에 포함된 일일 것이다.
그것은 같은 자리에 있던 리엔도 느낄 수 있는 부분이었고, 대화가 마무리된 직후에 그녀는 ‘어차피 우리는 부외자라는 걸 잊고 있었다. 나 혼자 고민해 봐야 소용없는 것을……. 루크, 너는 이런 것까지 예상하고 그런 말을 했던 거구나.’라며 씁쓸함을 내비쳤다.
륑겐 백작에 비해서는 훨씬 나은 사람임에 틀림없을 아티프조차도 희생될 사람의 목숨과 이후 있을지 모를 골치 아픈 문제를 저울질하는 것이 안타깝다는 듯이.
저녁에는 얼음 유적을 함께 공략했던 파티원들과 조촐한 식사를 했다.
얼음 유적 공략을 자축하는 자리였지만, 유일한 희생자인 가일 릭토르를 기리는 자리를 겸했기에 분위기는 가볍지 않았다.
그리고 그 자리가 마무리된 후에 우리에게 주어진 방으로 돌아갈 때, 어두운 복도에 기대어 우리를 기다리는 아모스와 마주쳤다.
“…떠나신다 들었습니다.”
아쉬움과 미안함이 잔뜩 묻은 얼굴을 한 아모스의 첫마디.
나는 그런 그를 향해 피식 웃으며 말을 받았다.
“할 일을 마쳤으니 다음 목적지를 향해 떠나야죠. 기사 수행이란 게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언제쯤 떠나실 예정이신가요?”
“막힌 길이 열리는 대로 떠날 생각입니다.”
“그리 멀지 않았군요…….”
아모스의 마지막 말은 나나 리엔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독백에 가까웠다.
그 독백에 가까운 말을 끝으로, 우리 사이에는 짧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아모스는 말이 없었고, 나는 그에게 별로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침묵을 깬 것은 리엔이었다.
그녀는 왕자에게 가까이 다가가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모스 왕자님.”
“네, 넷!”
아모스가 갑자기 가까이 다가온 리엔을 보고 깜짝 놀라 말을 더듬는다.
하지만 리엔은 그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흔들림 없이 말을 이었다.
“네즈빌 왕국에 앞으로 찾아올 위기는 그리 가볍지 않을 것입니다. 부외자인 저희들은 나름대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을 테니, 격랑의 한가운데 서 계실 당신께선 그곳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당신의 목숨을 구하는 데 작게나마 힘을 보탠 이의 부탁입니다.”
“…저는 루크 님이나 리엔 님처럼 재능이 넘치지도 않고, 그렇다고 마음이 강하지도 않습니다. 이런 제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리엔은 자신의 나약함에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힘겹게 말을 내뱉는 아모스를 향해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뇨, 당신께선 나약하지 않으십니다. 일전 도적들이 추가적인 피해를 야기하기 전에 처벌해야 한다고 했던 저를 막고, 대안을 만들어 그들을 살린 것은 왕자님이셨습니다. 그런 당신이라면 분명 수많은 대안을 만들어 내실 수 있을 겁니다.”
리엔의 전매특허인 중 하나인 강제로 칭찬하기가 나와 버렸다.
도적들은 어차피 백작한테 처형당해서 광장에 효수됐는데, 하고 생각해 버린, 감정이 말라비틀어진 나와는 달리 유약한 소년에게는 과한 처방이었다.
아모스가 필사적으로 숨기고 싶었을 감정이 물기 어린 눈에 드러난 것이다.
자신에게 올곧은 눈빛을 보내는 소녀를 마주한 그의 눈에서는 애틋함이 묻어나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