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l special! Dungeon Master RAW novel - Chapter 130
130
무력하다.
내가 아니라 적이.
지저인들은 천천히 전진하는 몬스터 부대를 어쩌지 못했다.
전투 없는 무혈입성이 이어졌다.
지저인들은 여리다.
종족 전체가 동족의 죽음에 지나치게 민감하다.
그런 약점은 나 같은 적을 상대로 너무나 치명적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덕분에 넉넉한 인질을 동반한 데스나이트들은 무혈입성을 이어 가고 있었다.
길을 막아서는 지저인들의 분노가 메시지가 되어 눈앞을 가렸지만, 그런 놈들도 3초 간격으로 바닥으로 굴러떨어지는 동족의 머리를 보면 바로 뒤로 물러났다.
지하 세계에 내디딘 걸음의 숫자를 지저인의 머리로 샀다.
열 걸음을 걷는데 하나가 필요하면 하나를 벴고, 열이 필요하면 망설임 없이 열을 벴다.
그렇게 지저인들의 인구 밀도는 올라가고, 반대로 내 구역은 늘어가고 있을 때.
나는 다음 공격을 개시했다.
* * *
내 앞에 꿇어앉은 수십의 지저인들.
반항하다 붙잡힌 거주구에서 골라낸 암컷들이다.
한마디로 내가 걷기 위한 길을 만들기 위해 쉴 새 없이 목이 달아나고 있는 놈들이다.
임시로 포로들을 몰아넣은 거주 구역에서 계속해서 끌려 나가는 놈들의 운명은 굳이 숨기지 않았다.
아니, 포로들을 담당한 신비에게 명령하기까지 했다.
‘너희들은 자신의 주인에게 반항한 대가로 야금야금 죽어 갈 것이다’라고 전하라고 말이다.
효과는 아주 좋았다.
죽어 가는 놈들은 물론이고, 다른 포로들까지 언제 끌려 나갈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끌려 나간 동족들의 죽음에 슬퍼하며 많은 네거티브 포인트를 쏟아 낸다.
“…정말 그렇게만 하면 살려 주시는 거죠?”
나이가 어린가?
아니면 단순히 덩치가 작은 걸까.
암컷만 모아 놓은 곳에서도 눈에 띄게 왜소한 지저인이 의심, 공포, 증오가 적절하게 섞인 목소리로 묻는다.
“그래. 시킨 일만 제대로 하면, 적어도 너희 거주 구역 출신은 살 수 있다.”
“다른 거주 구역 사람들은…….”
“내게 칼을 겨눈 대가를 계속해서 치러야지.”
“…….”
“하지만 이번 일만 잘 풀리면 또 달라질 수도 있다.”
당장 자신과 가족, 이웃 사람이 죽게 생긴 와중에 다른 동네마저 걱정하다니.
이걸 이타적이라고 해야 하나.
그렇다고 보기에는 목숨 이외에는 또 이기적인 면을 보이곤 한다.
지금까지 관찰한 결과, 지저인들은 단순하다.
칼을 쥐여 주고 하나를 죽이라고 하면 차라리 자살을 한다.
그러나 하나를 죽이는 게 열을 살리는 길이라고, 죽이지 않으면 나머지 열을 죽이겠다고 하면, 망설이기는 하지만 결국에는 죽이는 놈들이 많았다.
본능적인 단계에 한 마리라도 더 많은 숫자의 종족이 살아남아야 한다는 인식이 박힌 것 같은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처형당하는 동족 때문에 물러나고, 또 물러나고 있는 놈들도 언젠가는 폭발할 것이다.
이대로는 종족 전체의 씨가 말라 버릴 수도 있다고 느끼는 순간 대대적인 반항을 시작할 테니까.
그래서 나는 그 종족적인 본능이 나를 향해 이빨을 들이밀기 전에, 그것을 역으로 이용하기로 했다.
나는 [말 많은 자의 귀와 입술]을 꺼내서 던졌다.
“라치호에게 그것을 전해라.”
* * *
[말 많은 자의 귀와 입술]을 라치호에게 전하게 하기 위해 지저인들을 풀어 주고 하루가 채 지나지 않은 시간.잠시 눈을 붙이고 있는데, 다급한 발소리가 나를 깨웠다.
“마스터, 마스터! 입술이 뭐라고 떠드는데요?”
벌써 라치호에게 전해진 건가.
나는 피곤한 눈을 비비면서 벨로제의 손에 들린 입술과 귀를 받아 들었다.
“요란한 부하를 두었군.”
잘려 있는데도 촉촉함을 잃지 않아 기분 나쁜 입술이 달싹이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확실히 호들갑이 심하기는 하지.”
내가 할 말을 저쪽 입술에 전하는 건 말랑말랑한 귀.
나는 말랑말랑한 귀에다 대고 할 말을 했다.
“나에게 할 말이 있다고 들었다.”
“네가 라치호인가? 시꺼먼 지저인들을 이끄는.”
“그렇다. 내가 라치호다.”
라치호의 태도는 일견 착 가라앉은 것처럼 침착해 보였지만, 조금 더 밑에는 지옥에서 끌어올린 것 같은 분노가 느껴졌다.
하긴, 동족이 죽는 것이 무서워서 전투도 제대로 못 하고 전멸당한 종족의 우두머리다.
전진할 때마다 지저인의 목을 슥슥 베면서 걸어가는 놈들의 주인이 나라는 것을 들었을 테니 속이 말이 아니겠지.
“설마 죽음에서 걸어 나온 것들을 뒤에서 조종하는 것이 인간이었을 줄이야……. 언젠가는 이렇게 될 것 같았다. 지상인들의 욕망이 이곳까지 미칠 것을 알고 있었다…….”
“나도 누군가의 앞잡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렇지 않겠나. 나는 본 적 없으나, 선조들이 전한 이야기는 남아 있다. 지상은 지나치게 풍요롭고, 그만큼 수많은 지상의 존재들이 있다고. 너에게 들켰으니, 이제는 지상의 것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들이 끊임없이 내려오겠지.”
“나는 아직 이곳의 존재를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았다. 그리고 네가 나에게 협조한다면 앞으로도 함구할 것을 약속하지.”
“동족을 무참히 살해하고 있는 놈을 믿으란 것이냐.”
라치호의 지독한 불신과 분노가 글로써 표현된다.
그리고 나는 그가 뱉어내는 네거티브 포인트의 양으로 그의 힘을 가늠할 수 있었다.
라치호는 강하다.
정예 데스나이트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그의 부하들보다 차원이 다를 정도로.
이것을 이용해야 한다.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니까. 내가 포로를 죽이는 것은 내 앞을 가로막은 너희 때문이다. 물론 어서 오십시오, 하고 비킬 수야 없겠지. 남은 동족들의 목숨도 중요할 테니. 내 목적 또한 모를 테고.”
“목적? 우리를 밀어내고 이곳마저 차지하는 것이 네놈의 목적 아닌가?”
어차피 내 입으로 말해 줄 것이라 살려서 풀어 준 자들에게 내 목적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라치호의 대답은 너무나 순진했다.
살고 있는 본인들도 척박하다고 느끼는 땅을 위해 이 정도 일을 벌일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물론 나는 네거티브 포인트라는 자원을 캘 수 있으니 충분히 저지를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건 해도 된다는 뜻이지, 해야 한다는 아니다.
땅의 심장이 아니라면 굳이 이곳을 노릴 필요는 없다.
“너희들을 공격하는 건 목적이 아니야. 걸리적거리는 걸 치우려는 것뿐이지.”
“…….”
대답은 없었으나, 건너편에서 라치호가 분노를 참아 넘기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고민하고 있었겠지? 내게 잡힌 포로들을 살리는 것은 불가능한 것 같고, 이대로 가다가는 남은 지저인들도 위험하게 생겼으니……. 잡힌 포로의 목숨을 포기하고 저항을 시작해야 할지 말지를.”
“…….”
대답이 없다.
그러나 라치호는 내 말을 토씨 하나 빼놓지 않고 듣고 있을 것이다.
분노 때문이든 내게 잡힌 포로 때문이든.
그리고 그에게도 정보 한 조각이 아쉬운 때일 테니.
“포기해. 너와 함께하는 놈들이 강하고, 너는 그보다 훨씬… 한 차원 다르게 강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게 위협이 되는 것은 아냐.”
“…너도 우리가 두려우니까 이런 비겁하고 잔인한 방법을 써서 핍박하는 것이 아닌가? 네 말이 맞다. 결국 모두가 죽는 것보다는…….”
라치호는 차마 뒷말을 잇지 못했다.
아직도 갈등하는 건가.
그렇다면 갈등을 덜어 줘야겠다.
아니, 더 머리 아프게 만드는 건가.
뭐, 상대 머리가 아픈 것까지 신경 써 줄 필요는 없겠지.
“대지의 축복. 너희들이 그렇게 부르는 것의 비밀을 너는 알고 있다고 들었다. 그리고 아마 그것이 내가 찾는 것과 관련이 있을 확률이 높은 것 같고.”
라치호의 거친 호흡이 순간적으로 멈췄다.
적잖이 놀란 모양이다.
“네놈들이 대지의 축복이라 부르는 것은 아마도 강력한 마력원에 의한 신체 변이겠지. 마치 짐승들이 마력에 의해 변이되어 몬스터가 되는 것처럼. 그렇지 않나?”
“…….”
“대답하지 않으면 내일쯤 사지를 자른 시체 50구쯤 보내 주도록 하겠다.”
“이……!”
내 말에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던 라치호가 이를 간다.
그러나 지금 칼자루를 쥔 사람은 나다.
“어떻게 그것의 존재를 알아냈는지는 모르지만, 그건 너 같은… 아니, 우리가 탐낼 것이 아니다. 자연을 상대로 욕심을 부리면 파멸만이 기다릴 뿐이다.”
그게 뭔지도 모르는 놈이.
물론 섣불리 건드렸다가는 X 될 확률이 높은 것은 맞지만.
“너도 그것을 이용하고 있었던 것 아닌가?”
“우리는 자연이 주는 것을 받을 뿐 더한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나는 내가 원하는 걸 손에 넣기 전에는 물러날 생각이 없어. 네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나는 뒤에서 조종만 할 뿐이니 내게 닿을 수는 없을 거다. 계속해서 괴롭히고, 또 괴롭힐 수 있지. 너희들이 모두 죽거나 참지 못하고 다른 길로 지상으로 도망칠 때까지.”
대답이 돌아오기 전, 나는 한마디를 더 붙였다.
“네 선택에 수많은 목숨이 걸려 있다. 잘 생각하고 대답하는 게 좋을 거야.”
“…그건 우리 것이 아니다. 그냥 그곳에 존재할 뿐. 옮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알지.
예언자의 손이 보여 줬으니까.
“방법은 내가 알려 준다. 너는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돼. 그러면… 포로도 모두 풀어주고, 남은 자들의 목숨 또한 보장하지.”
“그것을 어떻게 믿으란 말이냐…….”
“내가 너에게 믿음을 줄 필요가 있나? 네 도움 없이도 언젠가는 내 손으로도 손에 넣을 수 있어. 그저 조금 더 빨리, 더 편하게 일을 처리하려는 것뿐이지. 자, 선택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전쟁이냐, 아니면 나를 돕고 죽어 갈 동족의 숫자를 줄일 거냐.”
라치호는 갈등이 심한지 대답을 하지 못했다.
머리가 엄청나게 복잡하겠지.
내가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르겠고, 땅의 심장에 문제가 생기면 대지의 축복도 더 이상 없을 테니 종족 전체가 손해를 볼 테니까.
하지만 지금 당장 고를 선택지는 두 가지뿐이다.
심사숙고할 시간이 있다면 다른 길을 찾아낼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런 시간을 주지 않을 거니까.
“…내가 어떻게 해야 되는지 말해라.”
됐다.
라치호의 힘없는 대답을 들은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일단 너에게 안내할 놈을 한 명 보내. 내 부하를 대동하고 돌아갈 놈을.”
“…좋다.”
“그리고 내 부하를 네가 아는 장소로 데려가면 된다. 네 부하들과 함께.”
“그런 다음에는?”
“네가 알고 있는 그것. 땅의 심장을 깨워 본래의 모습으로 돌린다.”
“…그 후에는 어떻게 되지?”
불안함이 가득 담긴 질문.
하지만 나는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지상으로 도망가도 소용없다. 라치호, 너는 종족을 위해 전쟁을 준비했다고 했지만, 정작 너희 앞마당이나 다름없는 지하에서, 내 침략조차 막아 내지 못했지. 위쪽에 너희들에게 허락된 곳은 없다. 그리고 내가 물러나지 않으면, 지하에서도 곱게는 못 살겠지. 나를 믿을 수 없고, 불안한 것은 알겠지만… 딱히 너에게 선택권은 없어.”
“…….”
“너는 그저 내가 물러나길 바라면서 협조하는 수밖에 없다. 그나마 이 상황을 끝낼 수 있는 건 지금 너뿐이야, 라치호.”
더 이상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몇 시간 뒤 데스나이트들이 점령한 곳으로 라치호의 부하가 걸어오고 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