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l special! Dungeon Master RAW novel - Chapter 132
132
도도히 흐르는 마력은 생물로 따지자면 혈액이다.
땅의 심장은 그 흐름이 막힌 곳에 뭉친 혈액 덩어리.
생물에게 일어난 일이었다면 혈관이 팽창하다 터져 나갔을 현상이다.
평범한 경우였다면 자연스레 뭉친 마력은 무언가에 해소되며 흩어지거나 마력이 짙은 장소를 형성하는 데에 그쳤어야 한다.
그러나 땅의 심장은 오랜 세월 이어진 우연과 필연이 겹쳐, 흩어지지 않는 마력 덩어리가 됐다.
선악의 구분도, 어떤 의지도 없는 그저 순수한 대지의 마력 덩어리.
그런 하얀 백지장에 마령의 정수를 던져 넣은 것이다.
땅의 심장은 지금 의지라고 부를 것도 못 되는 처절한 파괴 본능만 갖춘 괴물이 됐다.
정작 그런 괴물의 가슴팍에 파묻힌 라치호는 그런 것은 알지도 못했고, 안다 해도 고민할 여유가 없었다.
압도적인 파괴력 앞에 서 있음에도, 라치호의 머릿속에는 오직 하나의 생각만이 가득했다.
‘침묵시킬 수 있다.’
짧지 않은 세월을 종족을 위한다는 명목 아래 갈고닦은 힘.
그리고 지금도 자신을 따르고 있는 동료들.
거인의 몸짓 하나하나가 위협적이다.
맑고 깨끗하던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탁하고 거대한 마력이 가득 실린 주먹질은 동공만이 아니라 지하 세계 전체를 무너뜨릴 것 같은 기분마저 느껴진다.
그래도 충분히 맞설 수 있다.
갈고닦은 육체와 대지의 축복을 가득 담은 일격을 꽂아 넣을 수 있으니까.
라치호는 흉포한 기운을 내뿜는 거인보다는 악마 같은 목소리로 속삭이던 놈이 훨씬 두려웠다.
어디 있는지, 언제까지 자신들을 괴롭힐 생각인지, 무슨 꿍꿍이를 가졌는지…….
그 무엇도 읽을 수 없는 상대가 두려웠다.
그래서, 믿어서는 안 될 것 같은 목소리에 응하고 말았다.
정말… 자신의 손으로는 그 악마의 수작에서 종족을 건져 낼 자신이 없어서.
라치호는 살짝 흐릿하던 시야를 또렷하게 만들기 위해 눈을 부릅떴다.
다시 밝아진 시야.
아니, 밝지는 않았다.
아직도 파고든 거인의 가슴팍에 처박혀 있었으니.
“흐아압!”
라치호는 기합을 지르며 몸을 팽창했다.
맑은 대지의 마력이 뿜어져 나오면서 펑 하고 가슴팍에 균열을 만든다.
거인의 덩치에 비해서는 형편없는 충격이지만, 라치호가 빠져나오기엔 충분했다.
“라치호 님, 무사하셨군요!”
밖으로 나온 라치호를 반기는 지저인들.
라치호는 그런 그들을 보며 말했다.
“내 선택에 너희들을 끌어들여 미안하다……. 하지만 내 아둔한 시야에는 이 길 말고는 다른 길이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거대한 괴물을 상대하는 것이 보이지 않는 의지를 상대하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그저 무거운 짐을 지기 싫어 도망치는 것일지 모르지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희가 라치호 님을 따르기 시작한 게 언제입니까. 지상의 꿈을 꾸자고 헛소리를 하시던 때부터입니다.”
씨익 웃으며 말하는 지저인은 라치호와 처음부터 함께했던 인물이다.
“라치호 님은 헛소리를 한 대가로, 저희는 헛소리를 믿은 대가로 이러고 있는 겁니다. 멍청이들은 몸이 고생을 해야죠.”
그 말에 라치호는 마음속에 거북하게 자리 잡은 의심을 잠시 덮어 놓기로 했다.
여기서 죽음을 각오했지만, 아무래도 아직 죽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마음을 편히 먹을수록 책임감이 강해진다.
“모두 들어라! 지금부터 거인을 사냥한다! 지상을 꿈꾼 우리들이다. 우리 앞마당에 있는 것 하나 해결 못 할 리가 없지. 그러니 더 이상 죽지 마라! 종족을 연명하고자 한 선택이나 확실치 않은 미래다. 악마에게 자비를 구걸했고, 약속 받았다. 그러나 악마를 믿고 우리가 다 죽을 수는 없는 일. 다시 싸울 수 있도록, 또 한 번 목숨을 걸 수 있도록, 지금은 죽지 마라!”
라치호는 말을 마치자마자 대검을 일자로 들어 올렸다.
쿠웅.
라치호의 발이 지면을 뭉개며 균열을 만들어 냈다.
과도하게 뭉친 대지의 마력이 그를 더욱 무겁고 강력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것에 맞춰, 그가 쥐고 있는 대검에 호박색 마력이 쌓여 간다.
한 겹, 두 겹, 세 겹…….
빠른 속도로 겹쳐지는 호박색 검기는 더더욱 커지고 있었다.
“라치호 님을 보호해라!”
그것을 본 지저인들을 거인의 신경을 돌리기 위해 더욱 필사적으로 공격을 감행했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지저인들이 거대한 먹이를 사냥하는 개미들처럼 거인의 살점을 조금씩 물어뜯는다.
콰아앙!
마찬가지로 호박색으로 물근 병장기를 든 수십 명의 지저인들이 뭉쳐 거인의 주먹질을 막아 내기도 했다.
부상은 당했으나 움직임은 봉쇄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리고 그사이 완전히 호박색 불길에 휩싸인 라치호가 외쳤다.
“비켜라!”
웅장하게 울린 목소리 뒤로, 거대한 호박색 대검이 거인의 가슴팍을 향해 추락했다.
그래, 그건 추락이라 표현하는 게 알맞을 것 같은 참격이었다.
콰드드득.
라치호의 영혼을 불사른 공격은 거인을 이루는 암석의 절반을 녹여 냈다.
* * *
“미쳤네.”
화면 너머에 보이는 광경은 감탄보다는 안도의 한숨이 나오게 하는 것이었다.
저놈을 이렇게 써먹어서 다행이다.
내 몬스터들로 어떻게 해 보려 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이런 생각이 먼저 떠오르는 것이다.
그만큼 라치호는 강력했다.
만약 라치호가 정치판에 익숙한 음흉한 놈이었다면, 인간이었다면, 동족의 희생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혁명가 타입이었다면…….
내 어설픈 계획이 실패할 경우의 수는 너무나 많았다.
아니, 성공할 경우의 수가 단 하나만 존재했다고 해도 좋을 거다.
상대가 멍청한 몽상가일 경우.
나에겐 아주 다행스러운 일이었지.
라치호 하나가 아니라 놈들 따라다니는 놈들 전체가 몽상가 집단이었으니.
거인이 거대한 호박색 검에 반신이 녹아내려 쿵 하고 무릎을 꿇었다.
‘슬슬 시작해 볼까.’
아직 멀쩡한 지저인들이 많긴 하지만, 다 방법이 있으니까.
[대지의 흐름이 머무는 곳을 던전화하시겠습니까? …….]이번에는 네임드 몬스터를 운운하거나 던전 차지가 불가능하다는 글귀는 보이지 않았다.
거대 몬스터가 출몰했어도 여긴 던전이 아니란 뜻이겠지.
그렇다면 일단 땅의 심장이 있는 동공 전체에 내 영역이라는 증표를 남겨야 했다.
1.5억이 훌쩍 넘는 요구 포인트가 잠시 눈에 밟혔지만, 망설임은 잠시뿐이었다.
포인트야 다시 벌면 그만이고, 앞으로 쭉쭉 모이겠지만, 이만한 몬스터를 놓치면 언제 또 기회가 올지 모르니까.
네거티브 포인트가 줄어든다.
동시에 던전이 생성됐다.
하지만 기다리던 메시지는 출력되지 않았다.
반파된 거인을 수백의 지저인이 집단으로 린치하는 와중에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저건 그저 껍질.
무력화해야 하는 건 다른 무언가라는 뜻일 것이다.
‘여기까진 안 갔으면 했는데…….’
폭주의 방식까지는 못 봤으나, 땅의 심장의 정체는 익히 알고 있었다.
예언자의 손이 거기까지는 보여 주고 알려 줬으니.
그래서 대응 방법도 알고 있다.
나름 마법적인 지식은 열심히 공부했으니까 말이다.
그걸 써먹을 실력이 없어서 그렇지.
하지만 방법은 있다.
강력한 마력원을 억제하는 봉인 마법을 대체할 방법.
나는 던전 창을 열고 상품을 주문했다.
7단계 테마 던전으로의 업그레이드.
이번에는 미궁이 아니라, 봉인에 관련된 던전이다.
우우웅.
한창 정신없는 전장 바닥에 거대한 마법진이 생겨났다.
갑작스런 변화에 먼저 반응한 것은 지저인들이다.
[이게 무슨……?] [피해라! 무언가 이상한……!] [크윽!] [모두 이 바닥에서 떨어져라!]마지막 외침은 라치호였다.
마력을 봉인하는 마법진인 만큼, 대지의 마력으로 충만한 지저인들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쿵. 쿵. 쿵.
급조된 던전 전체의 공기가 압축되는 듯한 진동.
봉인진이 한 번 빛날 때마다 그 위에 있는 존재들의 마력을 억제해 나간다.
물론 7단계 봉인진이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건 7단계 네임드 수준이 한계일 것이다.
한눈에 봐도 그 수준을 아득히 넘은 거인이나 라치호는 그냥 잠시 억눌리는 정도에서 그칠 터.
나는 직접 던전 안으로 몸을 던졌다.
그리고 지옥 주머니를 열고, 비싸디비싼 창을 한 자루 꺼냈다.
[파마 의식용 주술창]전투 용도로 제작된 것이 아니란 것을 여실히 보여 주는 화려한 디자인.
창날은 물론이고 비교적 짧은 자루에도 빼곡하게 새겨진 검은 문자들이 인상적인 창이다.
방금 기특한 노예가 순간적으로 추천한 따끈따끈한 신상이다.
거대한 거인이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높이 뛰어오른 나는 정신을 집중했다.
아니, 집중하지 않아도 거인의 핵은 느껴졌다.
내가 아무리 반쪽짜리라고 해도 저만큼 거대한 마력원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막장은 아니지.
핵이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는 건 짜증 나긴 하지만, 못 맞출 것도 없다.
허공에 휘두른 손짓에 맞춰 주술창이 깔끔한 궤적을 그렸다.
쿡.
파괴력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맥 빠지는 접촉과 동시에 검은 글자들이 춤추며 추가적으로 마력을 봉인했다.
[당신의 던전에 출현한 네임드 몬스터, 어둠에 물든 땅의 의지 -이 굴복했습니다. 해당 몬스터의 소유권을 획득하시겠습니까?]막 태어났기에 고유한 칭호 외에는 불릴 이름조차 없는 몬스터가 내 것이 됐다.
탁.
다시 밟은 땅은 고요한 살기에 파묻혀 있었다.
나는 지저인들의 살기가 행동으로 옮겨지기 전에 입을 열었다.
“수고했다, 라치호. 그런데 다들 분위기가 살벌하군. 거래는 없던 것으로 할 생각인 건가?”
움찔.
라치호를 포함한 지저인들의 무기 끝이 흔들렸다.
망설이고 있는 것이다.
“나는 굳이 더 이상 지저인들을 죽일 생각이 없다. 그래도 뭐, 동족의 복수가 하고 싶다면, 말리지는 않겠지만.”
쿠구궁.
나지막하게 읊조리는 사이, 반파된 땅의 심장이 몸을 일으켰다.
갑작스런 내 등장에 모두의 관심에서 멀어졌을 때 몸을 수복한 것이다.
무시무시한 마력원을 코어로 사용하는 골렘이나 다름없는 존재.
땅의 심장은 재료만 주어지면 얼마든지 새로운 껍질을 만들 수 있다.
“안타깝게도 저건 이미 내 것이 되어서 더 힘든 싸움이 될 거야.”
천천히 일어나고 있는 거인을 바라보는 라치호의 건조한 눈에는 절망조차 비치지 않았다.
투웅.
묵직한 소리와 함께, 라치호의 대검이 바닥에 떨어졌다.
“…약속은, 반드시 지켜 주시오. 더 이상 동족의 죽음은 없을 것이라 믿고, 항복하겠소.”
쿵.
라치호의 거체는 무릎이 땅에 닿는 것만으로도 큰 울림을 만들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다른 무쇠 지저인들도 무기를 내려놓기 시작했다.
묵직한 쇠붙이가 바닥에 놓이는 소리가 일제히 울리자, 마치 멀리서 기병대라도 달리는 듯이 지면이 진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