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l special! Dungeon Master RAW novel - Chapter 136
136
로렌스는 몇 시간 되지도 않는 사이에 몰라보게 수척해져 있었다.
살려 달라 아우성치는 영지민들이 아마 그녀에게는 아귀 떼처럼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마주 앉고서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 말도 꺼내지 않는 모습에, 나는 먼저 입을 열기로 했다.
“할 말이 있어서 오신 것 아닌가요?”
재촉 아닌 재촉에 로렌스의 눈빛이 흔들리고, 입술이 달싹인다.
그리고 고르고 고른 그녀의 첫마디가 흘러나왔다.
“…사태 해결에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영주라는 자로서 추태를 보여 정말 부끄럽기 그지없지만… 그래도 감사조차 표하지 않는 무례한 자가 되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더군요.”
“부끄러워하실 것 없습니다. 여러 번은 아니지만 저는 전쟁도 겪어 보았고, 적지 않은 곳을 돌아다니며 죽기 직전의 인간들을 많이 봤습니다. 궁지에 몰린 사람이 저 정도 숫자가 모였는데 이 정도로 끝난 건 양반인 편이죠.”
내가 없었으면 이 정도에서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라는 말을 조금 돌려 말했다.
상대는 직구로 받은 모양이지만.
나는 다시금 달싹이는 로렌스의 입술을 보며 본론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겨우 감사 인사를 할 정도면 저런 표정으로, 저렇게까지 할 말을 고르고 있지 않을 테니까.
“귀족 간에, 아니… 이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바라시는 것이 있는 만큼 빚을 지운다 생각하고 도와달란 말도 소용없을 테죠. 그러나 하나는 물어야겠어요.”
“물어보십시오.”
“굳이 그곳을 원하시는 이유가 뭐죠? 선대 국왕 전하께서 제 조부에게 영지를 하사하신 후로 한 번도 곡식이 자란 적이 없는 땅이에요. 거기다 지금은 공교롭게도 몬스터까지 창궐한 땅이 됐죠. 그런데 갑작스레 그곳을 원한다는 분이 나타난 것이 저로서는 이해하기 힘들군요.”
로렌스의 눈에서 두 가지가 읽혔다.
호기심 그리고 의심.
대외적으로 나에 대해 알려진 것들 중 가장 유명한 것을 꼽자면 염동력과 소환과 관련된 능력이다.
직접 오우거를 부린 적은 없다.
하지만 마법적인 지식이 전혀 없는 일반인이, 그것도 궁지에 몰린 자가 의심하기 시작하면 세상만사가 자신의 적으로 비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세계에서 의심은 아무 쓸모가 없다.
차라리 힘 있는 자의 모함이 쓸모가 있지.
그리고 갑작스레 강력한 몬스터가 나타나 인간을 죽이는 것이 드물지 않은 세계다.
힘없는 준남작이 ‘저 새끼가 의심스러워요! 아니, 범인이에요! 내 땅을 뺏으려 한다니까요!’라고 외쳐 봐야 미친년 소리만 듣고 끝날 뿐이다.
“제가 그곳을 원하는 이유는 흥미 때문입니다. 뭐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꽤 유의미한 마력원이 있는 곳인 것 같습니다. 그것 때문에 몬스터가 출현한 건지는 저도 모르겠지만요. 모든 몬스터들이 짙은 마력에 이끌리는 성질은 있습니다만, 확실히 주변에 오우거 서식지가 없는데도 나타난 것은 이상하긴 합니다. 그래서 더욱 그곳을 조사하고 싶어지기도 하고요.”
“조사라면 얼마든지 하실 수 있지 않나요? 굳이 땅 자체의 권리를 가져가지 않으셔도…….”
“아니요.”
나는 로렌스의 말을 뚝 잘랐다.
입가에는 날카로운 미소를 머금고서.
“제 것이 되지 않을 것을 굳이 찾겠다고 들쑤실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꿀이 든 단지일지, 아니면 독사가 가득 들어 있는 항아리일지도 모르는 것을 뒤적여야 하는 건 저입니다. 마력, 마법과 관련된 사안은 항상 양날의 검과 같죠. 목숨쯤은 우습게 달아날 위험을 감수하고, 칼날 위는 걷는 도박을 해야 합니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남 좋은 일을 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런 말을 들으니 더욱 넘겨드리기가 힘들어질 것 같군요. 아시겠지만 저희 영지는 가난합니다. 에슬란테 남작령은 루비 광산으로 풍족한 영지가 됐죠. 에슬란테 공자님의 말씀은 제 영지도 그런 부유한 영지가 될 수도 있는 기회라는 소리로 들리는군요.”
피식.
나는 대놓고 비웃음에 가까운 웃음을 흘렸다.
“그럼 그렇게 하시죠. 모험가를 구하시든, 왕실에 도움을 청하시든, 작금의 사태를 진정시킨 후에 자체적으로 그곳을 조사하십시오. 저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대신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하는 것으로 만족하겠습니다.”
로렌스는 갈등 가득한 얼굴이 됐다.
내가 말한 조사를 데르야 준남작령이 자체적으로 할 수 있을 리가 없다는 것은 그녀가 가장 잘 알 테니까 당연한 반응이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이 복잡하겠지.
‘모험가? 늦는다. 왕실? 더 늦을 수도 있다.’
‘어쩌지. 어떻게 해야 할까. 이대로 오우거가 영지 내를 활보하기 시작하면 방금 전의 상황이 반복될 텐데.’
‘그런 영지민들의 불안과 공포가 분노로 변질되기까지 얼마나 남았을까.’
이런 생각이 계속해서 로렌스를 괴롭히고 있을 것이다.
지금 데르야 준남작령의 상태는 늙고 병든 사자와 같다.
견디다 못한 영지민들이 들고 일어서면, 대부분의 사병을 전쟁에서 잃은 영주는 얼마 버티지도 못하고 쓰러질 것이다.
그럼 하이에나처럼 기다리던 주변 귀족들은 감히 귀족에게 칼들 들이댄 천것들을 처단하고, 무주공산이 된 데르야 영지를 갈라 먹을 것이다.
“공자님보다는 마타…….”
잠시 길을 찾은 자의 얼굴을 하고 입을 열던 로렌스가 말을 흐렸다.
그래도 아주 멍청하진 않은 모양이다.
마탑에게 도움의 손길을 청하면 부리나케 달려오기야 하겠지.
무언가 있다면서 내가 관심을 보인다는데, 당연히 올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빨라도 나보다는 빠르지 않을 것이고, 적어도 나보다는 더 뜯어먹으려 할 것이다.
마탑의 평소 행실을 귀동냥이라도 했다면 알아야 할 상식이다.
“…그곳에서 나는 것의 절반을 넘겨드릴게요.”
“데르야 준남작님. 착각하시는 것 같아 말씀드리는데, 제가 굳이 부탁을 드리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은 가까워서입니다. 틈만 나면 이곳저곳 돌아다니는 게 제 취미예요. 관심 가고, 꼭 조사해 보고픈 마음이 드는 곳은 흐르고 넘칩니다.”
“기어코 무고한 백성들의 목숨을 두고 저울질을 계속하셔야 하나요? 얼마 전에 들었던 소식들은 전부 거짓이었나 봅니다. 루크 에슬란테 공자님이 라메리안도 아닌 룸펜에 이어 몇 개의 타국을 돌아다니며 무고한 자들을 위해 희생했다는 미담 말이에요.”
로렌스의 말에, 나는 날카로운 눈빛을 돌려줬다.
그러자 그녀의 기세가 말도 못 할 수준으로 찌그러졌다.
마지막 말조차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내뱉은 그녀다.
직간접적으로 만 명은 우습게 죽여 온 내 눈빛을 정면으로 받아 내기엔 무리라는 단어로는 부족할 정도로 유약한 인간이었다.
“말장난으로 본질을 흐리는 건 그만두시죠. 무고한 백성들의 목숨으로 저울질을 한다고 하셨습니까? 그 말은 그대로 돌려줄 수밖에 없군요. 하물며 저는 이 영지와 전혀 상관없는 인간입니다. 그러나 영주님은 다르지 않습니까.”
움찔.
갈수록 차갑게 변하는 내 태도에 놀란 로렌스가 어깨를 움츠렸다.
그러나 나는 더욱 그녀를 몰아붙였다.
“영주는 영지민들의 고혈을 빨아먹고 삽니다. 그들이 손이 부르트도록 밭을 일구어 재배한 곡식을 세금으로 걷고, 끼니를 걸러 가며 모은 몇 푼 안 되는 돈을 세금으로 걷습니다.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것을 안다더니, 그건 다 공짜라고 생각했습니까? 그렇게 걷은 돈으로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잤으면 영지가 위험할 때 나서서 해결해야 하는 게 영주의 책임입니다.”
“그건 저도 알고 있어요……!”
“안다는 사람이! 지금 당장 사태를 해결할 방법을 눈앞에 두고도 저울질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어디에 손을 뻗어야 가장 빨리 영지민들의 삶을 되찾아 줄 수 있을까가 아니라, 어떻게 해야 손해를 내가 가장 손해를 적게 볼까만 생각하면서!”
“그런 게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아니죠? 지금까지 한 번도 쓸모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던 땅에 뭔가가 있을 것 같으니 탐이 난 게 아닙니까. 이득이 될지 아니면 치명적인 재앙이 될지도 모르는 것을 제어할 능력도 없으면서 손에서 놓지 못하는 게 욕심이 아니면 뭡니까?”
쉬지 않고 몰아치는 내 목소리에, 간헐적으로 움찔거리던 어깨가 결국에는 서럽게 들썩이기 시작했다.
“진짜… 창피해서 이렇게까지는 말 안 하려 했는데에…….”
우네?
나는 닭똥 같은 눈물을 쏟는 로렌스를 보고 당황했다.
-당연히 울죠. 마스터가 얼마나 몰아붙였는데요.
-이 정도로 운다고?
-…여지껏 마스터가 상대한 사람들은 죽네 사네 하는 곳에 있는 사람들이잖아요. 이 여자, 딱 봐도 온실 속 잡초 같은데 당연히 울죠.
-…온실 속 잡초는 또 뭐냐?
-귀한 가치도 없는데, 강하지도 못한 그런 사람이요.
악마 아니랄까 봐 하는 말이 아주 신랄하다.
나는 잠시 기세를 갈무리했다.
더 몰아쳤다가는 나만 쓰레기 되게 생겼다.
예쁘장한 여자가 운다고 해서 없던 동정심이 툭 하고 생기진 않았다.
오히려 더욱 몰아치고픈 가학성이 눈을 뜨는 기분이다.
그러나 여기서 그랬다가는 소문이 안 좋게 날 가능성이 높다.
진짜 제대로 된 악당이 되려면, 뒤로는 호박씨를 까면서도 세간의 평판마저 휘어잡아야 한다.
“끄윽… 흐윽… 그런 거 아니에요… 저울질 아니라고요…….”
“…….”
나는 가만히 듣고 있었다.
로렌스의 울음이 조금 그칠 때까지.
그녀는 5분 정도가 지나서야 정상적으로 말을 마칠 수 있을 정도의 호흡이 가능해졌다.
겨우 울음을 삼키느라 충혈된 눈이 나를 바라봤고, 잔뜩 목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희 영지는 가난했어요. 아빠가 갑작스레 떠나가고, 제가 물려받으면서 상황은 더 악화됐죠. 기본적인 치안을 유지하기 위한 병사를 다시 확보하지도 못할 정도로 재정 상황이 안 좋아졌고, 그 부담은 어쩔 수 없이 영지민들에게 돌려야 했어요.”
로렌스는 한번 울어 재끼더니, 말을 더 편하게 하는 것 같았다.
게다가 내 앞에서 자신의 부친을 ‘아빠’라고 부르다니.
아마 자각하지도 못하는 거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할 때도 로렌스의 넋두리는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사건까지 발생했어요. 몬스터에게 집을 잃고 성 밖에 움막을 친 사람들을 어떻게 하죠? 돌려보낼 집도 없어요. 계속해서 저들을 먹일 식량도 부담이에요. 그런 제 앞에 돈이 될지도 모르는 게 나타났는데 어떻게 포기하란 거예요.”
어설프게 영주 흉내를 낼 때보다 이렇게 솔직하게 무능력을 인정한 로렌스가 더 나아 보인다.
발간 눈에 맺힌 눈물은 수막을 형성해 빛을 반사하고 있었고, 그것은 그녀를 조금 더 초롱초롱하게 만들었다.
‘다시 울려 보고 싶다.’
잠시 그런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그런 사소한 욕망은 옆으로 밀어냈다.
“그럼 제 제안을 받아들이시면 되겠군요. 땅을 판 돈으로 영지를 정비하시면 됩니다. 덤으로 몬스터들까지 제가 처리해드리도록 하죠. 모험가를 고용할 고액의 현금도 필요 없어질 겁니다. 왕실에서 도움을 주기까지 길어질 시간도 벌 수 있습니다.”
“…그 정도 돈으로 어떻게……!”
“황무지를 파는 것치고는 적지 않은 금액을 드릴 겁니다. 향후 그곳에서 무엇이 발견될지는 모릅니다. 숨겨진 던전이 있을 수도 있고, 단순히 마력이 짙은 곳일 수도 있습니다. 지하에 뭐가 묻혀 있을 수도 있고요. 하지만, 그리 빠르게 돈이 되어 줄 만한 것일 확률이 얼마나 될 것 같습니까?”
“…….”
IMF 때, 도산한 수많은 회사 중에 당연히 무너져야 할 만큼 부실한 회사도 있었지만, 조금의 시간만 주어졌다면 구멍을 틀어막고 살아남을 수 있는 회사들도 있었다.
시간이란 그렇게 무서운 것이다.
한 달만 있으면 금이 펑펑 쏟아져 내릴 금광을 파고 있어도, 열흘밖에 버티지 못할 사람들에게는 영원히 닿지 못할 엘도라도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리고 지금 로렌스가 바라보는 황금향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그 땅을 차지하고서 정당한 절차를 거쳐 주인이 된 후에야 생겨날 마정석, 마석 광산이니까.
“그곳을 조사하고서 나온 것이 일손이 필요한 것이라면, 데르야 영지의 주민들을 에슬란테 영지민들과 같은 비율로 고용하겠습니다.”
선심 쓰듯 던진 한마디.
결심에 결정적 영향은 아니겠으나, 다 넘어온 상태에서 툭 미는 것 정도는 되리라.
“…토지 대금은 얼마나 생각하세요?”
나는 씨익 웃었다.
“아마 영지가 안정될 때까지 많은 도움이 될 만큼은 될 겁니다.”
나는 품속에서 미리 준비해 둔 계약서를 꺼내 들었다.
-휴우, 저 온실 속 잡초 같은 여자가 이런 사태를 만든 게 마스터라는 걸 알게 되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요?
-역시 형님이십니다. 저한테 사기 쳤던 악마보다 더 사기에 뛰어나십니다!
-저의 옛 은인은 더러운 권모술수에 당해 억울한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그런데 주군께서는 권모술수에 이리도 능하시니 제가 걱정을 덜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삐이!
머릿속으로 부하 셋과 애완동물 하나의 미묘한 감탄사가 빗발쳤지만, 나는 앞으로 손에 넣게 될 오직 나만의 광산만 생각했다.
-어휴, 그리고 다들 느꼈지? 마스터는 예쁜 걸 보면 괴롭히고 싶어 하잖아. 예전에도 얼핏 느끼긴 했지만… 이제야 마스터가 나를 구박했던 이유가 밝혀진 것 아니겠어?
-…….
-…….
그러나 벨로제의 거만한 한마디를 지나칠 수 없었다.
뿌드득.
이가 갈리는 소리에 계약서에 눈을 두고 있던 로렌스가 고개를 들었지만, 나는 애써 미소를 유지했다.
벨로제에게 가할 12가지 고문을 떠올리니, 미소를 유지하는 게 어렵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