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l special! Dungeon Master RAW novel - Chapter 153
153
여울, 죽은 자가 검을 들어 올렸다.
-죽기를 바라게 해 주마.
“마저 죽여 주마.”
정령의 사랑을 받아 생기로 가득 찬 스리핏 나이트, 하심이 대답했다.
팟.
먼저 움직인 것은 여울이었다.
여느 때처럼 연기가 되어 흩어진 그녀.
그것을 본 하심의 동공이 놀람으로 커졌으나, 혹독한 수련으로 다져진 육체는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자동으로 움직였다.
“목령, 로아!”
하심의 입에서 자신과 계약한 정령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그러자 그가 딛고 있던 굵은 나무에서 자라난 나무들이 그를 집어 삼킨다.
순식간에 은빛 갑옷을 뒤덮은 수풀과 나무들은 그를 하나의 목인으로 만들었다.
챙.
눈 한 번 깜빡이기에도 부족할 시간 차이를 두고 금속음이 울렸다.
무섭도록 빠르고 사이한 여울의 검격을 막아 낸 것은 어느새 하심의 손아귀에 생겨난 목검이었다.
파앙!
동시에, 밝게 빛나는 녹색 기운이 터지며 여울을 몰아냈다.
‘통과할 수가 없다.’
여울은 여유로운 자세로 물러나며 눈을 빛냈다.
방금 그녀가 휘두른 검은 물리적인 공격이 아니었다.
생명이 담긴 그릇을 베어 내기 위한 죽음의 검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막혔다는 건 저자가 두른 것이 물리적 간섭이 불가한 존재에게도 강제력을 행사할 수준의 힘이 있다는 뜻이다.
‘그것이 뭐가 문제인가. 주군께서 베라, 명하셨으니, 나는 베어질 때까지 휘두르면 된다.’
여울은 자신의 집중력을 앗아 가는 주변의 모든 소리를 지웠다.
검극을 늘어뜨리고, 죽은 후로 신경 쓰지 않았던 기수식을 취해 본다.
“죽은 것이 감히 검사 흉내를 내는 것인가.”
그것을 본 하심 또한 자세를 고쳤다.
둘의 격돌은 고요했다.
그저 하심이 휘두르는 목검, 손, 발이 대기를 가르는 소리만이 흉흉하게 울릴 뿐이다.
하심의 공격에 집중된 목령의 기운은 닿기만 한다면 여울에게 타격을 줄 만큼 강력했다.
그러나 그건 닿았을 때의 이야기.
유령으로서 이점이 대부분 사라진 대결에서도, 여울은 상대에게 옷자락 하나 허락하지 않았다.
가녀린 목을 노리고 우악스런 손아귀가 다가왔다.
빙글.
한 바퀴 회전하는 것으로 하심의 왼쪽을 점했다.
“크윽!”
순간적으로 사각을 허락한 하심이 무리한 움직임으로 여울을 쫓았다.
툭.
처음 접촉은 무리하게 움직이는 하심의 균형을 무너뜨리기 위한 여울의 발길질이었다.
파악.
그러나 밀려난 것은 여울이었다.
하심을 감싼 목령은 사소한 접촉에도 녹색 기운을 흩뿌리며 여울을 거부했다.
타의로 거리를 벌리게 된 여울의 눈이 가라앉았다.
‘이음새 하나 없는 갑옷이라니, 골치 아픈 물건이군. 베어 내자면 못 할 것도 없으나, 그러면 나 또한 잠시 무뎌질 터. 그렇게 되면 자칫 명령을 완수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언제나 자신은 주군의 칼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싸우고자 하는 욕심을 채우는 것은 무인이나 할 생각.
주인의 도구로 살기를 원하는 자신이 품을 것이 아니다.
여울이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여울, 하고 싶은 대로 해 봐. 뒤는 내가 책임질 테니까.
무심한 듯 한마디가 날아들었다.
그러나 주군의 마음을 느낄 수 있는 그녀는, 그 말 뒤에 숨은 뜻을 읽어 낼 수 있었다.
울컥, 하고 가슴을 치는 감정에 여울이 잠시 휘청거렸다.
귀신이 현기증이라니, 웃기지도 않는 일이다.
그러나 그런 우스꽝스런 모습을 보이고 있음에도, 여울의 입가에는 미소가 피었다.
-기뻐해라. 지금부터 너를 생전과 사후를 통틀어 가장 강력한 호적수로 생각하겠다.
“그게 무슨……!”
헛소리냐, 라고 뱉으려던 뒷말은 쏙 들어갔다.
여울의 검에 넘실거리기 시작한 죽음의 기운 때문이었다.
아니, 그건 단순히 고위 언데드들이 갖는 죽음의 기운과는 달랐다.
훨씬 더 차갑고, 어둡고, 끔찍했다.
다시금 눈앞의 여자가 사라졌을 때, 하심은 마음속으로 목령의 이름을 외쳤다.
이건 지원이 올 때까지 대충 시간을 끄는 싸움이 아니다.
구원이 올 때까지 버티는 생존의 문제였다.
그걸 지금 알아 버린 것이다.
라이칸스로프들을 상대하는 레인저들을 신경 쓰던 마음은 싹 사라졌다.
“크윽!”
왼편에서 느껴진 살기에 반응해, 어느 때보다 필사적으로 끌어올린 정령의 기운을 휘둘러 막았다.
파악.
목검은 유령검과 부딪혀 공격을 막아 냈다.
그러나 여울과 닿기 무섭게 터진 녹색 기운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죽어 버린 것이다.
‘도대체 이게 무슨 사기란 말인가!’
하심은 목갑을 뚫고 느껴지는 여울의 기운에 경악했다.
목령에게 보호 받고 있음에도, 온몸에 수십만 개의 바늘을 꽂아 넣는 것 같은 통증이 느껴진다.
단 한 번의 검격이 이 정도였다.
-막아라, 살아라, 조금 더 오래 버텨라, 주군께서 내 예리함을 확인하려 하신다. 내게 나의 가치를 증명할 시간을 다오. 부탁이다.
시간 차가 거의 없는 공격을 이어 가며, 여울이 외쳤다.
벅찬 기쁨이 느껴지는 목소리다.
그러나, 동시에 끝을 알 수 없는 한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 한이다.
주르륵.
희게 웃는 여울의 목에서 새빨간 피가 흘러나왔다.
눈에서는 피눈물이 흘렀다.
그럼에도 그녀는 너무나 행복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으아아!”
그 섬뜩한 조합에, 하심은 견디지 못하고 고함을 지르며 기운을 폭발시켰다.
녹색 생명의 기운은 전 방위를 휩쓸며 퍼져 나간다.
그러나 여울이 반듯이 세운 검에 이른 곳에서만큼은 시들어 죽은 꽃처럼 스러졌다.
-살아라. 조금만 더 살아다오. 부탁이다.
간곡한 부탁에서는 진심이 느껴졌다. 그래서 더욱 무서웠고, 구역질이 치밀었다.
이제는 온몸에서 느껴지던 통증마저 사라져 버렸다.
하심은 막았다. 살기 위해 몸부림쳤다.
정령의 기운은 물론이고, 가진바 마력을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죽음의 기운을 몰아내려 애썼고, 눈앞의 귀신을 잡아 찢기 위해 필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하하하. 하하하하. 하하하하하!
그러나 미친 듯이 광소하며 휘두르는 괴물의 검은 주변 모든 것을 죽여 갔다.
천 년은 살았을 고목은 여울과 하심의 전장이 됐다는 이유로 말라 죽었다.
여울의 검은 생명을 빼앗는 뱀파이어의 송곳니처럼, 곁에 있는 모든 것을 흡혈했다.
그러나 뱀파이어가 다른 이의 생을 앗아 자신의 생을 잇는 것과 달리, 그녀가 흡수한 모든 생명은 바로 죽었다.
죽고, 죽고, 또 죽어, 다른 것을 죽이기 위한 것으로 바뀐다.
그럴수록 여울의 목에서 흐르는 피는 폭포처럼 기세를 더해 갔고, 피눈물은 고운 얼굴을 새빨갛게 적셔 놓았다.
“하심 님!”
누군가, 여유 없는 와중에도 희생양의 이름을 불렀지만, 소용없었다.
몇 발의 공격이 여울을 향했으나, 도착하기도 전에 마력이 말라비틀어졌고, 화살은 허망하게 여울의 몸을 관통해 숲속으로 사라졌다.
여울이 사라졌다 나타나면 어김없이 죽음의 검이 떨어졌다.
모든 공격을 하심은 훌륭하게 방어했다.
그러나 하심은 알 수 있었다.
이건 자신이 방어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여울이 목검이 있는 곳을 공격할 뿐이란 사실을.
하심은 마른 눈을 들어 정면을 응시했다.
그저 목검을 쥐고 있는 것만으로도 생이 이어지니, 오히려 여유가 생긴 것이다.
검은 무복은 피에 젖어 있었다.
새까만 탓에 피로 인해 색이 변하진 않았으나, 젖어들어 몸에 달라붙은 옷자락은 쓸데없이 야릇했다.
-살아다오. 제발, 조금만 더. 포기하지 말아다오. 부탁이다.
소름 끼치는 애원이 재차 이어졌다.
결국, 하심은 머리 위로 받치고 있던 팔을 떨어뜨렸다.
생명이 다하기 전에 마음이 죽은 것이다.
-아아, 벌써, 벌써 끝난 것이냐.
여울은 안타까운 탄식을 내뱉었다.
아름다운 여인이 피눈물을 흘리며 탄식하니, 그 앞에 꿇어앉은 남자가 죄인처럼 비친다.
그리고 그 죄인에게는 합당한 벌이 내려지려 하고 있었다.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차갑고 어두운 무언가가 그녀의 휘어진 환검으로 스며들었다.
이윽고 여울을 감쌌던 모든 죽음과 한이 깨끗하게 자취를 감춘다.
검 또한 평범하던 모습 그대로 돌아갔다.
-고맙다.
무엇이 고맙다는 걸까.
하심의 마지막 의문은 끝내 풀리지 못했다.
사악.
너무나도 깔끔하고 정갈한 궤적을 그린 여울의 검이, 하심의 목을 스쳐 갔다.
퍼석.
가장 먼저, 하심을 감싸고 있던 목갑이 말라비틀어지더니, 가루가 되어 쏟아졌다.
파스스, 하고 날리는 가루에서는 생명이라고는 터럭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드러난 것은 상처 하나 없는 하심이었다.
그러나 입고 있던 은빛 갑주는 색을 잃고 검게 변색되어 있었고, 그 안에 있는 육신은 상처는 없었으되, 동시에 생기 또한 없었다.
미이라처럼 말라 죽은 것이다.
…….
압도적인 모습에 사위가 고요해졌다.
그 고요 속에서 여울은 눈을 감고 고개를 하늘로 향했다.
자신의 주군이, 여울이라는 칼의 예리함에 감탄하고, 만족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전장에 속속들이 다른 레인저들이 도착하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 섞인 스피릿 나이트 또한.
낭비가 심한 전투를 치른 덕에 여울은 소모가 심했다.
죽이고자 했다면 백 번도 더 죽였을 만큼의 힘을 쏟아부었으니 당연했다.
그러나 여울은 걱정하지 않았다.
주군께서 말씀하지 않으셨던가.
‘뒤는 내가 책임질 테니까.’라고.
후속으로 도착한 레인저들과 스피릿 나이트들이 막 라이칸스로프들을 공격하고, 여울을 향해 떨어져 내릴 때.
“와하하하! 신비롭고 아름다운 불몽둥이! 신비 님이 나가신다, 길을 비켜라!”
숲을 쩌렁쩌렁 울리는 웃음소리가 나타났다.
하늘을 날아온 도깨비였다.
땅에서는 죽음을 몰고 다니는 군대가 풀을 밟으며 다가왔다.
“괴물 놈들이 매복을 한 건가!”
새롭게 등장한 스피릿 나이트 하나가 경악에 물들어 외친다.
“그래 봐야 잡것들이 늘어났을 뿐이다! 화령, 카라!”
그러나 당황도 잠시, 정령의 이름일 외치며 온몸을 불꽃의 갑옷으로 휘감고 뛰쳐 나간다.
퍼억.
“커억!”
그러나 어둠 속으로 뛰어든 스피릿 나이트가 허망하게 튕겨 나왔다.
“삐이?”
그 안에서 스피릿 나이트가 남긴 화염을 우물거리며 걸어 나온 것은 불가사리였다.
주변을 가득 채운 악한 것들의 냄새를 잠시 즐긴 여울은 말했다.
-주군께서는 신호탄이 필요 없으시다.
* * *
“뭐?”
만족스럽게 전장을 관망하던 나는, 여울이 뱉은 마지막 말에 실소했다.
악의라곤 전혀 없는, 오히려 존경심마저 느껴지는 한마디라 더 웃겼다.
어쨌든 여울의 진면목을 확인한 나는 기분이 좋았다.
지금도 일시적으로 강력해진 연결 탓에 필요 이상으로 그녀의 감정이 전해지고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자신의 쓰임을 증명했다는 기쁨이었다.
‘다시는 검집 속에 갈무리된 채 썩어 가지 않겠다. 나는 주인을 지키는 칼이다.’
갈수록 강렬해지는 그녀의 감정에서는 회한마저 묻어나왔다.
받을 만한 일을 하지 않고 받는 충성이라 그런지 꽤나 간지럽다.
그래서 나는 시점을 전환하려 했다.
핑계가 아니라, 지금은 신비나 불가사리를 중심으로 이어지는 전투를 살펴야 하는 상황이다.
어차피 큰 변수가 없는 한 일방적인 포획 작전이 될 가능성이 크긴 하지만…….
‘뭐지?’
그런데, 바뀌어야 할 시점이 바뀌질 않았다.
마치 여울이 나를 잡아끄는 듯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하는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나를 감싼 감각이 변해갔다.
빌렸던 시야가 내 것이 되고, 여울이 느끼는 감각이 내 것이 되는 기묘한 기분.
잠시 후 나는 여울과 정확히 같은 것을 보고 있었다.
그건 방금 전까지 보였던 광경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아직 목에 상처가 없는 여울.
그렇다. 나는 그녀의 과거를 보고 있었다.
그 속에서 여울은, 무릎을 꿇고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