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l special! Dungeon Master RAW novel - Chapter 154
154
열넷.
목이 베일 위기에 처하기는 아직 어린 나이였다.
그러나 더한 것도 겪어 왔기에, 아직 소녀의 모습을 한 여울의 눈은 무심했다.
부모를 죽인 자의 손에 거둬져, 첫 살인을 경험한 것이 겨우 여덟 살.
죽여야 했던 상대는 같은 처지에 서로 의지하며 동고동락했던 비슷한 또래의 여자아이였다.
그때, 여울은 자신의 마음을 죽였다.
그런데 아직 죽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남은 듯싶다.
“아기씨! 아무리 아기씨 고집이어도 이건 안 됩니다! 살수를 살려 두시겠다니요!”
여울을 죽이기 위해 검을 뽑아 든 남자가 답답한 듯 외치는 모습을 보니 말이다.
“말은 바로 해야지! 저 아이가 살수였던 게 아니잖아! 날 죽이러 왔던 건 냄새 나는 사내였다고!”
“말을 바로 하셔야 하는 건 아기씨이시지요! 저건 그 암살자 놈이 갈고 있던 칼입니다. 똑같은 거라고요!”
우락부락한 사내는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탕탕 쳤다.
착하다, 착하다, 해도 이건 아니었다.
아무리 그래도 자신을 암살하러 왔던 놈이 기르던 예비 살수를 살리겠다는 게 말이 되는가 말이다.
애초에 뿌리를 뽑는 자리에 데려오는 것이 아니었다고, 사내는 후회했다.
‘나를 노린 것들이야. 감히 주제를 모르는 짓을 한 놈들이 어떻게 죽는지 내 눈으로 확인해야겠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반대한 사내였지만, 저 고집을 집안 누구도 꺾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것만큼은, 절대로 이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었다.
차라리 막무가내로 목을 쳐 내고, 한동안 아기씨의 원망을 감수하는 한이 있더라도.
“죄송합니다, 아기씨!”
막 실행에 옮기려는 찰나, 그는 대경하며 검을 거두었다.
“아기씨!”
그의 다음 행동을 짐작한 듯 아기씨라 불린 소녀가 여울을 감싸 안은 것이다.
당연히 사내는 거칠게 난 수염을 쭈뼛 세우며 놀랐다.
저러다 몸에 숨기고 있던 날붙이라도 꺼내 들면 어쩌시려고!
아니, 어릴 때부터 암살자 조직에서 혹독한 훈련을 받는 년이다.
맨손으로도 아기씨의 가녀린 목 정도야 종이처럼 찢어 놓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이 사내의 머릿속을 순식간에 헤집었다.
해서, 사내는 불충을 무릅쓰고 검을 찔러 넣었다.
어설프게 감싼 정도로, 뛰어난 무인이 내지르는 검을 제대로 막아 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툭.
조용한 소리가 사내의 검을 멈추게 만들었다.
여울이 자신을 감싼 소녀를를 밀어낸 것이다.
그러고는 입을 열어 조용히 말했다.
“위험해요.”
그 순간, 주변에서 아기씨와 상관의 고집 대결을 지켜보던 자들은 속으로 생각했다.
‘또 지셨구나.’
그건 사내 또한 느끼고 있었다.
여울을 향했던 시선이 자신을 향했을 때, 그 눈에 담긴 것은 더 이상 고집이 아니었다.
그건 결의였다.
고결한 피를 타고 났기에 더욱이 빛나는.
“가주님께서 노하실 겁니다.”
“몰라.”
“마님께서도 노하실 것이고요.”
“모른다니까.”
“정말 왜 이러십니까. 이유라도 알아야 하지 않습니까.”
“…나도 몰라.”
여울은 고개를 들어 앞을 봤다.
작은 등이 보인다.
아마도 자신보다도 작을 것 같았다.
그렇게 소녀는, 아직은 누구도 모르는 이유로 목숨을 건졌다.
* * *
여울을 살린 소녀의 이름은 여소명이었다.
여울을 죽이려 했던 사내의 이름은 기문위였다.
각각 재상의 딸과 그 가문의 사병 대장이다.
기문위의 우려 아닌 우려와 달리, 여소명의 아비와 어미는 여울의 존재를 별다른 말 없이 허했다.
‘네가 살렸으니, 계속 살리는 것도 네가 해야 할 것이고, 죽이는 것 또한 네가 해야 할 것이다. 그만큼 손에 쥔 다른 이의 생을 감당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하나, 한 번 쥐었으면 끝까지 놓아서는 안 된다. 알겠느냐.’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눈을 한 재상이 뱉은 말이었다.
그렇게 여울은 고귀한 소녀의 몸종이 되었다.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부모로부터 받은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여울은 여소명에게 여울이란 이름을 받았다.
말괄량이 아기씨를 따라다니며 받은 정에 죽었던 마음이 싹트기 시작했다.
‘울아, 이것 봐. 참 예쁘지?’
누구보다 아름다운 아기씨는 꽃만 피면 여울을 동반해 산을 올랐다.
‘울아, 이것 봐. 참 맑지?’
누구보다 맑은 웃음을 짓는 소녀는 맨발을 여울에 담근 채 물살을 즐겼다.
또 시간이 흘렀다.
* * *
몇 년 뒤, 여울은 소녀에서 멀어져 여인에 가까운 외모를 갖고 있었다.
그건 비슷한 또래인 여소명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 시기에 여울은 검을 쥐기 시작했는지, 허리에는 지금과 같은 환검이 비스듬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아기씨.”
“응?”
책을 읽던 여소명이 여전히 맑은 웃음을 지으며 여울을 바라봤다.
“그때… 왜 저를 살리셨는지 묻고 싶습니다.”
새 목숨을 받고 일 년이 지난 뒤, 이 소녀를 주인으로 섬기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품고 있던 의문이었다.
그러나 어떤 대답이 나올지 두려워 지금까지 냉가슴을 앓아 왔던 질문.
착하기만 한 아기씨가 그저 동정심에 그러셨을 것이다. 알고 있다. 그럼에도 자신이 조금은 특별한 존재였으면 하는 욕심은 어쩔 수 없었다.
이름대로 여울처럼 물이 흐르는 눈을 바라보던 여소명은 책을 덮었다.
“울아.”
“예, 아기씨.”
여울은 평소보다 더 상냥한 목소리에, 하마터면 눈물을 흘릴 뻔했다.
그러나 기문위에게 혹독한 수련을 받으며 지내는 이유는 아기씨를 지키기 위함이다.
나약함을 보일 수는 없었다.
“너한테만… 아니, 이미 알고 계신 분들이 계시지만, 피가 이어지지 않은 사람 중에서는 너에게만 내 비밀을 알려 줄게. 그럼 너는 그 비밀을 지켜 줄 수 있겠니?”
물론입니다,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솟았으나, 동시에 다른 생각도 솟아올랐다.
주인의 비밀을 캐는 것이 과연 제대로 된 수하인가.
차라리 모르고 있는 것이 주인에게 득이 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그런 생각은 여소명의 다음 말에 의해 지워졌다.
“너는 피는 이어지지 않았어도, 내 동생이니까.”
울컥, 하고 무언가가 치밀었다.
여울은 가슴을 원망했다.
차갑게 죽어 있던 주제에, 겨우 몇 년이나 지났다고 이리 들썩이는지.
그런 여울을 보며 살풋 웃은 여소명은 고운 입술을 다시 열었다.
“나는 사람의 마음이 보여. 모든 이의 마음이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적지 않은 마음이 보이곤 해. 검은색은 당연히 악한 자들이야. 분홍빛은 사랑일 때도 있고, 욕정일 때도 있지. 녹색은 자연과 벗한 자들이 품은 색이란다.”
허무맹랑한 소리였으나, 여울은 의심 한 자락 없이 여소명의 말을 믿었다.
아기씨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볼 수 있으시다.
여울에게 고귀한 소녀의 말은 법이었고, 진실이며, 정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녀의 말은 동시에 공포로 다가왔다.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셨다면, 도대체 왜 나를 살렸단 말인가.
“그럼… 저를 왜 살리셨습니까.”
처음과 비슷한 질문이었으나, 의미는 다른 질문이었다.
여덟 살 때의 기억이 저주처럼 머릿속을 부유한다.
살기 위해 벗을 죽인 자신이다.
살릴 가치가 없었을 터다.
“너는 내가 본 어떤 아이보다 예뻤단다. 무표정한 얼굴이 어찌 그리 고운지. 그런데 더 놀라운 건 네 마음이었어. 그때 네 마음은 색이 없었어. 투명했지. 꼭 마음이 없는 것처럼. 나는 그게 너무 슬펐단다. 저리 고운 아이가, 도대체 어떤 일을 겪었기에 그리된 것인지. 그럼에도 그 투명한 마음은 네 얼굴만큼이나 곱고 예뻤어.”
결국 여울은 눈물을 흘렸다.
한 방울. 단 한 방울의 눈물이 도자기 같은 볼을 타고 흘러, 턱에 맺혔다 옷자락에 톡 떨어졌다.
“울아.”
“예, 아기씨.”
대답하는 여울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내가 네 이름을 그렇게 지은 이유를 아니?”
“…모릅니다.”
“처음 내가 봤던 네 마음이, 마치 뒷산 여울처럼 투명했기 때문이야.”
뒷산에 흐르는 여울은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였다.
날이 따뜻하면 꼭 맨발을 담그고는 하루 종일 콧노래를 흥얼대곤 했다.
“내가 아는 가장 예쁜 것의 이름을 땄는데, 지금은 네가 내가 아는 가장 예쁜 것이 되었구나. 지금 네 마음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나만 볼 수 있다는 게 안타까워.”
꾸욱.
여울은 자신의 옷자락을 잡고 버텼다.
입술도 깨물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못난 꼴을 보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노력은 결국 무너졌다.
어느새 다가온 여소명이 여울을 감싸 안은 것이다.
좋은 향기가 물씬 풍겼다.
그날은, 결국 여소명의 앞섶을 적시고야 말았다.
* * *
가장 강렬한 기억이 스쳐 가고, 몇 개의 추억이 흘러갔다.
그렇게 겹겹이 쌓여 가는 것은 여울이 품은 여소명에 대한 끝없는 마음이었다.
그럴 일이 없다고 믿으면서도, 죽으라 명하면 죽어 없앨 목숨이 하나인 것에 탄식하며 죽을 정도로, 여울의 마음은 확고해져만 갔다.
그리고 그 절박함은 그녀의 힘이 되었다.
원래부터 누군가를 죽이기 위한 수련을 어릴 때부터 해오던 그녀는 검에 대한 재능이 상상을 초월했다.
거기에 더해, 지키고자 하는 것을 위해 목숨은 물론 영혼마저 깎아 낼 의지를 가졌기에, 그 무예는 날이 갈수록 무섭게 늘었다.
그런 그녀가 여소명에게 품은 불만은 단 하나였다.
“울아, 나를 위해 검을 잡을 필요는 없어.”
“울아! 또 다친 거야? 다시는 다칠 정도로 훈련하지 말라고 했지! 안 되겠다. 그 검 이리 내. 이제부터 검은 만지지도 말아.”
쓰이기 위해 자신을 칼처럼 갈고닦았으나, 여소명은 여울을 부서지기 쉬운 보물처럼 아꼈다.
단 한 번도 제대로 쓰인 적이 없고, 쓰일 일도 없는 칼이 된 것이다.
그럴수록 여울은 더욱 자신을 몰아붙였다.
‘아직 아기씨께 믿음을 드릴 정도가 못 되는 것이다. 미덥지 못한 칼을 어찌 뽑는단 말이냐.’
갈수록 여울의 세상은 좁아졌다.
검과 여소명. 그 둘만이 그녀의 세상이 됐다.
* * *
다시, 기억이 흘렀다.
“울아, 내 부탁 좀 들어줄 수 있을까?”
이제는 어엿한 여인이 된 여소명이 여울을 향해 물었다.
여울은 몇 년 전 양친을 잃고 가주가 되어, 따로 만나기 어려웠던 여소명의 부름이 반가웠고, 도움이 될 일이 있다는 것에 기뻤다.
“기꺼이.”
깊숙하게 고개를 숙이며 대답하는 여울은, 여소명의 미소에 스친 슬픔을 보지 못했다.
“그럼 부탁할게.”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는 여느 때의 여소명이었기에, 여울은 그녀의 명을 받고 짐을 꾸렸다.
꽤나 먼 곳에서, 꽤나 길게 해야 할 일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여울은 서둘러 길을 떠났다. 조금이라도 빨리 일을 마쳐야 다시 자신의 아기씨를 볼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그것이, 여울이 산 여소명을 본 마지막이었다.
* * *
기억이 빠르게 흐른다.
여소명이 없는 여울의 시간은 잿빛이었다.
무엇 하나 유채색인 것이 없어, 굳이 재생되는 기억 또한 없었다.
그리고 여울의 기억이 색을 되찾았을 때, 그것은 붉었다.
“아아… 아아아……!”
시야가 붉었다.
여울이 피눈물을 흘리는 까닭이다.
그게 아니었어도 붉었을 것이다.
언제나 정갈하고 하얀 복장을 하고 있던 여소명의 옷이 붉게 물들어 있었으므로.
“아, 아, 아기… 씨……!”
여울은 자신의 아기씨를 끌어안고 오열했다.
도대체 어찌 된 일인가. 무언가를 유추할 정신이 그녀에게 남지 않았기에, 그런 의문조차 떠올릴 수 없었다.
그렇기에 여울은 죽은 자의 숫자가 매우 적다는 것 또한 모르고 있었다.
전대 가주로부터 시작된 정치적인 다툼의 끝자락에서, 희생양이자 먹잇감으로 선택된 것을 알게 된 여소명이, 최소한의 인원을 제외한 가솔들을 핑계를 만들어 멀리 보냈음을 몰랐다.
여울이 일어났다.
눈에서는 피눈물이, 꽉 쥔 손가락이 손바닥을 파고들었고, 이가 흔들릴 정도로 앙다문 입에서도 피가 흘렀다.
* * *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이는 것이 이어졌다.
붉어야 할 살육의 기억들은 여지없이 잿빛이었다.
마치 여소명을 만나기 전 죽어 있던 마음처럼.
“말해라.”
“누구냐.”
“아기씨를.”
“그렇게 만든 것이.”
“무슨 이유냐.”
수년의 시간 동안 여울은 자신의 칼로 수많은 인간을 베었다.
살수가 되지 않도록 구원 받았던 그녀는, 결국 어떤 살수보다도 더 기계적으로 인간을 도륙해 나갔다.
그 상대는 남녀를, 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자백을 받아 내기 위해 부모 앞에서 갓난아이의 사지를 잘랐고, 자식 앞에서 노모의 눈을 파내었다.
그 무수한 절규를 짓밟고, 여울이 도달한 답은 전대 가주의 뒤를 이어 재상의 자리를 차지한 자였다.
* * *
다시 짧은 시간이 회색이 되어 흐르고, 여울은 목숨을 구원받은 그때처럼 무릎을 꿇고 있었다.
적지 않은 수를 베었으나, 아무리 뛰어난 검호라 한들 한 나라의 재상에게 닿기에는 부족했다.
무수한 방해꾼이 그녀를 막았고, 결국에는 이리되었다.
아기씨를 해한 자가, 그를 따르는 자들이, 여울이 벤 자들과 관련된 자들이, 꿇어앉은 그녀를 두고 조롱했다.
그러나 그런 소리는 마치 다른 세계에서 떠드는 것처럼 멀게만 들렸다.
‘쓰이지 못했다.’
주인의 손에 의해 뽑힌 적도, 휘둘러진 적도 없는 칼이 생각했다.
‘부족했기 때문이다.’
더 날카로웠다면, 자신을 휘둘러 저것들을 베셨을 게다.
그랬다면, 지금 앞에서 웃고 있는 건 저런 비릿하고 역한 웃음을 짓는 오물들이 아니라, 무엇보다 맑게 웃으시던 아기씨였을 게다.
‘전부, 내 탓이다.’
여울은 끝내 아기씨의 원수도 갚지 못하고 날이 빠져 무엇 하나 벨 수 없게 된 자신이 원망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옆에는 가장 추악한 모습을 한 이를 고른 것 같은 사내가 서 있었다.
그녀의 목을 벨 준비를 하는 자였다.
그나마 지금 죽이려는 건, 그녀가 그사이 극독을 삼킨 탓이다.
아니었다면 죽지 못하는 꼴로 온갖 치욕을 감내해야 했을 터.
여울은 먹먹한 아픔이 올라오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죽어서라도 너희들을 씹어 먹겠다.’
그리 다짐하며.
그때, 그녀에게 누군가가 속삭였다.
옆에 선 사내인지, 아니면 다른 누구인지.
‘다시 한번 주군을 섬길 수 있다면, 그 혼을 내놓을 수 있겠는가?’
당연한 것을.
여울은 눈을 뜨고 대답했다.
“그리하겠다.”
자신의 사후를 저당 잡힌 그 대답을, 여울은 후회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로 인하여 생전의 주인은 구원받았고, 사후에 섬기게 된 주군에게 충성할 수 있었으니, 어찌 후회할 수 있겠는가.
여울은 여전히 먹먹한 가슴을 느끼며 눈을 떴다.
숲속이었다.
* * *
어지러움이 덮쳐 왔다.
중간중간 빠르게 흐른 잿빛 기억을 제외해도 짧지 않은 생을 간접으로 산 것이다.
나였을 때도, 여울이었을 때도, 그 누구도 아닌 다른 이였을 때도 있었기에 혼란은 더 컸다.
하지만 내가 그녀의 과거를 보았고, 그 순간순간의 기억과 감정을 공유했다는 것은 확실했다.
해서 나는 여울이 피눈물을 흘리며 휘두른 검에 담긴 절망과 한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한을 뒤로 하고, 내게로 온 여울에게 내가 어떤 의미인지도.
여소명, 여울이 모셨던 주인.
그녀의 구원을 대가로 여울이 선택한 것은, 여소명에게 향했던 마음을 오롯이 내게 향하는 선택이었다.
내가 아닐 수도 있었다. 다른 누군가에게 팔려 갔다면.
그러나 그녀는 내게 왔고, 과거를 공유할 정도로 깊은 유대를 형성했다.
이런 현상은 내가 인간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리라.
-여울.
-예, 주군.
나는 여울을 불렀고, 그녀는 대답했다.
아마 그녀도 내가 자신의 과거를 함께 여행했음을 알 것이다.
그래서 다른 말은 생략했다.
-나는 너를 휘두를 생각이다.
-감사합니다.
-힘들지도 모른다.
-바라던 바입니다. 설령 주군의 적을 베다 녹슬어 부러진다 해도, 충분히 쓰임 받았다면 저는 웃으며 부러지겠습니다.
-아니, 너는 부러지면 안 된다. 언제까지고 내 적을 베어 낼 예리한 검이어야 해.
-…명심하겠습니다. 저는 언제까지나 주군의 부러지지 않는 검으로 남겠습니다.
둘만의 대화가 끝나고, 우리를 옭아매고 있던 연결고리가 약해졌다.
싸움은 끝나 있었다.
예상대로 신비를 비롯한 몬스터들의 압승.
엘프들 절반 정도가 죽고, 절반 정도가 잡혔다.
그리고 그것을 알리는 신비의 경박한 웃음소리가 울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