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l special! Dungeon Master RAW novel - Chapter 176
176
삭막한 돌로 만들어진 계단이 무서운 속도로 뒤쪽으로 흘렀다.
위쪽 계단에서 내려오는 세 개의 인영이 시안색 실루엣으로 표시됐다.
직접 보지 않아도 마리아는 움직임과 소리, 그 외에 획득할 수 있는 모든 정보를 토대로 상대의 위협 지수를 평가해 보여 준다.
나는 속도를 늦추지 않고 뛰었다.
마리아가 사출한 단검들이 미리 날아가 모퉁이를 돌았다.
두 층이나 위에서 내려오던 것들이 일제히 죽어 앞으로 굴러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올라가는 중간에 나를 직접 방해하는 자는 드물었다.
이미 싸우고 있거나, 상황도 파악하지 못한 채 뛰쳐나온 자들과 마주쳤을 뿐이다.
그러나 그것도 비교적 아래층에 해당하는 이야기였다.
갑자기 여러 개의 실선이 내게로 꽂혔다.
나는 실선이 가리키는 방향을 확인하기도 전에 몸을 날려 위치를 이동했다.
파파파파파팍.
찰나의 차이를 두고 내가 서 있던 곳에 여러 개의 투사체가 꽂혔다.
하지만 투사체가 무엇인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석재 안으로 깊숙하게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다만 구멍의 크기를 볼 때, 아주 작다는 것만 예상할 수 있을 따름이었다.
“이 위로는 귀하신 분들이 계신 곳이라 보내 줄 수가 없다.”
차르륵. 차르륵.
나를 공격한 사내는 손에 쥔 구슬들을 던졌다 받기를 반복하며 위층으로 향하는 길목을 막아섰다.
어깨에 익숙한 문양이 보였다.
‘임페리얼 뱅가드.’
“다른 것들은 전부 걸어 다니는 시체뿐인데, 너는 다르군. 지금 이 X같은 상황에 대해 물을 것이 많으니, 일단 항복을 권유하겠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 나는 몬스터들과 다를 바 없는 복장을 하고 있고, 이는 신분을 감추기 위한 것.
안에 가면을 쓰고 있으니 말을 한다고 해서 정상적인 목소리가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쓸데없는 대화를 나눌 필요는 없었다.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말을 건 것은 그저 신경을 잠깐 분산하기 위한 술책.
그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길고 탄력적인 팔을 이용해 구슬을 투척했다.
핑.
빼곡하게 표시되는 실선들은 마치 산탄총의 탄도를 예측한 것처럼 보였다.
내 움직임을 예상해서인지, 아예 회피할 공간을 삭제하는 듯한 범위 공격이다.
그러나 피할 수 없으면 막으면 그만.
나는 방패를 꺼내 염동력을 집중했다.
따다다당, 하는 충격이 방패 위를 때렸다.
다른 것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혹시라도 비집고 들어온 탄환에 부상을 입지 않게 방어를 견고히 했을 뿐.
그런 뒤 반응을 보지도 않고 뛰쳐나갔다. 이미 적이 쓰러지는 것을 방패 너머에서 확인했기 때문이다.
역시, 동작이 큰 공격을 한 대가로 팔이 긴 키메라는 횡경막과 갈비뼈, 쇄골에 단검이 꽂힌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마리아가 한 일이다.
그를 스쳐 가며 목을 쳤다. 인체 개조가 어디까지 이뤄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재생이나 수복을 하는 놈이 없다고는 단정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달리는 와중에도 비행은 그치지 않았다.
탁.
최상층 바로 아래층에 발이 닿았다. 마주친 적들이 소스라치며 흩어진다.
제압사격처럼 쏟아지는 무기들 때문이다. 그러나 흩어진 것이 소용없이, 마법 무기들이 폭발을 일으키며 연약한 병사들의 육체를 휘저었다.
‘마력 소모가 극심하긴 하지만, 정말 편하긴 하네.’
병사들이었던 육편이 채 바닥에 쏟아지기도 전에 나는 복도를 질주했다.
이 층에서 유일하게 몬스터들을 압도하고 있는 인간들이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함이었다.
복잡하게 얽힌 복도, 모퉁이를 몇 번이나 돌았다.
마주치는 적들은 무의식적으로 휘두르는 검에도 속절없이 쓰러졌다.
그리고 마침내 원하는 곳에 도착했다.
내가 찾던 자들은 나와는 반대편을 보고 교전하고 있었다.
여자 하나, 남자 셋.
주변에는 언제 죽었는지 모를 인간과 몬스터의 사체로 가득했다.
“끄어어어.”
동쪽 계단이 이쪽이었나. 그들은 동쪽에서 밀려드는 몬스터들을 죽이며 내려가고 있었던 것 같았다.
동쪽이면 알렉산더가 박살 낸 성벽과 가까운 구역. 그만큼 많은 숫자의 몬스터가 진입했을 것이다.
그걸 증명하듯 그들이 쉴 새 없이 부수고 죽이는 와중에도, 계단 아래에서는 좀비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나는 충분히 떨어진 거리에서 접근을 멈추고, 상태창을 열람했다.
첫 번째 남자는 기사였다. 알렉산더의 반신을 날려 버린 놈과 비슷하거나, 그 이상이다.
또 하나는 사제. 이놈은 특이하게도 육체 능력이 전사에 버금가는 놈이었다. 근육 힐러 같은 느낌이다.
또 한 명은, 특성에 키메라나 가지고 있을 법한 것들을 갖고 있었다. 적어도 세 개의 다른 생명체가 조합된 듯 보이는 놈이다. 볼 것도 없이 임페리얼 뱅가드와 관련된 놈이었다.
순식간에 훑은 셋. 보기 드물게 강하고 특이한 놈도 섞였지만, 특채자는 아니었다.
그리고 마지막.
이름, 주안느 파사트람.
30대 후반을 바라보는 나이임에도 피에 젖은 것 같은 적발과 갈색 피부는 젊음을 넘어 어린 모습을 구현하고 있었다.
격투에 관련된 스킬과 특성이 그녀가 쌓은 수련을 반증하듯 상태창을 장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들과 역동적인 모습들은 순간 사라졌다.
내 눈에 남은 것은 단 하나.
[탐욕과 인색]익숙한 단어의 나열이었다. 너무나 오래 찾던 것을 확인한 탓일까. 나는 기쁨도, 후련함도, 그렇다고 불안도 아닌 묘한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그런 기분에 빠져 있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감상을 길게 할 여유 따위는 사치였다.
-여울! 신비! 알렉산더! 불가사리!
나는 주안느가 싸우는 곳과 반대로 달리면서 부하들의 이름을 불렀다.
자세하게 말로 풀어서 명령할 필요는 없었다.
이미 몬스터들은 반쯤 내 사고를 공유하고 있었으니.
확인한 것은 하나, 알렉산더의 상태였다. 재생하는 것을 보긴 했지만, 과연 지금도 무사할지.
그러나 다행히 알렉산더의 상태는 양호했다. 기사들을 몬스터들이 물량으로 밀어붙인 덕이었다. 죽여도 죽여도 끝이 안 나니, 알렉산더 같은 커다란 놈을 처리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콰아앙.
몸으로 소리를 듣는 기분이 들었다. 귀는 먹먹했고, 바닥은 흔들리다 못해 무너져 내릴 것처럼 위태로웠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동쪽 성체를 알렉산더의 거대한 석검이 후려친 것이다.
카드드득.
알렉산더의 덩치로도 가누기 버거울 정도로 비대하게 생성된 석검은 그 부피와 질량만으로도 성체를 갉아 냈다.
동쪽에 있던 몬스터들과 인간들이 무너지는 건물에 당황해 휩쓸리는 것이 보였다.
거기서 끝이 아니다. 상공으로 날아온 도깨비가 푸른 불꽃을 만들어 냈다.
화르륵.
신비가 만들어 낸 거대한 푸른 구체는 항성처럼 밤을 밝혔다.
그리고 그 항성을 삼키는 요괴, 불가사리.
불가사리의 덩치는 삼킨 불꽃에 비례해 커졌고, 모두 삼킨 후에는 다시 토해 냈다.
무너져 내리는 성체 위로 불의 폭포가 떨어졌다.
불가사리가 내뿜는 겁화는 성체를 이루고 있던 석재도, 휘둘러진 석검도, 차별 없이 불태우고 녹여 냈다.
펑펑펑.
상상을 초월하는 고열에 노출된 몬스터들과 평범한 병사들은 가까이 있었던 죄로 터져 나갔다.
사람이 부풀어 터져 나가는 광경은 끔찍함을 넘어 비현실적이었다.
화아악.
뒤늦게 뒤통수로 몰려온 열풍은 마력을 끌어 올려 저항하지 않았다면 살이 익었을 정도로 뜨거웠다.
-형님… 저는 이제 당분간 힘을 못 씁니다…….
힘이 빠진 목소리. 벌인 일의 스케일이 큰 만큼 힘을 크게 소비한 모양이었다.
-안전한 곳에서 쉬고 있어. 괜히 얼쩡거리다가 죽지 말고.
신비에게 그렇게 전하면서, 충격으로 무너진 벽을 통과해 성체 밖으로 몸을 날렸다.
알렉산더와 불가사리의 합공으로 동쪽 성체 이 할이 무너져 내린 탓에 언제 붕괴할지 모르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바깥 공기와 자유낙하에서 오는 해방감이 후끈한 열기를 잠시 식혔다.
착지하기 전에 [내가 던전이다]를 발동했다.
적들이 정신을 차리기 전에 확실한 타격을 주기 위해서는 전력을 아끼며 탐색전을 할 여유가 없었다.
-마리아! 전부 쏟아부어!
-Aye, Captain.
하늘을 향해 수많은 빛줄기가 올라갔다. 한 줄, 한 줄이 잠시 후 있을 공격을 예고하는 선들이었다.
투두두두둥.
지옥 주머니에서 사출된 무기들이 그어진 선을 따라 하늘로 올라갔다.
사출의 순간마다 터져 나오는 염동파가 몸을 묵직하게 때리기를 수십 번.
높이 솟은 온갖 종류의 냉병기가 방향을 틀었다.
-예상 지점을 무차별 타격, 적을 격멸합니다.
콰과과과광.
여전히 불타고 있는 대지 위로 폭격이 떨어졌다.
마리아가 고른 대부분의 무기는 폭발 속성 마법이 걸린 것들인지, 하나하나 지면에 박힐 때마다 폭음을 동반했다.
폭발이 일어날 때마다 타오르던 불길이 화악, 하고 기세를 더했다.
“이 괴물 자식!”
너무 요란하게 날뛴 탓일까. 기사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하지만 기세 좋게 달려오던 그들의 머리가 일제히 뎅강 하고 잘렸고, 머리 아래로만 달리던 방향으로 몇 바퀴를 굴렀다.
희끗하고 너울거리는 옷자락. 여울이었다.
-늦었습니다.
나에게만 느껴지는 기척이 왼편에 섰다.
-마스터! 예상보다 몬스터들 소모가 심해요! 알렉산더도 일시적 침묵에 들어갔어요. 화염 공격에 휩쓸리는 바람에… 지금 당장 공격을 당하고 있지는 않지만, 빠르게 회복하기는 힘들어 보입니다!
여기저기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정신없이 모니터링하는 중인 벨로제의 목소리도 들렸다.
-목표물은 찾았어. 그러니까 시간만 끌어. 내 쪽으로 적 병력들이 접근 못 하게만 해. 몬스터는 얼마든지 갈아 넣어도 되니까!
-해 볼게요!
그때쯤, 마리아의 공격이 멈췄다. 연산 능력에 제한이 없다시피 한 마리아가 전력으로 마력과 염동력을 운용한 탓에 내 육체가 순식간에 한계에 달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맡겨만 뒀음에도, 무릎이 꺾일 정도로 힘겨웠다.
비유하자면, 연사로 놓고 갈겨 댄 탓에 총열이 과열된 것이다. 적절한 시점에 끊지 않았다면 총열 역할을 하는 내 육체가 터져 나갔을 것이다.
퍼엉.
잠시 공격이 끊어진 틈에 무너진 잔해 안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잔해를 치워 내기 위한 폭발처럼 보였다.
실제로 거대한 돌덩이들이 잘게 부서지면서 비산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한 번의 억눌린 퍼엉, 하는 폭발음. 그다음 순간에 불길이 절반으로 쫙 갈라졌다.
한 차례 지독한 열풍이 지나가고, 시야가 확보됐다.
갈라진 불길 가운데 서 있는 건 주안느였다. 주먹을 정면으로 곧게 뻗고 있는 모습.
‘설마 주먹질로 불길을 갈라 버린 건가?’
나는 검댕이 잔뜩 묻은 주안느를 바라봤다.
사람이 터프란 것도 정도가 있지.
주안느는 옆구리에 사람 머리만 한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 흘러내려야 할 내장은 고열에 탄화되어 덜렁거리고 있다.
“…기습도 이 정도면 일품이라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구나. 비겁을 논할 단계를 지난 기습이다. 인정하마.”
낮게 읊조린 주안느는 주변을 돌아봤다.
가장 먼저 찾은 것은 사제. 큰 부상을 입었으니 당연한 선택이다.
그러나 사제는 어깨가 잘린 상태로 기절해 있었다. 기사는 하반신이 녹아내려 비명을 지르고 있고, 그나마 멀쩡한 건 임페리얼 뱅가드의 일원으로 보였던 남자뿐이었다.
잔해를 부수고 나온 그가 급하게 주안느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황녀 전하, 괜찮으십니까! 여기는 제가 막을 테니, 우선 후퇴를 하십…….”
그리 말하던 남자는 말을 삼켰다. 주안느와 눈이 마주친 탓이다.
남자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은, 동료나 부하를 바라보는 눈이 아니었다.
사막에서 물을 가진 약자를 만난 자의 눈빛이었다.
“취향은 아니나, 지금은 가릴 처지가 아니구나. 걱정 마라. 너를 먹고 살아남아, 약속한 미래를 너의 식솔들에게 선물할 테니.”
“그게 지금 무슨 말씀… 커억!”
재빠르게 남자에게 접근한 주안느가 그의 목덜미에 이를 박아 넣었다.
그것은 흡혈귀 같은 모습이 아니었다. 온몸으로 먹잇감을 휘감은 그녀는 수컷 사마귀를 잡아먹는 암컷 사마귀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