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l special! Dungeon Master RAW novel - Chapter 180
180
상태가 최악인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피를 너무 많이 잃은 탓에 몸이 움직여지질 않았다. 시야가 흐릿해지고, 이를 악물고 버티려 해도 이가 악물어지질 않았다. 도대체 숨은 어떻게 쉬어지는 거지? 이런 의문이 들 정도.
털썩.
결국 먼저 무릎을 꿇은 건 나였다.
그러나 승부에서 이긴 것 또한 나인 것 같았다.
“아아……! 말도 안 된다! 어찌, 어찌 내가!”
내 일격에 의해 균열이 가속화된 주안느의 육체가 붕괴하고 있었다.
가루가 흩날렸다. 숨을 쉬는 대가로 폐와 기도가 바스러진다.
말을 하려 입을 놀리면 혀와 성대가, 흩어지는 육체를 부여잡으려 하면 잡은 손과 손이 닿은 부위가 부서졌고, 피가 흐르는 혈관이 부식됐다.
자신의 고귀함과 나의 천함을 역설하는 주안느의 간헐적인 목소리도, 어느 순간 자취를 감췄다.
나는 그렇게 천천히 무너지는 주안느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남아 있지 않았기에 의식을 부여잡고 있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탐욕스런 황녀는 탐욕으로 인해 끈적한 액체에 녹아 가루로 사라져갔다.
[지옥 특채자 1명의 사망을 확인.] [현재 살아남은 지옥 특채자는 3명입니다.] [24시간 후 게임은 다음 페이즈로 넘어갑니다.] [서로의 위치는 더욱 노골적으로 공개되며, 그 간격은 갈수록 짧아질 것입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승리를 쟁취하십시오.]검붉은 피로 쓴 것 같은 글자들이 떠올랐다.
‘끝났구나.’
끝이라기보다는 새로운 싸움의 시작을 알리는 메시지였지만, 나는 당장 눈앞의 적을 쓰러뜨린 데서 오는 안도를 거부할 수가 없었다.
의식을 잃기 전, 내가 마지막으로 할 수 있었던 것은 겨우 뒤로 넘어지도록 고개를 젖히는 것뿐이었다.
겨우겨우 이겨 놓고 접시물에 코 박고 죽는 꼴이 될 수는 없지.
첨벙, 하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내 의식이 사라졌다.
* * *
-일어… 십…….
“으음…….”
-…일, 나…….
누군가가 날 흔들고 있었다.
조금 더 자고 싶은데, 귀찮게도.
그냥 무시하고 더 자자. 그렇게 생각했다.
-일어… 십… 오…….
흔들흔들. 이제는 몸을 잡고 흔들기까지 한다.
귀찮음을 넘어선 화가 치밀었다. 누구기에 나의 잠을 방해하는 거지? 이렇게도 달콤한 잠은 참으로 오랜만인데 말이다.
“……!”
그런 생각을 하던 나는, 갑작스레 불편해진 상황에 화들짝 놀랐다.
공기가 들어와야 할 코와 입으로 걸쭉한 무언가가 불쑥 들어온 탓이다.
호흡을 위해 열려 있던 것은 식도가 아닌 기도였고, 걸쭉한 액체는 그대로 기도로 흘러들었다. 내 몸은 당연히 그것을 토해 내기 위해 기침을 하려 했다.
“으읍……!”
그러나 여전히 나는 물에 코를 박은 상태였다. 몸을 뒤집어야 한다. 그런데 움직였다고 생각한 팔이 내게는 없었다. 결국, 나는 마리아가 다시 염동력으로 팔다리를 생성하고서야 몸을 뒤집을 수 있었다.
“푸하악! 콜록, 콜록, 콜록! 커허어……!”
-이제야 정신이 드셨군요. 제가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아십니까?
익숙한 목소리. 처음 이곳에서 눈을 떴을 때 나타났던 액체 덩어리다. 그런데 걱정을 했다고? 개소리!
“이 X새끼가! 너지? 날 익사시키려고 한 게!”
-무슨 섭섭한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저는 그저 의식을 회복하시라는 뜻에서 작은 도움을 드렸을 뿐입니다.
“도움? 계속해서 개소리를 하는 걸 보니, 너도 내가 건드리지 못할 놈인가 보군. 빌어먹을 지옥 놈들.”
나는 조금이라도 편한 자세를 찾아 몸을 누이며 그렇게 말했다.
화를 내 봐야, 이놈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다지 없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적어도 지금은 말이다.
-하하하, 맞습니다. 저는 어차피 이곳과 함께하는 몸. 이곳이 사라지면 저도 사라지지요. 그러니 저는 죽음에 대한 개념도, 공포도 없습니다.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신기루 같은 존재이니까요.
“지옥 놈들이 그런 너를 내 성질 돋우라고 만들진 않았을 테고, 할 일이나 하고 썩 꺼져. 지금 이 꼴로 밖으로 나가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것 같으니까.”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정말 특채자님다운 발상이군요. 저 같은 것은 빨리 소멸해라. 아주 좋은 말씀입니다. 바쁘신 것도 사실이지요. 절차가 이것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 여러 개가 겹쳐 버렸으니.
주저리주저리 떠드는 놈에게서 나오는 말들 사이로 의문 사항이 하나둘이 아니었지만, 나는 굳이 되묻지 않았다. 어차피 벌어질 일이다. 그냥 기다리자. 사소한 것, 아니 중요한 것이라 해도 신경 쓸 기운이 없었다.
내 미적지근한 반응에 액체가 한차례 출렁였다. 왠지 몰라도 조금 실망한 기색이 느껴진다.
-뭐, 저도 남자랑 대화를 오래 이어가는 취미는 없습니다.
-자,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지금은 불귀의 객이 된 년과 살아남으신 당신께서 편법으로 들어온 여기는 어떤 공간일까요?
헛웃음이 나왔다. 탈락하자마자 호칭이 ‘년’이 되는 건가. 그래도 나는 아직까지는 ‘당신’으로 불러주고는 있었다.
내가 웃는 것 이외에 다른 말이 없자, 액체 덩어리는 더 흥을 잃어버린 모습이었다.
조금 건조해진 설명이 이어진다.
-여기는 후보자들이 쓰고 버린 부정이 모이는 장소입니다. 당신은 부정한 자로 각성한 첫 번째 분이시니, 조금 더 이해가 빠르시겠지요.
“쓰고 남은 부정…….”
그런가. 이 끈적한 것들은 불행을 적출당한 찌꺼기들이었던 건가. 듣고 나서 주변을 둘러보니 주변 광경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아무것도 없는 공허 속에 버려진 무색무취의 액체. 갖가지 불행 속에서 지른 절규마저 적출당해 빼앗기고, 결국에 아무것도 남지 않은 채로 버려진 것들. 이것들 사이에는 분명 내게 죽고, 다치고, 상처받은 자들이었던 것 또한 가득할 것이었다.
-더 빨리, 더 많은 불행을 긁어모은 자가 이곳에 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당신이 그 주인공이 되었군요. 완벽히 자격을 증명한 것은 아니지만, 운도 실력의 일환이고, 무엇보다 가장 많은 불행을 뿌린 것 또한 당신이었으니 아주 불공정한 판정은 아닐 겁니다. 다소 시기가 앞당겨진 것뿐이지요.
“그럼, 이 공간 자체가 보상인가?”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여기는 쓰레기장입니다. 아무 쓸모 없는 것들을 모은 곳이죠. 받으셔야 할 보상은… 이것입니다.
촤륵.
액체 덩어리가 바닥으로 쏟아졌다. 처음부터 그곳에 없던 것처럼 물결조차 만들지 않고.
[머문 것만으로도 비통함이 남는 자.] [발걸음엔 핏자국이 남고, 숨결에는 타자의 절규가 흐르는 자.] [단순한 불행의 양산자가 아닌 불행을 지배하는 자.] [당신은 모든 불행 위에 군림하는 [부정왕]이 되었습니다.]마력과 염동력을 사용하지 않아도 피가 흐르지 않게 되었다.
조금이지만, 아직까지 남아 있던 부정의 정수가 상처 부위를 치유했기 때문이다.
활력이 조금씩 돌아오고, 몽롱하던 정신이 또렷해졌다.
부정의 정수가 피 대신 혈관을 흐르기 시작한 까닭이다.
사지가 자라나는 드라마틱한 효과는 없었으나, 부정의 정수를 소모하여 부상이 치료된 것은 분명히 유의미했다.
-캡틴, 신체 기능이 정상범주로 돌아왔습니다. 약 1시간 38분 26초 후 사망이 예정되어 있었으나, 해당 예측은 무효화되었습니다.
마력이든 피든 무엇이 됐든 간에 저 시간이 경과하면 죽을 예정이었나.
그러나 나는 죽음을 피했다는 안도보다 내게 생기고 있는 현상이 주는 생경함에 도취되어 있었다.
다른 이의 고통과 불행에서 부정의 정수를 착취하는 효율이 올라갔다.
부정의 정수를 꺼내어 쓸 때의 효율도, 부정의 정수가 갖는 위력도 올라갔고, 만들 수 있는 형태 또한 다양해졌다.
듣지 않았고, 시험하지 않았음에도 알 수 있었다. 부정한 자가 불행을 사랑하고 그 힘을 빌리는 존재라면, 지금의 나는 그것을 지배하는 존재가 됐다.
그만큼 인간에서 멀어졌단 뜻이기도 했다.
잠시 후 버려진 찌꺼기가 방울방울 떠오르기 시작했다.
소멸하고 있는 것이다.
장관이라면 장관인 광경이었으나 나는 다음 차례를 기다리며 몸을 일으켰다.
어느 정도 회복된 덕에 사지는 염동력으로 대신할 수 있었다.
‘이번에는 잘난 군주님께서 나타날 차례인가.’
지금 증발하는 불행의 찌꺼기들처럼 허망하게 사라진 놈은 말했었다. 절차가 겹쳤다고.
그 절차란 게 무엇인지 예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지금까지 특채자를 세 번 사냥했고, 그중 두 번 모두 어떤 방식으로든 지옥 군주와 마주했었으니까.
‘탐욕이 누구였더라? 내가 아는 놈이란 보장은 없지만… 지금까지는 겹쳤었는데…….’
만나게 될 자가 누가 될지를 떠올리려고 할 때였다.
하늘로 떠올라 소멸하던 액체들이 일제히 멈췄다.
온통 물방울로 가득한 모습이다.
이번에도 세계는 멈춰 있었다.
“반갑군, 젊은이. 본인은 지옥에서 작은 직책을 하나 맡고 있는 마몬이라고 하네.”
굽은 등, 왜소한 덩치, 자글자글한 주름. 초라한 모습의 노인이었다.
걷기는커녕 서 있는 것조차 버거워 보이는 모습.
그에 반해 걸친 모든 것은 귀해 보였다. 옷, 보석, 반지, 목걸이, 지팡이. 모든 것이 천박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탐욕의 마신, 지옥 군주의 일인인 마몬이다.
“…그거 아십니까?”
“무엇을 말인가?”
“지금이 세 번 중에 가장 정상적인 만남이란 거.”
내 말을 들은 마몬이 허허, 하고 너털웃음을 흘렸다.
속을 알 수 없는 눈이 나를 응시한다.
‘규칙’이 나를 보호해 줄 것이란 믿음이 있지만, 역시나 지옥 군주와의 대면은 필요 이상으로 긴장을 하게 만들었다.
“나는 다른 무식한 것들과는 다르네. 손해를 봤다고 화만 내고 있어서야 되겠나? 피할 수 없는 지출을 해야 한다면, 그 지출이 무언가를 창출하게 만들어야 하는 법이라네. 화만 낸다고 될 일이 아니란 얘기일세.”
“…….”
“자, 그럼 비즈니스를 시작하도록 하지. 자네는 내게 큰 손해를 끼쳤음에도 나에게서 무언가를 받아 가게 될 최초의 존재야. 그래, 무엇을 원하는가?”
“제가 원하는 것을 받는 겁니까? 지금까지는 그렇지 않았는데요.”
“그렇다네. 우리는 이 촌극을 시작하기 이전에 많은 합의를 했고, 강력한 규칙으로 서로를 옭아맸네. 그런 과정에서 중간에 패배할 때 내놓을 가치 있는 것들 또한 정했지. 그러나 나는 그러지 않았어. 그렇게 되면 괜히 더 가치 있는 것을 걸어야 했거든. 나는 차라리 특채자에게 선택권을 주기로 하고, 그 선택권만큼 가치의 총량을 낮추는 선택을 했지. 결과적으로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거래인 셈이지. 정해진 황금보다는 물이 더 귀한 때도 있지 않나. 사막 끝에서 발견한 것이 금덩이라면, 갈증 속에 말라 죽기밖에 더 하겠나.”
서로가 손해 보지 않는 거래. 갈증 속의 물 한 모금 같은 보상. 이런 말들은 듣기에는 그럴싸했으나, 그 말을 입에 담은 것이 탐욕과 인색의 정점에 선 악마라는 점에서 신뢰도는 지옥 밑바닥까지 추락하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빠르게 접어 정리했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영역에서 결정된 사안이다. 손쓸 수 없는 것에 대한 잡념은 빠르게 지울수록 좋다.
‘…도대체 뭘 요구해야 하지?’
지금은 이게 가장 시급한 주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