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ll special! Dungeon Master RAW novel - Chapter 189
189
후퇴 이후 그리 멀지 않은 던전에서 재정비를 한 나는 숨을 돌리기 무섭게 주리안을 찾았다.
어차피 주리안이 머무는 성은 내 몬스터들로 도배된 상태지만, 내가 모르는 수단을 동원해서 도주하거나 아니면 주리안의 껍데기를 버리고 사라졌을 가능성도 있기에 안심할 수 없었다.
후자의 경우에는 내가 어떻게 막아 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서 더욱 골치 아파질 수 있다.
하지만 내 그런 걱정들은 기우였다.
주리안의 몸을 차지한 놈은 얌전히 내가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이놈이 내가 주디스에게 패배하는 걸 걱정한 건 사실이야. 그만큼 주디스가 폭주하고 있는 상황이 두려웠던 건가? 역시 나를 이용해서 차도살인지계라도 꾸미는 모양인데…….’
놈의 목적은 너무 뻔해 보여서 오히려 걱정이 덜 되는 수준이었다.
그런 꿍꿍이에 순순히 응해 주고픈 마음은 없지만,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그러니 놈이 쥐고 있는 정보라도 알차게 긁어 낼 수 있는 만큼 긁어 내야겠다.
일단은 그것부터 하고 생각하자.
“네 말대로 일단 물러났는데… 너도 잘 알고 있듯이 나는 아직 너를 신뢰할 수가 없다. 했던 말들을 곱씹어 보면 이러저러하니 협력을 하자는 식으로 들리기도 했지만, 설령 그렇다고 해도 네가 내가 무슨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고 말이야.”
대답이 없다. 분명 건너편에서 듣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하아…….]한참을 뜸을 들인 끝에 처음으로 들린 것은 깊은 한숨이었다.
그리고 다시 한 호흡을 기다리자, 드디어 놈이 제대로 된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나라도 일단 경계부터 하고 볼 테니 어쩔 수 없다는 걸 알지만, 내가 놓인 입장이 있다 보니 억울한 건 어쩔 수 없군.]“네 입장이 어떻길래 억울하다는 거지? 우린 어차피 결국 한 명이 남을 때까지 서로 죽고 죽이는 관계인데, 신뢰란 건 너무 사치스런 감정 아닌가?”
[그래, 그랬었지. 죽고 죽여서 한 명이 모든 걸 갖게 되는 경쟁. 그런데 이제는 아냐. 나는 그 경쟁에서 빠질 거니까.]“…개소리를 하고 싶은 거면 대화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시작부터 속이려 드는 놈이랑은 숨을 섞는 것도 불쾌해하는 성격이라.”
[거짓말이 아니다. 원한다면 지금 당장 그걸 증명할 수도 있어.]“증명하겠다고?”
[그래, 지금 당장 증명해 주지.]놈이 그렇게 말하자마자 눈앞에 메시지가 하나 떠올랐다.
[현재 남은 지옥 특채자 3인 중 1명인 나태의 특채자가 특채자로서 받는 모든 혜택과 보상을 포기하고, 경쟁을 그만둘 것을 선택했습니다. 살아남은 특채자 중 과반 이상이 동의할 경우, 나태의 특채자는 특채자로서의 지위를 영원히 상실합니다.]“이런 게 가능할 리가 없는데……?”
[나는 나태의 특채자야. 게으름이 내 능력이고, 특징이지. 너도 다른 특채자와 차별되는 무언가를 갖고 있잖아? 다른 놈들도 그렇고. 나는 하기 싫은 걸 하지 않아도 되는 능력이 있다. 물론 이 경쟁 자체를 포기할 수 있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과반 이상의 동의라면… 내가 동의하기만 해도 2:1로 너는 이 진창에서 벗어나게 되겠군.”
[그렇지.]“아예 싸우는 것 자체를 포기하겠다라… 이유가 뭐지?”
[이유? 당연히 죽고 싶지 않으니까지. 기껏 끝내주는 인생을 손에 넣었는데, 너희 같은 괴물들 사이에서 죽을 생각은 없다. 나를 고른 군주도 그렇고, 나도 정보가 최고의 힘이라고 생각했는데, 정작 많이 알고 있다고 다 되는 건 아니더군. 너희들 머리 위에서 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겨우 머리 위에 앉은 파리 정도였던 거지.]말투만 보면 의기소침을 넘어서 자기비하 수준이었다.
누가 보면 ‘꿈속에선 존잘 인기남이었던 내가 현실에서는 찐따 병신!’ 같은 제목의 소설 주인공이라도 된 줄 알겠다.
뭐, 저놈이 자기비하 끝에 목을 매달든, 손목을 긋든, 약에 빠져 허우적대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네 말이 사실이라면, 그냥 나에게 동의만 요구하면 되는 일 아닌가?”
[그럼 결국 이 세계가 끝장나고, 나는 끝내주는 인생을 송두리째 잃게 되겠지. 너는 무조건 놈한테 질 테니까.]“확실히… 오늘 본 모습만 본다면 이길 자신은 없군. 하지만 그만한 사고를 쳤어. 아무리 제국 황자라고 해도 계속해서 저 상태라면 나 말고도 저놈을 잡아 죽이겠다고 나서는 자들이 한둘이 아닐걸? 너도 알겠지만 우리 말고도 이 세계에는 괴물처럼 강한 놈들이…….”
[아니, 그런 걸로는 절대 주디스를 막지 못해.]놈은 내 말을 단호하게 끊었다.
역시, 어떤 루트로 손에 넣었는지 몰라도 사태의 내막을 꽤나 자세하게 알고 있는 것 같다.
“근거부터 정보의 출처까지 군더더기는 빼고 깔끔하게 정리해서 말해.”
[걱정 마라. 나도 너와 대화하는 게 즐겁지 않으니까.]그런 것 치고는 말이 많던데…….
하지만 이런 생각을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또 괜히 말이 길어지고 쓸데없는 낭비가 발생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대신 나는 정신을 집중하고, 놈이 내뱉는 모든 것을 빼놓지 않고 흡수할 준비를 했다.
[일단… 정보의 출처는 지옥에 떨어진 예언자 놈들이다. 이만한 정보를 모으기 위해서 어마어마한 대출을 받았지. 덕분에 앞으로 10년 동안은 시장에 유통하는 마약의 양을 두 배로 늘려야 할 지경이다. 약값이 떨어져서 순익은 줄겠지만, 지옥에 갚아야 할 게 그만큼 많으니까. 마약을 푸는 것만큼 쉽게 많은 이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도 없는 법이지.]그건 나도 안다. 한번 해 봤으니까. 그런데 나와 대화하는 게 즐겁지 않다는 놈이 쓸데없는 말이 너무 많다.
아니, 쓸데없지는 않은가.
시장에 마약을 유통한다는 얘기를 하는 것을 보니, 대충 어느 분야에 몸을 담고 있는 놈인지 알 수 있었다.
[젠장, 심란하면 말이 많아지는 버릇은 아무리 노력해도 고쳐지질 않는군.]아무래도 자신이 내뱉은 말이 자신에 대한 추측이 가능할 만한 정보라는 걸 깨달았나 보다.
놈은 하지 않아야 될 말을 한 것을 후회하며 자책했다.
다시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서인지, 이후부터는 꼭 해야 할 말만을 골라서 하는 인상을 풍기기 시작했다.
말조심을 시작한 것이다.
[간단하게 설명하지. 주디스는 애초에 인간들에게 마왕이라 불리는 재앙이 될 운명을 타고났고, 이건 이 세계에 운명이 묶여 있는 자들이라면 피할 수 없는 재앙이다. 아무리 잘나고 강한 놈이 와서 덤벼도, 재앙을 어떻게 할 수는 없다는 얘기야. 그걸 억제하는 게 용사라는 운명이고. 원래대로라면 용사가 착실히 성장하고, 그 과정에서 만나는 동료들도 용사의 운명을 나눠 받으면서 재앙에 맞서야 하는데…….]“내가 걸레짝을 만들었다고?”
[그래. 덕분에 일이 이 지경이 된 거다. 용사가 멀쩡히 살아 있었다면 놈이 특채자가 될 일도 없었을 텐데, 재앙을 막아야 할 용사가 묵사발이 난 걸 확인하고는 냅다 특채자로 선정한 모양이야. 실제로 주디스가 마지막으로 선정된 특채자고, 선택받은 지도 얼마 안 됐다고 한다.]“이렇게 구구절절 이야기하는 걸 보면… 방법을 알고 있는 거겠지? 그게 아니라면 굳이 나한테 이럴 필요가 없으니까. 혹시 새로운 용사를 찾아야 한다거나 그런 건가?”
새로운 용사라는 말을 꺼내자, 반대편에서 코웃음 소리가 날아왔다.
[용사라는 게 무슨 그릇처럼 찍어 내는 물건인 줄 알아? 아무리 빨라도 엄마 배 속에 들어 있을 거다. 가능성 없는 이야기는 됐고, 내가 너한테 집착하는 이유는 네가 특채자여서가 아니야. 네가 재앙이니, 용사니 하는 이 세계의 운명에 구속되지 않은 존재라서다.]“알아듣기 쉽게 설명해.”
[잘 들어. 이 세계에서 살아가는 모든 존재들은 세계의 운명의 흐름에 속하게 돼. 아무리 잘난 놈들이어도 세계의 의지 앞에서는 운명에 굴복할 수밖에 없다는 소리다. 그런데 너는 아냐. 지옥의 예언자들도 이유까지는 알려 주지 않았지만, 너는 그런 흐름에서 벗어나 있다고 했어. 한마디로 세계도 너에게는 개입하지 못한다는 거지. 무엇 하나 정해진 게 없는 백지 상태란 거다. 그들은 너를 운명 밖에 선 자라고 부르더군.]“…….”
운명 밖에 선 자라고? 정해진 게 아무것도 없다…….
놈이 말한 것들이 머릿속에서 정보가 되어 퍼즐 조각처럼 조립됐다.
곧 완성된 퍼즐은 지나간 기억을 그리고 있었다.
루시퍼를 처음 만났을 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그리 큰 의미를 두지 않고 흘러갔던 그 장면.
‘새로 주어지는 삶은 오롯이 그대의 것이며, 그 안에서 이뤄지는 선택 또한 오롯이 그대의 것임을 보장한다.’
협박인지 설득인지 모를 제안을 하면서, 루시퍼가 했던 말.
검은 계약서에 적히기도 했던 문장.
‘그게 그렇게 거창한 의미가 담긴 거였나…….’
그저 루시퍼가 간섭하지 않겠다는 뜻 정도로 받아들였었는데… 그게 세계에서 내 운명을 독립시킨다는 의미였을 줄이야.
잠시 과거의 기억을 더듬던 나를 현실로 불러온 건 주리안의 목소리였다. 알맹이는 달라졌어도, 성대는 여전히 주리안의 것이었기에.
[이제 대충 알겠지? 재앙을 막아 낼 운명을 타고난 용사는 없어졌고, 나머지는 세계가 재앙이라고 정해 버린 거대한 흐름에 저항할 수 없는 작은 운명을 타고난 것들뿐이다. 그러나 넌 백지장이야. 이길 수도, 질 수도 있는 몸이란 거지. 문제는 너도 괴물이지만, 놈은 더 괴물이란 건데……. 이 차이를 메울 방법만 찾으면, 주디스를 막을 수 있다.]“네 끝내주는 인생을 지키기 위해서 말이지?”
[…나만 살자고 이러는 게 아니잖아. 결국 네가 최종적인 승자가 되는 걸 돕는 셈이니, 너한테도 최악인 상황은 아니다.]“그럼 돕는 김에 같이 싸우는 게 어때?”
[…헛소리 마. 나는 하늘에서 운석 비슷한 걸 떨어뜨리는 미친놈이나, 그걸 얻어맞고도 멀쩡하게 걸어 나오는 놈들을 상대로는 1초도 버틸 자신이 없어.]“그럼 다른 면에서라도 물심양면으로 돕겠다는 거겠지?”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전부 해 줬다. 내 밑천도 까 보였고, 가진 정보도 몽땅 줬어. 그러니까 이제 나를 보내주고, 너는 내가 준 정보를 바탕으로 놈을 어떻게든 해결하면 모두가 만족할 결말에 도달할 수 있다는 거…….]나는 중간에 놈의 말을 잘랐다.
“아니, 나는 네 기권에 동의하지 않는다. 한 놈은 아예 이성이 날아간 것 같으니 동의도 반대도 없을 거고, 그러면 너는 여전히 특채자지.”
[무슨 소리야! 경쟁자 하나가 줄어드는 게 너도 좋잖아! 괜히 내가 특채자로 남아 있으면 뒤통수 조심하느라 신경도 쓰일 거고…….]남의 말은 자르라고 있는 법. 이번에도 자르자.
“네가 기권하는 걸 확인한다고 해서 뒤통수가 편안할 것 같지 않은데? 나는 의심이 많은 성격이라서 말이야. 다른 특채자들이 못하는 기권이 가능하면, 중간에 다시 끼어드는 게 불가능하다는 보장이 어디 있지? 그렇다면 차라리 보이는 곳에 적인 채로 두는 편이 훨씬 마음이 편한 법이지. 그러니까… 네 끝내주는 인생을 지키기 위해서 조금 더 적극적으로 나서라는 말이다. 대출을 더 받아서 뭐라도 더 알아내든, 네가 확보한 지옥 라인을 나한테 소개하든.”
뭐? 용사를 묵사발 냈으니까 나보고 알아서 해결하라고?
웃기지 마라.
나는 혼자 독박 쓰고 똥 치울 생각 따위 없다.